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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새마을 사랑의 이발사
새마을지도자반 제63기 정 경 옥
(서울 성북구 성북 2동 232)
저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63의 20 광일이용원을 경영하는 이용사입니다.
별로 한일도 없으면서 저의 한일이라고 소개하게 된 것을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항상 저희들을 사랑하시고 아껴주시는 여러 선생님들과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불우이웃돕기 운동에 참여하시는 회원 여러분의 노고를 소개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가난에서 얻은 신념을 토대로>
저는 충청남도 서산군에 있는 조그마한 섬인 안면면 황도에서 한적한 농어촌의 가난한 농부의 1남 6녀 중 단하나의 아들로 (1941년 7월 3일) 태어났습니다. 적은 농토에서 나오는 양식으로는 저의 집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겨우 초등학교를 근근이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동료 학생들은 중학교를 가지만 저는 가정이 어려운 관계로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어머니를 졸라 서당 선생님을 저의 집에 모시고 한문공부를 하면서 때로는 10리 이상 떨어진 곳에 가서 나무를 해서 짊어지고 와야 되는 생활 속에서 한문 공부를 약 2년여를 배워 사서까지 깨우친 저는 더 배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외가가 있는 충남 부여에 주역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계신 관계로 부여를 향하여 정든 고향땅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외가 또한 가세가 변변치 못하여 도저히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직업을 갖기로 결심하고 직장을 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행이 부여군 내의 고물상 조합에 수금원으로 취직이 되어 부여군 내의 고물상을 자전거로 돌며 수금을 하였으나, 수금원의 월급은 저축은커녕 먹고 생활할 수도 없는 적은 월급이기 때문에 생각다 못해 우선 잠자리와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해야 되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음식점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당시 수도가 없어서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물을 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남들이 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물을 길어놓고 일할 준비를 하곤 하였습니다. 이런 생활을 약 3개월 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서울에 계신 저의 외삼촌께서 기술을 배워야지 장래가 있다면서 상경하라는 편지가 왔었습니다. 저는 음식점 주인에게 저의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주인께서는 3개월간의 월급과 수고가 많았다면서 돈을 더 많이 주셨어요. 저는 이 돈을 여비를 하여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서울 용산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린 저는 어떤 쪽이 서울 역 쪽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차가 서울역이라고 쓰고 가는 것을 보고 전차를 타고 서울 역 쪽으로 와서 정동을 찾아가서 하숙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 하숙집은 밤에는 여러 명이 모여 자고 아침을 먹으면 각자 자기 직장으로 가는 이런 합숙 하숙집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때 처음으로 법원 구내 이발관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용업에 근무하는 첫 길이였습니다. 이 구내 이용원은 저녁에 일찍 끝나기 때문에 야간 학교에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 저의 주인에게 학교를 다니게 해달라고 하였더니 주인의 배려로 이때 저는 야간 중학과정을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야간중학교도 정식 3년제 중학과정이 아닌 속성과정이였습니다. 이것은 나이가 많은 관계였습니다. 이때 저는 배움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느꼈습니다. 혼자 벌어서 생활하랴 책을 사보랴 정말 어려운 생활이었습니다. 그 뒤 저는 이집 저집 전전하며 이용기술을 배워 1963년 이용사면허증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정식 이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6년 저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날을 조용히 생각해보니 20여 년간 키워주고 가르쳐 주신 여자의 집에 경제적인 걱정을 시키지 말아야 되겠구나 생각하고,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그냥 와서 우리 앞으로 지금보다 잘살면 될게 아닌가.” 하고 말을 하였습니다. 왠지 모르게 여자가 여러 물건을 해 가지고 온다는 것이 저의 마음에는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먼저 여자에게 가장 간단한 것을 선물하기로 생각을 하고 동대문 옆 시계 점에서 가장 값싼 시계를 사 가지고 결혼하러 가는 택시 속에서 채워주면서 “앞으로 우리 잘살면 되지 않겠어? 잘살아 보세.” 하면서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식 날짜와 시간을 보지만 저는 이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내가 편한 일요일이 나에게 가장 좋은 날이라 생각하고 예식장에 가보니 오후 2시 30분이 남아 있었는데 사람들은 2시 30분은 2를 반으로 가르면 나쁘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남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예식하기로 계약을 했습니다. 이렇게 결혼을 했습니다만 독자로 태어난 저는 3남을 두었습니다. 둘만 낳아 잘 키워 보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잘 안 되는 바람에 한 명을 더 두고 보니 힘이 좀 드는 것 같았습니다.
