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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5 - 당나라가 망하고 혼란 속에서 5대 10국 시대가 도래하다!
고조 이연과 차남 이세민이 세운 당(唐)나라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개방적인 나라로 이민족도 능력
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중용했으며....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과 연결된 나라였으니 장안(長安)
의 인구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100만이었고 이 중에 외국인 비율은 5% 정도로 5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인도, 페르시아, 대식(大食, 아랍), 신라, 고려, 일본, 돌궐(突厥) 사람들이 장안에 거주했으며 신라인
최치원 등 당나라 관직에 오른 외국인들의 수는 적지 않았으니...... 페르시아 왕자 페로즈
3세는 페르시아가 멸망하면서 도망쳐오자 당나라는 그를 장군으로 임명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에도 19번의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했으며 상당수의 일본인들
이 과거시험에 응시해 당나라 관직에 올랐으니..... 아베노 나카마로는 30년간 당나라
관직에 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길 원하자 당현종(唐玄宗) 은 그 공로를 기념하며 주일본
당나라 사절로 임명했는데 시인인 이백(李白), 왕유(王維) 등과 깊은 우정을 쌓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나라는 여러 종교를 포용했고 당시 많은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 및 불교 승려들이 당나라로
왔으니.... 페르시아에서 장안으로 선교활동을 하러 온 선교사 올로판(Olopen)은 당태종(唐太宗)
의 깊은 배려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세웠고 중국 내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진행했습니다.
장안은 불교의 중심으로 외국인 승려들 역시 불경을 배우러 당나라를 찾았으며 반대로 당나라
고승인 감진(鑒眞) 대사는 759년 쇼무왕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에 도쇼다이지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전파했으며.... 그의 3대 제자인 엔닌 승려는 중국으로 건너와 불법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유학승들은 일본에 돌아가 천태종과 진언종에 법상종등 종단을 세웁니다.
아라비아인을 비롯 외국인 상인들이 무역을 하기 위해 당나라를 찾았고 비단길인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가
유럽과 장안을 연결했으니... 외국상인들은 보석, 향료를 팔기도 했고 호텔, 술집, 금융점포를 운영하기도
했으며 그들이 데리고 온 하인 중에 일부는 ‘곤륜노(昆侖奴, 흑인 노예에 대한 중국 호칭)’ 라고 불렸습니다.
당나라는 선비족과 한족 융합정권인 탓에 당태종은 항복한 돌궐인 10만을 받아들여 글필하력, 아사나사이,
아사나사마 등 100명을 5품이상으로 채용했고 또 고구려인 고선지와 백제인 흑치상지등이 중용됐습니다.
고선지는 타림 분지에 안서도호부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여러차례 큰 전공을 올려 부도호 로
승진하자 안서절도사 부몽령찰에게서 "개 창자를 씹어 먹을 고구려 노예놈" 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후 더 큰 전공을 세워 마침내 당나라 원정군 총사령관이 되어 "탈라스전투" 를
치르는데 시인 두보가 그를 찬양하는 시 高都護驄馬行(고도호총마행) 를 지을 정도였습니다.
백제부흥운동 지도자로 임존성을 지켰던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항복해 677년에 토번이 당나라
를 공격하자 조하도경략부사(洮河道經略副使) 로 포위되자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토번군
을 습격해 격파했으며 몇 년 후에도 토번군을 대파했고, 687년 돌궐이 당의 삭주(朔州)
를 침공하자 우무위위대장군으로서 황화퇴(黄花堆) 에서 돌궐을 크게 쳐부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인의 후손 이정기는 732년 랴오닝성 차오양에서 태어났는데 26세 때 평로절도사 왕현지가
죽자 그의 아들을 죽이고 고종사촌인 후희일을 절도사로 내세우니 안사의난이 완전히 진압되지
는 못한지라, 762년 당 숙종은 이를 추인해 성덕절도사 이보신과 연합해 청주에서 안록산의
잔당인 사조의의 난을 진압하게 하니 이후 평로, 치청, 기주, 제주, 해주, 밀주 일대를 관할합니다.
안사의 난이 끝난 765년에는후희일을 몰아내고 평로치청절도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 검교
공부상서 겸 어사대부, 청주자사가 되었으며 신라, 발해, 일본을 오가는 해상· 육상 무역을
관장하고 그러면서 산동반도에서 염전을 운영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는.... 위박절도사
전승사의 군대를 물리치고 덕주에 다시 2개 주를 손에 넣으니 요양군왕(堯陽郡王)에 봉해집니다.
그의 번진은 당시 여러 번진 중에 최대로 강성했으며 당나라 중앙정부에 대해서는 거의 독립적인 태도
를 취했는데, 781년 이보신이 숨을 거둔뒤 당나라 덕종이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에게 절도사 지위를
세습하지 않자... 이유악 · 양숭의 등과 함께 10만으로 산둥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 강회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죽으니 낙양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는데 직위는 손자인 4대 이사도로 이어져 819년 망합니다.
