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와 택시를 세워놓고 젊은이들을 무작정 끌고 가는 과정에서 기사들이 구타, 연행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서 모여 대형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로 몰려왔다. 금남로를 가득 메운 이들의 경적과 헤드라이트 불빛은 시위대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가공할 무력으로 인한 패배감이 강한 연대의식과 자신감으로 전환되어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를 해방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시위대는 도청을 지키는 군경을 포위하고 접전을 계속했으며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MBC 방송국, 노동청 그리고 세무서 등이 불탔다. 도청주변과 광주역 앞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 시위대와 선무방송차를 따라 곳곳을 돌아 다니는 시위대로 밤이 깊은 줄 몰랐다.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전지역이 시민의 손에 장악되었고 이날 밤으로 시외전화가 두절된다.
도청과 광주역 양쪽으로 몰린 공수부대는 급기야는 시위군중을 향해 집단발포하기에 이른다. 광주역 앞의 시위대는 날이 밝자 이때 사망한 두 구의 시체를 리어커에 싣고 도청으로 도청으로 분노에 찬 발걸음을 재촉했다.
18:00
- 택시운전사 2백여 명이 무등경기장에 모여 계엄군을 몰아내겠다고 결의.
- 30여 명의 군인들이 시위대 중간을 차단하려고 한국은행 맞은편 골목으로 진입했으나 이들은 '시민들을 때리지 말라', '평화적 시위는 제지하지 말라' 등 시민들의 집단항의를 받고 도청 쪽으로 되돌아 감. 시민들은 되돌아가는 군인들에게 박수를 보냄. (월간조선, 1985. 7)
- 충금지하상가 쪽에서 학생, 시민 5백여 명이 질서있게 연좌데모(시민들이 바리케이드 설치). '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사형하라'는 구호 제창. (시청 상황일지)
- 18시 현재 금남로의 학생, 시민 1천여 명은 계엄군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계엄군이 원상복귀하자 다시 국민은행 앞에 3백 명이 운집함. (계엄사 상황일지)
18:10
- 7여단 33대대 숙영지를 조선대로 이동 명령. (특전사 전투상보)
18:00 군사령부 작전지침 하달
- 군 사령부 지시사항 내용
1. 주민 계몽 담화문 31사단장에게 발표토록 지시
2. 유언비어 발생 및 유포과정 분석
3. 학생시위 구호 변천과정 분석
4. 유언비어 수집 및 분석
5. 군은 지역적인 구분이 없음을 천명
6. 계엄군의 사명 제시 (전교사 작전일지)
- 군사령부
1. 계엄군 자세 확립 지시
2. 총기피탈 방지
3. 민간인 적대행위 방지
4. 장기화 작전에 대비
5. 연행차 처리 (전교사 작전일지)
택시기사들의 시위 참여
18:20
- 산발적으로 무등경기장에 모인 택시 1백 대가 세 줄로 헤드라이트를 켜고 광주역 쪽으로 들어오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18:30
- 택시 2백 대가 계엄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택시에 돌멩이를 싣고 무등경기장에서 금남로 쪽으로 이동. (계엄사 상황일지)
18:30 - 21일 02:00 3여단의 광주역과 광주시청에서의 작전
- 부대가 광주역에 도착한 1시간 후(08:30분경) 31사단장이 도착, 현지서 작전 명령 하달.
- 조식과 중식은 특전식량으로 대용하고 18:30분경 21/2톤 2대로 본부대 요원이 작전부대 식사추진을 위해 전남대학교에서 약 5백 미터 전진하자 차량에 탑승한 폭도들에 의해 공격을 받아 차량은 유기하고 일단 긴급사항 통보.
- 여단은 16대대를 즉각 출동시켜 폭도를 제지시키고 설득을 했으나 최초 10여 대에서 1백여 대로 증가되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발전.
- 급기야 폭도는 대대장과 부여단장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차량으로 아군 병영에 돌진, 아군 1명 살해함.
- 이에 16대대는 가스탄 및 진압봉에 의한 타격작전으로 일단 폭도를 격퇴하고 광주역전으로 가는 도로를 차단, 폭도와 치열한 공방전을 수행.
- 한편 11대대는 금남로 일대에서 도청에 집결되는 시민과 폭도들에 포위되어 고립상태하에 자체방어에 치중.
- 13대대는 공영 주차장에서 폭도의 차량에 의한 공격을 받았으나 중과부족으로 일단 물리적 행동을 삼가고 정관상태로 꼿꼿이 대치.
- 한편 광주역 KBS에서 보병이 폭도와 대치중 돌파위기에 처해 긴급구호 요청을 보내옴으로써 광주시청에 차량과 집결중이던 12대대를 KBS로 급히 이동시켰으나 중간에서 폭도에 의해 저지되어 구조는 불가능.
- 이에 폭도의 위협이 없는 15대대를 KBS에 급파, 구조 지원토록 함.
- 이때 15대대는 KBS를 구출하고 전남대 쪽의 폭도와 12대대 쪽의 폭도를 동시 제압하며 12대대와 연결, 광주역전에서 합류, 2대 대대로 5차로를 방어.
- 12대대가 광주시청에서 이동하자 폭도 만여 명이 광주시청을 습격, 이에 긴급 구조 요청을 접수, 13대대를 돌파시켜 광주시청을 점거시키고 시청을 사수. 폭도 2인 이상의 파상공격을 저지.
- 11대대를 제외하고 4개 대대는 폭도의 차량화 특공대와 화염병 및 투석전으로 맞서는 폭도들과 계속 공방전을 실시.
- 22:30분경 광주역전 상황이 위급하자, 여단은 11대대와 12, 15대대를 구출하기 위한 2개 팀 정도의 특공대를 구성, 광주역전 뒷길로 과감히 돌파작전을 실시, 일단 12, 15대대와 역전에서 합류, 통합작전 지휘.
- 약 1시간 정도 광란하는 폭도와 대치하면서 가스탄(화염방사기, M203 방사기, E-8 발사통) 등으로 폭도를 제지. 이때 폭도는 약 20여 회나 차량으로 돌진(일부는 운전수 없이), 아군을 압사(10여 대의 고속버스가 주변을 파괴).
- 이러한 상황에서 11대대는 기회를 보아 화염방사기, CS의 기습사격에 의해 돌파구를 열고 광주시청 쪽으로 이동, 13대대와 합류에 성공(23:00경).
- 이에 11, 13대대의 합동작전으로 광주시청 쪽의 폭도를 제압하고 광주역전 쪽으로 합류하기 위해 이동(11:30분경).
- 12대대의 엄호로 01:00경에 4개 대대는 역전에 합류, 이때부터 조직적인 작전으로 폭도를 퇴치하며 철수준비.
- 11대대는 선발대로 통로를 개척하며 지원받은 차량을 인솔, KBS 기술자 5명과 무기고의 무기를 회수하여 전남대 입구의 16대대의 지원과 역전의 3개 대대의 엄호하에 철수하고, 부속하는 3개 대대는 축차진지를 점령하면서 무사히 전남대로 철수완료(02:00시경). (특전사 전투상보)
18:35
- 무등경기장에서 광주역-시외버스 공용터미널-금남로 쪽으로 택시 1백 대가 시가 행진중.
- 충금지하상가에서 4천-5천 명이 집결하여 '신현확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치며 마이크 설치를 위한 가두 모금운동 전개. (시청 상황일지)
18:40 전남대에서 5백 미터 전진지점, 계엄군 1명 사망
- 18:30분경 2 1/2톤 2대로 본부대요원이 작전부대 식사추진을 위해 전남대학교에서 약 5백 미터 전진하자 차량에 탑승한 폭도들의 공격을 받아 긴급사항 통보. 여단은 16대대를 현지에 출동시켜 폭도를 제지, 설득했으나 최초 10대에서 1백여 대로 차량이 증가되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발전, 급기야 대대장과 부여단장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아군 병영에 돌진하여 아군 1명 살해함. 16대대는 가스탄 및 진압봉에 의한 파격작전으로 폭도를 격퇴하고 광주역으로 가는 도로 차단, 폭도와 치열한 공방전.
