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준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22)를 읽고
정갈하고 슬픈 곡조의 정서를 골라서 잘 쓰는 박준 시인의 시집을 읽는 것은 자신을 갈고닦아 정제된 마음을 적은 시어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시 본문에서 골라낸 문장들인 소제목들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모두 시집의 제목이 되어도 망설임 없이 골랐을 것이다.
누군가에서 쓴 편지 같은 시들이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장마」를 읽으며 이 시집의 제목인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 있겠습니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밑줄을 긋고 귀 접기를 했다. 슬픔을 말하지 않겠다는 문장과 다르게 이 시집은 슬픔으로 버무려진 시들의 묶음이다. 그 슬픔이 흘린 눈물이 비가 되어 흘러넘쳐 장마가 되었기에 함께 장마를 볼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편지들이었다.
편지 형식의 글들이 갖는 특성이 다정해서 쉽게 읽힌다는 설명도 기억났다. 이 시집을 읽으며 ‘정말 그렇구나!’하고 한 발짝 더 감겨들었다. 모든 시가 편지로 읽혔고, “우리들의 천국”은 어디쯤이었을까를 생각하게 했고, “당신”(「그해 봄에」)은 누구일까를, “그해 봄에”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혹시, 시인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나였을 수도 있겠지만, 누구였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했다. 다음 시를 보자.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처음 던진 질문은왜 봄에 죽으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내게 고개를 돌려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봄에는 널려 있었다 ― 「그해 봄에」 일부
마지막 연에서 다음 장을 넘길 수 없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내 맘 같지도 않은 일들’이 어찌 봄에만 있으랴, 온 생애를 걸쳐 퍼석거리는 자갈밭 길을 ‘이마저도 행복’이라고 다독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특히, 봄에는 더 그런 것 같다. 4월, 5월로 상징되는 굵직한 현대사를 가진 우리이기에 봄에는 ‘이대로 대책 없이 또 한 해를 죽지도 못하고 살아내야 하나?’ 그런 어쩌지 못하는 생에 대한 생각들이 읽힌다.
시집 전체적으로 낮고 슬프고 아프다. 비어 있지만, 어딘가를 과거에서 미래까지를 연결하려고 애를 쓰는 마음을 보내고 있다. 당신을 그리워하며 ‘나 여기 있다’라고 가라앉힌 밀도 높은 슬픔의 밀들로 편지를 쓰고 있다. 왠지 모르게 목젖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가 「숲」을 읽으면서는 참았던 눈물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시인이 오래전에 보냈던 말들이 내게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고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고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 「숲」 부분
무언가 알 것 같은 슬픔이 굴러다니는 시집이었다. “맑은 당신의 눈앞에, 맑은 당신의 눈빛 같은 것들이” 알 것도 같은 슬픔이라는 “이름으로 가득한” 편지들이었다.
시 편마다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이 꼭 있었다. 멈춰서 다시 읽고, 밑줄 긋는 순간이 좋았다. 이 시집을 읽은 것이 그런 문장을 발견한 나와 숨은 그림 찾기처럼 문장을 숨겨 둔 시인과의 놀이 같았다. “어디쯤에는 그날 흘리고 온 다짐 같은 것도 있었다”(「우리들의 천국」), “더 오래여도 좋다는 듯 눈빛도 제법 멀리 두고”(「메밀국수」), “떠나는 일보다 머무는 일이 어렵던 가을이었다”(「능곡 빌라」), “무엇을 기다리는 일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여겨지기도”「호수 민박」) 등 시 속에 이런 빛나고 멋진 문장들이 있는 것을 보면, 시인이 애초부터 이 문장들을 붙잡고 시를 써 나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가장 좋았던 문장은 “더해야 할 말도 덜어낼 기억도 없는 그해 여름의 일입니다”(「여름의 일」)이다. 알 것 같은 슬픔이 적힌 시집을 읽던 여름이었다.
첫 번째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에서는 자기 내면을 향한 격정의 슬픔이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당신’을 향해 더 낮고 깊은 슬픔 속으로 걸어 들어간 긴급 구조요청 같았다. 내가 손을 내밀었다는 것을 그가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서둘러 손을 내밀었다.
첫댓글 좀 특이한 시 감상 잘 했어요.
시어들이 생각을 깊이 하게 만드네요.
감사합니다~ 현대시집 리뷰 과제로 읽은 시집인데 참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