<괴로웠던 지난날이 불우이웃 돕기의 동기>
1972년 종로구 당주동에 있는 동아 이용원의 책임자로 근무할 당시였습니다.
평소 길모퉁이에서 머리가 덥수룩한 청소년들이 구두를 닦는 것을 볼 적마다 저는 고물상과 음식점에서 일하던 저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저 불우한 청소년들을 도울 수가 없을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종로 경찰서에서 불우 청소년을 위한 사랑의 이용원을 사직 공원 안에 마련하여 놓고 이용사를 각 업소에서 차출 하였어요. 대개 이런 차출이 나오면 나이 어린 이용사를 내보내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만 저는 제가 나갔어요. 가보니 담당하시는 경찰서 직원과 이용조합 사우만 나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분들에게 “이 사랑의 이용원을 저의 친목회원이 나와서 매주 활동을 교대로 하겠으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승낙하셨어요. 그것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요. 이때 저는 저희 친목회원들에게 우리가 일요일 날 필요 없이 술만 마시고 놀 것이 아니라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돈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이발을 하여 주어 이들을 위로도 해 주고 깨끗이 해 주어 청소년 선도도 겸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건의를 하였더니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결의가 되어 우리 친목회원 11명은 매주 2, 3명씩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청소년들은 자기 머리를 자기 마음에 들게 해 달라고 하면 우리는 머리를 원하는 대로 멋있게 다듬어 주곤 했지요. 이들은 길을 다니는 우리에게 인사도 하고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라고 격려도 하곤 하였습니다.
저의 가슴속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이러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분은 알기 힘든 일들이지요. 이렇게 하여 초겨울까지 계속하다가 겨울철에 날씨가 추운 관계로 청소년들이 모이질 않아 활동을 계속 못하게 되어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후 친목회까지도 깨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혼자서라도 이웃의 어려운 생활을 하는 집들의 어린이들을 도울 것을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이발이지만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작은 일인 것 같아서 더 불우한 부모 없이 외로운 고아원을 찾기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많은 인원을 감당할 수가 있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만일 하다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도 많았어요. 그러나 아니다 혼자라도 하자, 부모 없이 외로운 고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하였으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 가면서 산다면 얼마나 좋은 사회가 되겠는가 생각을 하였으며 우리 3,500만 전 국민이 각자 자기만 좋은 마음을 가지고 법을 준수하고 산다면 얼마나 좋은 사회가 될까 생각을 했으며 그리고 나 자신이 봉사활동을 함으로써 나의 속에 나쁜 마음을 제거하고 원칙을 심어주는 아주 좋은 것 같았으며 스스로는 나쁜 일은 하면서 자식들 보고는 착한 일하는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한다면 자식들이 잘 받아줄 것 같지를 않았습니다.
<실천 없는 좋은 생각은 무의미>
이러한 좋은 생각을 아무리 했다하여도 이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그만 일이라도 나부터 솔선수범하고 나서 자식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실천할 것을 결심하고 1975년 2월부터 혼자서 신대방동 신명보육원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는 고아원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계하시는 시청에 문의하여 찾았어요. 아무 준비도 없이 기구를 싸들고 생전 처음 고아원을 찾아 고아원의 7호실에서 정 선생님의 안내로 고아들의 머리를 다듬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방에는 남학생만 약 10명이 있었습니다. 모두 건강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눈치들을 많이 봤어요. 그러나 몇 주 후부터는 나와 고아들과의 사이는 친 형제와도 같았어요. 서로 터놓고 이야기도 나누고 제가 고아원에 들어서면 정문까지 쫓아 나와 반가워하는 고아들의 얼굴을 볼 때 과연 이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누가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나 생각하면 아이들을 둔 아버지의 입장에서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옛날 6.25 때는 전쟁으로 인하여 고아가 많았었지만 지금은 다 잘 살고 있으며 좋아졌는데도 왜 이렇게 고아가 많은가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고아들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저의 힘이 너무 미약했습니다. 손이 부르트는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고아원에 갈 때에는 날씨가 좋았었으나 올 때에는 비가 오는 날도 많아서 비도 많이 맞았습니다.