* "이날 오후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대원을 장갑차로 깔아 죽였다는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로 이름이 이금영(?)이었던 것 같다. 지휘관이 권총을 빼들고 '야, 이새끼 장갑차, 우리 부하를 죽인 놈, 너도 죽어야 해' 하면서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팼다. 들어오는 공수들마다 '야, 장갑차 나와! 니가 우리 동료를 죽여?' 하면서 개머리판과 워카발로 짓밟았다. 그가 확실히 장갑차로 공수를 깔아 죽였는지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그 청년은 공수들의 분풀이감이었다." (구술 : 황강주, 현사연 조사)
- 광주시내 2백여 명의 택시 운전사들이 무등경기장에 모여 '동료가 사상된 데 항의, 광진교통 소속 전남 5나 3706호 시외버스 등 5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헤드라이트를 켠 채 금남로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운전기사들은 데모군중을 헤집으며 군저지선을 뚫고 금남로 2가 광주관광호텔 앞(도청 앞에서 4백 미터 떨어짐)까지 돌진. 이곳까지 밀린 군인과 경찰은 차량에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터뜨리며 최후저지선을 확보. 도청앞 광장과 도청 청사까지 가스가 가득했고 시위가 극렬해지기 시작.( 월간조선, 1985. 7)
- 광주역 쪽에서 택시, 화물트럭을 앞세운 시위대 2천여 명이 대인동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몰려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잡석을 싣고 온 경남 7다 6080호 트럭을 붙잡아 금남로 쪽으로 밀어붙인 뒤 불태움. (월간조선, 1985. 7)
18:50
- 차량 헤드라이트를 켠 채 돌진. CBS(가톨릭센터) 앞에서 군중 사이에 낀 채 정차. 학생을 태웠던 택시 운전사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퍼짐.
* "유동 쪽에서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돌진해 오고 있었다. 맨 앞에는 택시 몇 대가 오고 바로 뒤에는 짐을 가득 실은 대한통운 소속 12톤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가 따르고, 그 뒤로는 영업용 택시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뒤를 따랐다. 트럭 위에는 청년들이 가득가득 올라 서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면서 밀고 들어왔다. 이를 보고 있던 시위대 중 누군가가 '민주기사들이 드디어 봉기했다' 하면서 공수들을 밀어버리자고 소리쳤다. 갑자기 돌변한 사태에 놀란 계엄군은 엄청난 양의 최류탄을 쏘아댔고, 페퍼포그 차를 동원하여 가스를 뿜어댔다. 경찰이 쏘아대는 독한 가스탄이 진격하는 차량의 유리창을 부수고 차 안에 떨어졌다. 차를 멈춘 운전기사들은 방향감각을 잃고서 연기 속에서 사방을 헤맸다.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면서 비틀거렸다. 이 틈을 타고 계엄군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곤봉으로 유리창을 깨고 기사들을 끌어내 군화발로 짓밟고 나서 연행해 갔다. 차량 주위에 서 있던 시민들은 계엄군들의 만행을 보면서 돌을 던졌으나 역부족이었다. 계엄군은 잡히는대로 연행해 갔다. 나는 이곳에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광주우체국 앞으로 도망을 갔다. 우체국에는 1백여 명의 시민과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구술 : 이재의, 현사연 조사)
19:00
- 산수동 오거리에서 광주역으로 이동한 시위대 계엄군과 공방전.
* "오늘 밤 시내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예정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와 함께 산수동 오거리로 나갔다. 산수동 주민을 모아 시내로 나가기로 친구와 합의하고 그때부터 주민들을 규합했다. '시민 여러분, 우리의 형제자매가 공수의 총칼에 무참히 쓰러졌습니다. 저들의 만행을 저지합시다. 오늘 밤 시내에서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나 공수를 광주에서 몰아내기로 결의했습니다. 산수동민 여러분도 각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나오십시오. 오늘 밤에는 꼭 결판을 냅시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 시민들이 각목, 쇠파이프, 식칼 등의 무기를 들고 하나둘씩 산수동 오거리로 나왔다. 1시간 이상을 외치고 다니자 거의 1천 명 정도의 시민들이 나왔다. 주로 청장년의 남자들이었다.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MBC 방송국을 거쳐 광주역으로 가면서 주변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 관공서의 유리창 등을 몽둥이로 깨부수면서 갔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그곳에 운집해 있던 1천여 명의 시민과 합류하여 광주역에서 그날 새벽까지 계엄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구술 : 김한중, 현사연 조사)
- 무등경기장 앞 경상도 트럭 2대에 방화
* "광주역에서 공수들과 싸우던 시민들이 군용트럭 2대를 불태웠다. 헝겊에 불을 붙여 차바퀴에 붙였다. 그것을 보고 난 후 나는 청년들과 같이 시청 옆에 있는 광호교통 차고로 갔다. 그곳 직원에게 데모하는데 차가 필요하니 버스를 내달라고 요구하자 처음에는 거절하던 그가 나중에 버스 3대를 끌고 나왔다. 우리는 그 차를 타고 산수동, MBC 방송국 등 시내 곳곳을 돌며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철페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밤늦게 계림동파출소 앞을 지나면서 시위대들이 파출소 안으로 몰려가 기물을 파괴하고 불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계림극장 사거리에서는 군인과 시민, 학생들이 서로 최루탄과 돌로 대치하면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구술 : 김영민, 현사연 조사)
- 금남로 거리에 버스 8대, 대형트럭 1대, 택시 50대를 앞세우고 도청 앞(관광호텔)까지 진출, 구호(계엄해제) 외침. (월간조선, 1985. 7)
- 무등경기장에 집결한 택시기사, 신안동 롯데제과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
* "공설운동장에서 택시기사들이 모인다는 말을 듣고 나도 자가용을 몰고 그곳으로 갔다. 신안동 롯데제과 앞 6차선 도로에 광주역 쪽을 향한 자동차와 시민들로 꽉차 있었다. 시내로 나가려는 시민을 저지하기 위해 공수들은 착검한 M16을 '허리총' 자세로 들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양쪽 모두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이 대항하는 것을 보니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가용을 도로 옆 골목에 세워놓고 시민과 공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중재에 나섰다. 일단 양쪽 다 뒤로 10보씩 물러서라는 것이었다. 간신히 내 의견이 먹혀들어 공수부대와 시민들이 10보씩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뒤쪽에 있던 시민들이 그 뜻을 모르고 공수를 향해 돌을 던졌다. 그것과 동시에 공수들이 최루탄을 쏘아대며 곤봉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곳에서 잡힌 사람들은 군용트럭에 짐짝처럼 차곡차곡 실렸다. 나도 그때 잡혀 전남대로 끌려갔다. 전남대 강의실에서 공수들은 '이 대검이 내가 월남에 가서 베트공 여자 유방을 40개 이상 자른 것이다' 하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공수들이 내 옆에 있던 사람에게 주소를 묻자 그는 '양동구'라고 대답 했다. '양동이면 양동이지 양동구가 뭐야' 하고 악을 쓰면서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 개머리판으로 내리치고 발로 밟아버리자 그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죽어버렸다. 4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이튿날 전남대로 붙잡혀온 사람들을 포승줄로 줄줄이 묶어서 밀폐된 트럭에다 실은 후 최루탄을 터트렸다. 나는 팔이 부러져서 포승줄에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스러웠다. 트럭 양쪽에 있는 작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보니 전남대 테니스장 부근 비탈에 여학생 두 명이 죽어 있었다. 그 여학생은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고 쓴 휘장을 가슴에 둘렀는데 온몸에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트럭에 탔던 시민들이 최루탄 가스 때문에 코피를 흘리고 오줌을 싸는 등 그야말로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나는 숨이 막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자 머리로 유리창을 들이받아 유리파편이 머리에 박혔다. 교도소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저물었다. 우리가 탄 트럭에서만 서너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그 외에도 최루탄에 화상을 입어 얼굴이 벌겋게 벗겨졌다. 공수들은 시체들을 옆에다 눕혀놓고 주전자의 물을 붓거나 오줌을 싸서 피로 얼룩진 시체의 얼굴을 군화발로 문질러 씻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시체의 가슴 위에 번호를 쓴 나무판을 놓았고 뒤따르던 공수는 카메라로 시체 하나하나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 뒤 가마니로 덮어두었다." (구술 : 강길조, 현사연 조사)
- 도청 앞에는 고속버스 3대를 포함하여 차량 3백 대가 진출. (전교사 작전일지)
- 택시 15대, 노동청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
- 11대의 대한통운 소속 12톤 대형트럭, 고속버스, 시외버스와 2백여 대의 영업용 택시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 금남로에 나타남. 시민들 환호하면서 차량을 따라 돌격 개시. 계엄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아댐. 경찰의 가스탄이 차량의 유리문을 부수고 떨어짐. 저지선 20여 미터를 남기고 차량은 멈췄고,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는 청년들을 계엄군은 구타하여 연행해 감. (1980년대 민주화운동)
- 2천여 명의 시민, 차량의 뒤를 따라 현재 지하상가 공사장 앞을 통과, 도청으로 가고 있음.
