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 4대 교구장(第四大敎區長) 베르뇌(Berneux) 주교(主敎)의 입국
① 선교사(宣敎師)들은 자신들의 수가 부족한 것을 보충(補充)하기 위해, 동분서주 (東奔西走)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열성(熱誠)이 지극하여도, 인간의 힘으로는 한계(限界)가 있는 것이었다. 여러해 전부터 몹시 쇠약(衰弱)해진 다블뤼(Daveluy) 신부의 건강(健康)은 매우 불안한 것이었고, 매스트르(Maistre) 신부는 비록 매우 튼튼한 체력을 타고 나기는 했어도, 역시 무거운 짐을 지고서 기진맥진(氣盡脈盡)했으며,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 자신도, 비록 이 나라의 기후(氣候)외 음식에 익숙하지만, 그 역시 일에 찍어 눌려 있었다.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한 해에 대부분의 신자들을 찾아가, 4,500여명의 신자들로부터 고해(告解)를 들어야 했다. 그러므로 선교사(宣敎師)들은, 그들 의 양떼를 불쌍히 여기시어 원군(援軍)을 보내주시기를 끊임없이 하느님께 구하 였다. 이 기도(祈禱)들이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1855년에 교황청(敎皇廳)이 조선에 목자(牧者) 한 분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감사(感謝)의 기도를 드렸으며, 또 1856년 초에 그들의 새 교구장(敎區 長)과, 그분을 모시고 온 두 젊은 선교사(宣敎師)들을 얼마만한 기쁨으로 맞이 했는지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앵베르(Imbert) 주교와 페레올(Ferreol) 주교 의 영광스러운 유산(遺産)을 물려받으러 오는 그 주교(主敎)는 갑사(Capsa) 명의의 베르뇌(Berneux) 주교(主敎)였다. 사도직(使徒職)을 통킹의 감옥(監獄)에서 시작하여, 만주(滿洲)의 달단(韃단)인들에게 가서 그것을 계속하였고, 마침내 조 선에서 10개성상(星霜)에 걸친 활동과 순교(殉敎)로 그것을 완성(完成)한, 이 위대(偉大)하고 거룩한 선교사(宣敎師)의 생애(生涯)를, 꽤 길고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을 독자(讀者)는 용서하기 바란다(베르뇌(Berneux) 주교(主敎)의 상세한 전기(傳 記)를 쓰기 위해 달레(Dallet) 신부는 베르뇌(Berneux) 주교(主敎)가 그의 가족, 친구, 동료신부, 파리본부에 보낸 서한을 위해서, 그를 잘 아는 친구, 선배, 선생, 동창 및 동 료 신부들이 남긴 약전(略傳)들을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② 시메옹 ․ 프랑스와 베르뇌(Simeon-Francois Berneux)는 르망(Le Mans) 교구 의 샤또될루아(Chateau-du-Loir) 시에서 1814년 5월 14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 시메옹 ․ 베르뇌(Simeon Berneux)와 엘렌 풋세(Hellen Fosse)는 노동일을 해서 근근이 살아갔으나, 훌륭한 신자들이었고, 아들의 신심(信心)과 하느님을 경외(敬畏)하도록 정성(精誠)을 다하여 키웠다.
1824년에 본당 보좌신부(補佐神父) 중 한 사람이, 신부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 고자 하는 열렬(熱烈)한 이 소년의 훌륭한 마음가짐에 감동(感動)하여, 라틴어를 조금 가르친 다음, 샤또될루아(Chateau-du-Loir)의중 학교에 입학을 시켰는데, 소년은 오래지 않아 그곳에서 학업성적과 품행(品行)이 뛰어났다.
그는 중학교 3학년을 르망(Le Mans) 중학교에 가서 수학(修學)하고, 중등교육 과정을 프레씨네(Precigne)의 소신학교(小神學校)에서 마쳤다. 그의 학우(學友) 였던 르망(Le Mans) 교구장(敎區長) 피용(Fillon) 주교는 나중에 이런 감격적인 증언(證言)을 했었다.
내가 여기서 하느님의 종의 생애를 들려주어 한다면 … 귀중하고 오랜 친교의 추억을 모아서, 내가 알 수 있었던 사실대로의 그의 모습을 전해주는 것이 기 쁜 일일 것입니다. 프레씨네(Precigne)의 소신학교(小神學校)에서는 신심(信 心)과 규칙엄수(規則嚴修)와 학업에 대한 열심으로, 덕이 있는 학생들의 모범 (模範)이 되었었고, 쌩 뱅쌍(Saint-Vincent)서는 성직자(聖職者)무리의 장식처 럼 되어, 선생들의 평가와 동창(同窓)들의 애정에서 다같이 높은 위치에 있었 으니, 그가 이룩한 일을 전해 듣고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③ 베르뇌(Berneux) 신부는 1831년에 대신학교(大神學校)에 입학했다. 그러나 성직(聖職)에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또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까닭에 건강을 해쳐서, 약간의 휴양(休養)을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가정교사 로 르망(Le Mans) 교구 주교(主敎)의 사촌인 까롱(Caron)씨의 집에 갔었는바, 거기에서는 6개월밖에 머무르지 않았고, 다음에는 라부이에리(La Bauillerie)씨 의 집으로 가서, 훨씬 오랫동안 머물렀었다.
그의 생애(生涯)에서 이 시기에 대하여는 베르뇌(Berneux) 주교가 가르친 아 동의 형인 까르깟손(Carcassone) 주교님의 말을 인용하겠다.
