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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크리스천문협․부산크리스천문협 공동 주최
2002년도 여름문학세미나 일정
1. 주제
● 멀티미디어 시대와 기독교 문학
2. 일정
첫째날/8월5일(월)
● 오후 4시 : 부산대학교 국제상남회관 -접수 및 숙소
● 오후 5시 : <개회예배>
사회 / 류정희 집사
설교 / 유관지 목사
묵도 -------------------------------------------------- 다같이
기도 -------------------------------------------------- 김석 장로
찬송 --------------219장------------------------------- 다같이
성경봉독 --------- 요한복음 8:1-11 ----------------------- 사회자
중창 -------------------------------------------------- 김미영 외
말씀 ------------- 왜 쓰셨을까? ------------------------- 유관지 목사
특송 -------------------------------------------------- 이성원
인사 -------------------------------------------------- 양왕용 장로
광고 -------------------------------------------------- 류정희 집사
축도 -------------------------------------------------- 이실태 목사
요08:1-1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2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오는 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 느냐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작품상 시상식, 총평/ 오리엔테이션 및 회원소개 -부산국장 박정선 집사
● 오후 6시 : 만찬/ 환영사/ 박재윤총장
● 오후 7시 : 친교, 복음송
● 오후 7시30분 : 주제발표 - 멀티미디어 시대와 기독교 문학 /사회-이상옥 교수
1) 밀티미디어 활용을 중심으로 / 발표 : 허성욱 시조시인 , 토론 : 이영지 시조시인
2) 소설을 중심으로/발표 : 오인문 소설가 , 토론 : 박정선 소설가
● 오후 9시 : 작품낭송과 교제 /사회 - 조성국 목사
1) 작품낭송
유소례(시)-고백/ 최선남(시)-고향 / 이민화(동시조)-이웃집 감, 메밀꽃밭,
호병규(수필)-정 / 이소연(시)-견딜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 최연숙(시)-아저씨 분꽃 안중덕(수필)-책부잣집 / 이은화(성경동화)-눈을 뜨게 하셨어요
2) 복음송 -
● 오후 10시 : 친교시간(자유롭게)
둘째날/8월6일(화)
● 오전 6시 : 새벽기도회 - (인도 김지원 목사)
● 오전 7시 : 일과 준비 및 아침식사
● 오전 9시 : 나의 작품, 나의 인생
조금순 전도사, 김지향 장로
● 오전 10시 : 관광 (송정해수욕장)
● 오후 1시 : 점심식사
● 오전 2시 : 폐회예배(주요셉 목사), 해산
3. 도움 주신 분
● 부산대학교 박재윤 총장님
● 증경회장 강난경 목사님
● 증경회장 박종구 목사님
● 유관지 목사님
● 부산남노회 남선교회 연합회
● 고려식품 대표이사 구자연 장로님
● 서면메디칼안과 원장 정근 안수집사
낭송작품
고백
-유소례-
....그런데, 그때 기도원에서
눈만 감고 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음에는 세상의 일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잠 속이었을까 환상이었을까 불현듯,
날카로운 바람소리, 그 바람타고 날던 그분
강대성 복판에 우뚝 서던 순간의 그분
몇 초 간의 그분은 누구였을까!
짧은 필름이 내 뇌파에 감겨
이 시간에도 심장의 피를 뛰게 합니다
빛의 색맹처럼 길을 찾지 못하던 가시밭의 지난날
아집으로 넘던 가파른 고개의 무거운 짐
덕지덕지 도배된 내 벽의 누더기
쓸어질듯 기진해서야
당신을 만나던 때도 영혼의 깊이는 없었습니다
당신 앞에 무릎꿇었어도 가끔
삶의 파고에서 보이지 않는 육지,
허탈을 심연의 강에 띄우고 허우적이며
사단과 싸웠던 내 모습을 당신께 고백합니다
이제 나는 능선에 앉은 노을입니다
높이 손 뻗치고 뜨거운 호흡으로 당신만을 부릅니다
"내 안의 갈피마다 곱게 물들은 노을 빛이 되어
님의 희망이 되게 하소서." _아멘_
2002.07.19.
약력
창조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크리스천 회원
여의도 순복음교회 권사
고 향
-어머니-
최 선 남
삶의 이유로
어제의 자리로 밀려나도
슬퍼하지 않는다
현실의 웃음에
초대하지 않아도
노여움 없이
자리물림 하고
그리움의 끝 번지로 수없이 밀어내도
시간을 거스르지 않는다
사랑의 기다림으로
마음 저려와도
원망을 녹이고
다만
변함없는 이름으로
솟을대문 빗장 뽑아 문 열어놓은 채
반가움의 등불 기름 채우고
풀 먹인 이부자리 깔아 놓으며
소유(所有)를 가만 가만 뒷문으로 내어 보낸다
동시조
메밀꽃밭
이 민 화
붉은 꽃대에 보글보글 하아얀 메밀꽃
구름도 몽실몽실 꽃대를 맴돌고
어디서 고추잠자리 날개 접고 앉았다
바람 부는 들녘은 백설의 고운 나라
함박눈 송이송이 하얀 소망 퍼 올리며
누군가 올 것만 같은 기다림이 피는 꽃밭
이웃집 감
이웃집 마당에 감나무 한 그루
내 방문 창가에 친구처럼 손 내밀어
둘이서 이야기꽃을 도란도란 피웠지요
아침마다 눈뜨면 밤새밤새 감이 크고
내 맘 속 푸른 꿈도 날로날로 자라나고
우리는 서로 내기하듯 정다웁게 자랐지요
날마다 내 눈빛 먹고 곱게 익은 붉은 감을
어느 날 남김 없이 주인이 따버렸어요
‘그 감은 내가 키웠는데...’ 자꾸자꾸 눈물이 나요
정(情)
호 병 규
신림동 집에서 이사를 했다.
관악산을 모간(母干)으로 그럭저럭 삼십년을 살았다. 그렇다 보니 정이 들대로 든 동네를 뜬 셈이다.
사실 내가 젊은 시절 가평, 여주 등 경기도 일원을 공직을 따라 두루 돌아 신림동에 안주했을 때는 1970년 4월이었으니 이 땅에 중흥의 기운이 서서히 일을 즈음이였다. 막상 서울에 들어서기는 했으나 우리 세 식구가 들어 살 마땅한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셋방은 부르는 것이 값이었고 어느 동네든 자고나면 판자집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던 때였다. 도대체 장안에 내 키에 걸맞는 방을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동서남북 어디고 간에 아무리 뒤지고 다녀도 가난을 비웃는 끝없는 조롱뿐 이었다.
나는 지금도 아내의 물지게를 잊을 수가 없다. 관악산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허리를 잘리고 멈춰 선 신림2동 달동네에 살 때 이야기다. 상경 후, 내가 첫번째 들어 선 셋집이었으니 이 동네의 산등성(현재의 현대아파트 자리)에 세 들어 살 때였다. 평지 동네에서도 공동수도(共同水道)를 쓰는 판에 세면 벽돌집이 다닥다닥 붙은 무허가 산동네에 수도가 있을리가 없다. 그나마 낮에는 수돗물 급수가 중단되다 보니 밤이면 사람들이 몰려나와 줄을 섰다가 받아 오는 것이다. 물지게를 지고 숨을 몰아 쉬며 이골목 저골목을 돌아 언덕빼기를 오르던 아내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어려운 삶의 애환들을 이 시대가 얼마나 이해들을 할까? 아내는 최근에 들어 부쩍 허리의 통증을 호소한다. 그러나 누구나 환갑진갑 넘긴 여인이 그렇지 뭐하고 쉽게 받아 넘기겠지만 한 시대를 숨가쁘게 허덕이며 기어오른 우리 세대들은 그냥 웃어 넘기가 벅찬 그 때의 그 애환이 아직도 연속이다 싶은 심정인 것이다.
