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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元 王 朝 世 家
元(원) AD, 1271∼AD, 1368 위치 몽골 중국 種族(종족): 몽골족 성: 보르지긴
代數 | 在位期間 | 位 | 諱 | 關係 | 首都 | 現地名 |
제 1대 | AD, 1260∼AD, 1294 | 世祖(세조) | 쿠빌라이 | 툴루이의 4남 | 大都(대도) | 北京(북경) |
제 2대 | AD, 1294∼AD, 1307 | 成宗(성종) | 테무르 | 세조의 손자 | ||
제 3대 | AD, 1308∼AD, 1311 | 武宗(무종) | 카이샨 | 세조의 증손자 | ||
제 4대 | AD, 1311∼AD, 1320 | 仁宗(인종) | 아유르바르바다 | 무종의 아우 | ||
제 5대 | AD, 1320∼AD, 1323 | 英宗(영종) | 시다발리 | 인종의 장남 | ||
제 6대 | AD, 1323∼AD, 1328 | 晉宗(진종) | 이순테무르 | 세조의 증손자 | ||
제 7대 | AD, 1328 | 廢帝(폐제) | 아슈케베 | 진종의 장남 | ||
제 8대 | AD, 1328∼AD, 1329 | 文宗(문종) | 투그테무르 | 무종의 차남 | ||
제 9대 | AD, 1329 | 明宗(명종) | 쿠살라 | 무종의 장남 | ||
복위 | AD, 1329∼AD, 1332 | 文宗(문종) | 투그테무르 | 무종의 차남 | ||
제 10대 | AD, 1332∼AD, 1333 | 寧宗(영종) | 린칠반 | 명종의 차남 | ||
제 11대 | AD, 1333∼AD, 1368 | 惠宗(혜종) | 토콘테무르 | 명종의 장남 |
몽골 제국의 제 5대 대칸 쿠빌라이 칸이 국명을 중국식인 대원으로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제 1대 황제(AD, 1215∼AD, 1294)
그는 할아버지 칭키즈 칸이 한창 몽골군을 호령하며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던 AD, 1215년에 칭키즈 칸의 막내아 들인 툴루이와 소르각타니 베키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AD, 1251년 형 몽케가 제 4대 대칸의 자리에 오르자, 중국 방면 대총독에 올라 내몽골 지역에 자리 잡았다. 몽케는 오고타이가 계획했던 남송과 폐르시아의 정벌을 결심하고, 쿠빌라이에게는 중국 전선을, 그리고 다른 형제인 훌라구 에게는 폐르시아 전선을 맡겼다. 쿠빌라이가 북중국을 잘 다스려 화남 지역은 농업 생산량이 늘고 서민은 삶의 질이 올라갔다. 이러한 성공으로 북중국의 장수들과 관리들에게 지지를 받았고, 이들의 지지는 이후 원 제국을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AD, 1253년 쿠빌라이는 몽케 칸의 명령을 받고 운남 지방의 大理國(대리국, AD, 937∼AD, 1254)을 정벌하여 남송 의 측면을 돌파 하고자 하였다. 쿠빌라이는 먼저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단씨 왕조는 사자를 죽이고 항 전하였다. 쿠빌라이는 1254년 대리국을 멸망시켰는데, 대리국에서 몽골의 사신을 죽였음에도 몽골 제국의 전통과는 달리 대량학살을 하지 않았다.
몽케와 보수 세력의 견제는 계속되어, 1258년 남송 원정 초반에는 원정군에서 제외되는 대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좌 익군을 이끌고 있던 태무게 웃키친 타가차르가 약탈 문제로 몽케와 갈등을 빚다가 그냥 자기 영지로 되돌아가자, 결 국 그 자리에 임명되어 원정에 참여했다. 몽케는 1258년 3월에 성도를 점령하며 사천 지방 일부를 점령했으나 1년 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전진을 하지 못했고, 끝내 AD, 1259년 8월 쿠빌라이가 전장에 도착하기 이전에 사망했다.
쿠빌라이는 막내 동생 아리크부카가 군대를 소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 초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오 기 전에 아리크부카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몽골 귀족들 대부분에게 지지받아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몽골족 중에 쿠빌라이와 그의 다른 형제 훌라구(일 칸국의 칸)만이 아리크부카의 카칸 즉위를 반대하는 형세였는데 북중국의 장군과 만주의 과거 금나라 출신의 여진족 장군들은 쿠빌라이를 지지 하고 나섰다. AD, 1260년 쿠빌라이 는 자신의 본거지인 내몽골의 개평부로 돌아가 자신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카칸을 칭했다.