- 계엄군은 장갑차 1대를 앞세우고 도청 앞에서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19:05
- 가톨릭센터 앞에서 계엄군이 가스탄 발사하자 대부분의 차량과 시민들은 분산 도주했으나, 계속 버스 3대, 택시 30대, 군중 1천여 명은 계엄군과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19:15
- 광주고속 앞 택시 50여 대 집결중. (시청 상황일지)
19:18
- 광주은행 앞에 버스 3대, 트럭 1대를 앞세우고 택시와 군중 2천여 명이 시위 중.
- 노동청 앞의 2천여 시민, 도청으로 진격할 태세.
- 전남매일신문사 앞에서 1천여 명의 시위대, 군경과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19:20
- 버스 6대 앞세우고 대학생들이 2열로 버스 앞에 서서 도청을 향해 진격하고, 후미에는 군중 1천여 명이 뒤따르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투석이 진행되는 동안 광전교통 전남 5아 3706 버스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군저지선을 향해 돌진. 최루탄으로 시야가 막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춤. 공수대원이 몰려나와 운전사와 탑승했던 20대 청년 9명을 곤봉과 군화발로 난타. 이들을 구하려던 5백여 명의 시민들도 무차별 난타.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오후 6시경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가보니 7, 8대의 택시가 왔다. 그들은 도청 앞에 있는 계엄군을 밀어버리려는데 금남로 진입로에 공수들이 가로막고 있어 돌파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때 버스 앞 유리창에 '무안'이라고 씌어진 시외버스 한대가 공용터미널 배차실로 들어왔다. 빨간 잠바를 입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 차를 세웠다. 그는 운전수를 붙들고 계엄군을 몰아내기 위해 차량시위를 시도하고 있는데 택시만 있어 불가능하니 차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운전사는 순순히 차를 줬다. 빨간 잠바의 청년이 차를 몰고 서서히 금남로 진입로를 향해 갔다. 점차 공수부대의 대치점과 가까워지자 속력을 냈다. 그 과정에서 공수들이 물러났다. 그렇게 해서 도로가 뚫리자 버스는 도청을 향해 쏟살같이 질주했고, 10여 대의 택시가 그 뒤를 이어 달려갔다. 나도 시민들과 함께 걸어서 도청으로 갔다. 15분쯤 후 금남로 관광호텔 앞에 당도해 보니 선두에 나섰던 시외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아 불타고 있었다. 공수들이 최루탄을 쏘며 뛰어왔고 그곳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있었다." (구술 : 정홍섭, 현사연 조사)
19:25
- 전남대 정문 앞 사거리에서 4백 명의 학생들이 돌멩이 준비중.
- 무등경기장 앞에서 차량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며 택시들이 차도를 막고 전차량을 세우고 있음.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4, 5백 명의 군중과 군인이 투석전중이며, 경상도 트럭 1대를 방화.
- 시내버스 3대와 트럭 1대를 선두로 그 뒤에 수백 대의 차량(동구청-제일고등학교 입구까지 연장)이 도청 쪽으로 행진하고 있으며, 시민은 수만 명이 모여 있음. (시청 상황일지)
19:45 도청 광장에 있던 공수부대가 포위되다
- 가톨릭센터 앞까지 진출한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구호 외치며 도청 쪽 향함 .
- 오후 7시 40분부터 40분 동안 소강상태. (월간조선, 1985. 7)
- 공수부대는 전남일보 앞에 장갑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는 듯이 버티고 있었다. 차량행렬도, 시민들도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20미터쯤의 간격을 두고 대치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금남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청 쪽과 학동 쪽, 충장로 입구에서도 길을 가득 메운 시위군중이 도청 광장으로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공수부대원은 금남로만 맡고 있었다. 다른 길은 경찰이 맡아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수없이 쏘아대면서 도청 광장으로의 전진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러니까 도청 광장을 둘러싼 네 길목에서 군경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어 도청 광장과 군경은 시민들에게 포위된 셈이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MBC 방송국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학생 5천 명, 시민 5천 명이 운집해 있으며 이들 중 3천 명은 소형 태극기를 휴대하고 있음.
- 시민관 앞에 정차중인 경남 7바 6083호 트럭에 불을 질러 연소중. (계엄사 상황일지)
19:50
- 충금동 예비군중대 사무소에 청년들이 침입하여 옥상방송을 하려함.
- 학생, 시민 4백여 명 유동 쪽에서 광주역 쪽으로 이동. (시청 상황일지)
20:00
- 정면공격이 불리하다고 여긴 시민들은 가톨릭센터 옆길을 빠져나와 MBC 방송국 점령. 시민들은 밖의 상황보도 요구, 거절하자 화염병을 던짐. 직원들이 소화, 군중들이 방송기재를 파괴해 방송중단.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광주 MBC 방송국(도청에서 1km), KBS(도청에서 2km, 광주역 앞)가 방송중단, 시민이 접수한 것 같다. 전일발송, CBS는 나와.
- 제봉로를 따라 MBC 방송국 건널목 쪽으로 전진했다. 일단의 과격파들은 이때 대인동 광주소방서를 점령, 소방차 3대를 끌어내 사이렌을 울리며 시가지를 질주. 시위대는 광주시청에 난입하며 20여 장의 유리창만 박살내자 철거반장 등 일부 시청직원들이 데모대원들을 설득, 위기를 모면.
- 검찰청과 법원에 시위대 진출했으나 일부 광주출신 검사들이 데모대를 설득, 돌아감.
- 도청과 같은 건물 안에 있는 도경은 완전히 포위상태.
- 금남로를 따라 택시, 버스를 앞세운 데모대는 도청에서 4백 미터쯤 떨어진 관광호텔 앞에 진출, 군경과 대치. 도청에서 오른쪽으로 불과 1백여 미터쯤 떨어진 노동청 앞, 도청에서 왼쪽으로 역시 1백 미터쯤 떨어진 충장로 입구에 각기 포진.