이렇듯 안사의난 이후에도 절도사들의 세력이 강해서 독립 왕국처럼 활개를 치게 되고 그후에 황소의 난
이 일어나 망하게 되니 화북지방은 5개 왕조가 흥망성쇠를 이어갔으며 전국적으로 10개 나라가 명멸
했으니, 일러 5대 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라고 부르는데 당(唐, 618년 ~ 907년) 왕조가 멸망한 907년
부터 송(宋, 960년 ~ 1279년) 왕조가 개창된 10세기 중엽까지 약 반세기 동안 이어진 혼란기를 말합니다.
우리 한국의 시대로는 후삼국시대에서 고려 4대 왕인 광종 치세까지 겹치는 시기인데 53년후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대혼란의 시대를 끝낸 나라가 송나라이니 서진이 멸망하고 전개된 오호십육국
시대와 이름은 비슷하지만 시기는 완전히 다르고 차라리 제2의 위진남북조시대 라고 부를만 합니다.
똑같은 중국의 혼란 시대지만 춘추전국시대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 나 위진남북조시대
(220년 ~ 589년) 보다는 훨씬 짧게 전개되었기에, 이 시기에는 중국인들에게 '통일왕조' 에
대한 강한 염원과 이념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보는데.... 고대로 부터 중세로 이르는 기간동안
분열의 시기가 점점 짧아진다는 것을 알수 있으니 중국이라는 구심력이 생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혼란은 당 말기 번진 세력이 할거하기 시작한 안사의 난이 발발한 755년
이나, 난이 끝난 763년부터 주전충이 애종에게 선양을 받는 907년까지인 번진 할거
시기 부터 각 번진별로 반독립적인 상황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니..... 공식적으로
오대십국시대가 시작한 907년 이전부터 이미 당나라는 혼란상태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안사의 난” 이후의 당나라 역사는 자립하려는 지방 절도사와 중앙 정권이 대립하다가 토벌하고
역습당하는 어지러운 세월이 이어지는데, 안사의 난 때는 곽자의 등이 있어 버티긴 했지만
황소의난 까지 터지니 더 이상 혼란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오대십국시대는 50여년이었지만
넓게 보면 755~ 763년부터 979년 까지 200년 정도가 실질적인 혼란 시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동아일보 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에 “밭 가는 여인들” 이 있으니, 남자는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여자는 집안에서 살림하던 당나라 말기에 벌어진 이변으로.... "당나라 시인
대숙륜 (戴叔倫) 의 ‘밭 가는 여인의 노래(女耕田行)’ 는 여인들이 밭일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명시다. 가난한 집안의 두 딸이 칼을 갖고 밭을 갈아 곡식을 심고 있다."
그들은 남들이 행여 알아볼까 봐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결혼도 못 한 오빠는
군대에 갔고/ 작년에는 가축 역병이 돌아 소까지 죽었답니다./ 그래서 칼로 소를
대신하고 있는 거고요.” 사연을 듣고 시인은 가슴이 아팠다. 게다가
“짝을 찾는 꿩들이/ 한낮에 언덕에서 점심을 먹는 두 노처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북학의(北學議)’ 를 쓴 박제가(朴齊家)는 이 시가 환기하는 현실에 주목했다. 그는 1798년
에 쓴 ‘북학의를 임금님께 올리며’ 라는 글에서 이 시를 언급하며 여자들이 밭일을
하는 현실을 얘기했다. 그래도 중국 여자들이 밭일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였다. 안녹산(安祿山) 의 난으로 인해 남자들이 징집을 당해 집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지난 백 년은 평화의 시기였다. 문제는 과거를 준비한답시고 아무
일도 하지않는 선비들이었다. 그들의 수가 10만명이 넘었다. 그들의 아버지와 형제도 농사일
을 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무리들이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한지 지금 백년이 되었습니다.”
누가 농사를 지었는가. 노비로 부리는 농민들과 자기 처자식들이었다. 소를 먹이고 밭을 갈고 풀을
베고 방아를 찧는 일의 대부분은 규중 아낙네의 몫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마을에서는 다듬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입을 옷이 없어 몸을 가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슬픈 현실이었다.
박제가는 그런 상황을 남들이 알까 두렵다며 임금에게 직언했다. “선비들이 농사를
망치는 가장 심각한 존재” 이니 그들을 도태 시키십시오. 그러나 정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로부터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돌아보면 한심한 역사지만,
그렇게라도 임금에게 직언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아주 조금은.
여자들이 밭을 가는 현실은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니... 당나라 이전의 통일
왕조인 한(漢) 나라와 비교하면 한나라와 당나라 모두 중앙 정부의 권위와
통제력이 실추되자 황건적의 난과 안사의 난이라는 반란으로 국가가 내리막
길을 밟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거의 유사한 멸망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제국의 해체와 혼란기의 도래 과정에서 상당히 다른 차이를 발견할 수 있으니
한나라는 황건적의 난 직후 부터 공중 분해되기 시작해 40년도 채 되지 않아
멸망했지만, 이에 비해 당나라는 150년간 절도사들의 독립과 이탈을 나름
대로 어느 정도 진압하면서..... 지방을 통제해서는 국가 자체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때문에 역사학계는 "진한제국", "수당제국" 등의 명칭을 사용하는데 중국에서 왕조
가 망할 때 보면 꼭 농민 반란이 일어나니 진나라는 진승 오광의 난, 한나라는
황건적의 난, 당나라는 안사의난 이후 황소의 난, 원나라는 홍건적의 난,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 그리고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망국으로 치닫습니다.
