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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자의 서원』 중 「회향분」
~~~바라옵건대 모든 중생이 항상 안락하여지이다. 일체 병고는 영영 소멸하여지이다. 악한 일을 하고자 하면 하나도 됨이 없고, 착한 일을 하고자 하면 다 성취하여지이다. 저들이 나아가는 곳에 일체 악취의 문은 모두 닫히고, 인간에나 천상에나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은 활짝 열려 있어지이다. ~~~
금주의 법어--두 번째의 불교전래--서구 불교와의 만남
금주의 법사--조은수 교수(서울대학교 철학과)
제가 불광사에 여러 차례 왔었는데 법당 준공식할 때는 대중으로 참여했다가 지금 앞에 나와 있으니 떨립니다. 날이 좋은 일요일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혜담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돈 되는 공부(약대)해서 돈 안 되는 공부(불교철학)로 옮겨 간 사람입니다. 제가 대학가려고 종로학원에서 재수할 때 점심시간에 조계사 법당을 다니면서 어린 나이에 종교적 위안을 받았습니다. 가끔 그때 청량한 느낌을 떠올려 봅니다. 제 부모님은 신실한 불자셨지만 어머님은 절에 공양올리는 걸 주로 하신 분이라 체계적으로 불교를 공부한 건 아닙니다. 그때 저는 불교를 처음 만났습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을 갔지만 1학년 때부터 공부에 마음이 없어서 다른 데로 돌다가 결국 불교를 공부하기로 마음 먹고 철학과로 진학했습니다. 박사 과정 공부하는 중에 미국 갔는데 인도에는 불교 연구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미국에는 유명한 교수님이 많이 있어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시간대, 버클리대에서 공부했는데 미국의 큰 대학에는 불교를 전공하는 교수님이 한두 명은 다 있습니다. 박사과정에 보통 8년 정도 걸리는데 저도 7년 걸렸습니다. 산스크리트어, 티벳어를 공부하면서 서구사람의 불교 이해에 대해 저의 관점으로 연구했습니다. 서구사람이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명상을 하지만 사실 불교인이라 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제가 있는 서울대 철학과에 19명의 교수가 있고 그중에 6명이 동양철학, 2명이 불교철학하는데 한 분은 이번에 은퇴를 하셔서 곧 후임을 뽑게 되었습니다. 저희 학생의 경우는 절에 가보지 않은 학생도 많이 있고 동국대와 같지 않은 세속의 일반대학이라 학생에게 종교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답사하듯이 가자고 해서 절에 가기도 하는데 국사학과 미술사학과에 불교전공하는 학생들이 불교로서 공부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괴리가 있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한국스님이 세운 절이지만 서양사람이 주로 다니는 절에 다니면서 그들이 공부하는 불교가 어떤 것인지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고, 버클리대에 있을 때는 마침 한국에서 청화스님이 오셔서 92년인가에 호텔에서 보살계 수계식을 하셨는데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청화스님이 세운 삼보사에 주로 다녔고 그 절은 한국에서 이민 온 분들이 세운 절이었습니다. 미국의 불교는 소위 ‘이민자 불교’(한국, 중국, 일본사람)와 ‘현지 사람이 하는 불교’로 나뉩니다. 서로 간에 언어 문제도 있고 해서 소통이 많지 않아서 섞이지 않는데 문화적인 배경, 교리적 해석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은 신심이 나는 멋있는 말씀을 드릴 단계는 아직 아니어서 진리를 설하는 법문이기보다는 제가 그동안 느끼고 연구한 내용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로 생각하시고 편히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즘 알게 모르게 외국불교가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온 건 4세기라고 공식적으로 전하지만 스님들은 그 이전에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즘 불교를 보면 두 번째 전래라 할 정도인데 위빠사나라든지 티벳불교 등이 옛날처럼 왕이 사신을 맞아서 국교로 공인되는 식은 아니지만 저변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불교는 2600여 년 이상의 세월 속에서 굉장히 넓은 지역으로 퍼져가서 기독교보다 600년 더 오래 전해졌습니다. 불교의 전래를 생각해보면 넓은 시간과 공간을 거치기 때문에 그 속에서 다양한 불교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다양한 모습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분들이 남방으로 직접 가셔서 거기서 명상을 배우시는 분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위빠사나와 티벳불교가 미국이나 서구를 통해서 들어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역수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청화스님 계시는 삼보사 다닐 때 한국에서도 많은 스님이 사실 오셨습니다. 서경보 스님과 숭산스님 이후에도 많은 스님이 한국불교를 미국에 알리겠다고 오셨습니다. 