- 군인과 경찰은 삼면에서 협공당하고 있음. 도청을 제외한 외곽지대는 완전 치안부재 상태. 이때부터 금남로, 제봉로, 충장로를 비롯, 외곽지대는 시위대들이 닥치는 대로 차량을 탈취, 운전하거나 불태우기 시작했으며 낮에는 없었던 스피커가 나오기 시작. 첫 음성은 여자였다. MBC 방송국 쪽의 시위대는 이 여자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고 전시가가 온통 시위대의 함성으로 가득함. (월간조선, 1985. 7)
- 차량시위를 하던 시민,학생 도청으로 연행
* "전남일보사 앞에서 수백 대의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질주해 오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경찰과 공수들이 일제히 최루탄을 쏘자 매워서 눈을 뜰 수 없어 친구와 나는 도청 쪽으로 오던 차를 세워 승차했다. 내가 택시에 탄지 채 5분도 안되었을 때 공수들의 무차별진압이 시작됐다. 나는 택시의 헤드라이트와 유리창을 깨고 덤벼든 공수들에게 붙잡혀 YMCA 앞으로 끌려갔다. 먼저 잡혀온 30여 명의 시민이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었다. 잠시 후 집으로 보내주겠다면서 우리를 미니버스에 가득 태웠다. 약속과 달리 그 차는 도청 앞 광장을 한 바퀴 돌더니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차량시위를 구경하던 시민, 안내양, 기사 등 수백 명이 도청 상황실로 잡혀왔다.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들락거리는 공수들에게 죽도록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얼굴이 퉁퉁 부어 성별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구술 : 임재구 현사연 조사)
* "저녁 8시경 도청 앞에서 차량시위 행렬을 지켜보던 나는 공수에게 붙잡혀 도청으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먼저 잡혀온 시민, 학생들이 3백여 명 정도 있었다." (구술 : 전고선, 현사연 조사)
- 시청에 대기중인 공수, 3대의 트럭에 분승 출동. (시청 상황일지)
- 시청건물은 시위군중의 총공세에 밀린 군과 경찰의 철수로 점거, 접수.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시외곽지대의 시위대들은 주유소를 점거하며 휘발유로 화염병을 만들었으며, 시내 전역의 파출소를 파괴함.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소방서가 시위대에게 접수됨. 2, 3대 소방차 탈취해 사이렌 울리며 도청 6백 미터 전방까지 돌진.
- 계림동 일대 시위군중 1만-3만 명으로 증가.
- 전남대병원 앞 1만 명 시위군중 도청으로 진격. (시청 상황일지)
20:10
- 광주역 로터리에서 군중 2천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지 않는 영업용 택시 2대 파손. (시청 상황일지)
- 금남로에 버스 2대와 군중 1만여 명이 군경의 제지로 후퇴, 분산.
- 노동청 앞 3천여 명은 도청을 향하여 진입 시도중.
- 일부는 MBC 방송국 앞을 통과하면서 화염병을 MBC에 던지며 MBC 방송국 셔터 를 파괴.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의 5천여 명은 화학탄 발사로 분산.
- 전남매일 앞 2천 명은 애국가를 부르며 군경과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20:20 - 20:30
- 역전파출소를 점령한 군중은 역 유리창을 파손, 양동파출소 점령, 학동파출소 점령. (계엄사 상황일지)
* "밤 9시경 집 밖을 나와보니 양동파출소가 불타고 있었고 파출소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 나는 시위대를 따라 무등경기장으로 갔다. 그곳에 6, 7대의 차량이 있어 시위대가 나누어 타고 전남대 앞으로 갔다. 전남대 앞에서는 시위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구술 : 최현철, 현사연 조사)
20:30 소방서 점령
- 광주소방서 완전 점령, 기물 파괴, 소방차 4대 탈취하여 MBC 방송국 쪽으로 향하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학동, 산수동, 계림동, 양동 파출소 등 대부분의 파출소 파괴, 방화.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밤늦게 시위군중과 함께 월산동 파출소로 갔다. 경찰은 이미 도망가고 한 명도 없었다. 이날 낮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데모를 했을 리 만무한 어린 아이의 손을 묶어 탱크의 총신에 매달아놓고 빙글빙글 돌리던 공수의 만행에 치를 떨었던 나는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 기물을 부수고 서류에 불을 질렀다." (구술 : 김결, 현사연 조사)
* "전남대 의과대학 부근에서 전경과 시위대들이 대치하던 중 시위대들에 의해 전경이 포위될 상태에 이르자 전경들이 철수했다. 1백여 명이 넘는 시위군중이 학동 파출소로 이동하여 파출소내 기물을 부수고 방화했다. 잠시 후 소방차 1대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그곳으로 왔다. 그러나 그 소방차에는 시민들이 타고 있었다." (구술 : 조인호, 현사연 조사)
- 목포, 9시 이후 KBS, MBC 방송국-TV 중계가 중단(광주에서 중계해 주는데 중계시설이 부서진 듯).
- 노동청 앞에서 1대의 버스가 전경대의 저지선을 돌파. (말, 1988. 5)
- 노동청 앞에서 불에 탄 차량 버스 2대, 택시 등 모두 12대. (월간조선, 1985. 7)
- 라디오 방송 중단. (전교사 작전일지)
21:00 노동청 앞, 시위진압 경찰 4명 사망
- 나는 전남 도경 기동대 소속으로 근무하던 중 광주사태를 맞이하게 됐다. 5월 20일 밤 여기저기에서 타오르는 불길과 연기는 전쟁을 방불케 했다. 우리는 4줄로 서서 수백 명의 군중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노동청 쪽에서 약 1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주유소가 시민들 수중에 들어갔다. 데모대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퍼내 차에 불을 질러 불타는 차를 우리쪽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밤 9시쯤 됐을까? 군중 쪽에서 버스 한 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 버스는 불타고 있는 차 사이를 곡예하듯 빠져나와 우리 전경부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게 아니가! 나는 '피하라!'고 소리치면서 버스를 향해 돌을 던졌다. 전경들은 양쪽으로 쫙 흩어졌 다. 버스는 속도를 늦추며 오른쪽으로 비켜 담벼락을 긁으면서 멈췄다. 버스 쪽 으로 달려가 보니 버스와 담벼락 사이에 경찰관들이 여러 명 깔려 있었다. 순간 울음소리, 신음소리가 뒤엉켰다. 그들을 끌어내려고 팔, 다리를 잡아당기자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사고로 함평경찰서 소속 정춘길, 강정웅, 이세홍, 박기웅 등 4명이 숨졌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월간조선, 1985. 7)
* "나는 광주고속버스 운전기사로 5월 20일 오후 7시경 남원에서 승객을 싣고 광주로 왔다. 문화동에 도착하자 주위 사람들이 지금 시내에 난리가 나서 차를 운행할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승객을 문화동에 내려주고 안내원만 태운 채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갔다. 그때 회사버스 3, 4대가 터미널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터미널에는 회사중역들이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내 차를 본 상무가 차가 없어 걱정했는데 마침 잘됐다며 앞에 나가고 있는 차를 따라가라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차를 따라나섰다. 도로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차가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차를 밀다시피 하여 시내 쪽으로 갔다. 밤 9시가 되었는데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회사에서 동원한 앞 차를 따라 광주경찰서 골목을 통해 MBC 방송국 쪽으로 빠졌다. 내 차에는 우리 회사 김갑진 기사와 시위대원 몇 사람이 타고 있었다.
노동청 앞에서 도청을 향해 차를 돌렸다. 도청과 상무관 앞에는 군인과 경찰들 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남도예술회관 앞의 군경저지선을 향해 서서히 갔다. 군인들이 계속해서 최루탄을 쏘아댔다. 군인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최루탄가스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운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운전대를 놓고 운전석 밑으로 몸을 움추렸다. 상무관 앞에서 버스는 도로 귀퉁이로 미끄러졌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최루탄가스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버스가 도로에 부딪혀 멈추자 나는 재빨리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버스 안에 있던 시위대와 함께 부근의 지하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가 주는 밥을 먹고 난 뒤 밖이 조용해지자 그곳을 빠져나왔다.
