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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1일 아침, 서울 시위대 병영에서는 소리없이 깃발이 내려갔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령이 떨어진 날이었다. 이날 시위 제1연대 제3대대에서 부관을 맡고 있던 정위 김혁(金赫, 본명 金學韶)은 총을 내려놓아야 했다. 황제의 군대가 스스로 해산 명령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기 반납을 거부하고 봉기한 이들도 있었다. 시위대 봉기병들은 대부분 지방 의병부대와 합류했고, 항일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김혁은 그 자리에서 총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다.
경기도 용인 기흥읍 농서리. 1875년 10월 6일, 이 마을에서 태어난 김혁의 집안은 경주 김씨 갈천공파(葛川公派)였다. 시조인 갈천공 김원립(金元立)은 1636년 병자호란 때 능주목사로 의병을 모아 과천에서 청군과 맞섰던 인물이었다. 고조인 김용원은 진사, 증조부는 증부제학을 지냈다. 아버지 김태식은 법부 참서관을 역임했다. 대대로 관직에 몸담아 온 지방 양반 가문이었다.
8세부터 21세까지 향리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스승은 동전 맹보순(孟輔淳)이었다. 당시 한강 이남에서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던 맹보순은 신갈에 사는 김화식의 초청으로 용인향교에 부임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1908년 기호흥학회가 설립되자 이 학회에서 활동했으며, 1910년 국권 피탈 직후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연락망을 뒷받침했다. 만주 안동현에서는 독립운동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며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스승이 이런 인물이었으니, 제자의 민족의식이 어디서 형성됐는지는 길게 설명이 필요없다.
1898년 6월 22일, 김혁은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건양 원년(1896년) 정월에 설립돼 융희 3년(1909년) 9월까지 존속했는데, 1898년부터 1904년까지가 전성기였다.
교육과목은 전술학·군제학·병기학·축성학·지형학 등 군사학과 불어·독어·영어·중국어·러시아어·일어 등 외국어학이었다. 군사교범이 대부분 외국어로 된 외국 서적이었고, 당시 대한제국의 군제가 열강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1900년 1월 7일 졸업. 그는 무관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다. 졸업식은 함녕전(咸寧殿)에서 열렸고, 고종이 대원수 자격으로 직접 참석해 졸업장을 수여했다. 같은 달 19일, 육군 참위(參尉)로 임명됐다. 이후 친위 제1연대 제1대대, 시위 제1연대 제3대대를 거쳐 1903년 4월 부위(副尉), 1906년 4월 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 부관으로 임명됐다. 군대해산을 맞은 1907년에는 정위였다.
군인은 무기를 빼앗기면 끝인가. 적어도 김혁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그는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1910년에서 1913년 사이, 그는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했다. 정확한 입교 시점을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1914년 4월 29일 대종교 참교(參敎)에, 1917년 11월 11일 지교(知敎)에 임명되는 것으로 보아 1910년에서 1913년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만주 지역 기록에서 '김학소'가 아닌 '김혁'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이 시기 대종교 입교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대종교는 1909년 1월 15일(음력), 나철이 오기호·강우·유근·정훈모·이기·김윤식·김인식·김춘식·최전 등 수십 명과 함께 서울 북부 재동 취운정하 8통 10호에서 북쪽 벽에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단군교를 민족종교로서 새로이 중광(重光)한 종교다. 단군사화(檀君史話)를 신앙의 원천으로 삼되, 그것을 역사적 실체로 받아들이고 민족 자존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나철이 중광 직후 발표한 단군교포명서에는 이런 논리가 있었다. 단군교를 믿은 왕조는 융성했고, 그렇지 않은 왕조는 쇠망했다는 것. 따라서 지금 조선이 살아남는 길은 단군교를 되살리는 것 외에 없다는 것. 거칠게 말하면, 종교를 통한 민족 재건론이었다. 김혁이 이 논리에 공명했다는 것은 이후 그의 행적이 증명한다.
대종교는 빠르게 세를 불렸다. 1914년 5월 13일에는 총본사를 서울에서 만주 청파호로 옮겼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각지에 시교당이 설치됐고, 신도가 수천 명에 달했다. 만주로 이전한 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하면서 무장독립운동의 거점에 더 가까이 붙겠다는 선택이었다. 대종교총본사가 화룡현에, 북로군정서가 왕청현에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19년 3·1운동이 터졌다. 40대 중반의 나이였던 김혁은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단신으로 만주 유하현으로 망명했다. 1919년 5월의 일이었다. 당시 유하현 삼원보 일대에는 한족회·신흥무관학교·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김혁은 대종교도였으므로 자연히 대종교인들이 조직한 단체를 찾아 나섰다.
당시 백두산 서남쪽 봉천성 무송현 하북 지역을 중심으로 흥업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화룡현의 대종교총본사, 왕청현의 북로군정서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하는 병농겸행의 원칙으로 운영됐다. 1919년 8월, 김혁은 흥업단에 합류해 부단장 직을 맡았다. 단장 김호, 총무 윤세복, 재무 이원일, 경호 오제동, 교섭 이현익이 함께였다.
