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예배라고 하면 일정한 형식과 절차를 따라 거행하는 종교적인 예식을 생각하고 그것을 예배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뜻으로 예배를 이야기한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 : 1)
로마서 12장이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11장까지가 죄사함 받고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으므로....구원을 얻었으므로.... 그러므로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이것이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첫 번째 문제가 ..... 영을 드리거나 혼을 드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몸을 하나님께 맏겨라 입니다....그러면 영과 혼은 어디 갔습니까....영과 혼이 몸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인간을 총체적인 하나로 인식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따로따로 때어서 설명은 할 수 있으나 실제 생활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하면 신비주의로 가게 마련입니다.
두 번째 문제가 ....너의 몸을 산 재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예배입니다.
너희는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려라.. 영으로 예배드려라... 그것이 영적 예배니라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전 인생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그러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다시 한번 믿음을 확인하고 교제하는 것이 주일예배입니다.
이 본문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사실 거꾸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사실 주일예배에 목숨 겁니다....평상시 살아가는 것은 불신자와 똑같은데 무엇만 다르냐 하면 주일날 교회 나가는 것만 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주일예배 잘 드려야 지요....그러나 그보다 더 잘 드려야 할 예배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그게 영적예배입니다. 우리가 거꾸로 배우고 거꾸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그 제물이 자기 것이 아니고 제물을 받는 하나님의 것이란 뜻입니다.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자기 인생의 목적이나 자기 꿈을 이루려고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드러내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 몸을 산 채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공급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신학용어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므로 너희 몸을 산 재물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원래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 것인 줄 알고 임의로 사용하고 살게 된 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알고 살면 아무리 잘살아온 것 같아도 결국 늙고 노쇠하여져서 남는 것은 허무와 고통과 슬픔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을 구원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이 오직 죽어서 가는 피안의 세계만을 위한 것이라면, 다시 말해 구원이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만 보증하여 그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을 대면할 필요도 없고 이 땅에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지금 이 현실에 있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고 지금 내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씀입니다...그러니 구원이 저 피안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니고...이 땅에서....지금 그리스도의 주권이 우리 삶과 우리의 전 인격에 실제로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육 그 전부를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것이고 그 소유하신 전부를 구원하신 것입니다.....그러므로 구원과 영생은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현재진행형이지 영적인 비밀한 지식을 얻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때 사영리(4가지 영적원리)를 배우고 그 원리를 따라 전도한 경험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계시는데....2 당신은 죄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만날 수 없습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셔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다리를 만들어 주셧습니다. 4 그러므로 당신은 그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었으면 영접 기도하십시다. 하여 함께 기도 한 후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다” 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구원의 확신을 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라는 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단순히 그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베드로가 확신에 차서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은 하였지만 고백할 당시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근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하나님이 소망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산상수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것이요라고 합니다....여기에 애통은 십자가에서 일어나는 사망에 대한 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위로받는다는 말이 그 애통에 초대받아서 위로받는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초대받아 참여하는 것 그것 자체가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4영리를 배우면서 십자가의 초대가 무엇인지...회개와 심판이 무엇인지 거듭남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하고 사(4) 영리로 구원의 확신을 스스로 가지고 말았습니다....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다고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강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겨대고 강변한다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것이 그런 영적 지식을 깨달았다고 완성된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과의 전인격적 관계로 얻어지는 구원이 아닌 구원받는 비결만 깨달으면 거듭난다는 오직 믿음주의 앞에 허망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4) 영리식의 구원으로 이루어진 믿음은 사람을 더 공허하게 만듭니다.
구원받은 자기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정체성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삶을 경영하는 주체가 여전히 자기가 되고 자기라는 틀 안에 같혀서 ..자기의 꿈과 소원만 바라보고 사는 것....베드로가 그랬지요...자기 세계관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수님 죽고나니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없었던 베드로는 나는 고기 잡으로 간다하고 자기 고향 갈릴리로 가버렸습니다. 그러한 삶은 공허해지고 걱정과 근심이 쌓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허해진 자기의 신앙을 매우기 위하여…. 무엇을 추구하느냐하면…. 신비한 영적인 체험을 갈구하게 됩니다. 기도원에서 불 받았다고 온 강당을 대굴대굴 구르고....사람들 새워 놓고 훅 불어서 쓰러뜨리고....금식기도원 같은데서 개처럼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괴상한 소리 내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난장판이 됩니다.. 그런 체험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그런 난장판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빠뜨리는 것이 아니고 넘어진 사람도 일으켜 세웁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자비와 양선으로.... 오래참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초월적인 신비한 현상을 목도하게 되면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런 은사운동은 한때 미국에서 유행했던 빈야드운동을 배워온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복잡한 거 싫어하고 눈에 보이고 금방 효험이 나는 것 같은 신비한 초월적 현상 앞에 맥을 못 추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무얼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느냐.....믿기만 하라고 합니다...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신비한 현상에 미혹 당하여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관계 속에서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전 인격적인 부활의 신앙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 허공에 떠 버리고 맙니다.
오늘 롬 12:1절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너의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꿈은 너무 협소하고 작아 진리를 담을 수 없으니 거기에 매여 있지 말고 하나님의 꿈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광대 무한한 우주의 질서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인생도 내가 만들어 태어난 것이 아니고 장차 올 죽음도 내가 만들어 낸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은 네 의지가 결정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으니 영원하시고 광대하시며 무한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 순전히 항복하여지는 것이 순리적인 삶이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성경이 설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