지금 한국에 들어오는 불교는 큰스님의 불교라 할 수도 있지만 일반인, 한 사람의 개별 수행자에 의해 들어오는 거라 할 수도 있습니다. 서구불교가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떤 논문에서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는데 우리가 왜 서구불교에 관심을 가지는가에 대해서 현재 한국불교의 상황이 밖으로 눈을 돌려서 다른 문화 속에서 우리에게 시사점을 갖는 어떤 것을 찾을 필요가 생겼다는 점을 느낍니다. 그 말은 곧 한국의 1700년 불교사 중에서 한국불교를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생긴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보는 이유는 자기를 객관화해서 보고 싶은 욕구에서 만들어집니다. 한국사회는 서구사회와 굉장히 많은 공통적인 문화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어서 서구화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서구에서 불교가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그 연유를 잘 이해함으로써 한국불교가 나갈 방향을 추상해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구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서구불교의 역사를 보통 150년이라 봅니다. 그전에도 불교가 알려진 기록은 있어서 아쇼카왕이 전법을 위해 많은 사람을 스리랑카로 보내서 불교가 생기는 계기를 만들었고, 인도에서 6~7세기에 불교는 거의 명맥이 끊어지게 되는데 그전에 스리랑카로 전해지고 스리랑카에서 동남아로 불교가 전해지고, 그 이전에 BC1세기 정도에 실크로드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전해지고 다시 동아시아로 전해졌습니다. 그런 전법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인도내에서 불교가 사라져도 불교는 전세계로 퍼질 수 있었습니다. 아쇼카왕은 서구쪽으로도 많은 전법사를 보냈고 서구 그리스에서도 인도로 사람들이 왔다고 합니다. 그것이 오래 가지는 않고 서로가 간단한 언급만 한 정도였는데 그런 점에서 150년 전에 인도에 대한 관심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촉발하게 됩니다. 그 이전인 19세기 말까지는 거의 공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에 의해 인도가 지배당하고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아시아의 많은 나라를 식민지화하면서 거기에 파견 왔던 많은 관리는 유명대학을 나온 지성인입니다. 그래서 일은 밑에 사무원들이 하고 높은 지위의 관리들은 인도 문화에 관심을 가져서 학자처럼 인도의 언어, 문화, 고전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책을 남겼습니다. 그런 분 중에 네팔에 배속이 된 허친슨은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많이 수집하고 산스크리트어로 된 책을 냈습니다. 스리랑카에 파견된 분은 팔리어에 관심을 갖고 경전을 번역했는데 이 분은 런던대학에서 공부하다 제자와 결혼하여 부부가 함께 1881년에 ‘팔리성전협회’를 만들어 거기에서 지금도 니까야의 많은 책이 영어로 번역되어 나옵니다. 니까야의 한문 경전인 아함경을 한국에서 우리가 공부하게 된 것은 1960~70년대에 동국대 고익진 교수님이 아함경이 중요하다고 말씀한 뒤입니다. 아함경을 소승경전이라며 공부하지 않던 때도 있었습니다. 유럽의 불교 연구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학자가 법화경을 불어로 번역한 것이 1851년으로 오래 되었고 독일에서는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 책도 내고 금강경을 독어로 번역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번역으로 보는 불교’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은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교재로 많이 쓰입니다. 이런 책들이 19세기 초엽에 시작해서 영어, 독일어, 불어로 퍼지게 되면서 후속에 영향을 줍니다. 철학자 중에서는 쇼펜하우어, 니체가 불교에 관심이 있었는데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으로 잘 알려져 있어서 그가 알고 있는 불교는 부정확하다고 우리는 알고 있지만 자신의 철학에 불교가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서 속에서 부처님을 많이 언급하여서 그런 영향 때문에 유럽의 지식인 세계는 불교가 낯선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세계종교의회’가 처음으로 열렸는데 지금도 계속 열려서 내년에도 열린다고 합니다. 1893년에는 EXPO도 같이 열려서 세계적으로 문명이 바뀌는 시점이 되었는데 그 만국박람회에는 한국에서도 식민지 되기 전이라 참여해서 고종황제가 보낸 분들이 갓을 쓰고 있는 한국관이 기사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 기독교, 그리스정교 등 여러 수백 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했는데 그때 아시아 종교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종교지도자 즉 큰스님들이 전세계에서 참석한 점이 의의가 큽니다. 한국에서는 간 분이 없지만 일본에서는 임제종의 큰스님이 갔는데 그 분의 통역자로 온 사람이 동경대를 졸업한 명석한 스즈키입니다.