동한(東漢)의 멸망 이후 도래한 혼란기인 위진남북조시대의 경우 초기인 삼국시대에는 한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한 통일 왕조 건설이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다뤄졌으....니 한나라의 정통성과
국가 구조를 계승한 조위(曹魏) 와, 조위를 계승한 진(晉)이 일시적으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북방계 유목민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변방이던 강남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 명맥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당시 오랜 중국 문화와 경제 중심지이던 중원(화북지방)을 차지한 것은 북방 유목민
이 중심이 된 5호라고 불리는 수많은 국가들인데 370년에 이르는 이 기나긴 혼란 시기
에서 중국을 재통일한 수왕조의 경우 북방 유목민의 유입으로 세워진 국가들을 통합
하여 세워진 국가라는 점에서 중국의 통일 왕조 개념에서 새로운 통일 국가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오대십국시대는 위진남북조시대와는 혼란의 양상이 다르니 당나라가 붕괴한
이후에도 당시까지 문화와 경제, 정치의 중심지였던 중원을 통제하던 5대와,
이전 시대에 비해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변방에 가깝던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한 10국의 양상이 이어진 것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화북(중원)에 자리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때문에로 외곽 지역의 10국
및 절도사 세력들이 독립해 나갔지만, 통일 제국의 중심부인 중원 지역 자체는 다섯 번이나
왕조가 교체되는 와중에도 그 강역이라든지 또는 단일한 정치적 구조로 남아있을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중원에서 신 왕조로 세워진 북송(北宋)이 나머지 독립 세력인 10국을 흡수하는 형태로 중국이
재통일되었다는걸 생각한다면, 오대십국시대의 양상을 제국의 영향 범위 축소와 외곽 지역의 독립 →
제국의 왕조교체 → 신 왕조에 의한 영향 범위 재확장으로 보는 관점도 설득력을 가진다고 생각됩니다.
저 중원의 5대 왕조에서 특이한 것은 왕조는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황실만 교체되었지 신하와 관료층
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니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재상이 풍도인데 자신이
"다섯 왕조, 여덟 성씨, 열한 군주(五朝八姓十一君)" 를 모셨다고 회상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또 이런 경향은 이전인 남북조시대에 장강(양자강) 이남지역에 세워진 남조(南朝)의 상황
과도 동일하니..... 후경의 난이 벌어지기 전까지 난징에 도읍한 남조 역시
황실의 성씨만 바뀌었지 나머지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니 서로 유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송태조의 조씨 가문도 마찬가지로 송태조가 성인이 될 때까지 왕조가 세번 바뀌었으나 세 왕조에서 계속
해서 봉직했는데, 남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 돌아가는게 확실히 피를 덜 보는 온건한 세태였으니
왕조가 바뀌고 전란이 일어나긴 했어도 백성들의 삶이 힘들기는 하지만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수틀리기라도 하면 자주 백성을 학살하고 다녔던 남북조시대 남조(유송, 남제, 남량, 남진)의 폭군들에
비하면 이 시기에는 그래도 군주들은 기본적인 선은 지켰으니 지조 없고 몸보신에 인생 바친
처신의 대부 풍도는 백성들 살리는데는 재산이고 체면이고 그다지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온갖 추악한 짓을 서슴치 않았던 후량의 태조 주전충 조차도 기본적
인 애민의식은 있어서, 환관이나 문벌귀족이나 당나라 황족들은 마구 죽이고 다녔지만 백성
들에게는 동정적인 면모를 보여준 일도 있었으며 심지어 한간( 漢奸)이라고 천년 넘게
욕을 먹고 사는 석경당 조차도 백성들 상대로 학살을 하거나 문제를 일으킨 기록은 없습니다.
후당의 황제 이종가는 이민족인 거란족의 요나라의 지원군까지 끌고 쳐들어오는 석경당에게 패퇴하자,
절망하여 궁궐에 불지르고 자결하려 했으나 황후 유씨가 궁궐이 불타면 백성들이 다시 짓느라 고생
하게 될 테니 그러지 말라는 말을 듣고 낙양 현무루에 가족들과 올라가 현무루만 불에 태웠다고 합니다.
안사의 난이니 황소의 난 같은 반란이나 위구르, 토번, 돌궐등이 돌아가면서 당나라로 쳐들어 와서
괴롭힌 당 말기와 비교하자면, 분열된 지방 정권들이 자기 지역은 안정적으로 통치했던 편이라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나은 면도 있었으니 지방정권인 10국들의 경우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국가들이나 남조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정권의 안정성도 강했고 경제나 문화적으로도 번성했습니다.
이 시기에 중국의 '중심' 이 한 번 이동하게 되는 것이니 진(秦)나라 때 부터 오랬동안 수도
역할을 하던 중심지인 관중(시안, 뤄양) 일대는 전란으로 황폐화 되어..... 두 번 다시
제국의 수도가 되지 못했으며 후량은 주전충의 봉지였던 카이펑으로 수도를 이전하게 됩니다.