1920년 8월, 흥업단을 떠나 북로군정서로 옮겼다. 북로군정서는 그해 10월 왕청현에서 대한정의단과 길림군정사가 연합해 조직된 무장독립운동 단체였다. 주요 구성원 대부분이 대종교 신자였다. 그들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이상국가 배달국을 지상에 재건하겠다고 했다. 총재는 서일,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김혁이 북로군정서에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920년 8월 맹부덕의 중국군이 독립군을 '토벌'한다고 했을 때, 중국 측 평가 문서에 그의 이름이 서일·김좌진·현천묵·나중소·이천을·윤창현·윤우현·김재룡과 함께 북로군정서의 중심인물로 나온다. 특히 이 문서에서는 군대 조련 방식과 관련해 구한국 육군식 훈련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 언급된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이자 정위까지 지낸 그가 군대 조련과 사관 양성에 기여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
1920년 9월 9일,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제1회 졸업식이 군정서 본영에서 열렸다. 소장은 사령관 김좌진, 교수부장 나중소, 본부교사 이범석, 학도단장 박영희였다. 이날 김혁은 조성환과 함께 축사를 했다.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자리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가 벌어졌다. 화룡현 일대 골짜기에서 열흘 남짓의 시간 동안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연속 승리를 거뒀다. 청산리전투에 김혁이 직접 참전했다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그의 위치와 역할로 보아 전투의 준비와 진행에 일정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청산리 이후의 길은 험했다.
전투가 끝나고 1920년 음력 10월, 봉천성 안도현 삼인방에서 홍범도·이청천 등 수백 명과 함께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의용군을 조직하고 부관을 맡았다. 1921년 음력 1월에는 길림성 도목구에서 김좌진·서일 등과 함께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를 합쳐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군사부장이 됐다. 이후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한 독립군단은 러시아로 건너갔으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만주로 돌아왔다. 1922년 8월 30일, 환인현 남구 마권자에서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한교회·대한광복단군영·대한정의군영·대한광복군총영·평북독판부·통군부 등 8개 단체 대표 71명이 모여 대한통의부를 조직했다. 김혁은 군사부감이 됐다.
1924년 3월에는 북만주 동빈현을 거점으로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했다. 총재 현천묵, 군사부장 조성환, 서무부장 나중소, 재무부장 계화 등과 함께 참모로 활동했다.
1925년 3월 10일, 영안현 영안성에서 신민부(新民府)가 창립됐다.
그해 1월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가 열렸다. 참석 단체 대표들은 대한독립군단의 김좌진·남성극·최호·박두희·유현, 대한독립군정서의 김혁·조성환·정신이었다. 이들이 모여 신민부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부여족통일회'라는 명칭은 대종교 역사관의 표현이었다. 대종교는 단군의 고조선에서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민족사를 근간으로 삼는다. '부여족'이라는 말 자체가 그 민족사관을 담고 있었다.
신민부는 3권분립 구조였다. 중앙집행위원회(행정), 검사원(사법), 참의원(입법)으로 나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중앙집행위원회에 권력이 집중됐다. 창립 당시 위원장에 추대된 인물이 김혁이었다. 나이 50세, 항일 경력 6년, 구한국 정위 출신. 군사부위원장은 김좌진, 참모부위원장은 나중소, 외교부위원장은 조성환이 맡았다. 총사령관도 김좌진이 겸임했다.
신민부의 간부 구성은 대종교 계보를 그대로 보여준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에서 부총재 현천묵을 거쳐 신민부 위원장 김혁으로 이어지는 라인은, 청산리 이후 10년의 대종교 무장세력 계보다. 그 바탕에는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있었다. 대종교인들은 단순히 같은 종교를 믿는 것을 넘어, 단군이 세운 나라를 되찾는다는 역사적 사명을 공유하고 있었다.
신민부는 표면에서 종교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호도 단군기원이 아닌 임시정부의 민국 연호를 썼다. 하지만 독립군 양성 기관인 성동사관학교를 목릉현 소추풍에 세우면서 교장으로 임명된 것은 김혁이었다. 부교장 김좌진, 교관 박두희·오상세·백종렬이 함께했다. 성동사관학교는 전후 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독립군 간부로 활동하게 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배운 것이 여기서 쓰였다.
젊은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에서 김혁의 사람됨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당시 신민부에서 활동하던 청년 이강훈은 직접행동으로 적의 수뇌를 처단하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 김혁은 호를 직접 지어줬다. '청뢰(靑雷)' - 청구반도의 우레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젊은 혁명가의 당연한 포부일 것이나, 군은 교육가로서 많은 혁명투사를 배출시키고 마지막에 지금 말하는 직접행동을 실천하도록 의지를 굳히고 있음이 어떨까."
총보다 교단(校壇)을 먼저. 현장의 투사이기 전에 다음 세대를 만드는 사람. 김혁이 독립운동에서 맡은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이 한마디가 압축한다.