그때 관심을 끈 두 분 중에서 한 분은 ‘리베카 난다’로 머리에 터번을 쓰고 힌두, 요가, 명상 얘기를 하여서 요가의 자세뿐만 아니라 요가에 들어있는 인도철학, 즉 브라만, 아트만, 베다, 우파니샤드가 처음으로 알려지고 수행 전통으로서의 인도철학이 알려지게 됩니다. 그와 같이 또 인기가 있었던 분은 스리랑카에서 온 스님으로 재가법사로 큰 인상을 남겼는데 큰 강당에서 연설을 하며 ‘이 자리에서 2400년 전에 인도에서 일어났던 일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부처님 열반 뒤 결집이 있었는데 사람이 모여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모으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돈 많은 실업가 유태인이 그 자리에서 나와 바로 그 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에게 전법하러 가라고 할 때는 지금처럼 수계식이 있었던 게 아니고 삼귀의를 세 번 하면 불제자가 되었다고 하듯이 그런 식으로 했던 겁니다. 이 유태인이 서양, 미국 최초의 불교신자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미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수용된 사건입니다. 제가 미시간에 있을 때 함께 공부하며 불교를 믿은 남학생이 자기는 ‘개종한 불교자’라고 했는데 저는 개종이 아니고 그냥 불교인이 된 거라고 얘기했지만 ‘개종한 불교인’이란 말은 공식적인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서양인은 기독교 전통 속에 태어나기 때문에 그 전통을 버리고 개종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개종하라 강요한 건 아닙니다만.
인도에 불교가 없지만 불교와 관련된 여러 행사, 일본이나 한국에서 보드가야에 절도 만들고 성지로 꾸미는 그 노력의 바탕에는 ‘마하보디 소사이어티’란 단체가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정토종, 정토진종, 천태종, 진언종, 선종, 임제종 많은 스님이 참석했는데 스즈키는 아미타불 부르는 정토종 스님으로 선의 전도사가 됩니다. 에드윈 아놀드라는 사람이 쓴 부처님 전기인 ‘아시아의 빛’에서 부처님의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분은 옥스퍼드에서 교육받고 학문적으로 역할을 많이 하고 인도에 공헌한 것으로 빅토리아 여왕에게 작위도 받고 인도에 대학도 세운 일을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인도와 불교를 구분하지 않아서 그런 영향으로 신지학회가 있는데 아시아의 신비로운 사상이나 종교 전통을 따로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헤르만 헷세는 서양사람이 좋아하는 작가인데 '싯다르타'라는 책이 부처님 전기는 아니지만 유럽 서구에 가져온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로버트 버슈웰 교수님은 옛날 송광사에서 10년 동안 스님 생활을 했는데 그 경험을 ‘선 수행자, 스님으로서의 산 경험에 대해서’ 책을 냈습니다. 송광사에서의 일과가 자세히 나와 있어서 지금도 미국에서 인기가 있는 책입니다. 불교의 출가 전통을 세세하게 알아보기 가장 좋은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로 많이 씁니다. 그 책에 보면 한국 스님을 70년대에 인터뷰한 내용이 있는데 왜 출가했는지에 대해 제일 많이 나오는 대답이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출가했다고 나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스즈키가 통역자로 왔을 때 시카고의 유명한 출판사 사장이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 다른 스님한테 불교 개론을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하기 어렵다고 해서 결국 스즈키박사에게 맡겼습니다. 그래서 '불교개론'도 쓰고 '대승기신론'을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하였고 이후에 '젠(선)이 무엇인가'란 책도 씁니다. 선은 사실 중국에서 발생했고 중국에서는 챈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선이라 하는데 서양에서 젠이라 처음 쓰이게 된 것은 스즈키 때문이라 보면 됩니다. 선에 대해 여러 책을 썼는데 어떤 책에 보면 당시 유명했던 ‘에리히 포름’과 공저한 책도 있고 서문은 심리학자 ‘칼 융’이 쓸 정도로 당시 정신계, 문명의 사조를 이끄는 분들이 선에 관심을 가지고 같이 책을 썼다는 겁니다. 당시에는 문명의 변화에 계기를 준 것이라 '아놀드 토인비'는 21세기 문화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불교와 서구의 만남이라 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대학에서는 스즈키 박사의 책이 선풍적인 인기가 있어서 스즈키 책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정도였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느냐 하면 1945년에 전쟁이 끝나면서 서구사람들에게 정신적인 공황상태가 온 것을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해 선이 가지고 있는 즉심, 비합리성, 합리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뛰어넘는 체험의 세계, 직관의 세계 중요성을 얘기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말도 서양사람에게 익숙해졌는데 삿도리라는 일본말이 지금도 많이 쓰는 말입니다. 