두 가지 원인이 있으니 하나는 기후의 악화로 오랜기간 농사를 지어 관개가 중요한데도 잦은 전란으로
기반 인프라가 붕괴되어 환경 파괴가 일어나 토질이 악화, 관중 평야의 생산력이 떨어지면서 수도에
요구되는 100만 규모 인구를 더이상 자체적으로 유지할수 없게 된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강남 지방의
개발이니 화북 지방 중에서도 대운하에 보다 가까운 지방이 많은 인구를 유지하는데 유리해진 것입니다.
오대십국이란 화북 지방에 자리잡은 5개의 왕조를 오대라고 하며, 중원 이외의 강남이나 사천
지방에 자리잡았던 10개의 나라들을 십국이라고 통칭하는데, 다만 십국 중 북한(北漢)은
예외로 북쪽인 산서성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북한이 후한과 후주의 교체기에
후주의 건국에 반발한 후한의 건국자 유지원의 동생인 유숭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화북(중원) 지방 오대 왕조들을 보면 후량(後梁, 907년 ~ 923년), 후당(後唐, 923년 ~ 936년), 후진
(後晉, 936년 ~ 946년), 후한(後漢, 946년 ~ 950년), 후주(後周, 951년 ~ 960년)의 다섯나라 입니다.
이들은 중앙의 정통왕조로 분류되는데 이 다섯 왕조들의 흥망성쇠가 오대십국이라는 연대의
중추가 되며, 물론 "후(後)" 라는 이름은 전부 훗날 붙여진 것으로 연대를 보면 2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하나도 없었고, 다섯 왕조를 모두 합쳐도 고작 53년밖에 가지 않았습니다.
단명왕조인 전국시대 통일 후의 진(秦)나라, 오호십육국시대에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과 후연, 또는 오호
십육국을 처음으로 잠시 통일한 전진이나,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 보다 더 짧으며 심지어 후한은
고작 4년으로 단, 후한은 북한까지 합치면 오히려 오대 중 가장 오래 존속된 나라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후량의 주전충은 환관과 명문가를 죽이는등 잔인했으며 후당의 이존욱은 전쟁 부분에서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세웠지만 결혼 한번 잘못해 좋지않은 인성을 가진 황후를 만난
것과 지나친 음주 가무, 그리고 어이없는 중과세 등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후진의 석경당은 왕이 되고 싶어서 적국이자 이민족인 거란족의 왕인 야율아보기와 내통해 통째
로 땅을 갖다 바쳤고 거란을 상국으로 떠 받들었는데..... 그렇다고 통치를 잘 했냐면
그것도 아니니 실망스러우며 후한은 세워진지 불과 4년 만에 망해버려 최단명 정통 왕조
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으며 후주는 잘 나가나 싶더니..... 세종이 죽자 그대로 무너졌습니다.
다섯 왕조 국호를 보면 양(梁)을 제외하면 그 이전의 중국을 대표했던 통일 정통 왕조의 이름이 시대
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이니(당 → 진 → 한 → 주) 그리고 후주의 뒤를이어 탄생해서 통일
왕조를 수립한 송(宋) 은 본래 상(商, 은) 나라의 후예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볼 수 있으니 주(周)나라가 상나라의 후손들을 위해 분봉해 준 땅이 송(宋)나라 였습니다.
특이한 점은 처음부터 서로 적국이었던 후량과 후당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의 시조가 전
왕조 시조의 측근이었다는 것이니 후량의 시조 주전충은 당나라 하남군벌의 거두였고
후당의 개조 이극용은 산서군벌의 거두였으며 후당의 2대 황제인 명종 이사원은
이극용의 양아들로, 이존욱의 인척이자 장수였으면서 반란으로 황위를 획득한 인물입니다.
후진을 세운 석경당은 그 이사원의 측근이자 사위였으며 후한을 세운 유지원은 그 석경당의
측근이었고 후주를 세운 곽위는 또 유지원의 측근이었으며 또 송(宋)을 건국한 조광윤
은 곽위의 양아들인 시영의 측근이었으니 권력에 가까이 있어야 반역도 쉬운법인가 봅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국가가 난립한듯 하면서도 연속성이 있는 이 시대의 특징을 잘 말해주니 나라
가 바뀌면 피바람이 휘몰아쳤던 오호십육국시대와는 달리 이 당시 중원의 혼란기는 교체된
것은 황성과 국명뿐이고 나머지는 변화가 없었으니 1인자가가 제거당하고 대신 2인자가
제위에 오른 것일 뿐, 풍도의 사례에서 보듯이 아랫사람들과 정치 체제는 계속 유지 되었습니다.
주전충 때 당나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잔인하게 제거한 일이 있었고, 풍도가 '난세 처세술의 달인'
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그렇지만.... 이 시대의 관료나 백성들에게 있어 오대십국시대는 이전 시대
처럼 왕조가 바뀌거나 정권실세가 바뀌면 처형되어 피바람이 부는 그런 시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중화의 국체가 혈통이 다른 지도자로 바뀌면, 즉 역성혁명이 일어나면 나라 이름을 바꿔야 하는것이 요구
되었던 동아시아였기 때문에 나라 이름이 자주 바뀐 것이지 유럽이었으면 단일 국가로 지속되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였으니 로마 군인황제 시대나, 카페에서 발루아, 부르봉으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왕위 교체시기, 장미 전쟁 시기의 잉글랜드 같은 유럽의 왕위계승 혼란기와 유사했다고 봅니다.