저희들의 활동은 머리카락이 날리기 때문에 항상 구석진 곳에서 활동을 하는 것이 저희들의 실정입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 먹은 마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솔선수범이 최선의 설득력>
주위 사람들은 저를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자기도 살기 힘든 몸이 일요일 날 아이들이나 데리고 등산이나 낚시질이나 다니지 무엇 하러 다니느냐고 하면서 남을 돕는다고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너희들도 크면 나와 같이 어려운 고아들을 위해 일하면서 살고 착하게 살라고요. 이렇게 하다 보니 주위 이용사들이 참여를 하여 인원은 늘었고 또 전에 친목회원들도 다시 참여를 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이 많은 회원이 한 군데로 가는 것보다는 조를 편성하여 활동 범위를 넓혔습니다. 직업소년학교와 양로원 등으로 1976년 2월 8일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구세군 양로원에를 갔었습니다. 여기는 무의무탁한 할아버지 20분과 할머니 20분이 계셨습니다. 전에는 이용사를 불러 돈을 주고 이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찾고 부터는 서울의 일류 이용사들이 이발을 해드리고 여자 회원들이 부드러운 손으로 면도도 해드리고 손톱도 깎아드리면 할아버님과 할머님께서는 서로 농담으로 장가가는 날인가 하면서 서로 웃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 손자들이 해 주는 것 같아 즐거우신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매월 찾으므로 서로 친해진 뒤로부터는 마음속에 간직한 청춘시절의 이야기를 대화로 화제를 나누다가 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물으면 대통령 각하께서 사회복지에 힘쓰시고 사회에서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잘 지내신다고 하십니다. 혹 친척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아들은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손자가 있는데 지금은 모 대학을 다닌답니다. 현재 사회에서는 한포기의 풀과 한그루의 나무를 사랑하자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하고 있나 생각도 해봅니다. 만일 자기가 늙고 자기 손자가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저 혼자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다니다보면 할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분이 계십니다. 저는 여기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되며 내가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젊음이 있을 때 어려운 이웃을 도와가며 올바르게 살아야지 하고 마음을 굳게 먹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들은 우리들이 이발을 해드리고 면도를 하는데 서로 순서를 많이 찾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별로 할 일도 없으면서 서로 순서를 찾으며 시비를 하시는 것을 보면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서로 서로 사이좋게 양보하면서 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니 어린 시절의 마음가짐은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다 서로 헤어질 시간에는 아쉬워하며 “다음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젊은이들 잘 돌아가요” 하면서 눈시울을 적시며 양로원 문 앞 멀리까지 나오시면서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면 왜 그렇게 외로워 보이는지 몰라요.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지요. 그러나 인원이 많아지고 봉사회도 창립이 되어 활동지역도 많아지므로 뒤 따르는 활동비용이 문제였습니다.