다음날(21일) 아침 어제 저녁의 일이 궁금해 상무관 앞으로 가는 도중 우리 회사의 오석구 기사를 만났다. 그는 나를 붙잡고 큰일났다고 했다. 어제 저녁 내 차에 상무관 앞에 있던 경찰관 4명이 치어 죽었다는 것이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날 내 차에 탔던 김갑진 기사는 현장에서 잡혀갔고, 다른 동료기사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 사건으로 5월 29일 광주경찰서로 끌려갔다. 그 후 상무대와 보안대, 광주경찰서로 옮겨다니며 한 달 동안 조사를 받고 상무대에서 재판을 받았다. 결국 나는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하던 중 1982년 크리스마스 때 석방되었다. 5.18 관련자로는 마지막으로 석방된 것이다." (구술 : 배용주, 현사연 조사)
21:13
- 3여단 11대대 방어중 금남로 지역에 7만 명의 시위대 운집. (계엄사 상황일지)
- 군인 일부를 포함하여 경찰이 담양 방면으로 철수.
21:20
- 7여단 33대대 조선대에 무사히 도착(이동중 투석에 의해 2명 부상). (특전사 전투상보)
21:22
- 3여단 16대대, 투석중인 폭도 4명 체포.
- 항의하며 추적한 70여 명의 폭도들이 각목과 쇠파이프로 난동. (계엄사 상황일지)
21:30 시위대에 의해 광주역 포위됨
* "시민관 쪽에서 광주역으로 가던 우리는 공수들의 저지를 받고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투석전을 전개했다. 투석만으로는 공수들에게 대항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인근 주유소로 갔다. 우리가 드럼통에 불을 붙여 계엄군을 공격하자 그들은 공포탄을 공중으로 쏘아댔다.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화가 치민 나는 운전사와 시민 2명과 함께 2톤 트럭을 타고 광주역 진출을 시도했다. 도로에 널려 있는 돌멩이 때문에 차가 달리지 못하자 옆에 있던 두 사람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 순간 차를 향해 달려든 5, 6명의 공수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나를 시멘트 바닥에 눕혀 곤봉으로 복부를 때리면서 왼쪽 다리를 대검으로 찌르고 군화발로 얼굴을 짓밟았다. 공수들은 부상당한 나를 끌고 다녀 엉덩이가 시멘트 바닥에 긁혀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얼굴은 온통 피로 뒤덮였다. 그렇게 몇 시간을 구타당해 의식이 희미해져 갈 무렵 공수들은 다른 부상자들을 트럭에 싣고 광주역에서 철수했다." (구술 : 김용완, 현사연 조사)
21:35
- 역전 쪽으로 2천여 명 폭도들이 횃불시위 중. (계엄사 상황일지)
21:40 MBC 방송국 방송국 전소
- 수천 명의 시민 계림 파출소 쪽에서 MBC 방송국으로 향함. (현사연 조사 종합 )
*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을 지나 계림동파출소 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몽둥이, 연탄집게, 삽 등으로 무장한 수천 명의 시민이 있었고, 선두에는 네 명의 어린 아이가 태극기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청년들이 계림동 파출소에 돌을 던지자 어른들이 말렸다. 우리는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 언론사는 자폭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MBC 방송국 앞으로 갔다. MBC 방송국 앞 도로에는 장갑차를 앞세운 군인들이 버티고 있었다. 시민 대표 몇 명이 계엄군 책임자에게 가서 평화적으로 시위하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돌아서 가려는데 장갑차가 돌진해 왔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 오자 나는 재빨리 골목길로 뛰었다. 잠시 후 전신전화국 앞으로 갔다. 장갑차에 꼬마 2명이 깔려죽었다고 아우성이었다. 직접 확인해 보려고 MBC 방송국 앞으로 갔다. 시체는 없었으나 배에서 튀어나온 내장이 피에 젖어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나서 속이 확 뒤집혔다. 흥분한 사람들은 '도청으로 가자. 망할 놈의 MBC 방송국을 불질러 버리자'며 제각기 외쳐댔다.
사람들이 MBC 방송국 건물로 들어가려 하자 '그러면 진짜 폭도로 몰리니까 경고로 유리창만 깨자'고 누군가 만류했다. 사람들이 돌을 던져 MBC 방송국의 유리창을 산산조각냈다. 그런 뒤 노동청 쪽으로 갔다. 그곳에도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버티고 있어 MBC 방송국 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 가 나면서 MBC 방송국 건물이 불타기 시작했다. 내가 봤을 때는 MBC 방송국 건물 바로 옆에 위치한 변전소에서 불길이 솟았다." (구술 : 박중렬, 현사연 조사)
- MBC 방송국 건물에서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폭동화한 것은 이때였다. 불에 타는 MBC를 보고만 있어야 했다. 화염병이 창문으로 던져져 불에 타기 시작할 때 건물에는 직원 2, 3명과 1개 분대의 군병력이 있었으나 뒤쪽 비상계단을 빠져 겨우 피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방차도 접근할 수 없었고 이 건물은 밤새워 새벽 3시까지 고스란히 40-50억 원의 재산을 삼킨 것이다. (월간조선, 1985. 7)
- 궁동 쪽에서 갑자기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불기둥이 솟구쳐올랐다. 대낮같이 밝은 불기둥, 아니 포항제철의 용광로 불길처럼 새빨간 불기둥이 문화방송국에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시위군중들이 불을 지른 것이다.
이날 문화방송국에 불을 지른 것은 오후 7시 뉴스에 계엄당국이 발표한 거짓투성이의 보도문이 나온데 대해 분개한 군중들이었다. 이날 전남북 계엄분소는 '친애하는 광주시민 여러분'으로 시작된 담화문을 작성해 도청 기자실과 지방 신문사, 지방 방송국에 보내 이를 보도토록 했던 것이다. 광주사태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있었던 공식반응인 이 담화문의 내용이 문제였다.
"지난 18일과 19일 양일간의 소요진압 과정에서 연행된 학생과 일반인은 군에서 잘 보호하고 있으며 그중 가벼운 범법자와 잘못을 반성하는 일부 학생을 석방조치했으며, 나머지 학생에 대해서도 조사가 끝나는 대로 선별하여 추가 석방할 것이며, 소요 주모자나 범법행위가 지나친 학생은 엄히 처리할 것입니다."
계엄분소는 이 발표문과 함께 광주시 신안동 135의 14번지 한승철 씨 등 1백 67명을 석방했다고 그 명단을 공개하였다.
그런데 군중들은 시위를 했건 안했건 눈에 띄는 사람이면 무조건 두들겨패고 강제로 연행해 버린 상태에서 누구더러 소요 주모자요 범법자라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소요진압 과정에서 일부 부상 학생은 정성껏 치료를 받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중상자는 없읍니다'라는 내용이 시민의 분노를 샀다. 곳곳에서 두들겨맞아 중상자가 수두룩한 것은 물론 개중에 상당한 수의 사람이 희생당한 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시민들이 사망자는 커녕 중상자도 없다는데 분개한 것이다. 그래서 계엄당국의 발표문을 그대로 방송한 MBC나 KBS가 거짓 방송을 했다는 것이 방화이유였다. 이날밤 역시 불에 탄 KBS도 같은 이유로 방화된 것이다. 5층짜리 방송국 건물이 활활 타고 있어도 속수무책이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 "시민들이 저녁 7시경 MBC 방송국 옆 금성센터에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 그런데 9시가 지나서 펑 하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보니 MBC건물에 1층부터 4층까지 동시에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때는 시민들이 물러가고 난 뒤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MBC는 시민들이 방화한 것이 아니었다." (정현애,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증언)
* "공정보도를 하지 않는 MBC를 불지르기로 합의한 시위대와 함께 그곳으로 갔다. 시민들이 MBC를 불지르려고 화염병을 던졌으나 불이 확 붙지 않아 셔터만 태웠다. 광주시민의 재산을 함부로 없애지 말자는 어떤 시민의 말을 듣고 시위대는 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MBC 방송국 건물 뒤쪽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시위대는 MBC 방송국 앞 도로에만 있었고 방금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기로 약속하고 셔터에 붙은 불을 껐는데 뒤로 가서 방화했을 리 없다. MBC 방송국 방화는 분명 공수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구술 : 김후식, 현사연 조사)
21:45
- 시위군중 CBS 침입하려다 실패. (시청 상황일지)
- 관광호텔 앞 시위군중 3천 명 집결.