아리크부카는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카칸으로 추대받았을뿐더러 본래 몽골의 관습에서는 막내 아들이 세습했 기에(말자상속) 정통성에서 앞섰다. 쿠빌라이는 중국 화북이라는 강력한 배후 기지가 있었지만, 화북 이외의 점령지 의 몽골군 사령관들과 칸들이 아리카부카에게 붙는 바람에 전체적인 전력에서는 약세였다. 하지만 각 칸국들이 자 신들끼리 싸우느라 아리크부카에게 충분히 지원을 하지 못했고, 결국 국지적인 전력에서 쿠빌라이 쪽이 우세를 점 하게 된다.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 양 군세가 본격적으로 붙었을 때에도 쿠빌라이군이 승리하였으나 아리카 부카는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수도인 카라코룸의 물자를 쿠빌라이가 끊는 데 성공하면서 판도가 쿠빌라이 쪽으 로 기울었다.
아리카 부카의 진영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리크 부카가 동맹국인 차카타이 칸국의 인물들을 살해하는 등 가혹한 처신을 일삼으면서 몽골인들의 인심까지 떠났다. 결국 AD, 1264년 8월 아리크부카는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를 지지했던 인물들은 죽였지만 아리크부카는 용서했다. 이후 쿠빌라이는 새로 쿠릴타이를 열고 카칸에 올랐다. 1271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大都(대도, 금 베이징)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大元(대원)으로 정 했다. 쿠빌라이는 79세에 죽었다.
제 2대 황제(AD, 1265∼AD, 1307)
몽골 제국의 제 6대 카간이자 원나라의 제 2대 황제, 묘호는 성종이며 시호는 欽明光孝皇帝(흠명광효황제)이며 휘는 테무르이다.
쿠빌라이 칸의 차남인 황태자 친킴의 3남이자, 쿠빌라이 칸의 막내 딸이자 이복 여동생인 제국대장공주가 고려 충선 왕의 어머니이므로 충렬왕은 원 성종의 고모부, 충선왕은 원 성종의 사촌 동생이다.
아버지 친킴이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 쿠빌라이에 의해 황태손으로 책봉되었다가 황제로 즉 위했다. 쿠빌라이 사후 아리크부카의 아들 요부르크와 몽케의 손자 울루스부카가 우구데이 칸국을 이탈해서 카이두 칸(우구데이 칸국의 3대 칸)의 세력이 약하가 되긴 했으나 지속적으로 위협해왔다.
특히 AD 1301년, 카이두가 아리크브카의 차남 멜리크테무르와 차카타이 칸국의 두아 칸과 함께 대규모 원정을 감행 에 위기를 맞았으나 성종의 조카 카이산(훗날의 무종)의 군대가 막았고, 결국 카이두는 이때 부상을 당해 죽고 말았 다.
그리고 AD 1306년엔 차카타이 칸국의 두아 칸과 함께 우구데이 칸국을 정복하였다. 카이두의 난 제압 외에는 그럭 저럭 태평한 치세를 누렸지만 그가 후계자 없이 죽자 원 황실은 후계자를 둘러싼 분쟁에 윕싸였고, 이후 원나라는 불과 25년 동안 9명의 황제가 연달아 즉위하는 혼란속으로 빠지게 된다.
제국대장공주의 원나라 내에서의 공주 책봉 문제를 가지고 충렬왕, 원성공주와 다툼이 있었다. 결혼 당시만 하더라 도 그냥 공주 또는 크툴룩켈미쉬로만 표기될 뿐, 고려에서 충렬왕이 독자적으로 공주의 거처 원성전에서 까온 원성 공주로 책봉하기 전까지 정식 봉호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주와 같은 예우를 받기는 했다. 성종은 이를 꺼렸으 나 결국 세월이 지나 안평공주로 책봉됬고, 황제가 바꿔면서 쿠빌라이 칸의 딸이라는 이유로 제국대장공주로 높여지 게 되었다.
제 3대 무종(AD, 1281∼AD, 1311
몽골 제국의 제 7대 카안(또는 대칸)이자 원나라의 제 3대 황제. 묘호는 武宗(무종)이며, 시호는 仁惠宣孝帝(인혜선효 황제)고, 휘는 카이산이다. 세조 쿠빌라이 칸의 차남인 칭킴의 차남 다르마발라의 차남이었다. 즉 쿠빌라이 칸 한테는 증손자였다. 고려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와는 사촌이었다. 또한 충숙왕비 조국장공주의 숙부이고, 공민왕비 노국대장 공주의 작은 할아버지였다.