인간의 품성이 나타나는 것은 특히 가정에서인바, 당신네들의 거룩한 선교사는
우리 가정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어질고 신심있고, 조용하면서도 명랑하고, 정 신과 마음의 사랑스러운 장점들을 지니고, 어린아이에게 공부와 기도에 취미를 붙이게 하는데 소용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의 학생에게 보낸 편지들은, 우리 집의 보잘것없는 기록들을 장식해줍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빛나는 왕관(王冠)이 그의 머리에 씌워진 오늘, 이 편지들은 훌륭하고 기쁜 기 념품만이 아니고, 하나의 영광(榮光)입니다. 그때에 나는 그를 직접 알았습니 다.내가 기억하기로는 훤칠한 키에 등이 약간 굽었고, 말할 수 없이 어진 얼굴 을 하고 있었습니다.
④ 베르뇌(Berneux) 씨는 신학공부를 마치기 위해, 1834년 10월에 르망(Le Mans) 대신학교(大神學校)에 다시 입학했다. 그때부터 그는 하느님의 영광(榮光)과 영 혼(靈魂)들의 구원(救援)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獻身)하겠다는 생각에 끌리는 것 을 느꼈다.
얼마동안은 솔렘(Solesmes)의 베네딕토 수도회(修道會)에 입회할 생각을 하였 다가, 다음에는 르망(Le Mans)의 성십자가 수도회(聖十字家修道會) 창설을 준비 하던 모로(Moreau) 신부의 동료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딴 곳으로 부르시 던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계획(計劃)이 실현되지 못하게 막으셨다.
1836년 9월 24일 에 부제품(副祭品)을 받고, 대신학교에서 철학복습교사직(哲 學復習敎師職)을 맡아보다가, 나이가 차서 곧 사제품(司祭品)을 받았다. 서품식 (敍品式)은 1837년 5월 20일에 있었다. 철학교수(哲學敎授)로 있다가, 1839년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탄원(歎願)을 한 끝에, 외방전교회신학교(外邦傳敎會神 學校)로 갈 허락을 주교에게서 받아, 7월 27일에 그곳에 도착했다.
⑤ 선교사(宣敎師) 생활의 첫 번째이자, 가장 쓰라린 희생(犧牲)은, 5년 전에 미망 인(未亡人)이 된 어머니와의 이별(離別)이었으니, 그가 떠남으로 인하여 어머니 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이고, 어쩌면 생명을 위태(危殆)롭게 할지도 모 를 일이었다.
베르뇌(Berneux) 신부는 그의 이전 보호자이며, 첫 번째 선생이었던 누아르 (Nouard) 신부에게 그해 8월 16일에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제 가족 모두가 저의 의도를 알고 있습니다. 천주께서는 우리 가족들에게, 그리 고 특히 가엾은 어머니에게 천주의 거룩하신 뜻을 따르는 인종(忍從)과 힘을 주시고, 저에게는 마음이 동요(動搖)되지 않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이제부터 당해야 할 공격(攻擊)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용기(勇氣)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님과 누님은 제 결심을 듣고 매우 놀랐으며, 그들의 고통은 극심합니다.
그 고통이 특히 어머님에게는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천주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저는 천주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 해 일하는 신부입니다. 이것이 제 목적입니다. 저를 버리지 않을 은총(恩寵)의 도움으로 그것으로 이룩하기를 희망합니다.』
같은 날 이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올렸다.
『어머님께 이런 마음의 괴로움을 면해드리기 위해서는, 저의 마지막 피 한 방 울까지도 흘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천주께서 알고 계십니다. 제 가 희생할 수 없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니, 제 영혼(靈魂)의 구원(救援)과 천주의 뜻이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머님도 그런 희생(犧牲)을 저에게 요구하 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천주를 사랑하고, 그분을 알고 계시는 어머님이 저더러 천주의 명령을 어기라고는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머님은 제가 제 소명(召命)에 불충실하여, 제 영원한 구원(救援)을 위태(危 殆)롭게 하는 것을 보시기 보다는, 제가 죽는 것을 보는 것이 천 배나 더 낫 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몇 해 동안 헤어져 있는 것이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괴로울 바에야, 영원히 서로 갈라져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고통이 겠습니까….』
⑤ 하느님께서는 관대(寬大)한 데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지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느 님께서는 베르뇌(Berneux) 신부의 모친에게, 당신의 영광(榮光)을 위하여 자식 을 희생(犧牲)하는 부모들에게 항상 하시는 것과 같은 일을 하셨으니, 그의 어머 니의 고통(苦痛)을 덜어주시고, 무한히 귀중(貴重)한 은총(恩寵)을 많이 내리셨 다. 베르뇌(Berneux) 신부는 3개월 후에 이런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님! 천주께서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어머님께 내려주시는 은총(恩 寵)을 보는 것이 참으로 기쁩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보십시오. 천주를 알지 못하 는 백성들에게 복음(福音)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는 이 소명(召命), 현세밖에 는 생각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어머님과 제게 불행(不幸)이 되는 것으로 생각 할 이 소명(召命)이, 벌써 어머님께는 이 세상의 재물(財物)을 무한히 초월하는 재물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어머님의 신앙은 더 강해졌고, 천주께 대한 어머님의 믿음은 더 튼튼해졌으며, 천주께 대한 어머님의 사랑은 더욱 열렬해졌습니다.
저희들에게 그렇게도 너그럽게 내려주시는 모든 은총(恩寵)에 대해, 천주께 감 사하기를 마지않습니다. 어머님이 좀 위로(慰勞)를 받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 에, 전에 제가 느끼던 그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이제는 느끼지 않게 되 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