아무튼 이집 저집 셋방에서 셋방으로 콧대 높은 안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집 없는 서럼으로 살았다. 인간은 알다가도 모를 힘이 있다. 환경이 구속하면 할수록 저항하는 힘은 지극히 반사적이다. 결국 인간은 소유의 측도로 삶의 질을 판별하는 이 수단 이외는 달리 길이 없다는 수직적인 결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허리띠를 동여매고 그것들과 싸웠다. 그리고 끈질긴 노력으로 40평도 못되는 작은 집이었지만, 내 집에서 3남매와 잠자리를 펴던 날 그날 밤은 행복이 무엇이라고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 내외는 이동네 입구에 소위 슈퍼마켓이라는 점포를 차리고 주거와 점포 사이에서 이중 생활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어느날 첫째와 둘째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병원쇼파에서 치륵치륵 거품을 내고 있을 때 우리는 이 곤혹스런 상황에 당혹할 뿐이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리고 저항이라도 하듯 하루에도 수없이 죽어가는 연탄가스 중독사를 보면서 관악산을 향하여 삶의 모순을 붙잡고 처절한 내 속내를 크게 외쳐대고 있었다.
또 다시 얼마간의 세월을 보낸 후 비록 스테이션에서 산길을 따라 15분을 걷는 거리였지만 아내의 규모있는 살림은 60평 넓은 땅으로 옮기게 됐으니 그곳은 소위 신림동 해군단지라는 곳으로 그때가 1978년 8월 30일이었다. 그 당시 세차게 일어나는 건축 붐에 따라 우리도 이웃집들처럼 단층 슬래브(slab)집을 헐어내고 3층 건물로 재건축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건축업자만 도와주는 큰 실수였다. 왜냐하면 전세금으로 집을 짓다보니 건물 감가삼각비를 생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없이 기뻤다. 그리고 관악산을 바라보며 내 속의 흐뭇한 감정을 토로하며 잦은 산행을 했던 것이다.
나는 이 집에서 순탄하게 살았다. 3남매를 모두 이 집에서 대학을 졸업시켰으며 대학원에 재학중인 막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집장가를 보냈으니 신림동은 그야말로 지워질 수가 없는 내 삶의 무대였고 내 인생의 가장 친숙한 동반자였고 걸맞는 상대였던 것이다.
내가 이렇듯 긴 세월을 신림동만 고집한 이유는 관악산이 좋아서였다. 문만 열면 산이 반겨주기 때문이었다. 관악산은 언제나 내 삶을 어루만져 줬다. 언제나 끈끈한 정으로 나를 다둑이고 위로하며 그렇게 다가오는 교감이었다.
봄이면 생명력에서, 여름이면 생동감에서, 가을이면 침묵하는 잔엽의 그 사유에서, 눈날리는 겨울이면 자연의 겸허한 순응에서, 나는 건너야 할 인간의 숙연한 진실을 거기서 배웠다. 이처럼 해마다 연속되는 계절의 주문 속에 나는 날마다 내집 정원처럼 관악산을 걸으며 세월의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런 결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길은 그야말로 티없이 맑은 가장 순수한 산정(山情)이 낸 길이었다. 그것은 내 삶의 위대한 지표였다.
정(情)이란 원래 칠위(七謂)라 하여 喜 怒 哀 樂 愛 惡 欲의 감정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는 곧 살면서 부딪치는 감정이 곧 정이라는 뜻일게다.
누구나 사람은 감정을 삭이는데 주름살이 늘게 마련이다. 그러나 관악산은 내 감정을 여과해 주는 용수였고 섬약한 내 심정에 큰 용기였던 것은 살아가는 칠위를 씻어 산정으로 희석해 주고 삶의 율동에 탄력을 부어 줬던 것이다.
흐르는 계곡물에 손을 적시며 상큼한 공기에 볼을 비비며 산새들의 진솔한 귀엣 말에 산정(山情)은 사뭇 사연이 되어 인간 자유의 원초적 본질을 연출하듯 자못 살아가는 의미를 더했던 것이다. 날마다 칠위(七謂)의 정을 다스려 묵시의 철학을 터득시키는 산정의 깊은 품에서 관악산은 내 인생의 참 스승이었던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거기에 묻어 두고 떠났다. 그것도 11월30일 한해의 어설픈 자락에 무엇에 쫓기듯 말이다. 이제는 그렇게 교감해 오던 산정도 칠위에 얹힐 사심(私心)도 공심(公心)도 진심(眞心)도 허심(虛心)도 모두가 불위(不爲)만을 채우려는 공간일 뿐이다. 때문에 인생의 족력(足歷)을 설니홍조(雪泥鴻爪:눈과 진흙 위의 기러기 발자취 없어지듯 인생의 발자취도 그렇다.)라 했는가 보다.
햇살이 날마다 문안을 온다. 나를 따라 온 난초잎에 다가와 볼을 비벼대며 아파트 생활이 어떠냐고 씩 웃는 것이다. 곁에서 이것들을 넌지시 지켜 보고 있으려니 왠지 내가 장난감 나라의 무슨 공작물 주인이 된 기분이다. 14층 공중에 매달린 나를 새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딸의 아파트에 임시 거처를 삼았다. 두달 기한으로 이곳에 머문 후 다시 옆 동네인 군포시 오금동 소재 율곡 아파트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남은 나그네 길이 그곳에서 얼마나 더 머물게 될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우리 내외가 신림동을 떠나 이곳으로 온 것은 외손녀들 때문이다. 직장일로 아이들을 건사치 못하는 딸 내외를 돕기 위함이다. 하기야 노년에 할 수 있다는 일이 이런 일도 있구나 하면서 노객의 백미(百媚:사람을 흘리는 온갖 태도)에 절로 웃고 있으니 속 모르는 내자가 왜 실없이 웃느냐고 묻는다.
이제 내 곁에는 관악산이 없다. 내 심사를 걸러 주던 그 용수가 곁에 없으니 아직도 정이란 것을 말할 수가 있을까. 그저 나그네 길에 미로 같은 사로에 잡혀 헤매게 된다.
2001. 12. 10
프로필
한국기독교수필문학회 회장, 한국수필문학회 이사, 한국장로문인회 상임부회장
예장 평화교회 장로
견딜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이소연 -
시작이 시작을 견디지 못하여
끝을 불러오고
끝은 끝을 견디지 못하여
시작을 서두른다
순간이 순간을
영원이 영원을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는 슬픔이여,
비밀이 비밀을 지킬 수 있었을 때
빛이 빛을 잃지 않았을 때
견딜 수 있었음이라
사랑이 사랑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을 택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어떻게
죽음이 죽음을 이길 수 있었는가를
아저씨의 분꽃
최연숙
퇴근길이면 지하주차장을 나와 맨 먼저 마주하는 사람이 있다.
건물 주차관리 아저씨. 참 친절했다. 늘 활짝 웃는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다 보면 기분이 절로 즐거워지곤 했다.
해 그림자 길게 누운 여름 오후, 지하 주차장을 나오던 나는 차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담 밑에서 진분홍 분꽃이 초롱불보다 더 밝게
피어 내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비온 뒤 돋아나는 새 풀잎처럼 잎과
꽃의 대비가 선명해 길 가는 모든 이들에게 들키고야 마는 꽃. 신부의
머리위에 얹혀진 족두리에서 움직일 때마다 신부의 마음처럼 가늘게
떨리던 장식같은 꽃. 분꽃을 보면 유년의 사촌오빠 혼례식에서 보았던
신부가 생각난다. 참 오랜 날 동안 피어 있었다. 한낮이면 새초롬이
꽃술을 감추었다가 해질녘이면 활짝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요염하기까지
했다.