- 산수동 파출소 3백 명 투석 난입 점거.
- 노동청 앞 시위군중 2천 명 집결.
- 서부경찰서 5백 명 점거 기도. (전교사 작전일지)
21:50
- 동구 학1동 주택가에 난입한 계엄군이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곤봉을 휘둘렀다. 경향신문 박옥재(41) 기자가 중상을 입는 등 수십 명 부상. (월간조선, 1985. 7)
*"경향신문 기자였던 나는 사건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녔다. 학동에 있던 대우병원 앞에서 시위상황을 취재하던 중 어느사이 계엄군과 시위대의 대치지점 사이에 끼게 되었다. 양측 모두 최루탄과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던 중 시위대가 몰리게 되었다. 계엄군들이 곤봉을 들고 시위대를 쫓아가다 나를 붙잡고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기자 신분증을 가슴에 달고 있었기 때문에 무사하리라는 내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나는 신문기자로서 사건 취재중'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막무가내로 두들겨팼다." (구술 : 박옥재, 현사연 조사)
- 광주시내 모든 거리거리에 각목, 곡괭이를 손에 든 시위군중이 넘쳐 1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시내전역에서 '계엄철폐'와 '전두환 사임'의 구호가 밤하늘을 뒤덮었으며, 다음날(21일) 오전까지의 철야데모로 이어졌다.
MBC 방송국 전소에 이어 광주지검과 법원청사 및 8개 파출소가 파괴되었다. 왜곡보도로 시민들의 원한이 서린 MBC 방송국과 세무서, 노동청도 불에 탔으며, 도청, 도경, 교도소를 제외한 전시가지가 시민의 손에 장악되었다. 세무서의 예비군 무기고가 불에 타면서 수십 정의 소총이 젊은이들에게 인수되기도 했다. 군인들은 광주역을 점거하려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20-3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시위대가 지나는 길목마다 총성과 비명이 울렸다. (현사연 조사 종합)
- 광주역에 투입된 31사단 병력 이동.
* "광주역에 있던 계엄군 2백여 명이 '허리총'을 하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시민들이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자 선무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우리는 공수부대가 아닙니다. 향토사단 31사단 병력입니다.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퇴각중입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그곳을 빠져 나갔다." (구술 : 전용호, 현사연 조사)
- 도경, 도청 함락 직전. 데모대들 도청 뒷담을 곡괭이로 허물고 있음. 도청에 있는 간부들 대피. 생명의 위험이 있어 교육위원회로 피신. 도청을 중심으로 데모군중 2만-3만 명 포위. 오늘 밤 광주시내 큰일날 듯. 대단히 긴박한 상태.
시민들도 나와 지켜보는 상태. 경찰관, 군인들 포위당하고 있음. 시민도 귀가 않고 있어 폭발 일보 직전. (월간조선, 1985. 7)
22:30 광주역 전투
- 광주역의 시위상황이 급박해지자 여단은 11, 12, 15대대를 구출하기 위한 2개 팀의 특공대 구성, 광주역에서 합류, 통합작전 실시. 시위대는 버스와 트럭을 이용하여 20여 미터 돌진하는 등 광주역에 진주한 병력을 위협하자 각종 가스탄, 화염방사기, M203발사기, E-8발사통으로 제지하고 있음.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향하는 모퉁이의 주유소에서 한 청년이 휘발유가 든 드럼통 2개를 트럭에 싣고 불을 붙여 광주역을 향해 질주. 청년은 계엄군 전방 20미터쯤에서 밖으로 뛰어내리고 트럭은 불덩이가 된 채 돌진하여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역전 앞 분수대를 들이받아 폭발. 이 무렵 계엄군은 공포로 위협만 하던 것을 그치고 M16 소총을 발사, 투석하던 전위대의 청년들이 쓰러짐. (1980년대 민주화운동)
22:55 외곽지역의 군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곳곳에서 발포
- 광주역 쪽에서 군인들이 수백 발 발포.
- 본사에 기사를 송고하고 있을 때 광주역 쪽에서 이날 처음으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백 발의 총성이 계속 났다. 밖에 뛰쳐나가 보니 그것은 공포탄이 분명했다. 빨간 불덩이가 쉴 새 없이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월간조선, 1985. 7.)
* "공수들이 광주역을 등지고 KBS 방송국 앞까지 진을 치고 있었다. 시민들이 공수를 향해 돌을 던지면 최루탄을 난사해 흩어지게 만들었다. 시위대 중 일부가 동양고속버스 몇 대를 몰고 공수들을 향해 쏟살같이 달려가자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공수들이 발포를 한 것이다. 주로 예광탄이 공중으로 날아왔고 주변의 건물에 실탄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구술 : 김한중, 현사연 조사)
* "계엄군이 진을 치고 있던 광주역을 뚫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중앙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탈취했다. 우리가 탄 버스가 KBS 방송국 앞에 갔을 때 계엄군이 버스의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집어던졌다. 최루탄가스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우리는 차를 돌려 외진 곳으로 왔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다시 광주역을 향해 진주하는데 수백 발의 총성이 났다. 총소리에 놀란 우리는 차를 돌려 MBC 방송국 앞으로 갔다. 방송국이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MBC 방송국 옆에 있던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각종 물건을 거리로 끌어내놓았다. 미처 꺼내지 못한 제품들을 시민들이 도와 밖으로 꺼내고 있었다. 광주시민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구술 : 김광호, 현사연 조사)
* "광주역에서 데모하는 모양이니 나갔다오겠다며 밤 10시경에 집을 나간 남편이 밤새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이 집을 나간 후부터 광주역 부근에서 계속 총소리가 들렸으나 설마 무슨 일이 있겠나 싶어 새벽녘에 설풋 잠이 들었다. 전화벨 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새벽 5시였다. 남편이 광주역에서 총에 맞아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가서 보니 남편의 가슴에 총구멍이 커다랗게 나 있었다. 같이 있었던 청년들이 남편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자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남편은 3일 후에 죽었다." (구술 : 정귀군, 현사연 조사)
23:00 도청 앞 발포
- 금남로에서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 또는 전소됨.
- 도청 앞은 치열한 심야 공방전 계속. 계엄군은 공포를 쏘아대고 공중으로는 위협사격을 하는 기관총의 예광탄 날음. 더 이상 버틸 수 없게된 계엄군은 M16 자동소총 발사. (1980년 민주화운동)
* "MBC 방송국 건물이 불타는 것을 보고 집으로 갔다. 옥상에 올라가보니 MBC 방송국만 불타는 것이 아니라 시내 곳곳에서 불기동이 솟아 있었다. 전남대 부속병원 옥상에서 도청 쪽으로 예광탄이 포물선을 그으면서 날아갔다.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수없이 날아갔다. 그날밤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구술 : 이지형, 현사연 조사)
- 금남로에서 데모 주력 시민들이 강제 진압(군인이 페퍼포그 쏘아)으로 흩어짐.