스즈키 박사가 쓴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서양의 문명에 대해 주관과 객관, 주관이 대상을 포착하고 언제나 이분법적인 분열된 사고를 한다고 말합니다. 분열된 사고를 하는 기본에는 영어라는 언어의 문제가 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다리가 네 개다’를 영어로는 cat has four legs로 has라는 가지고 있다는 소유를 나타내는 표현을 한다는 겁니다. 언제나 외부세계는 소유하고 정복하는 대상으로의 세계가 되기 때문에 절대로 객관과 주관의 합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에 젊은 사람들이 열광을 했고 그것이 비트 제너레이션(패배세대), 히피운동, 반전운동한 사람에게 인기를 끌어서 불교는 새로운 대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불교는 전통적으로 마음에 관심을 가져서 내면 관찰하기 좋아하는 분들에게 울림이 있는데 미국에서 불교는 반항적인, 사회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비판적인 사람이라 정치적으로도 진보적입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돌다 불교를 만나는 소설책을 썼는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이 책이 한국에서 나오기도 했는데 그렇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서구불교가 만들어진 태생을 봤을 때 공통된 성격을 갖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는 교조주의에 대한 반항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19세기에 이국적인 종교로 유럽 사람에게 번역을 통해 알려지다 철학가와 문학가에 의해 저변을 확대하게 되고 20세기 중반에는 2차대전 종전 이후 큰 전파를 하게 됩니다. 1960~70년대가 불교가 붐을 이뤘던 때입니다.
서구에서는 불교를 합리주의적인 철학으로 본다는 겁니다. 기독교에 대한 불만에서 뛰쳐나온 사람이 많습니다. 18세기 서양의 기본적인 문명사조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로 교회는 우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여 권위에 대한 부정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기독교는 큰 도전을 받게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로 증명되면서 기독교의 창조설과 배치가 되는 사실입니다. 불교도 사실 신이 있지만 그건 육도중생 중의 한 가지 모습으로 신도 마찬가지로 업에 따르게 되어 있어서 자신의 선업을 마치면 다른 육도로 전생하게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창조신을 말하지는 않아서 그런 것이 큰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또 한 가지는 인간 중심주의, 관심을 신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인본주의도 포함합니다. 둘째로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우주론, 우주에 관한 연구, 양자물리학이 발달하면서 불교가 점점 설 자리가 많아지게 됩니다. 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것들이 과학과 배치되지 않아서 실체가 공이란 것임을 증명하는 데 양자역학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 것에 기여한 사람이 '카프라'인데 ‘물리학의 도’라는 책을 써서 유명한 분으로 동양사상을 서양 과학의 입장에서 설명합니다. 한국에서는 윤회, 전생, 환생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데 서양사람은 환생에 관심이 많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번 생에서 예수를 믿으면 천당 가고 그래서 영생한다는 말보다는 윤회 전생하는 삶의 미묘한 역학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많이 해서 '이안 스티븐슨'은 최면 연구로 ‘환생을 암시하는 20가지 사례’라는 책을 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는 얘기를 썼습니다. 물리학을 하시는 분도 환생을 연구하고 죽고나서 체험하는 임사체험을 통해 전생이 있다는 걸 연구하고 그 분이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과학연구 그룹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과학과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저희 대학 공대와 자연대의 교수님 중에는 과학을 하면서도 창조설을 지지하는 분이 대부분입니다.