분꽃을 보며 절로 즐거워진 마음에 심은 사람을 찾았더니 주차관리를
하는 아저씨라 했다. 늘 미소를 잃지 않던 그 분의 촉촉한 감성이
전해 지는 듯 하다. 온통 시멘트 벽 뿐인 건물 담 밑 약간의 흙에
어쩜 고운 분꽃을 심을 생각을 했을까. 언젠가 차에 키를 두고 문을
잠가 난감해 할 때, 당신의 일인 양 달려 와 열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친절을 베풀어 주던 했던 아저씨는 분꽃이 지기도 전에 어디
론지 훌쩍 떠났다. 내게 스마일아저씨로 새겨진 마음 고운 그 분은
내년엔 어느 도시 한 모퉁이에다 달빛보다 더 환한 분꽃을 심어 오가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할는지…….
아저씨가 가고 이번엔 피부가 검고 표정이 어두운 아저씨가 오셨다.
의례 하던 대로 차창을 열고 "수고 하세요." "수고 많으시네요."하며
인사를 건네 보지만 받지도 않을 뿐더러 그냥 무표정한 얼굴이라 내
쪽에서 무안했다. 사람이 다 같을 순 없으니 어쩌랴. 이왕 늘 하던
인사 안받으시면 어때 라는 생각을 하며 빠짐없이 인사를 드렸다.
한 달 쯤 지났을까. 아저씨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분꽃은 하나, 둘 지고 있었다. 열매처럼 까맣게 익어 달려 있는
분꽃씨를 받아 내년엔 아저씨대신 내가 심어 보리란 마음으로 몇 개의
씨앗을 거두고 이, 삼일 간격으로 가보았다. 꽤 많이 익었을 열매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나처럼 내년에 심으려고 다 받아 갔나.하며
서성이는데 아저씨가 오셨다. 씽긋 웃으시며 손을 가르키는 곳엔 잘
여문 분꽃씨앗이 한 움큼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아저씨의 웃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씨앗을 수집하러 다닌 나를 위한 배려와 어둡던
얼굴 안으로 훈훈한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 내게 큰 기쁨이 되었다.
이젠 미소로 인사를 받는 아저씨를 만날 시간이 기다려진다. 어쩌면
분꽃이 맺어 준 인연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닫힌 마음은 부드러움만이 열게 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은, 떠난 아저씨로부터 받았던 아름다운 미소가 내안에서 열매를 맺은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새 아저씨가 받아 준 이 많은 분꽃씨를 어디다 다
심을까. 나는 벌써부터 꽃부자가 되어 버린 것만 같다. 아마 내가 심은
분꽃을 보는 이들마다 나와 같은 소망과 기쁨도 함께 거둘 것이다.
저만치서 아저씨의 환한 미소가 분꽃처럼 웃고 있는 것 같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문화예술인선교회'
2002년 크리스천문학 겨울호에 수필로 등단
(수필)
책 부잣집
안 중 덕
“엄마, 우리 반에 상혁이네는 부자인가 봐.”
“왜?”
“자기네 집에 ‘스포츠 카’도 있고, 중국에서 사 온 강아지도 있대.”
“그러니?”
유치원에서 막 돌아 온 일곱 살이 된 큰아이와 아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입에서 ‘부자’라는 말을 처음 들은 터라 귀가 솔깃하여 딴청을 피우듯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수빈아, 부자가 뭔데?”
“돈이 많은 거잖아.”
다섯 살 난 둘째 아이가 끼어 들었다.
“그렇지.” “그런데 수언이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빠가 전에 가르쳐 줬잖아.”
“그랬구나.”
큰아이는 유치원에서 자존심이 좀 상했던 모양이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온 집안을 들쑤시며 놀던 아이가 오늘은 사뭇 조용하다. 아내가 다시 물었다.
“수빈아, 상혁이네는 돈이 많아서 부자라면 우린 뭐가 많지?”
“음.......”
“책!”
둘째 아이가 재치있게 또 끼어들었다.
“그래, 맞아.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책 부자네? 그렇지?”
큰아이는 미쳐 그 생각을 못했다는 듯 피시식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치를 두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 행복을 느끼고 또한 삶의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은 것을 소유하였거나 남이 없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요즘 모 카드회사의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의 영향인지 부쩍 사람들의 입에서 ‘부자(富者)’라는 말이 오르내리곤 한다. 무엇이든지 많으면 좋은 것이라는 신화가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데는 많을수록 좋은 것과 적당해서 좋은 것, 그리고 모자라서 편리한 것들도 있는 법이다. 무조건 많이 소유하려드는 것은 욕심이 아닐 수 없다. 삶에 있어서 욕구는 선한 경쟁을 불러일으키지만 욕심은 불만과 불평을 자아낼 뿐 아니라 때로는 파괴와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무조건 무엇이든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무엇이 많아야하는가를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큰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이 모두 유럽 여행을 하고 돌아 온 적이 있다. 그 후 큰아이는 다니던 유치원에 다니지 않겠다고 해서 줄곧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정해진 일과표도 없이 집 안팎에서 그림책과 뒹굴며 지냈다. 아내는 매달 평소에 보아 둔 아이들 책과 교육도서를 극성스러울 정도로 사들였다. 그리고 지혜롭게도 매일 아이들에게 책 한 권씩을 선물로 주었다. 아내는 잠자리에서 그림책 서너 권을 읽고 자는 아이에게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선물이 있을 거라고 일러주고 곤히 잠을 재운다. 그러면 아이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뜯어서 혼자 그림책을 보는 것이다. 아이는 매일 새로운 책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생긴 습관으로 요즘에도 아침에 일어나면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의 책마저 집안 여기저기에 하나둘씩 쌓여갔다. 이사할 때마다 책이 많아 힘들다는 인부들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어왔는데, 이제는 대꾸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행복한 고민이 생긴 것이다.
조금 서둘러 귀가한 어느 날, 아이들과 아내는 노란 종이 하나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큼직하게 ‘도서관’이라고 빨간 글씨로 써달라는 것이었다. 집안을 둘러보니 곳곳에 쌓여있던 책들이 아이들 방 한 모퉁이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손님을 기다리듯 꽂혀 있었다. 어느새 집안에 그럴 듯한 도서관이 하나 생긴 것이다. 나는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그 동안 내가 어떤 것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그 작은 도서관이 이제는 우리동네 어린이도서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아이들의 말대로 ‘책 부잣집’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 속에 ‘우리 집은 책 부잣집’라고 인식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만일 우리 집이 외국 자동차에다가 외재 가구로 가득한 집, 고급 디지털 텔레비전에다가 노래방 시설이 완비된 집, 디지몬 어드벤쳐 비디오와 게임 CD로 넘쳐나는 집으로 자녀들에게 인식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목회를 하다보니 나는 가끔 다른 이들의 집을 방문하곤 한다. 어쩌다가 책 부잣집이라도 방문하게되면 그런 집에는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그들과 친해지고 싶고 따뜻한 전통차라도 다려 마시면서 고즈넉한 담소를 나누고 싶다. 살아온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 그리고 살아갈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 서로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찾으려 애를 쓰고, 조금 더 배울 것이 없을까 하는 호기심어린 눈을 깜빡거리기도 한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나도 매일 보는 사람같이 친근하고 평화롭다. 그들은 여유가 있고 모든 일에 진지하다. 그들은 하는 일이 매사에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큼 참신하고 투명하다. 그런 집은 오래 기억이 되고, 언제든지 다시 찾아가고 싶은 곳이다. 다른 것에서 얻을 수 없는 그들만의 풍요로움과 자유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부산크리스천문협 세미나 주제 발표
멀티 미디어 시대와 기독교 문학
-소설을 중심으로
吳 仁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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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위기인가? 아니면 오히려 기회인가? 또는 기회이면서 위기이기도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가?