- 광주시청 앞에서 11시에 사격개시. 1백여 발, 유탄 50여 발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음. (월간조선 1985. 7)
- 시민들 버스 2대, 트럭 5대로 곡괭이, 삽, 쇠파이프, 화염병을 싣고 도청으로 수송. (전교사 작전일지)
23:20
- 시위군중 지역에서 총성 청취(3, 4발) : 민간인 신고 시위군중은 총 10만여 명으로 추산.
- 군사령부 작전지시
1. 발포 금지, 실탄 통제.
2. 특전사 부대 대대 단위로 분산 집결(융통성있게).
3. 특전사 임무 20사에 인계(교대) 고려.
4. 선무활동을 위한 홍보활동 강화. (전교사 작전일지)
23:30
- 11, 13대대의 합동작전으로 광주시청 쪽의 폭도를 제압하고 광주역전 쪽으로 합류하기 위해 이동. (특전사 전투상보)
23:45
- 지원동 파출소 3백 명 난입 점거. 농성동 파출소 2백 명 난입 점거. 월산동 파출소 3백 명 점거 난입. (계엄사 상황일지)
23:55
- 백운동 파출소 점거 파괴.
- 첩보에 의하면 01:00을 기하여 도청을 목표로 총공격 예정. (계엄사 상황일지)
24:00
- 조선대 정문 앞 2천여 명의 시민들이 몰려가 계엄군과 대치. (특전사 전투상보)
21일 00:00 날을 지새우는 시위대
- 시위대는 지칠 줄을 몰랐다. 전날보다 한층 더한 대혼란 속에 시위는 가열됐다. 우리 취재팀은 여자의 마이크 소리를 따라 불에 타는 MBC 방송국 쪽으로 다시 취재에 나섰다. 거리는 온통 난장판이었다. 깨어진 유리조각, 돌멩이, 파출소 등에서 끄집어낸 부서진 집기 등 마치 전쟁을 치르고 난 뒤의 난장판 같았다. 일부는 거리에서 집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시위대는 마이크를 잡은 여자의 지휘에 따라 노동청 앞 쪽으로 밀려갔다가 다시 MBC 방송국 쪽을 거쳐 광주역 쪽으로 반복하며 움직였다. 멜빵을 두른 청바지 작업복에 빨간 잠바를 걸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마이크를 잡고 20대 청년 2명을 시켜 1명은 스피커를, 또 다른 1명은 앰프를 들게 하고 움직였다. 어느새 시위대에는 시민은 거의 없고 10대에서 2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쇠파이프, 몽둥이, 곡괭이, 낫, 화염병 등으로 무장했고 거리 군데군데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다친 청소년들을 응급치료해 주기도 했다. MBC 방송국와 노동청 앞 등 시내 곳곳에서는 불길이 계속됐다. (월간조선, 1985. 7)
- 7공수 병력 조선대 2백 미터 전방에서 폭도와 대치. (특전사 전투상보)
00:10
- 데모군중이 계속 시위. 대형 스피커를 동원하여 여학생이 처량하게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아 물러가라'를 외치고 있음. (시청 상황일지)
- 경찰 1명 사망 추가. (계엄사 상황일지)
00:15
- MBC 방송국 방송국 전체가 불타고 있으며, 옥상에서 시민 1명이 구조를 요청. (계엄사 상황일지)
- 노동청 쪽 길에서 2만여 명의 군중들이 계속 밀어붙이며 경찰 저지선을 뚫으려고 시도하는중.
- 전옥주는 마이크를 통해 '도와주세요 경찰관 아저씨, 아저씨들은 우리의 동지입니다. 비켜주세요. 우리를 도와주세요' 하며 계속 울부짖고 있었다. 나중에는 '우리 모두 죽여라. 죽은 내 자식 살려내라'는 극열한 감정적 구호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00:36
- 조선대 정문 3천 명이 차량 3대로 정문 돌파 시도. 그중 1대는 담을 들이받고 정지. 고속버스 1대, 수류탄의 저지로 민가를 들이받고 정지. 폭도 3명 검거.(특전사 전투상보)
00:40
- 조선대 정문 앞 55미터 전방에 폭도 5백여 명 출현. (특전사 전투상보)
00:45 광주세무서 방화
* "수백 명의 시위대들이 전남공고 쪽에서 광주세무서로 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도로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세무서 양쪽에 2명의 공수가 거총자세로 서 있었고, 시민들이 함성을 지르며 세무서 쪽으로 몰려가자 공수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총을 쏘아댔다. 그때 세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것을 보고 흥분한 시민들이 '우리가 낸 세금으로 국방을 튼튼히 해 놓으니 오히려 국민의 가슴에 총뿌리를 겨누다니! 세무서도 필요없다. 불질러 버리자'고 소리쳤다. 나는 그 곳에 있던 청년들을 규합하여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가져와 군용트럭에 붓고 불을 붙였다. 나와 청년 1명이 트럭을 몰고 후진해 가다 세무서 건물 앞에서 뛰어내렸다. 세무서 건물에 불이 붙자 그곳에 있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세무서 안에 있던 공수들이 M16을 난사했다. 주위는 총소리, 비명소리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구술 : 문장우, 현사연 조사)
* "광주세무서 앞에 모여 있던 시위군중들이 세무서를 불태워버리자고 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움직이는 군대가 사람을 죽이고 난동을 부리니 불을 질러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일부 시민은 지금 불태워버리면 어차피 우리들이 낸 세금으로 다시 지어야 되기 때문에 이중으로 손해이니 자중하자는 말을 했다. 그러나 계엄군의 온갖 만행을 직접 당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분분했던 의견이 불을 지르자는 쪽으로 모이자 이날 새벽 세무서를 불태웠다." (구술:김결, 현사연 조사)
01:00 31사 화염방사기 소대 출동
. 인원 : 2/31명
. 발연기 4대
. 화염방사기 10대
. 차량 6대 (전교사 작전일지)
- 광주세무서 뒤의 노동청 반소.
- 새벽 1시 15분 전후해 광주세무서에 불길이 올라. 광주세무서 곁에 2개 주유소가 있는데 여기의 휘발유와 경유를 빼 불을 질러. 노동청에서 국세청 사이 현장에서 남자 1명 여자 1명이 죽었다는 말이 있음. 계속 함성. 발포. 도청 주변에서 계엄군이 장갑차로 밀어붙이고 있다. (월간조선, 1985. 7)
- 3천여 군중이 차량 1대를 앞세우고 조선대 쪽으로 진출하다가 차량과속으로 전복되고 나머지 군중은 계속 진출중. (계엄사 상황일지)
03:00
- 시위군중 3천 명, 11공수가 방어하고 있는 도청 앞 공격. (전교사 작전일지)
04:00 광주역에서 계엄군 철수
- 수만의 시위대가 광주역에서 공수의 M16 난사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계엄군은 끝내 광주역에서 철수. (1980년대 민주화운동)
04:20
- 방송차량을 이용, 금일 공설운동장(현 무등경기장)으로 시민들 전원 나오라고 방송하고 선동중. (계엄사 상황일지)
04:40
- 20사 61연대 도착. (계엄사 상황일지)
- 35대대, 법원으로 가는 로터리에서 대기중. (특전사 전투상보)
- 조선대 정문 앞 시위대 해산.
04:55
- 가스살포기(M5) 장착된 500MD 5대 출발. (육본 상황일지)
05:00 KBS 방송국 방화
- 광주역전 파출소 및 KBS 방송국 방화.
- 광주역 1천여 명 운집.