<희생 없는 봉사 있을 수 없어>
처음엔 회비를 500원씩 자율적으로 받았습니다마는 내는 회원은 몇 명이 없었으며 왜 내 돈 내고 무엇 하러 고생하느냐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저는 이 때부터 나의 개인 지출은 물론 생계비까지 절약하여 활동비를 마련하였습니다. 몇 개월만 참여해 보면 좋은 일인 것을 느끼기라고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에는 저는 여러 부양가족이 있기 때문에 점심 식사만은 좀 영양가 있는 500원 정도의 식사를 했습니다. 이는 내가 건강해야 우리 집 식구를 부양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부터는 점심을 국수와 라면으로 먹어야 했습니다. 친구들끼리 한 잔씩 마시는 술도 금하지 않으면 않 되었으며 아이들에게 저녁 퇴근 시간에 사들고 들어가던 과자봉지도 멀리하여야만 되었어요. 그리고 남의 집 직공으로써 모일 장소와 시간이 없어 남모를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근무시간이 끝나서 회원들과 회의를 하러 가려면 직원회의가 있다고 하면서 못 가게 하는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을 낮 삼아 회원들을 설득하여야만 되었으며 일요일 어쩌다가 쉬는 날에는 지방의 이용사들을 찾아 지역 활동을 권유도 하였지요. 그리고 모일 곳이 없어 지하철 정류장이나 겨울철에 예식장 안에서도 아는 친우의 이용원에서 모이다 보면 견습생들의 나가라는 호통에 회원들을 다방으로 모이게도 하고 아는 사장님을 찾아 일요일 날 한 두 시간씩 사무실을 빌려 쓰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도 많았으며 남모를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일요일 날 활동을 가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과 같이 뒷동산(구진봉)에 올라 잠깐 등산을 하지요. 이 때도 저희 아이들 3형제의 대화를 들어보면 과자 같은 것은 어려운 아이들과 같이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하고 시내를 다니다 보면 육교에서 불우한 노인들을 보면 서로 이야기하면서 아빠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가면서 살라고 했잖아 하면서 돈을 주고 이야기하면서 오는 것을 보면 내가 하는 활동이 자식들에게 산 교훈이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흐뭇할 적도 많았으며 이제 내가 죽어도 우리 아이들은 나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봉사활동 하는 날에는 몸살이 나서 누웠다가도 일어나야 했으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양로원과 고아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활동은 기술을 통한 봉사이며 머리는 매월 깎아야 되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또 봉사활동에 참여하시는 회원들도 봉사하는 사람들이 질서를 잘 지켜야지 하는 회원들의 말을 들으면 한없이 기뻤으며 전에는 별로 신경을 덜 쓰시는 분들도 해야 된다고 하시면서 앞장을 서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원들의 마음에 고운 마음을 심어주는 좋은 일인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어떤 부인들로부터 고아원에 어린이 입양문제도 문의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들 중에는 남편이 없는데 아기를 고아원에 보내고 시집을 갔으면 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어린이고 어머니가 자기를 고아원에 보낸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고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자기가 뿌린 씨앗은 자기가 거둔다는 정신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았습니다. 저의 친구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부정한)으로도 돈을 벌어서 자식들은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경제 성장이 이루어져서 다 잘 살고 복지사회가 되면 자식들이 부모를 원망할 것이다. 올바르게 벌어서 물려주고 좋은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이 활동을 우선 우리 집안부터 참여를 시키기로 생각하고 저의 처가와 외가에 계신 분들을 참여시키고 한사람보다 열사람의 힘이 크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이용업에 계신 분들을 참여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더 많은 회원을 늘리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저에게는 뜻하지 않은 행운이 닥쳐온 것입니다. 제가 몇 년간 단골로 이발을 하여 드리는 분이 저의 애로사항을 아시고 1977년 7월 10일 조그마한 이용원을 마련하는데 협조를 해 주셔서 저는 이때부터 모일 장소와 활동비용을 이곳의 수입의 일부로 사용하고 저의 업소는 오후 5시 이후에는 한가한 편이어서 길에서 신문을 파는 청소년들에게 저의 이용원에 와서 이용을 하도록 하여 매일 1, 2명씩 와서 이발을 하고 가곤 하지요. 이것은 저의 어렸을 적을 생각하여 이발료를 절약하여 노트나 연필을 사서 쓰라는 자의 뜻입니다. 이발을 하러 오는 학생들 중에는 고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는 학생도 있지요. 저는 격려를 하면서 내가 머리를 깎으면 틀림없이 합격하니 걱정 말라고 하면 이 학생들은 나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가지요. 우리는 이들에게 축복을 빕니다. 이 학생들은 내일의 우리 사회를 이끌어 줄 청소년들이기에 잘 보살펴야 되기 때문입니다.