즉위 전에는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 칸과의 격렬한 전쟁에서 활약했는데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를 누비며 활약한 젊은 무인이었으며, 증조부인 쿠빌라이 칸을 애먹인 카이두를 완전히 몰락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AD 1307년, 원 성종 테무르 칸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황위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이 정쟁의 중심에는 오랫동 안 외척으로서 영양력을 발휘한 옹기라트 부족이 있었다.
성종 테무르 칸의 황후 불루간은 옹기라트 부족과 이 부족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테무르 칸의 종 제인 안서왕 아난다를 차기 황제로 삼았다. 하지만 일찍이 불루간 황후의 경계를 사 모친 다기와 함께 유배됐던 성종 의 조카이자 무종 카이산의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 려워한 중신들도 이에 동참했다. 결국 쿠데타 세력에 의해 불루간 황후와 아난다는 숙청되었다. 다기는 동생 아유르 바르다와가 제위를 차지 하길 희망했지만, 서북방 전선으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던 카이샨에게 제위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대신 무종은 차기 제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했다. 또한 아유르바르다와는 자신의 다음 제위 는 무종의 아들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했지만, 이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 무렵 잠시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에 있었던 고려의 충선왕도 카이산을 지지함으로써 덕분에 무종이 즉위했을 때 고려로 돌아가 왕위에 복위했을 뿐만 아니라 2자왕인 심야와으로까지 책봉되었고, 후에 인종의 대에 이르러 1자왕인 심왕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은 황자 시절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 형제와 친했다고 한다.
차카타이 칸국은 두아 칸이 AD 1307년에, 사망한 뒤에 내란에 휩싸였는데, 이걸 기회라고 본 오고타이 칸국의 차파 르는 AD 131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알말리크 근처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크게 패배해, 차파르는 자신의 세력 을 이끌고 원나라로 망명했다. 이로서 오고타이 칸국의 세력은 완전히 원나라에 흡수되었다.
무종은 즉위한지 4년 만에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즉위전의 약속되로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즉위했다. 아유르바 르와다가 자신의 약속은 지키지 않는 바람에 시간이 꽤 지나며 숱한 분쟁을 겪은 뒤에야 무종의 차남이 제 8대 황제 로, 장남이 제9대 황제로 즉위했다.
제 4대 인종(AD, 1285∼AD, 1320)
몽골 제국의 제 8대 카안이자, 원나라의 제 4대 황제. 묘호는 仁宗(인종), 시호는 聖文欽孝皇帝(성문흠효황제), 휘는 아유르바르바다 이다.
세조 쿠빌라이 칸의 차남 칭김의 차남인 다르마발라의 3남으로 태어났다. 고려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 원 진종과는 사촌이다. 또한 고려 충숙왕비 조국장공주의 숙부이며,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작은할아버지였다.
형 무종이 사망했을 때 무종이 즉위 전에 약속했던대로 무종의 아들 대신 즉위했다. 그의 통치기에는 어머니가 다기 태후의 영향력이 커서, 대놓고 황제보다 황태후의 권위가 더 높다는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인종은 무종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무종의 장남 코실라를 제위 계승에서 배제 하자 코실라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여 차카타이 울루스로 망명했다. 인종은 아들 시데발라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안하기 위해 다기 태후의 일파였던 권신 테무데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아들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덕분에 인종 사 망 후 별다른 저항없이 제위에 오를 수있었다. 혼란스러운 중앙 정치와 달리 다행히 인종의 재위 기간 내내 원나라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제 5대 영종(AD, 1303∼AD, 1323)
몽골 제국의 제 9대 카안이자, 원나라의제 5대 황제이며. 묘호는 영종이고 시호는 睿聖文孝皇帝(예성문효황제)이고 , 휘는 시디발라 인종이며 아유르바르바다의 아들이다.
시데발라는 AD 1303년에, 인종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이는 적장자가 제위를 계승하는 중국식 제위 계승법에 따라 황태자에 책봉되고 정식으로 황제로 즉위한 몽골 제국에서 드문 사례였다. 인종은 형 무종의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주 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에 책봉했다.
무종과 인종 사이의 약속 때문에 인종의 아들임에도 정통성이 부족했다. 따라서 인종은 아들을 위해 어머니와 다기가 총애하던 권신 테무테르를 적극적으로 밀어줘 아들의 승계를 도왔다. 인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부터 다기의 권력은 상 당했기에 영종 즉위 후에는 다기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그러나 영종은 태황태후 다기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 았고, 다기의 세력은 영종의 폐립을 모의했으나 적발되어 관련 자들은 숙청되고 다기의 정치적 영향력 역시 소멸했 다. 한편 테무테르는 폐립 모의에 참가하지 않아 그의 권력은 여전했다.
