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 혜항慧航법사 문답
묻건대, 우익대사께서 “명자위 중 참 불안(名字位中眞佛眼)”이라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답하되, 거짓 명제이다. 육즉은 모두 부처이다. 부처는 모두 안목을 갖추었다. 부처님의 안목(佛眼)은 모두 진실하거늘 달리 거짓 불안이 있단 말인가? 이즉불위 또한 참 불안이다. 그렇지 않으면 《열반경》에서 어찌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다.” 말씀하셨겠는가? 만약 이즉불이 명자즉불 만하지 못하여 마땅히 거짓 불안이라면 명자즉불 또한 관행즉발만하지 못하여 또한 마땅히 거짓 불안이겠는가?
묻건대, 우익대사께서 “명자위 중 참 불안”을 말씀하신 후 또한 “결국에 어떤 사람에게 부촉할지 모른다(未知畢竟付何人)”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답하되, 인광대사께서는 이 두 문구에 따르면 곧 우익대사께서 “명자위에 거하심을 보이셨다(示居名字)” 하심은 얼마나 잘못인가! “마침내 어떤 사람에게 부촉할지 모른다.”
이는 겸손에 보이지만 감히 감당할 수 없다는 뜻으로 결코 “명자위에 거함을 보인다”는 말이 아니다. 어조는 비록 겸손해 보이지만, 말투를 분석하고 그 뉘앙스를 뽑아내면 사람들로 하여금 우익대사가 남악대사의 상사위, 지자대사의 관행위를 이어받은 후 또한 앞선 대사를 이어받아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 자인하고 있음을 아주 쉽게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명자위는 어느 것이나 다 그러니, 또한 뭐 그리 소중하겠는가? 《법화현의法華玄義》에서 이르시길, “일체 과거불에게 들은 한 마디가 있으니 명자즉이다(於諸過去佛 若有聞一句 名字卽也).” 형계대사는 《지관의례止觀義例》에서 이르시길, “만약 가명假名이라면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처운 법사가 《지관의례수석》에서 해석하여 말하길, “만약 가명이라면 명자위 사람은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는 명자의 사람이 많음을 드러낸다.”
《법화현의의석첨》에 이르시길, “명자위에 들어감이 아니다(名字非位).” 명자위에 퇴전이 있을 수 있으니 진정한 의미로 입위入位가 아니라는 뜻이다.
묻건대, 인광대사께서는 명자위를 “대개원해大開圓解”로 삼았는데, 이 뜻은 어떠한가?
답하되, 거짓 명제이다. 육즉은 원해가 끊임없이 전해져 번갈아 깊든가 얕지, 결코 대개. 소개가 없는 두리뭉실한 말이다. 만약 반드시 대개라 말하려면 《법화경》에서 “불지견이 열려야 한다(開佛知見)” 말하고, 위位는 원교의 초주에 있다.
명자위는 번뇌를 조복하지 못해서 언제나 퇴전할 수 있고 심지어 삼악도에 떨어지니, 어떻게 “대개원해”라 말하겠는가?
묻건대, 인광대사께서 “명심견성은 해오이지 증오가 아니다.” 말씀하셨는데, 이 뜻은 어떠한가?
답하되, 와전된 것이다. 《법화현의》에 이르시길, “원신圓信. 원행圓行은 각 부문이 서로 통하지 못하고 각각 구별되어 나누어져 있지(歷別) 않음으로 말미암아(원융하여), 이번 생에 초주에 즉입하여야 불성을 친견할 수 있다.
“「견성」은 원교의 초주, 분증의 위임을 알 수 있다.”
《수습지관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에 말씀하셨다. 《화엄경》에서 이르시길, “처음 발심하였을 때 바로 정각을 성취하여 제법의 참된 자성, 모든 지혜의 몸을 요달하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르시길, “초발심보살은 여래의 한 몸을 얻어 무량한 몸을 짓는다.” 또한 이르시길, “초발심보살이 곧 부처님이다.” 《열반경》에 이르시길, “초발심과 필경의 얻음과 다르지 않나니, 이와 같은 두 마음 중에 앞 마음이 어렵다.” 《대품경》에 이르시길, “수보리여! 어떤 보살마하살이 초발심에서 곧 도량에 앉아 정법륜을 굴리면 이 보살은 부처님과 같은 줄 알지라.” 《법화경》에서는 용녀가 구슬을 바침으로써 증득한다. 이와 같은 여러 경전은 모두 초심에 일체 불법이 두루 갖추어져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곧 《대품경》 중 아자문阿字門이고, 곧 《법화경》중 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을 열게 하기 위함이고, 곧 《열반경》 중 불성을 본 까닭에 대열반에 머묾이다.