왕조 하나가 10년 겨우 넘겨가며 단명했던 이유도 역설적으로는 왕조가 바뀌어 봐야 손해
보는 사람이 이전 왕조의 황제나 그 가문 정도나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으니 다른
관료들이나 선비, 백성들의 경우는 왕조가 바뀌더라도 안정적으로 자기 지위와 재산을
지킬수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왕조가 바뀌는 데 저항할 필요가 없었으니 반발도 적었습니다.
주전충이 당 애종에게 선양이라는 형태로 황위를 넘겨받은 이후에 왕조가 바뀌는 과정이 철저하게
힘과 힘의 대결로 이뤄졌으니..... 명분이라는게 덜 중요한 사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명분
이라는걸 구태여 따져가며 살던 시대 보다 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부분이 있었다는게 놀랍습니다.
5대 10국이 왜 단명했느냐 하는 이유는 “自矜功伐(자긍공벌) : 스스로 공을 자랑하고, 奮其私智而
不師古(분기사지이불사고): 그 자신의 지혜만 믿었지 옛 것을 본받지 않았다’” 항우에 대한 사마천
의 평가처럼 창업자들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간언을 소홀히 한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사마천이 박한 사람은 아닌 것이.... 한나라의 시각으로 볼 때 항우는 반역자라
반고는 《한서》에서 항우를 본기는 커녕 일종의 반란자들의 사적인 “진승 항적열전”
에 수록했지만 그러나 사마천은 항우를 한고조 유방 보다 앞서 본기에 수록했습니다.
사마천은 “항우본기” 를 7권, “고조본기” 를 8권으로 편찬했으니 이례적인 일이 아닐수 없는데 하지만
사마천이 항우를 높인 것은 아니니 해하전투(垓下戰鬪)에서 열세에 몰리자, 항우는 “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니다.” 라는 말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책망하지도 않은 것이 그의 과오라고 말했는데 5대의 군주들에게도 통하는 말인가 합니다.
1. 후량(後粱)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반란인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반군 출신의 주전충
(朱全忠) 이 당나라에서 받았던 봉지였던 개봉(開封)에 도읍하여 개창한 오대십국시대의
첫 왕조로 남조의 남양과 서위의 괴뢰국 후량과 구분하기 위해 주량(朱梁)이라고도 부릅니다.
주전충은 태생이 미천하여 가난한 농부인 주성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적 부친이 죽자
가족과 함게 먼 친척 유숭에게 몸을 의탁했는데 속에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주온
이었지만, 늘 자신을 게으르게 여기는 주인 유숭에게 욕과 매질을 당하며 지내야만 했으니
분을 삼켰으며 늙은 어머니만이 오기가 가득찬 꼬마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주온은 하라는 농사는 안하고 학문과 무예에 흥미를 보였으니 장성했을 때,
멸망 직전의 부패한 당 정권에 불만을 품은 황소가 대대적으로 난을 일으키자
형과 함께 참전해 그 밑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니 880년 황소는 파죽지세로 중앙
정부군을 물리쳤고, 이에 놀란 당나라 황제 희종은 촉(사천) 지방으로 달아납니다.
황소는 장안을 함락시키고, 국호를 '대제(大濟)' 라 정하며 제위에 오르지만 오합지졸 농민군들을 끌어
모은 정권이 오래 갈수는 없는 일이니 곧 당 왕조에 충성하는 투르크계 사타족 출신 독안룡 이극용
이 군대를 이끌고와서 장안을 공격하는데 처음부터 황소는 인망이 있던 주온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이무렵 촉에 있던 당나라 장군 왕중영이 주온에게 밀사를 파견하였고, 이를 계기로 평소
교활하고 야심이 있던 주온은 왕중영과 내통하게 되니 그후 장안에서 황소를 배신
하고 반군을 격퇴하여 몰아내자 이 전공으로 주온에게는 왕중영은 물론 당나라로
부터 사례가 내려졌고 황소는 장안을 버리고 도주해 산동의 태산 부근에서 자결합니다.
당나라 조정은 주온을 양왕(梁王)에 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 하중행영부초토사의 지위
와 함께, 당나라에게 충성하라는 의미가 있는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했으니
이후 그는 당의 장수로서 주온이라는 본명 대신에 주전충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황소까지 무찌르고 두려울게 없는데다가, 오늘 내일 하는 유약한 왕조를 보며 주전충은 하라는
충성은 안하고 황제 희종이 하사한 이름인 '전충(全忠)' 을 멋대로 인왕중심(人王中心) 이라고
해석하는데 환관들이 황제 소종을 몰아내고 장남 이유(李由)를 황제로 세우자 주전충은 군대
를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재상 최윤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과 환관들을 학살하고 핍박합니다.