전생(轉生)이 매력적인 점이 있는데 사람이 동물로 태어나기도 하지만 동물이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해서 우리 인간으로서의 지위가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유정으로 알아듣는 인식능력이 있어서 부처님 법을 배우고 해탈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사람만이 가능해서 동물은 안 된다고 하여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관리할 권리와 책임을 신이 부여했다고 합니다. 생태하고 환경하시는 분은 기독교에 대해 공격을 많이 했습니다.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연 그대로 있는 것은 반문명적인 것이라 자연을 가꿔서 인위를 통해 건설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서구 사람의 노력에 의해 세계 문명이 만들어졌지만 21세기 들어 우리는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문명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편의라는 점도 있지만 우리가 자연을 침해함으로써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밀림을 없애고 농토로 바꾸어 가축을 기르고 경작을 해서 더 많이 기르고 키우면 좋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살던 동물의 종이 멸종하게 되고 기후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문제가 일어납니다.
서로서로 인과가 물리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과학적이고 불교적인 겁니다. 영국에서는 목초지로 예전의 야생지로 돌아가는 운동을 해서 길도 더이상 만들지 말자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2050년 되어서 지구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육도윤회하는 인간에 대해 인간만이 가지는 장점이 있다는 말씀은 하셨지만 불교에서는 다른 종과 인간은 평등한 입장을 취합니다. 기독교는 그렇지 못해서 종차별적이라 비판받고 있습니다. 생태적으로 봤을 때 불교가 훨씬 평등하고 건강한 세계관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불교는 교조주의적인 종교가 아니라서 부처님 스스로도 내가 얘기했기 때문에 믿지 말고 스스로 따져보고 믿어라 말씀하셨습니다. 경전은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힘을 기르라고 하는 것이라 우리의 안목을 넓혀서 모든 사람의 눈이 밝아지도록 하는 것이 경전의 목적이라는 점에서 서양 종교의 경전과 차이가 납니다. 불교를 믿기 위해서 고해성사나 서약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큰 장점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서구 불교 중에서 미국에 가장 많이 들어가서 300만 명이 된다고 하는데 순착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토마스 제퍼슨이 만든 헌법에 의해 종교와 국가 정치는 분리가 되고 있습니다. 모든 정치인이 기독교인이듯이 제퍼슨도 일요일마다 교회를 가는데 반대파의 교회 목사를 웅덩이에 살해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헌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여러 측면에서 불교는 진보적인 윤리관을 가진 것으로 해서 서구의 종교사에서 기독교가 남긴 여러 가지 이단에 대한 박해 역사를 떠올리며 불교는 자유로운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서구 불교가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서구문명이 나가고자 하는 방향과 불교가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구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방향대로 불교를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 티벳불교는 지금도 신탁을 해서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기도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징후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라 불교는 언제나 합리적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아시아 불교와 이런 괴리가 생겨서 서양의 젊은 작가에 의해 불교 책이 많이 나오는데 그 속에 설명하는 불교와 한국의 불교와는 괴리가 있습니다. 서구적인 관념의 불교와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불교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어느 쪽으로 따라갈 것인지 중도를 취할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구의 불교는 전부 재가자의 불교라 동아시아의 출가 교단에 큰 도전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지금 한국 불교에서 출가자들이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기 때문에 서구 불교의 나갈 길과 현재의 위치와 서로의 교류가 많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정도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혹 질문 있으시면 이메일로 연락주시면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불광인의 선서>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법등오서, 전법으로 정정진을 삼겠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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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법회 사진 찍어주신 지일심 보살님, 금강경 독송 사진 찍으신 자성인 보살님,
일인시위 사진 올려주신 도명화 보살님 모두 감사합니다. ....()()()...
서구불교의 전파 경위와 그 현상 및 사회성에 대한 교수님의 강연(?)이 흥미 있었습니다.
가끔씩은 이런 인문학적 불교 법문도 필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쇼펜하우어 니체 칼융 에리히 프롬 헷세 등의 이름이 등장하니
아주 반갑고 경이롭기까지 하였습니다.
장문의 내용 복습하게 해주셔서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바라밀님 수고 많으셨고
사진 촬영하여주신 분들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건강하십시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이 긴 법문을 편집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긴~장문을 읽으며 종합공부 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영상 촬영도 편집도 알차게 잘 클럽하셨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바라밀 님, 내용을 소상하게 작성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과거로부터의 불교 전파 과정을 알게 되니
현재 우리가 정상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정성 들인 편집 덕분에 감사하게 받아지니 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