【보충】 연지蓮池. 지자智者. 우익藕益. 선도善導 네 분 대사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 진사혹塵沙惑은 언제 다 끊어질까?
보통 불법과 비교하면 염불법문은 견혹. 사혹. 진사혹을 다 끊을 필요가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중생은 자력에 기대어 미혹을 끊고자하여도 가능성이 없다.
견혹見惑의 88사使와 사혹의 81품品은 거세게 이는 물결처럼 도도하다.
견혹을 끊으면 마치 40리의 거세게 이는 물결을 끊는 것과 같으니, 하물며 여전히 사혹思惑이 있음에랴! 정말 “칼을 뽑아 물을 갈라도 물은 다시 흐르는 것”과 같다. 설령 견혹을 끊을지라도 비로소 초과인 수다원과를 얻을 수 있다.
연지대사께서는 명나라 때 스님으로 늘 마음속 깊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시대에는 수다원과를 얻은 성인을 찾을 수 없지만, 요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불과를 증득할 수 있다고 여긴다. 우리는 조사들께서 어떻게 몸소 모범을 보이셨는지 살펴볼 것이다.
지자대사께서는 천태종의 조사이다. 그가 왕생할 때 제자는 물었다. “스승님, 이번 생에 수행하여 어떤 과위를 증득하셨습니까?” 지자대사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대중을 거느리지 않았다면 육근이 청정하였을 것이다. 나는 자신을 덜어 남을 이롭게 하느라 오품을 증득하였을 뿐이다.”
「오품五品」은 원교의 오품위, 즉 수희. 독송. 설법. 겸행육도. 정행육도이다.
원교의 오품위는 어떤 수준인가? 여전히 견혹. 사혹을 끊을 수 없고, 단지 견혹. 사혹을 복주하여 번뇌가 현행을 일으키지 않게 할 뿐이다.
이런 수준은 육즉 (이즉불. 명자즉불. 관행즉불. 상사즉불. 분증즉불. 구경즉불) 한가운데 있고, 관행즉불에 상당하여 관행의 과정 한 가운데 있다.
우익대사께서는 정토종 제9대조사로 한평생 정진을 그치지 않았다.
종문에서 개오하였고 대통하신 분으로 우리에게 약 3백여 권의 대단히 많은 저작을 남기셨다. 명종命終에 임할 때 한 제자가 그의 과위를 물었다. 그는 게송을 지어 “명자위 중 참 불안을 결국에 어떤 사람에게 부촉할지 모르겠네.” 답하시어 가는 명자즉불名字卽佛임을 표명하였다. 명자즉불이란 무슨 의미인가? 그는 견혹. 사혹을 끊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속 조복하여 모두 복주伏住하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이 두 분 조사들께서 우리에게 시현하여 주신 것은 모두 범부이다.
현대의 수행인은 걸핏하면 어떤 과위를 증득했다 말하니, 그래 그들이 지자대사와 우익대사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똑똑히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 조사들께서 왕생하시기 전 과위를 시현하신 은덕은 대단히 크니, 아직 증득하지 못하였는데 증득하였다고 말하여 범부로써 성인을 남용하는 후세 사람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주셨다! 우리는 자신이 모두 범부의 자격임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말법시대의 중생은 모두 업장이 깊고 무거워서 소용돌이치는 생사고해 속에서 우리는 아미타부처님의 자비원력을 여의면 건너가기 어렵다.
우리는 반드시 이렇게 자신을 정확히 아는 현명함을 지녀야 한다.
선도대사께서는 준엄하게 자신이 죄악생사 범부라고 해부하셨다.
우리의 생각은 업이 아님이 없고, 죄가 아님이 없다. 그래서 현현하는 과보는 매우 여의치 못하고, 매우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 우리는 바로 아미타부처님께 기대어야 한다.
염불법문은 우리가 업을 지닌 채 왕생하여 삼계를 횡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ㅡ대안법사, 《정토자량신원행淨土資糧信願行》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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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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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법문은 우리가 업을 지닌 채 왕생하여 삼계를 횡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한다......!!!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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