멀티 미디어 시대를 맞아 이런 논의가 한창이다. 기독교문학 역시 문학에 속하는 만큼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기독교문학에 대한 논의는 이 땅에 기독교가 상륙한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트러위크가 <문학으로서의 신약성서>(김영수 역, 대한기독교서회 발행) 등에서 보여주듯 성서를 문학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문인들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심각한 과제는 기독교문학작품을 어떻게 창작하여야 되는가 하는 점이었고 또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와 ‘문학’ 이 양자 중 기독교 신앙이 더 중시될 수밖에 없으므로 크리스천 문인은 마땅히 기독교의 이해와 바른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문예창작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수가 많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 문학 역시 문학의 일부이므로 예술적 향기 높은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서구의 기독교 작가들 - 도스토예브스키, 프랑소와 모리악, 조르쥬 베르나노스, 그레엄 그린 등 -과 같이 인생의 저 깊은 내면에까지 들어가 거기에서 펼쳐지는 심오한 혼(魂)의 드라마를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학과 문학은 별개의 영역에 속하지만 참된 삶의 문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을 지니므로 문학적 상상력은 신학적 사고의 폭을 넓혀주고, 신학적 사고는 문학적 지성에 역동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발표는 기독교문학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살피는 데 있지않고, ‘멀티 미디어 시대’라는 특이한 환경에 오히려 그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고 보아야 할 터이므로 이러한 전달 매체와의 관계 및 영향 등에 더 비중을 두어 살펴보고자 한다.
문자와 언어를 가졌다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인간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지식들을 문자로 기록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류 문명도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문자를 종이에 인쇄하여 책을 펴낼 수 있게 됨에 따라 문학도 구비문학의 한계를 벗어나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종이 책’의 위기 시대가 되었다고 시끌벅적하다. 컴퓨터의 발전이 점차 가속화하면서 인터넷을 동한 정보 교환이 보편화되고, 이에 따라 종이책을 외면하고 인터넷 매체 언어에 의존하는 경향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한 월간 잡지의 경우에도 2002년 <교교>라고 하는 CD롬 잡지가 창간, 대량 보급됨으로써 종이책에 비해 부피가 작으면서도 가격은 1/4 수준으로 저렴하고, 수록된 원고분량은 그 2 - 3배에 이르며, 동영상과 더불어 소리까지 컴퓨터를 통해 듣게 해주는 새 매체의 시대를 열었다. 전달 매체가 이처럼 변화되면 문학의 본질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종이책에 익숙해진 문인들은 문학의 위기론까지 제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이와는 달리, 멀티 미디어 시대를 맞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문학의 전달 매체가 다양해짐에 따라 문학도 새로운 변화와 발전의 시대를 맞고있다고 조심스럽게 낙관론을 펴는 이들도 있다.
어느 주장이 과연 더 옳은가를 논하기에 앞서 멀티 미디어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고 넘어가자.
멀티미디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디어에 대한 개념 파악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미디어(Media) 즉 매체(媒體)는 사이(間, between)의 의미를 가진 고대 희랍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문학작품에서도 송신자(작가)와 수신자(독자)가 있어 신호를 전달하듯 둘 사이에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나 매개물이 미디어라는 것이다. 이럴 때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 바로 그 ‘전달’을 위해 동원되는 모든 형태의 채널이 곧 미디어이다.
이 전달 매체는 물리적 실체로서의 도구(Tool),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기호나 언어 형상물 체계인 전언(傳言, Message), 생산자와 수용자가 도구에 담겨져 있는 전언을 통해서 상호 교감하는 상호소통(Communication)으로 세분할 수 있다.
따라서 인터넷 매체언어는 인터넷이라는 상호소통 도구를 통해 구현되는, 언어 심벌 도형 사진 그림 애니메이션 영상 등 일체의 기호적 표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문자나 그림 등을 종이에 인쇄하여 책을 펴내던 출판의 형태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있고, 그에 뒤이어 라디오 방송이 등장함에 따라 언어를 문자화하지 않고 귀로 듣는 미디어 형태에 익숙하게 되었다.(라디오와 텔레비전은 모두 방송 매체라는 점에서 한 묶음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라디오는 언어로 전달되는 매체이므로 활자 매체의 책과 가까운 요소가 짙고, 텔레비전은 영상을 통해 전달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비디오 영화 등과 같은 계열에 넣을 수 있다.), 텔레비전 비디오 등 영상 매체의 등장에 이어 컴퓨터가 등장하고 우리나라 IT산업이 세계의 선두 그룹에 나서게 됨에 따라 인터넷 매체 언어가 이제 새로운 매스 미디어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매체 언어에 의해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복잡해진 오늘날의 미디어 체계를 멀티 미디어라고 칭한다는 정도로 우선 이 부분에 대해 이해를 하고 기독교 문학과의 관계를 더듬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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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책 가운데서 가장 매혹적인 진리의 책 중 하나로 꼽히는 바이블은 그것이 한 순간에 이뤄진 게 아니다. 구약성서는 약 1천년에 걸쳐 기록되었고, 신약성서에 수록된 글들은 기원 50년에서 125년까지 75년 동안(권위 있는 일부 학자들은 기원 51년에서 150년까지 100년간)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일정 기간 동안은 성서의 내용들이 문자에 의하지 않고 구전(口傳)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언어로만 전달되었으리라는 것을 추측케 해주는 대목이다.
설화(說話)나 신화(神話)가 문학의 모태(母胎)이며 그 자궁 속에서 시도 소설도 드라마도 다 태어났다는 프라이의 말을 구태여 빌리지 않더라도 이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글자’보다도 ‘말’에 의존한 ‘상호 대화식 언어 미디어’시대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근동의 문학 속에는 이러한 설화나 신화가 적지 않게 포함되었을 터이므로 신약성서의 그리스도 행적 자체를 이러한 설화나 신화의 변형된 집적(集積) 정도로 평가하려는 일부의 번역서들도 그런 측면의 해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편의상 이런 시기를 ‘구전 미디어 시대’라고 표현한다면 이때의 문학은 고도의 상상력을 필요로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책이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기 이전 시기에 할머니나 어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한 소년기가 우리에게도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이해가 쉬우리라. 이때는 정보의 양도 많지 않았고, 이야기의 권위가 있었으며, 또 상상력이 풍부해서 신(神)에 대한 외경감이 생활을 지배하도록 종교 문학적 구전 내용이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금속활자의 개발로 책이 일반화되면서부터 기독교 문학도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된다. 김우규는 <한국 기독교 문학 소사(小史)>에서 1900년 전후의 개화기부터 현재까지를 제8기로 나누고 있는데, 이인직의 <혈의 누> 등 개화기의 신소설 중 20여편이나 되는 작품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기독교 정신을 수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수용’이란 어휘가 나타내듯 이 시기는 아직 본격적인 기독교 소설이 등장한 시기는 아니었고, 제2기인 모색기(1918년 전후 - 1930년)에 이르러 춘원 이광수 늘봄 전영택 등이 서양 문물과 더불어 기독교를 동경하는 시선으로 그린다. 제3기인 성장기(1931년 - 1939년)에 이르러 토착 신앙과 외래 기독교의 충돌을 그린 문제작 김동리의 <무녀도>가 출현하고, 리얼리스트 작가 염상섭 등은 대표작 <삼대> 등에서 비판적 시각으로 기독교를 그린다. 이런 무렵에 박태원 등 일부 월북(또는 납북)작가들의 소설에서는 서양의 자본주의에 일찍 눈뜬 기독교 신자가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농민들을 수탈하는 반(反)민족 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 문학의 암흑기(1940 - 1945년)와 시련기(1946년 - 1959년)에는 전영택의 <소> 박계주의 <진리의 밤>을 비롯, 김말봉 임옥인 이종환 등의 작품들이 명맥을 이어갔고, 6. 25가 발발한 1950년대에는 “기독교가 과연 인간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통렬하게 제시한다.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 이범선의 <오발탄> 등이 그것이다.
“주여, 교회는 무엇하는 곳입니까? 어떤 사람이 참 신자이며, 어떤 사람이 참목자입니까?”