영종은 테무테르를 견제하기 위해 무칼리의 후손 바이주를 중용했다. 영종은 테무데르를 점차 정치적으로 소외시키면 서도 그의 일파로 분류되는 테시를 총애했다. AD 1322년, 다기 황태후와 테무테를가 모두 사망하자 영종은 본격적으 로 친정 체제를 구축했고, 바이주는 영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테무텔 세력의 비리를 파헤쳐 숙청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테시는 AD 1323년, 영종의 당백부 이순테무르 일파와 모의해 영종을 살해하는 남파의 변을 일으켰다. 영종 사후 이순테무르가 즉위한다.
제 6대 진종(AD, 1293∼AD, 1328)
몽골 제국의 제 10대 카간이자 원나라의 제 6대 황재며, 시호는 欽仁大孝皇帝(흠인대효황제)고 휘는 이순테무르 이 다.
쿠빌라이 칸의 증손자다. 침킨 태자의 장남인 카말라(현종)의 아들이며, 충선왕의 아내 계국대장공주는 이사람의 누나 이며, 원 무종 카이산과 원 인종 아유르바르바다는 그의 사촌이다.
5촌 조카가 되는 영종 사디발다가 독살 당한 후에, 반란군에 의해서 황제로 추대되어 즉위했다. 황제로 즉위한 후에 그가 한 일 중엔 큰 업적도 실책도 없는 편이다.
기근과 천재지변으로 민심이 동요하고, 사회적 모순이 점차 심화되어간 시기가 바로 태정제 시기였다. 재위 기간 도 중 하남행성의 사주 백성인 조추시와 곽보살이“ 미륵불이 마땅히 천하를 가질 것이다” 라는 소문을 퍼뜨리자, 조정에 서 이들을 체포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하남 지역은 황하의 잦은 범람으로 원나라 조정에 대한 불만이 가장 컸는 데, 조추시와 곽보살이 미륵불 요인 사건은 하남의 불온한 민심을 더욱 반영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원나라 말엽 홍건적 나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백련교에 영향을 주었다.
이순테무르는 묘호를 진종으로 받았지만, 재위 기간에 사용한 연호 중 하나인 태정에서 따온 태정제로 불린다. 이후 에 그의 아들 라기바호가 폐위될 때 그의 묘호와 시호도 같이 추탈되었기 때문이다.
제 7대 폐제, 천순제(AD, 1320∼AD, 1328 ?)
몽골 제국의 제 11대 칸이자 원나라의 제 7대 황제, 묘호를 받지 못하고 시호는 덕효황제며 휘는 아슈케베다. 진종의 장남이나 폐위가 되어서 묘호를 못받았다. 그래서 연호에서 따온 천순제로 주로 불린다.
AD 1328년 9월, 上都(상도)에서 좌승상 다울라트 샤에 의해 아슈케베는 칸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2개월 후에 엘테무 르와 투구테무르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 때 패배해서 폐위되었다. 8세의 어린애 였으므로 실권을 휘두를 수는 없었고, 폐위 이후의 기록은 없으나 폐위 때에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제 8대 문종(AD, 1304∼AD, 1332)
몽골 제국의 제 12대 카간이자 원나라의 제 8대 황제, 묘호는 문종이며 시호는 聖明元孝皇帝(성명원효황제)다. 원 무 종 카이산의 차남으로 휘는 투그테무르다.
투그테무르는 천순제를 폐위시키고 원나라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복형 쿠살라가 대군을 이끌고 수도 카라코룸으로 왔고, 투그테무르는 항복하고서 형에게 양위했다. 그러나 원 명종 쿠살라가 얼마 후 돌연사해 복위되었 다.
복위한 지 3년 만에 사망, 황후 부다시리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3명이나 있었지만, 유언으로 형 원종 쿠살라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라는 말을 남겨 이후 조카인 영종 란칠반과 원 혜종 토큰테무르가 즉위했다.
원나라에서 가장 학문을 사랑한 군주다. 그의 연간인 AD 1331년에 대법전 “皇朝經世大典(황조경세대전)“을 남기니 이것이 훗날 대명률, 영락대전의 바탕이 되는 법전이다. 기존의 당나라로부터 내려오던 율법에서 빠진 육부의 형부 와 병부를 확고하게 규정했기 때문에 이는 주자의 주례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이다. 다만 이 경세대전은 오늘날 전 하지는 않는다.