<봉사활동의 확대가 소망>
저와 저의 회원들은 이 활동을 전국의 고아원과 양로원 직업소년학교 등으로 확대하여 우리 이용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자기 고장의 복지시설에 수용된 고아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불우한 이웃을 이발 봉사와 매월 찾아 위로해 드릴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마음이며 전 회원들의 결의입니다. 지금 저희들의 회원은 120명이 되었으며 5개의 지부도 있으며 약 2만 여명의 이발을 해 드렸습니다. 이것은 1인당 300원씩 계산하면 6백만 원이라는 큰돈이 됩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들도 힘을 합치면 무서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지방에 계신 분들과 같이 의견을 나누며 지역개발에 열중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의 정신자세인 것 같았습니다. 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어려움은 더 많아지는 것이기에 나의 정신을 확고히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생각다 못해 새마을 교육을 받기로 결심하고 시청에 계신 담당하시는 분에게 의사를 말씀드렸더니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가도록 주선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21세 때 신체검사 당시 그리운 고향을 가보고 지금까지 고향을 가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갈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가는 시간에 나와 같이 어려운 사람이 없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못 가 보았습니다.
<하면 된다는 신념 심어준 연수원>
새마을지도자반 (1977년) 63기로 10일간 교육을 받으면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원장님을 비롯하여 교관님들의 일거일동은 그 어디서도 보지도 못하는 생활 교육 이였으며 모범적인 새마을지도자분들의 성공사례는 나의 마음을 꿰뚫어서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하고 나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모르고 못하는 것은 큰 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배워서 알고 있으면서 실천을 안 하는 것은 무엇보다 나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연수교육을 끝마치고 나온 후 뜻밖에 1977년 12월 31일 부로 제가 경영하던 건물주인께서 업소 철거명령이 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난 후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죽고 싶은 심정 뿐 이었습니다. 막대한 돈을 들여 마련한 이 업소를 철거한다고 하면 손해금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간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저는 건물주에게 나의 사정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건물주께서 1년간 연장을 해주었기 때문에 당분간 걱정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철거 되었더라면 봉사활동을 하는 모든 문제들을 생각하니 큰 걱정들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저는 다른 업소를 마련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리저리 생각하여 저는 1978년 7월 1일 서울 역에 (현 서울 중구 남대문로 5가 63의 20) 광일 이용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려서 공부를 못 하였기에 우리 업계에 계신 분들 중에 배우고 싶어도 시간 관계와 어려운 관계로 공부를 못하신 분들을 위하여 야간 강습소를 저와 형제같이 지내는 분과 같이 힘을 합쳐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면 된다.”는 새마을 교육 속에서 실제 하면 된다는 실 체험을 했습니다.
<이용사 생활에 보람 느끼며>
저는 이용사 생활을 하면서 이용사로서 보람을 느낄 때도 있었고 내가 왜 이용업에 종사하게 되었나하고 생각도 했습니다. 이용사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머리 부분의 일부를 만지고 있으며 추한 머리 모양을 다듬어 좋은 얼굴(미남)로 만들고 아무리 고집이 센 분도 이발사가 머리를 돌리라고 하면 돌려야 되는 것이 우리 이용사가 아닌가 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보람을 느낍니다. 또 나는 왜 이용사가 되었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이용업은 생산업이 아닙니다. 제가 만일 생산업에 종사하였더라면 제가 만드는 기계류나 수출품이라면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에서 제일가는 품질 좋은 물건으로 만들어 대한민국의 제품을 세계에 널리 알려 대한민국을 널리 알리는 일을 했을 것을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용사이기 때문에 내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새마을운동은 이웃과 협동하며 다 같이 잘 살기 운동이며 말도 아니며 글도 아니고 다만 실천으로써 마음과 몸이 똑같이 항상 언제 어디서나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며 올바른 마음으로 올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 새마을운동이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앞을 막아도 굴하지 않고 이 몸이 활동할 수 있는 체력이 유지되는 한 처음 먹은 마음과 연수원에서 배운 인내로 끝까지 계속 노력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