주전충은 봉상에서 72명의 환관을 모조리 죽여버렸으며 그리고 이 잡듯이 장안 등에서
환관을 잡아내 90여명의 목숨마저 빼앗았으며 이후 황제를 만나 환관 몰살 허락을
공식적으로 얻어낸 주전충은 그날 밤으로 제오가범(第五可范) 등 수백여명의
환관을 내시성(內侍省)에 몰아 넣으니 환관들은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본래 잔악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주전충은 환관들의 단말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모두의 목숨을 무자비하게 빼앗아버렸으며 사람을 보내 바깥으로 나간 환관들도
잡아 들여 아예 씨를 말려버렸고, 단지 어리거나 쇠약한 환관 30여명만 살려
두어 청소를 하게 했고 순박한 촌사람들만 50여명을 뽑아 새로 환관으로 임명합니다.
지난 100여년간 당나라 조정을 어둠 속에서 지배한 환관들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조정에서 사라져버렸으니 결국 환관은 송나라 때까지 세력이 커지지 못하며
그리고 소종을 협박하여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강요한후, 장안을 무참히
파괴했으며 장안 궁궐에서 뜯어온 자재들을 이용해 낙양에 다시 궁궐을 세우게 합니다.
마음대로 구체제를 파괴하고 살육하던 주전충의 행보는 여러 절도사들의 반발을 끌기에 충분했고,
당나라 소종도 이를 이용하여 절도사에게 구원을 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니당초에 소종을
이용해 중국 역사상의 유례가 깊은 '체면 차리기' 인 선양을 받으려고 했던 주전충은 소종이
예상과는 다르게 시끄럽게 굴자 생각을 고쳤으니 자객을 보내 소종의 목숨을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자객에게 쫓긴 소종은 도망치다가 궁궐 기둥 아래서 그의 칼에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환관과 귀족을
죽여 없앴을 때 처럼, 영웅인 태종 이세민의 후예도 이렇게 너무나 간단하게 쓰러져 버린 것이니
소종을 처리한 주전충은 하루빨리 황제가 되기 위해 소종 소생의 자식들까지 싸그리 몰살했고
소종의 장례를 관장하면서 거짓으로 통곡하는 척 했으며 그후 소종의 9남 당 애종을 옹립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문벌귀족들이었으니 귀족들을 쳐내는 것은 환관들을 쳐내는 일보다도 거 간단했는데
이 시기에는 세력을 가진 무인과 환관들이 모두 양아들을 대거 받아들여 자신의 사람으로 삼고
세력을 키우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그러나 난세에도 문벌귀족들은 이러한 '가자' 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한고조를 비웃었던 그 고귀한 혈통에, 어디에서 온지도 모를 가자 따위를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닌 대거 받아들인다면 문벌이 흐려지기 때문인데 이때 당의 명사 소리를 듣던 고관
38명을 낙양 교외의 백마역(白馬驛) 에서 황하에 수장시킨 사건은 당의 몰락을 상징합니다.
주전충의 참모 이진(李振)은 진사(進士) 시험에 몇번이나 낙방했던 경력 탓에 진사 출신이나
문벌 귀족으로써 당의 고위 관료가 된 자들에게 앙심을 품고있던차라 주전충에게 "저것
들은 더러운 주제에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잘난체하는 놈들인데, 이번에 황하에 던져서
아주 탁류(濁流)로 만들어 버리시죠?" 라고 부추겼고 주전충은 껄껄 웃으며 이를 허락합니다.
환관도, 귀족들도 지난 수백여년간을 버틴 존재들은 파격적인 행보를 자랑하는 폭군
앞에서 너무나 간단하게 사라졌으니 구체제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주전충
에게 있어서, 자존심이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귀족들의 족벌 따위는 그저 '재미
삼아' 황하에 내던져 볼만한 구경거리를 만드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의심 많고 잔혹하며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악랄한 폭군이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당제국을 멸망시키기엔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던 것이니 조정의 귀족들을 모조리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린 주전충은 어느날 큰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가, 조용히 뇌까렸
으니 이 버드나무로는 의당 차곡(車轂: 수레바퀴의 바퀴통)을 만들어야 한다.(此木宜為車轂)
그러나 주전충을 본래 따르던 무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 주전충 역시 그들이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나무라지 않았지만, 눈치를 살피던 유생들은 재빨리 주전충의 비위를
맞추려 과장스럽게 동의했으니 그렇습니다. 의당 이 나무로는 차곡을 만들어야 합니다!(宜為車轂)
그러자 갑자기 주전충은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으니 입만 산 서생들이란
작자들이 알지도 못하며 아첨하여 지껄여대는 소리라는 게 바로 이런 것들이다! 망할
놈들, 차곡은 반드시 느릅나무를 끼워서 사용해야 하는데, 어찌 버드나무로 그것
을 만들 수 있겠느냐?(書生輩好順口玩人,皆此類也!車轂須用夾榆,柳木豈可為之!)
그렇게 말한 주전충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으니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냐!(尚何待!) 주전충의
말에 그의 옆에 있던 수십여명의 병사들은 그 즉시 '버드나무로 차곡을 만들어야 한다.' 던
유생들의 머리채를 끌고 가 때려 죽였고 머지않아 주전충은 마지막 황제 애종으로부터
선양이라는 미명하에 제위를 찬탈했고, 애제를 조주로 보냈다가 이듬해 사람을 보내 독살합니다.