<대성리 교회>란 오승재의 소설에서 터져나온 이 절규가 보여주듯 60년대 이후의 기독교 문학에서는 호교적(護敎的) 내용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 본질의 궁극적 문제에 매달려 그 답을 구하고 괴로워하는 소설들이 많이 등장한다. 영문으로 미국에서 먼저 발표된 소설인 김은국의 <순교자>를 비롯하여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그리고 김원일 강정규 백도기 등의 작품들이 이 계열에 속한다.
이런 작품들이 발표된 시기는 정치 사회적으로도 격변의 시기였다. 4.19혁명, 5. 16에 이은 장기 군사통치시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등등.
이와 더불어 매스 미디어 체계에도 큰 격변이 있었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개국으로 흑백 TV를 거쳐 컬러 TV시대가 열렸고, 이에 따라 영상매체 세대가 우리 사회의 중심 축으로 떠올랐다. 영상 매체는 활자 매체와 달리 사고력 합리력 지구력 등을 저하시키고, 감각적 충동적 행동적 인간으로 만든다는 연구보고가 가리키듯이 이러한 영상매체는 기독교 문학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 뒤이어 이제는 컴퓨터의 인터넷에 중독된 N세대가 등장했다. 그야말로 멀티 미디어(多媒體) 시대가 우리 앞에 활짝 열린 것이다.
이러한 멀티 미디어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또 기독교 문학에 미치는 영향은?
그런 것을 이제 천천히 검토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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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의 구음(口音)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城)과 대(臺)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 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混雜)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세기 11장 1 -9)
이 바벨탑 이야기는 창세기 제1장부터 11장 사이에 기록된 원역사 시대의 천지창조, 인간의 타락, 대홍수 심판과 함께 4대 사건의 하나로써 가장 늦게 일어난, 그리고 규모 면에서는 스케일이 작은 사건이다.
갑자기 이 바벨탑 사건을 발표자가 거론하는 것은 그것이 창세기에서 언어의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많은 학자들이 이미 심도 있게 해놓았고, 또 이번 주제와는 관계없는 부분도 있으므로 발표자는 여기에서 언어의 통합과 혼잡의 문제만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여기서 ‘통합’의 의미를 담고있는 부분은 ‘구음이 하나이요’(와에히 사파 에하트)이다. 촘스키 등 현대 언어학자들의 연구 결과 언어는 단순히 의사 전달의 수동적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인간의 사고 방식과 사고의 내용까지를 규정하는 고유한 능동적 기능까지 가진 인간들만의 고유한 문화 양식이다. 이 언어는 본래 인간이 의도적으로 고안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보는 것이 신학의 입장이다. 구음 즉 언어가 하나였다는 것은 천지창조 때에 주어진 단일 언어가 계속 전승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 당시까지는 언어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하여 별로 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이 비록 하나의 언어로 통합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언어를 창조주의 뜻에 맞게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적 풍요한 땅인 시날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망각하고 그곳에 안주하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대신 인간인 자기 자신을 자리잡게 한다. 바벨탑을 쌓는 벽돌 하나 하나에 자기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에 인간의 오만에 대한 응징으로 언어의 분열과 혼잡이 오게 된다.
여기서 ‘바벨’이란 ‘혼잡케 하다’로 번역되기도 하는 ‘빨랄’이 ‘빨벨’로 바뀌고, 이 말이 다시 축약되어 ‘바벨’이 되었다고 성서학자들은 보고 있다. 고대 근동의 오래 된 자료에 의하면 바벨의 이름이 ‘신의 문’이란 뜻을 가진 ‘카딘기르키’로도 나와 있는데, 이 이름 속에는 “하늘에까지 닿아 신들이 있는 곳의 문에 도달하겠다”는 실로 교만한 인간들의 의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벨탑 사건을 비(非)신자라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세계 인류는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해 왔고, “언어는 곧 그 민족의 혼”이라 하여 일제 통치기간 중 일제의 언어 말살 정책에 온 겨레가 항쟁을 한 경험을 우리 민족도 갖고 있다.
이처럼 분열되었던 언어가 하나로 다시 통합되는 듯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도구가 바로 컴퓨터이다.
컴퓨터의 인터넷 매체언어는 디지털로 형상화된다. 디지털은 문자, 소리, 사진, 애니메이션, 동영상과 같은 데이터를 0과 1로 이루어진 2진수로 표현한 것인데 이것은 ‘비트’라는 최소 단위로 구성된다. 그리고 디지털화된 각종 데이터는 컴퓨터 속 파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문자언어가 인터넷상에 구현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자언어로 종이 위에 기술되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형상성을 갖게 마련인 것이다. 이와 함께 언어 자료의 무한한 재생과 복제, 가공이 가능해짐으로써 테크놀로지에 의한 사물의 유일성이나 진품성의 상실을 가져오게 된다는 점도 우리 문인들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서로 다른 언어들을 번역하여 접속시켜주는 소프트웨어가 계속 발전함에 따라 세계 언어가 하나로 통합되는 결과를 더욱 재촉하고 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여 인간의 오만과 교만을 보여주는 원역사 시대의 바벨탑 사건이 이러한 언어 통합에 따라 오늘날에 재현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사건들은 여러 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인간 생명의 탄생까지 과학의 힘으로 좌우하려는 ‘복제인간 시도’를 다룬 장편소설을 17년 전인 1984 -5년에 이 주제 발표자도 <月刊文學>지에 연재, 책으로 펴냄으로써 그 해 한국문학상을 받았고, 인간의 오만이 빚을 비극에 대한 경각심을 이 소설로 일깨운 바 있었는데, 상상으로 전개했던 그 사건들이 곧 현실화되어 세계의 첫 복제인간이 우리 한국에서 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충격적 뉴스가 매스 미디어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인간이 더 이상 자기 중심의 바벨탑을 쌓아나가지 못하도록 우리 기독교 문인 자신들부터 이 시대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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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의 일반적 매체에서는 상호소통보다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전언을 하는 속성을 더 중시했다. 따라서 매체는 발신자의 의도와 지식을 담고 있는 책 신문 라디오 등 매개체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고, 수신자는 이 매체의 언어적 표상을 통해 그것을 수동적 입장에서 전달받으면 되었다. 비록 수준이 매우 높은 독자라 하더라도 문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 저자와 실시간(實時間)에 자기의 의견을 펼치거나 또 저자와 담론을 해나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담론을 펴고싶을 경우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전화나 편지 등에 의지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단(單)방향 매체의 한계를 빌렘 플루스는 텔레비전 매체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예로 들어 “그 텔레비전 매체는 잘못 디자인되었다. 전화처럼 정보를 보내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어떤 망 속에서 한 접속지점이 된다면 얼마나 편리했겠는가. 헌데 그 물건은 저기 저 안방에서 어떤 전파 보따리에 담긴 주사선의 종점이 되고 말았다” 고 했다. 단순한 소비자의 위치로 전락하여 전파의 종점에서 발신권(發信權)을 박탈당한 수신자의 입장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매체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수신자(소비자)는 발신자(생산자)와 대등한 위치에 서서 자신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표현함으로써 다른 매체가 구현할 수 없는 상호소통을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터넷 매체가 기존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본격적인 상호작용 언어활동을 구현할 수 있게 해줌에 따라 문학 창작의 경우에도 많은 시도가 가능하게 되었다.