- 날이 새면서 군중이 해산되어 현재 1만여 명이 잔류중이며, 마이크 및 사이렌을 통해 군중 운집 종용중. (계엄사 상황일지)
- 양승희는 3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시위하면서 05:30분경 신안동 소재 KBS 건물 앞에 이르러 누군가가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면서 선두 픽업 차량에서 휘발유가 든 화염병을 약 30명의 성명미상의 폭도들에게 던져주어 이들이 화염병을 위 방송국 현관에 던지자 이에 가세하고 폭도 수십 명과 공동하여 돌을 던지는 등. (공소장)
05:05
- 부장 전교사 방문
. 일시 : 5.21 09:00 광주비행장 도착 예정
. 항공기 : U-21기 1대
. 수행 : 작전과장
. 요청 : 차량 및 안내 요망 (육본 상황일지)
05:30
- KBS 방송국은 불길이 온 건물에 번졌다. 불타기 30분 전쯤 광주역에 끝까지 남아 있던 군인들이 철수한 뒤 역대합실에서 3구의 청년 시체가 발견됐다. 시체를 본 시위대들이 광주역 기물과 유리창 등을 닥치는대로 부수고 KBS 방송국에 몰려가 방화했다는 것이다.(월간조선, 1985. 7)
05:40
- 2.5톤 트럭에 시체를 싣고 시위대 시내를 배회중. (계엄사 상황일지)
05:50
- 광주역에서 출발한 학생, 시민 1천여 명, 곤봉, 쇠파이프 등을 들고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연좌농성(시체 2구를 리어커에 싣고서).
* "마이크를 설치하여 가두방송을 하고 다니는 차를 따라 우리는 밤새도록 금남로, 유동, 양동, 적십자병원, 학동 등 시내전역을 행진하고 다녔다. 가끔 '폭도 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계엄군의 선무방송이 들렸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가행진을 계속했다. 날이 밝을 무렵, 광주역 광장에 있는 분수대의 고인물에 서 손을 씻고 있는데 누군가 '광주역 안에 시체가 있다'며 기겁을 하고 외쳤다. 나는 역사를 향해 달려가던 중 들것에 실려나오는 시체를 봤다. 누가 봐도 구타로 인한 사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온몸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얼굴은 시커멓게 되어 있고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부어 있었다. 광주역사에 또 한 구의 시신이 있다고 했으나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분노가 들끓은 우리는 곧바로 도청으로 갔다. 도청에는 시민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구술:김정기, 현사연 조사)
* "21일 아침 가두방송을 하던 중에 시체 2구가 광주역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광주역 입구에 대검에 찔려 눈알이 튀어나온 남자 시체 2구가 있었다. 나는 리어커에 시신을 싣고 태극기로 덮어 도청으로 갔다. 금남로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그 시신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나는 리어커를 끌고 도청 앞에 주둔해 있던 계엄군 중령에게 가서 시체를 보여주며 따졌다. 그는 우리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간첩이 나타나서 그런 것이라고 발뺌했다." (구술 : 전옥주, 현사연 조사)
06:00
- MBC 방송국 쪽에서 밤새워 시위한 1천여 군중들은 다시 금남로 4가 네거리 쪽에서 농성에 들어갔으며 일부는 밤사이 빼앗은 고속버스, 시내버스, 트럭, 승용차 등을 닥치는대로 타고 시가를 질주.
06:06
- (첩보) 광주공단 입구에 모닥불을 피우고 시위학생 21일 04:00 - 06:00에 광주역에 모여 고교생 특공대를 조직, 장갑차나 차량에 불을 지를 예정. (계엄사 상황일지)
06:25
- 전교사에 가스 살포용 500MD 도착. (전교사 작전일지)
06:50
- 공단 입구 바리케이드 설치하여 차단. (전교사 작전일지)
06:55
- 선무요원 수송.
. 공군 C-130 1대, 09:00 K-16 출발.
. 인원 : 전남출신 장교 중령급 이상 50 - 60명. (육본 상황일지)
07:00
- 곤봉과 쇠파이프를 든 시민들이 수만 명으로 불어나고, 05:00에 불붙었던 KBS는 전소.
- 학생들 공사현장에서 가져온 각목으로 무장. 광주 외곽을 차단하고 3만여 시민들을 차량에 태워 금남로로 수송.
아침, 계엄사령부 최초로 광주에서의 유혈충돌을 발표
계엄사령부는 21일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 지난 18일부터 연 4일째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계엄사는 이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5.22)
08:00 밤새운 시위대는 당국과 협상을 시도
- 전옥주(32)로 알려진 여자 리더가 시민들에게 시체를 향해 묵념을 올리게 했고 시위의 정당성을 시민에게 호소했으며 광주시장과의 면담을 제의했다. 이날부터 각 기관은 문을 닫고 상가는 완전 철시했다. 중고교는 물론 국민학교도 휴교 상태에 들어갔다. 전남일보, 전남매일도 신문제작이 중단됐고 지방방송도 모두 끊겼다. 관광호텔의 외국 손님들도 모두 대피했다. (월간조선, 1985. 7)
- 폭도들이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 1대, 트럭 1대, 덤프트럭 1대를 몰고 송정리 쪽으로 가면서 시민 선동(마이크 이용).
- 서부서 로타리 부근 가로등을 뽑아 차량의 통행을 차단(1백대). (계엄사 상황일지)
08:00 ∼ 11:00 함평, 전교사 지역 '진도개 하나' 발령
- 진도개 하나를 접수하여
.08:52 - 출동준비 완료
.10:00 - 각 파출소 무기, 탄약을 부대로 접수받고 즉시 경찰서 및 예하 예비군 중대에 전파
11:00 - 함평군 예비군 무기 일부와 그 외 지역에서는 노리쇠와 탄약을 100퍼센트 회수(31사단 전투상보)
08:20
- 가톨릭센터, 한일은행 앞에 5천여 명 운집. 학생들 각목, 삽 등을 휴대하고 버스 1대, 용달차 1대, 군용지프 1대를 탈취하여 경찰과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08:30
- 시위대, "도지사와 시장은 시체를 인수하라"고 외치고 있음 (어제 죽은 민간인 시체). (계엄사 상황일지)
- 제일은행 앞에 학생들이 각목, 삽, 총기를 소지하고, 버스 2대, 군용지프차 2대를 탈취하고, 시체 2구를 리어커에 싣고 군인과 대치. 그 뒤에 군중 1만여 명이 운집해 있으며 계속 증가 중. (계엄사 상황일지)
- 조선대 앞 시위대 5백여 명 집결. (특전사 전투상보)
08:45 20사단 병력 광주 진입 저지
- 20사 지휘차량 육로 이동, 광주공단 입구 도착시 차량 1/4톤 14대 피탈, 인원 2명 부상, 1명 실종, 잔류 25명, 12:00시경 탈출 복귀.
- 폭도들의 광주시 진입 및 타지역으로의 이동을 봉쇄하기 위한 작전으로 최초 부대배치 실시. (20사 작전상보)
* "농성동 소재 한국전력공사 앞에서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통근버스를 기다리는데 평상시보다 1시간 이상이 경과했는데도 통근버스가 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한국전력공사 부근에서 일반보병이 완전군장을 하고 시내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 광경을 관망하기만 했다. 주변에 있던 시민, 학생들이 가로수를 쓰러뜨려 그들의 시내진출을 저지하며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지프차와 트럭에 탄 보병들이 바리케이드 부근으로 접근하면 시민들이 몰려가 지프차와 총을 빼앗았다. 보병들은 무기를 빼앗긴 채 재빨리 도망쳤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되풀이 되는 동안 나도 시위대에 합류하며 한국전력공사 앞에서 서부경찰서 사이에 3개의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구술 : 김용대, 현사연 조사)
- 고속도로를 통해 밤을 새워 광주에 온 20사단의 일부 병력이 광주공단 입구에서 무장한 시위대와 충돌했다. 이 병력은 전방에 있던 보병부대로 27일 단행되는 진압작전의 주력부대가 된다. 이 부대의 공식적인 이동 승인은 22일 받게 되는데, 이날 미리 도착한 것은 사전 승락을 받고 출발한 것인지, 작전지휘권자인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결국 승인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됐건 공식 승인 이전에 현지에 도착한 것이다. (10일간의 취재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