한편 이 와중에 주전충은 황소에 대항해 함께 싸웠던 이극용과 당 조정 내부에서의 주도권 쟁탈
전을 벌였는데.... 원래 이극용은 술자리에서 주전충에게 치욕을 주었고, 이에 분노한
주전충이 병력을 이끌고 하동군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기에 둘의 대립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이극용은 전쟁에는 강했으나 정략에는 주전충에게 뒤졌고, 또한 그의 갈까마귀군도
그 용맹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난폭함으로 변했기 때문에 조정에서의 평판은
좋지 못했는지라 결국 주전충은 이 싸움에서 승리해서는 이극용을 쫓아 버립니다.
그러나 그의 세력 범위는 화북 일부에 한정되었고, 각지에는 신-후한, 후한-삼국 교체기 때 처럼
절도사라는 명목하에 군벌들이 웅거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주전충의 후량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특히 주전충에 의해 패배한 이극용은 변경에서 절치부심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한편, 908년 1월에 이극용은 주전충 타도를 아들 이존욱에게 부탁하고 병사했는데 이극용은 죽을 때
존욱에게 화살 3개를 주며 "유인공 부자가 배신하고, 거란의 야율아보기 또한 나와의 맹약을 배신
했다. 주전충은 나에겐 원수와도 같은 존재이다. 너에게 주는 3개의 화살 중 첫 번째는 유인공에게,
두번째는 거란에게, 3번째는 주전충을 멸망시킬 때 각각 사용하거라.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소원이다!"
훗날 아들 이존욱은 내분이 일어난 유인공을 멸망시키고 거란을 정벌했으며 골육상잔
으로 서로를 살육하던 후량마저 멸망시켜 아버지의 유언을 모두 지켰습니다.
황제가 된 주전충은 즉위하자마자, 당의 멸망은 부패한 조정 대신에게 있다고 판단하면서
과거 당의 고관들을 싸그리 잡아들여 모두 죽인뒤 황하에 시체들을 던져서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버렸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으니 본인이 향락에 빠져들고 당현종
처럼 자신의 양자의 아내, 즉 의붓 며느리와 감통하는 등 여러모로 막가는 짓을 합니다.
한편 이존욱은 아버지 이극용의 원한을 가슴깊이 새긴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는데, 마침
주전충은 향락을 즐기던 와중에 정적의 병사 소식을 듣고 '좋구나, 그놈 땅도 내가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군대를 보냈으나 이존욱의 반격으로 참패당하고 말았습니다.
주전충은 절치부심해서는 1년간 군사 훈련에 힘쓴 뒤 자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갔으나 역시 참패하자 화병을 얻어 병석에 누웠는데..... 주전충은 친자 외에 많은
양자를 두었는데 그 중 주우문을 총애한지라 그를 후계자로 점찍고 있었는데,
주전충과 열심히 내왕하던 며느리 중의 하나가 주우문의 처 왕씨였기 때문 이었습니다.
게다가 912년에 2번의 패전으로 인해 상심이 크고 화병이 찾아와 연로한 주전충은 병이 들어 제위
를 양자인 주우문에게 물려주려하자 불만을 품은 친아들 영왕 주우규가 군대를 이끌고 황궁
을 점령한 다음 침실에 들어가 주전충을 암살하고 제위를 찬탈하였으니 비겁한 꾀와 막장으로
살았던 주전충도 친아들 손에 처참히 목숨을 잃었으며 주우규는 사람을 보내 주우문도 죽입니다.
하지만 주우규 또한 아버지와 똑같은 향락에 빠져들고 황음을 일삼다가 겨우 1년만에 넷째 아우
균왕 주우정(881년 ~ 923년)에게 살해당했는데 주우정은 사람 됨됨이가 공손하고 검약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무능했으며 형제들이 역모를 일으키자 그후 황족들을 경계합니다.
후량은 형제들의 황권 쟁탈로 점점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이
아버지의 원수이기도 한 연왕 유인공을 공격하여 그 나라를 병합해 후당을
세웠으며 후량을 잠식해 나가다가 결국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게 되니 주우정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목을 찔러 자결했으며 이로써 후량은 3대 16년 만에 멸망합니다.
일찍이 주전충은 이존욱에게 대패하고 홧병이 나서 와병 중에 '내 자식들 중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을 당해 낼 놈이 하나도 없다. 머지 않아 나는 죽은 후에도 묻힐 무덤이
없어질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 말이 실제로 적중하여, 이존욱은 주씨 황족들을
모두 도륙냈으며 주전충 또한 이존욱의 명령으로 부관참시에 쇄골표풍까지 당합니다.
주전충은 수도를 개봉으로 옮겼으니 중국의 지리적인 중심을 옮겼을 뿐더러 인재풀의 중심도 옮겨
버렸으니 황하에 문벌귀족을 대량 투신시킨 일은 잔인했지만 덕분에 동한 시대부터 1,000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문벌귀족들의 시대는 영원히 다시 오지 않게되고 가문 하나만 가지고 과거
에 급제하고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는 시대는 당나라가 마지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권력의 획득 과정이 비열하고 잔인하며 사생활도 막장이었지만 다른 폭군들에 비하면 일반
백성들의 삶을 생지옥을 만들거나 하지는 않는 사람이었으니 잔인히게 제거한 세력은
당나라 황실과 환관, 그리고 문벌귀족과 유학자들이었는데, 그가 멸망시킨 당나라 조정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로 모두 자신이 황권을 차지하는데에 위협을 줄수 있는 정적들이었습니다.