다케무라 신이치의 <호흡하는 네트워크 파워>(오현영 옮김)와 이채연의 <인터넷과 국어교육> 등이 이미 밝히고 있듯이 그 어떤 매체도 구현한 적이 없는 새로운 형상성을 인터넷은 물리적 혼성(混成)과 화학적 융합(融合)의 방법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인터넷 매체언어는 문자, 그림, 사진, 동영상, 애니메이션 등이 각각의 개별적 형상성을 유지한 채 컴퓨터 화면 속에 하나의 문서로 통합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혼성적이라 할 수 있으며, 그림과 사진이 문자와 합성되거나 동영상과 사진 혹은 문자가 합성되어 새로운 개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는 융합적이다. 우리는 인터넷 매체언어의 혼성적이고 융합적인 형상성을 이용해 듣기 말하기 쓰기 읽기 등 언어활동을 할 뿐 아니라 그림 사진 영상 등 비언어적 기호의 전언성을 복합적으로 수행한다. 인터넷 매체언어는 언어적 기호가 표방하는 사실적 진술과 비언어적 기호가 표방하는 시각적 이미지가 하나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는 혼성‧융합적 형상성과 전언성을 갖고 있어 멀티 미디어의 특성을 가장 잘 충족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터넷 매체는 기존의 다른 매체와 달리 기존 세계를 재생하거나 혹은 가공하여 새로운 가상(假想)세계를 구현한다. 기존의 PDA(Personal Digital Assistants)에 전자사전, 전자교과서, 전자노트, 무선 인터넷이 결합된 가칭 ‘전자서판’(Electron Tablet)의 등장이 예견되고 있어 이 인터넷 매체를 통해 ‘종이책을 읽듯 자유롭게 어디서나 독서를 하는 상황’도 얼마든지 일반화될 것이다.
이 인터넷 매체언어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 구조로 형상화된다. 하이퍼텍스트는 1960년대 시오도 넬슨이 만든 용어로 전자적 텍스트의 형식, 근본적으로 새로운 정보기술과 출판의 양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연속적 글 쓰기, 즉 독자가 선택하여 읽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상호작용적 스크린 위에서 가장 잘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를 제공한다.
이 지구촌 어디에서도 수신자는 단순한 수신자로 끝나지 않고 송신자도 될 수 있다는 데에 이 매체의 특성이 있다. 이것은 지구 규모로 네트워크가 확대되었다거나 지구 전체가 공시적(共時的)으로 체험을 공유하는 하나의 마을, 즉 ‘글로벌 빌리지’와 같이 된다고 하는 기능적인 변화로도 환원시킬 수 없는, 근본적인 질적 전환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호흡하는 네트워크 파워>에서 밝히듯 그것은 각자가 항상 현재 진행형으로 이 세계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재발견할 수 있는, 개별적이면서도 우주적인 발전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경험의 창이나 거울을 디자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이퍼텍스트 구조는 비선형성(nonlinearity)에 토대를 두고 있어 노드와 노드는 위계적이면서도 분지적인 형태를 취한다. 인쇄된 문자언어는 처음, 중간, 끝이라는 완결된 구조를 갖추지만 인터넷 매체 언어는 분지적(分枝的) 휘발적(揮發的)인 언어 특성을 갖고 있어서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갈무리하기가 쉽다는 측면도 가지고 있으며 공감각(共感覺)적 가독상황(可讀狀況)을 제공한다. 동일 공간에 시각적 언어로서의 문자, 사진, 애니메이션, 동영상과 같은 영상물과 청각적 언어로서의 음향물이 매체합성을 통해 동시에 구현되기 때문에 시청각의 언어감각이 동시에 수행된다. 인쇄매체가 책장을 넘기면서 언어수행을 한다면 인터넷 매체는 컴퓨터 화면의 스크롤 바를 움직이거나 마우스의 클릭을 통한 노드 간 이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책과 같은 종래의 인쇄매체가 시각이라는 단일감각을 바탕으로 상상적 재구성을 통해서 의미확장이 이뤄진다면 인터넷 매체언어는 읽으면서 보고 듣고, 보면서 쓰고 말하는 동시적이고 혼합적인 언어수행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 인해 기독교 문학 독자는 독자로서 수신자의 역할에만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창작에 참여함으로써 발신자(작가)의 위치에 설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퍼텍스트를 응용한 소설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실험에 들어갔고, 한국소설가협회에서는 이미 100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이런 기능에 바탕을 둔 ‘전자책 소설’ 연재를 준비하고 있다. 닫힌 통로의 일방 통행적 소설은 이제 점차 발붙이기가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으며, 머지않아 이런 멀티 미디어의 태풍이 기독교 문학계에도 몰아닥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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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 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이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다니엘 5: 5)
앞에 인용한 성경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처럼 왕이 교만에 빠져 여호와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도 게을리하고 있을 때 일어난 현상을 기록한 내용이다. 왕이 불안하여 소위 박사들과 술객들을 불러 이를 해석토록 하였으나 아무도 그 뜻을 밝히지 못하고 있을 때 다니엘이 이 부분을 해석하는 내용이 같은 장 25 - 28절에 펼쳐진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뜻을 해석하건데 메네는 이미 하나님이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데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이 일로 하여 다니엘은 다리오의 총리가 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사건의 내용이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 어떤 사건과 접하고, 현상을 보며, 또 텔레비전이나 책을 본다. 하지만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지 않으면 설사 그 사물을 대한다 해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 기독교 문학 작가들은 그들의 눈과 생각을 대신해줘야 할 책무를 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문학작품은 ‘인생의 압축 파일’이라고 한다. 인생에 대한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은 영감으로 글을 지으며, 소설가는 “신을 흉내내는 원숭이와 같은 자로서 가장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 자”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조물주가 창조해놓은 이 우주 안에서 소설가는 신을 흉내내어 또다른 소우주(小宇宙)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며,. 때문에 그것은 비록 허구(虛構)라 해도 사실 이상으로 공감을 주며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다.
과학 만능주의, 상업주의, 퇴폐 향락문화의 극성으로 황폐해진 정신 상황, 텔레비전 등 영상매체 세대의 등장으로 감소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독서(讀書)인구의 문제 등 신앙생활과 관계된 우리 시대의 문제점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인생이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체험으로 겪어야 할 신비의 세계”라는 시인 릴케의 말처럼 우리 크리스천은 기계적인 신앙고백에만 매달려 만족하고 살기에는 너무나 벅찬 ‘체험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서구의 신앙도 이성(理性) 중심에서 직관(直觀)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신학자들은 얘기하고 있다.
“신학적 명제를 간추려 놓던 식에서 요즘은 그냥 이야기로 풀어가는 분위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원래 신학이 그처럼 딱딱한 명제로 정리되기 전에는 사실, 신학적인 통찰은 모두 이야기에 담겨 있었습니다. 추론으로서가 아니라 직관으로, (부분의) 분석으로서가 아니라 종합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하나의 커다란 전체이므로 부분의 합(合)보다 크며, 직관에서 나오고, 종합적인 것이니까요”
캘리포니아 에설린 연구소의 슈타인들-라스트가 한 이 말도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야기 형식은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과 가장 가까운 것이다. 더욱 깊고 열린 역동적 신앙, 성숙된 영성(靈性)을 위해서라면 호교(護敎)라고 하는 비교적 단순한 신앙세계에만 머물러 있을 게 아니라 그 시대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바로 꿰뚫어 봄으로써 그 시대 신앙인들에게 안겨줘야 할 예언자적 선지자적 메시지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멀티 미디어 시대, 과학 만능의 시대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도 이 21세기가 마지막일 것 같다는 느낌마저 밀려든다. 발신자가 보내오는 신호를 듣고 거기에 복종하기만 해도 됐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이 지구가 하나의 마을처럼 좁아졌고, 지구상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사람들끼리도 즉시 인터넷망을 통해 수신자와 발신자가 될 수 있는 다양화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있음을 싫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종교적 갈등과 다원주의에 대해서도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할 때이며, 이런 변화가 자칫 혼란을 몰고 오지 않도록 문학의 세계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미리 고민해야 할 때도 지금이라고 보겠다.