그는 위원장 직책에 묶여 본부에만 있지 않았다. 1926년에는 부하 엄우영을 대동하고 밀산 평양진으로 가 현황을 살폈다. 이강훈을 데리고 밀산현 전역을 순회했다. 같은 해 4월 15일에는 김좌진과 함께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서한을 보내 내정·경제·무력 준비 등 여러 방면의 지도를 요청했다.
살왜단도 그의 작품이었다. 위하현 석두하자에서 송상하·이철우 등과 협의해 상해의 살왜단 이재희와 연락, 대원 약 200명의 살왜단을 조직했다. 총단장은 김준, 각 지방 단장은 신민부 구장이 맡는 구조였다.
고려혁명자후원회 위원장도 겸임했다. 혁명자가 체포·구금됐을 때, 가족이 빈곤에 빠졌을 때, 교전으로 부상을 입었을 때 물질적·정신적으로 지원하는 조직이었다. 석두하자 한인학교에서 각 단체 대표들이 모여 창립됐으며, 회원이 약 천 명에 달했다. 남북만주를 아울렀다.
1928년 1월 25일 새벽, 일제는 신민부 총회 정보를 입수하고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과 중국 순경 합계 42명을 동원해 석두하자 마을을 포위했다. 음력 정초를 기하여 신민부 총회가 열린다는 첩보였다. 오전 8시경 조선인 부락 17호를 일제히 수색해 권총 탄환 80여 발, 태극기, 상해·광동 등지 독립운동단체와의 연락 문서, 미국 하와이 독립운동단체 발행 신문, 러시아 문서 등을 압수했다.
이날 마을 순행을 나간 김좌진만 화를 면했다. 체포된 10명 중 위원장 김혁이 있었다.
하얼빈 유치장에서 일화가 하나 전한다. 부하 청년 하나가 체포돼 같은 감방에 들어왔다. 김혁은 일경을 불러 크게 화를 냈다. "내가 아무리 체포된 몸일망정 혁명 운동자도 아닌 청년을 같은 방에 가두느냐." 일경이 즉시 그 청년을 다른 방으로 옮겼고, 며칠 뒤 농민으로 판단해 석방했다.
1928년 3월 10일 신의주경찰서로 이송됐다. 4월 4일 신의주 검사국에 회부되어 신의주 지방법원 예심판사 사토에게 6개월간 조사를 받았다. 조사 중 동지 황처준이 폐병으로 사망했다. 10월에 14명 중 9명의 유죄가 확정됐다. 김혁은 그 9명에 포함됐다. 나이 54세, 기록에는 김학소로 적혀 있었다.
1929년 6월 12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구형보다 3년 많았다. 함께 재판받은 유정근은 15년, 김봉훈은 6년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공소를 취하해 10년형이 확정됐다.
7년여의 수형 생활 끝에 1936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했다. 출소 후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254번지 장남 김용기 집으로 돌아갔다. 재산은 가옥과 토지 합쳐 견적 약 500원, 소작농. 한때 만주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의 귀환 풍경이었다.
1937년 4월 13일,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동삼이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서울 심우장에서 5일장이 치러졌다. 김혁이 문상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공적 행적이다.
1939년 4월 23일, 김혁은 용인 농서리 자택에서 순국했다. 옥고로 인한 병환이 끝내 낫지 않았다. 나이 65세.
1919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만주로 건너간 사람은 많지 않았다. 조상의 묘가 있고, 부모와 가족이 있는 곳을 떠나는 것은 결심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김혁을 움직인 것은 여러 겹의 힘이었다.
갈천공 김원립의 병자호란 창의 정신은 집안에 내려온 이야기였다. 스승 맹보순이 보여준 구국의 실천,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배운 군인의 책임, 그리고 대종교가 제시한 민족 재건의 비전. 이것들이 한 사람 안에서 합쳐졌다.
그는 직접 싸우는 현장 투사라기보다 참모였다. 만주 독립운동의 여러 단체를 관통하며 - 흥업단 부단장,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군사부장, 대한통의부 군사부감, 대한독립군정서 참모,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성동사관학교 교장 - 그가 맡은 자리들은 하나같이 조직을 세우고 사람을 길러내는 역할이었다.
그 중에서 성동사관학교 교장이 가장 그답다. 500여 명의 졸업생. 전투는 그들이 했다.
대종교가 만주 독립운동의 핵심 종교 공동체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흥업단·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정서·신민부, 이 단체들이 모두 대종교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됐다는 것도 그렇다. 그 조직들을 관통하며 20년을 버틴 김혁의 삶은, 대종교와 만주 무장독립운동이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를 한 사람의 이력으로 보여준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서 김규식이 대종교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 신자들은, 조상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는 결심을 굳게 한 애국적인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그 무렵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던 김혁은, 이 말이 묘사하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총을 내려놓은 군인은 교단에 섰다. 그리고 500명의 독립군을 길러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