부하들과 사람들을 마구 죽이던 잔혹무도한 주전충이었지만, 의외로 그는 후대의 같은 성씨의 군주처럼
백성들에게 동정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으니 특히 그는 시장에서 쌀을 약탈하던 병사들을 처벌
하거나, 황폐화된 지역을 위문해 생산력을 올리려는 노력을 하면서 애민 의식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906년 주전충은 유주의 유인공 세력의 영역 중 하나인 창주를 포위하니 성주는 아들 유수문으로
아버지 유인공이 겁이 나서 구원하지도 못하는 와중에도 치열하게 버티며 싸웠는데 주전충은
창주를 봉쇄하여 새와 쥐조차 왕래할수 없게 만들었기에 성 안에서는 식량이 떨어졌고,
성내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흙을 먹으면서 버텨야 했을 정도였다. 주전충은 유수문에게 소리칩니다.
지원병은 오지 못한다. 어찌 항복하지 않느냐? 그러자 유수문은 성에 올라서서 대답하니, 저와
유주는 부자관계 입니다. 양왕(주전충)께서는 대의를 가지고 천하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고
있는데, 만약 아들에게 부친을 배반하고 오라고 한다면 장차 그를 어찌 써먹을 수 있겠습니까!
유수문의 당당한 변론 때문인지 아니면 유인공의 아들이 그토록 당당한 것을 보고 자신의 무능한
자식들에 대해서 생각이 났는지 주전충은 부끄럽게 여기고 공세를 늦춘후 이윽고 창주 공격
을 중단하고 귀환하면서 배로 실어와 산처럼 쌓아 놓은 군량미를 가져가기 힘들어지자,
없애기 위해서 불을 지르자 적군이었던 유수문은 귀환하는 주전충에게 서신을 보내 요청합니다.
왕께서는 그저 백성이라는 이유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포위망을 풀고 떠나셨으니
이는 왕의 은혜입니다. 성 안에 수만의 사람들은 수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그것들을 불살라서 연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을 가라앉게 하여
진흙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바라고 빌건대 그 나머지로 저들을 구원케 해 주십시오."
유수문은 적군이었던 주전충에게 식량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주전충이
이를 도와줄 이유는 전혀 없었고, 창주의 백성들이 모두 죽든지 혹은 유랑민이
된다고 해서 주전충이 받을 손해는 이미 더 커지기도 힘든 악명 외에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유인공의 세력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을 살려야 한다는 유수문의 말을 들은 주전충은 곰곰히 생각하더니, 아직 없애지
않은 식량들을 모아 여러 곳간에 남겨 창주로 보냈고, 창주의 백성들은 이 곡식
을 통해 아사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아름다운 미담이라.....
주전충은 왕용이 이극용과 통교를 하였다는 이유로 토벌하니, 왕용이 두려워서 판관
주식을 보내 화친을 구하자 주전충이 화를 내며 주식에게 말하기를, “내가 누차
편지를 보내어 왕공에게 당부하였음에도 끝내 듣지 않았다. 지금은
군사가 이미 여기에 도착하였으니 기어코 그냥 놓아둘 수는 없다.” 라고 대노합니다.
그러자 주식이 말하기를 “진주가 태원과 가까워서 침략에 시달리는데 사방의 이웃이 각자 자기
를 보호하느라 구원하는 자가 없으니, 왕공이 그들과 연화한 것은 곧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명공께서 남을 위하여 해악을 제거한다면 천하에서 누가 명령을 듣지 않겠으며,
어찌 진주뿐이겠습니까? 위무만을 끝까지 부린다면 진주가 작기는 하나 성이 견고
하고 먹을 것이 충분해 명공께서 비록 10만의 군중이 있더라도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 왕씨가 5대에 걸쳐 군기를 잡으면서 그때마다 충효를 숭상해 사람마다 목숨을 바치고자 합니다.
어떻게 승리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주전충이 웃으며 주식의 옷소매를 잡고
장막 안으로 맞아들여 말하기를, “공과 농담을 한 것이오.” 라고 하고, 이에 사자를 보내어 왕용
에게 들어가 보게 하니, 왕용이 그의 아들 절도부사 왕소조 및 대장의 자제들을 볼모로 삼게 합니다.
아들 균왕 주우정은 수도 개봉(카이펑)이 함락되기전에 형제들이 모반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 부하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했는데, 결국 이존욱에게 개봉이
함락되면서 후량 왕조는 불과 16년 만인 923년에 멸망했는데 그럼에도 5대 국가 중에는 가장 길었습니다.
짧은 역사의 나라지만 이후 중국사에 큰 영향을 끼치니 1,000년간 중국의 중심이었던 낙양과
장안이 전란으로 황폐화되자 주전충이 그곳을 버리고 자신의 세력권인 개봉으로 천도한
것이니 개봉은 이후 오대십국시대, 북송, 금나라로 이어지는 300년간 중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로인해 중국의 중심은 중원에서 화동 연해로 대이동하는 역사적 시작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