한국․부산크리스천문협 세미나 주제 발표
멀티미디어 시대와 기독교 문학
-멀티미디어의 활용을 중심으로
許 成 旭
1. 들어가면서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과학기술문명이라는 대홍수를 경험하고 있다. 이 격변을 통해서 인류의 문명은 ‘시대’라는 ‘지층’ 속에 ‘문화’라는 ‘화석’으로 남기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석유’와 ‘석탄’의 형태로 저장되어 새로운 시대의 연료가 마련되기도 한다. 전 지구적인 문명의 대홍수 속에서 격랑을 극복하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며,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신 대주재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대격변의 한 가지 현상은 정보 전달의 방법과 속도의 급속한 변화라 하겠다. 발표자는 오늘 멀티미디어 시대와 기독교문학의 새로운 정의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시작된 멀티미디어 시대를 살면서 기독교문학이 그 격랑을 향유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 약속된 무지개를 바라보고자 할 뿐이다.
2. 멀티미디어
1) 멀티미디어의 정의
미디어(media)라는 말은 매체라는 말이다. ‘어떤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 사전적 의미이다. 인간 상호간의 지식이나 감정이나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을 뜻한다. 즉, 인간사회에서의 정보전달 수단을 말한다. 지식이나 정보를 상대방에게 알려줌으로써 ‘서로 나눠 갖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미디어란 정보의 반송경로, 정보의 보존매체,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도구,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라는 네 가지 의미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멀티미디어란 문자, 음성, 소리, 그래픽, 사진, 영상 등의 다양한 정보를 통합 처리하여 다양한 입출력 장치를 통하여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시스템과 서비스를 말한다. ‘여럿’이라는 ‘멀티(multi)'와 ’미디어‘의 합성어인 멀티미디어(multimedia)라는 단어는 ‘다중매체‘라 번역된다.
멀티미디어는 크게 offline (예 : CD-ROM) 멀티미디어와 online 멀티미디어로 구분한다. 한편 유럽연합의 Info2000 프로젝트에서는 멀티미디어를 “텍스트와 데이터에서 사운드와 그림에 이르는 audio-visual 자원을 총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으며 이들 다양한 데이터를 하나의 통합시스템에서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는 새로운 세대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서술하고 있으며, 멀티미디어에 대한 실용적 정의로서 아래의 “다양한 재현형태 중 최소한 셋 이상을 조합하여 통합한 재현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IMM-Europe Home Page).
∘ 텍스트 (주석, 캡션, 서브타이틀, 목차/색인/사전/도움말 등)
∘ 데이터 (표, 챠트, 그래프, 통계, 다양한 원시 데이터 등)
∘ 오디오 (말, 음악, 배경음악 및 음향 효과 등)
∘ 그래픽 (전통적 드로잉, 프린트, 지도, 포스터에서 컴퓨터에 의한 이미지까지 모두 포함)
∘ 사진이미지 (네거티브, 슬라이드, 프린트, 디지털 카메라 사진)
∘ 애니메이션 (필름과 비디오에 의해 녹화되거나 컴퓨터에 의해 제작된 애니메이션)
∘ 영상 (아날로그 필름이나 비디오에서 변환된 디지털비디오 또는 완전히 컴퓨터로 제작된 영상)
멀티미디어의 핵심은 컴퓨터를 기반으로 통합된 다양한 미디어 형태의 상호작용이다.
2) 멀티미디어의 특징
멀티미디어는 정보의 디지털화, 통신망의 확충, 대화성, 정보검색을 필요로 한다. 대화성이란, 단말의 화면을 통하여 대화하면서 정보와 주체적으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①디지털화 - 멀티미디어에 사용되는 모든 정보가 디지털 신호로 통일되어지는 것
②영상화 - 문자, 음성, 영상, 기호 등 지각적 이해가 다른 정보 형태들이 TV 스크린을 통하여 영상화된 정보 전달 형태로 변모하는 것
③종합화 - 유선 및 무선 전송수단인 통신망이나 근거리 정보 통신망 등을 종합 통신망으로 통합하는 경향
④쌍방향성 - TV에 컴퓨터 시스템이 도입되어 단방향으로 유통되던 정보전달이 쌍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
⑤비동시화 - 정보 전달자와 수용자가 동시에 참여해야 하는 시간적, 공간적 제한이 극복되는 것 예) 전자 사서함, 전자 게시판
⑥상호작용적 링크 - 학습자가 화면에 제시된 선택사항 중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하면 해당되는 화면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화면들이 융통성있게 서로 연결될 수 있 게 만든 것
3. 멀티미디어 시대와 기독교 문학
1) 기독교 문학
이관희님은 기독교문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 문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무릎 꿇는 <참회의 정신>으로 부터 글을 쓰고 읽는 작업이 시작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참회의 정신이 선행되지 않고 예수를 바로 볼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학은 본질상 <참회의 문학>이다.
기독교 문학이 본질상 참회의 문학인한 그것은 또한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들어 내어 형상화 시키는 <증언과 고발>의 문학적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문학의 고민이 있으니 곧 <참회의 정신>과 <고발의 성격> 사이의 갈등과 조화의 문제가 그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문학적 요소가 어울려서 기독교문학이라는 육체를 만든다. 신의 존재와 세계의 창조, 원죄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성령의 우주적 활동에 대한 믿음, 자유, 사랑, 정의, 평화와 같은 윤리적 가치들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대강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기독교문학이라 함은 문학 내부의 고유한 미학적 형식 안에 기독교적 진리를 함유하고 있는 작품을 이르게 된다.
성경을 다룬 문학, 신앙인이 쓴 문학, 신앙인이 등장하는 문학이 곧 기독교 문학일 수는 없다. 나는 기독교 문학의 정신을 위와 같은 질문들 속에 요약하려 한다. 그것은 복음과 세계, 그리고 자신과 인간과 삶을 이해하려는 자가 끊임없이 되묻는 질문, 곧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얻는 문학적 성과들을 뜻한다. 나는 그것이 바로 기독교 문학을 규정짓는 조건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인간을 획일화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거짓된 모순과 부조리에 온몸으로 버티며, 인간과 삶을 왜곡없이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모든 종류의 회의와 비판과 성찰의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의 호기심을 이해 못하고 무조건적인 규범을 설정해 버림으로써 아이를 가두는 무식한 어머니가 무식하다는 것을 날카롭게 고발하며, 절대적인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어떻게 획일화하고 파괴할 수 있는지를 비판하며, 사회와 개인의 허위의식과 자기 기만에 대해 반성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어떻게 행복하게 그리고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탐구하면서, 또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그것은 생각하고 자문하게 만든다. 그 되묻게 하는 힘은 역동적인 힘이다. 그 힘이 바로 기독교 문학을 이루는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2) 멀티미디어의 활용
맥루한은 미디어는 바로 메시지(The medium is the message)라고 주장한다. 이 명제는 맥루한 이론의 근본에 일관되어 있으며 특히 인류문명 역사의 발전과정을 여기에 근거해서 설명한다.“미디어가 곧 내용”이라는 그의 파격적인 주장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이지 매체 그 자체는 아니다”라고 하는 사회 통념을 깨뜨리기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진실로 말하고 싶은 것은 매스 미디어의 내용이란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의 테크놀로지와 분리해서 생각될 수 없다는 점이며 사실상 사람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그 매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데 있다.