제 9대 명종(AD, 1300∼AD, 1329)
몽골 제국의 제 13대 카간이자 원나라의 제 9대 황제며 묘호는 명종이며, 시호는 翼獻景孝皇帝(익헌경효황제)고 휘는 쿠살라다. 원 무종 카이산의 장남으로, 문종 투그테무르의 이복형이다. 차남 영종 린칠반과 장남 원 혜종 토큰테무르 의 아버지다.
천순제가 즉위한 직후에 투그테무르와 그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쿠살라는 수도 카라코룸에서 멀리 떨어진 중 앙아시아에 있었다. 투그테무르가 승리해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쿠살라는 많은 수 의 군사들을 모아 카라코 룸으로 향한다. 이 소식을 들은 투그테무르는 형에게 양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사하였고. 투그테무르가 복위했다. 이에 대해 투그테무르와 엘테무르가 명종을 독살한 거라는 가설이 있다. 투그테무르 사후에 차남 린칠반이 즉위했다.
제 10대 영종(AD, 1326∼AD, 1332)
몽골 제국의 제 14대 카간이자 원의 제 10대 황제며 묘호는 영종이고 시호는 沖聖嗣孝皇帝(충성사효황 제)며, 휘는 린칠반이고. 원명종 쿠살라의 차남이다.
문종 투그테무르가 형의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즉위했다고 한다. 당시 6세이다. 그러나 린칠반은 황제로 즉위한 뒤에 사망해 그의 형 혜종 토큰테무르가 그 뒤를 잇는다.
제 11대 혜종(AD, 1320∼AD, 1370)
몽골 제국의 제 15대 카간이자, 원나라의 제 11대 황제며 묘호는 혜종이고 시호는 宣仁普孝皇帝(선인보효황제), 혹 은 順皇帝(순황제)다. 휘는 토큰테무르며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명나라에 의해 몽골 고원으로 쫓겨가 세로 개창 한 북원의 초대 황제이다. 또한 기황후의 남편이다.
원 혜종 토큰 테무르는 명종 쿠살라의 장남이었므며, 원래라면 동생 린칠반이 아니라 그가 숙부인 문종 투그테무르 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으나, 그의 어머니의 가문이 명문가가 아니라는 것과 당시 토큰테무르가 문종을 독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기 때문에 엘테무르가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때문에 황제에 오르기전에는 고려의 대청도와 중국 남쪽 광서성 지역 등을 오가며 사실상 추방당한 삶을 살았다. 이런 과거 때문인지 나라가 망할 경우에는 탐나 라로 퇼 계획도 세웠었다고.
영종 린칠반의 사후 즉위는 했지만 엘 테무르가 죽을 때까지 정식 즉위는 하지 못했으며, 엘 테무르가 사망한 뒤로 도 내부 정쟁 때문에 실제로 실권을 갖고 있던 기간은 길지 않는 편이었다고 한다. 이 영향 때문인지 야사에선 토큰 테무르의 어머니가 송공제의 첩이었다가 후에 명종 쿠살라의 후비가 된 정유휘성황후 카를룩씨이고, 친아버지는 송 공제라고 적여 있다고 한다. AD 1336년 6월, 원순제는 선대 황제들처럼 서방에 사절을 보냈다. 교황 베네딕토 12세 는 그 답례로 32명의 사절단을 대도로 파견하였다.
고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충혜왕을 귀양보낼 때” 그대의 죄는 너무 커 그대의 피를 천하의 개들에게 줘도 부족할지 경이나, 짐은 사람 죽이기를 즐기지 않으므로 귀양을 보낸다“ 참고로 몽골 문화에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엄청난 행위로 취급받았다.
AD 1364년, 베이르테무르는 다통에서 대도로 진군하여 칸 휘하의 중앙정부를 장악하였다. 기황후와의 사이에서 태 어난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라는 타이위안으로 달아나 코케테무르의 지지를 구하였다. AD 1365년 황태자는 코케테무 르와 함께 베이르테무르를 공격했는데, 베이르테무르는 부하에게 배반을 당한뒤, 코케테무르에게 사살되었다.
그러나 AD 1368년 세력을 키워 명나라 건국을 선포한 주원장이 군대를 이끌고 화북으로 진격해온 끝에 수도 대도 를 무너뜨리자 혜종을 비롯한 원 세력은 응창부로 쫓겨나면서 북원으로 전락했고, 2년 후인 AD 1370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아유시리다라가 황위를 물려받았다.
사료 출처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