맥루한은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종류에 따라 인류역사를 다음의 네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첫 단계는 구두 커뮤니케이션에만 의존했던 원시부족사회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근접하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구전으로 의사소통을 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시각, 청각, 후각 등 오감을 동시에 사용하는 복수감각형이었다. 둘째 단계는 약2천년 전의 하자나 알파벳의 잘생 이후부터 시작된 문자시대 또는 필사본 시대이다. 이 때부터 차츰 사람들은 시각형의 인간으로 형성되었지만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여전히 앞 시대와 마찬가지로 복수감각형의 인간이 지배적이었다. 셋째 단계는 15세기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의 발명 이후부터 전자 미디어가 등장하기까지의 약 4세기 동안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인쇄술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시각에 주로 의존하는 부분감각형의 인간이 되었다. 넷째 단계는 20세기의 전자 미디어 시대이다. 전기미디어의 발달로 세계는 점차 하나의 지구촌으로 발전하게 되어 인류를 과거의 구전문화가 우세한 시대로 복귀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일종의 재 부족화 현상이 일어나 사람들은 시각적 인간형에서 복수감각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
맥루한은 인류의 역사란 인간의 기능과 역할을 확대하기 위한 도구나 기술, 즉 매체의 발달사라고 말한다. 사람은 감각을 확장하기 위해 미디어를 창조해 왔고, 그런 미디어는 인간의 감각과 더불어 작용하면서 상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곧 새로운 환경이 나타나면 사람의 감각에도 새로운 균형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맥루한은 이것을 감각비율(sense ratios)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책을 보는 사람은 시각 비율이 높아지고 전화를 많이 사용하는 교환수는 청각 비율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으로 등장하면서, 동시에 인간자체를 변화시킨다. 즉 인간은 미디어의 원인이자 동시에 미디어의 효과의 대상이다. 수면에 비친 자신의 영상이 마치 자신의 확장 또는 복제이듯이, 미디어는 인간의 욕구의 환경에 나타나는 인간 자신의 확장이다. 결국 미디어의 의미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확히 이해될 수 있으며 메시지는 특정 미디어와 인간이 만남으로써 비로소 발생한다. 이 때 인간은 미디어로 완전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이 변화 자체를 맥루한은 메시지라고 본다.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미디어는 메시지일 수밖에 없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그의 주장에 공감하면서 맥루한 이론을 기독교문학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작품자체가 매체가 된다. 작품은 작가가 노래하고 있는 事象에 대한 정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독자들에게 작가가 멀티미디어적으로 작품을 전달하려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 교회에 따라선 예배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액정을 활용하여 성지 현장 사진이나 동영상․ 성경구절․ 자료화면을 보여줘서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꼭 같이 생각하면 되겠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독자들에게 작품을 오감을 통하여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를 하나 든다. 20년 전 이었다. 출근 길 버스 속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돌아보니 선배였다. 순간 고향 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때 얻은 시가 한 편 있다.
이게 얼마 만인가 어깨 툭 치는 손길
돌아보면 물씬 풍기는 풀향기 솔내음
고향 산
봉우리에는
흰 구름이 감돌더라.
이것을 독자들에게 오감을 통하여 전달할 수 있다면 그 당시의 내 마음을 제대로 보여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품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면 작가와 독자의 대화가 활발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무대를 독자가 실제 또는 가상 공간을 통하여 체험할 수 있으면 작가의 감성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멀티미디어라는 매체를 통하여 작품을 전달하지만 작품이 매체가 되고 독자가 매체가 되어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기독교문학은 표면적이지 않더라도 은근하게 그 근저에 흐르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있다. 작가의 삶 속에서 용해되고 우러난 그 가치관이 독자에게 전달되자면 문학 그 자체가 매체라야 되겠다는 뜻이다. 설교가 회중에게 영향을 주어 그 삶이 바뀌면 새로운 전도자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설교의 청중이 이제는 그 메시지의 매체이다. 마찬가지로 독자가 매체가 된다. 기독교 문학이 그것을 공개적으로 주장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크리스천 문인들의 문학 행위에는 작가 자신도 모르게 독자를 메체로 만들고자 하는 소망이 잠재되어 있다고 하겠다. 순수문학이라 해도 좋고 목적 문학이라고 해도 좋다.
이미 문학의 생산자(작가)가 일방적으로 작품을 창작하여 책이나 신문, 잡지, TV 등을 통해 발표하면 소비자(독자)가 일방적으로 공급받고 그 문학의 향기를 맛보는 시대는 지나갔다. 인터넷 상에서 작품이 생산되고 쌍방향으로 주고받으며 하나의 작품이 완성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멀티미디어가 문학의 새로운 전달수단으로 등장한다면 몇 가지 상황도 변화할 것이다.
동의를 얻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변화의 하나는 창작행위의 변화이다. 즉, 작가 일방적 창작에서, 릴레이 작품,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작품도 가능해 질 것이다. 또 하나는 창작품 판매 행위의 개선이다. 그 동안의 서점 망에서 인터넷 몰을 통한 전자 상거래와 e-book 제도를 활용할 수도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창작물 품평 활동이다. 독자로 하여금 서평 또는 작품평을 달게 함으로써 작가와 독자의 교류의 장을 넓혀갈 수 있다. 또 하나는 사이버문학강좌 개설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일을 통하여 시간․ 거리․ 생활 여건상 문학수업을 받기 어려운 분들에게 공부할 기회 제공함으로써 기독교문학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3) 활용의 몇 가지 예들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검색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 문학 사이트로 멀티미디어가 이렇게 활용하고 되고 있다라고 다양하게 소개할 수 없다. 발표자가 살펴 본 사이트 가운데 현재 사용되지 않는 것도, 뜨지 않는 사이트도 있었다. 또한 문학전문사이트가 아니라 선교사이트에 홈지기가 특정 시인과 그 작품을 선호해서 올려놓은 경우도 있었다.
크리스천 문우간의 친교와 문학적 격려 또는 기독교문학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멀티미디어가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으면 좋겠다. 문인들은 각자 자신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신의 삶과 신앙, 작품, 관심분야의 생각들을 홈페이지에 탑재해 둔다. 그리고 문협이나 크리스천문학사의 홈페이지에선 모든 문우들의 사이트를 연결해 둔다. 그러면 독자들이 어느 때라도 방문하여 기독교문학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표자가 꿈꾸는 사이트는 아직 발견하기 쉽지 않다. 오히려 일간신문사이트를 방문하면 기사와 기사에 대한 100자 평쓰기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아래에 발표자가 방문한 몇 가지만 사이트를 적어 둔다.
바다와 섬-신지영시인 http://jyshin.netian.com/
시인김성구목사의 문학마을 http://godislove.net/ymc
양수창시인 http://www.poem21.pe.kr
오형칠의 문학세계 http://user.chollian.net/ ~zpdeb137
한국문인협회 http://www.munin.or.kr/
멀티포엠
아직 이 사이트들도 전문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계속될 때 멀티미디어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적 영역이 확대되고 삶에서 기독교 문인이 꿈꾸는 세상이 구현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육하신 뜻을 발견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이 땅에 오신 뜻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날이 단축될 수 있을 것이다.
4. 나오면서
멀티미디어 시대라고 할 때 offline보다는 online 시스템을 우리는 재빨리 연상한다. 그것은 컴퓨터와 연결되어 생각하는 멀티미디어는 인터넷 활용에서 그 효과를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누구나 인터넷상에서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여 필요로 하는 자료를 찾고, 문서를 보낼 줄 안다. 김치를 사야겠다고 생각하면 컴퓨터를 열어 본다. 동창이나 은사를 만나고 싶으면 아이러브스쿨 사이트에 들어가면 된다.
지금 대부분의 기독교 사이트들은 기독교 정보를 공유하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되어 10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도 이 땅의 문화가 이교적이다. 이 땅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시대를 여는 지름길이다. 그 책임이 기독교 문화인들에게 있다면, 그 한 축을 크리스천 문인들이 담당해야 하며, 그 한 방편이 멀티미디어 활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멀티미디어 시대의 기독교문학은 가상공간에서도 그 문학의 향기를 풍겨야 한다고 발표자는 믿는다.
정보의 바다 속에서 대격변적 격랑을 만나도 기독교문학 사이트가 방주처럼 있어 독자는 외롭지 않다. 작가나 독자가 그 방주에 승선하여 두루 방문하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으면 우리의 문학은 그냥 화석으로만 남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주승중(2002).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론과 설교. 교육교회 2002년 7/8월호
한국기술진흥재단. 멀티미디어와 정보화사회.
http://211.40.179.13/book_file/ke28/ke028-010.htm
이승우. 기독교문학을 말하는 이유. http://lw.kehc.org/files/199910/html/lf03.html
이관희 http://www.supilmunhak.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