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의 힘] 미국 (2) 신의 한 수, 루이지애나 구입
당시 막 걸음마를 뗀 미합중국은 안전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또 경계선 안에서 제약을 받고 있던 터라 강대국이 되고자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은 일찌기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오하이오 강까지 진출했지만 미시시피로 이어지는 지역, 즉 뉴올리언스로 내려가는 서쪽 하구는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세 안에서 아메리카의 프랑스 사령관은 멕시코 만에서 구세계뿐 아니라 현재 미국의 심장부라 할 광활한 서부 지역과도 교역할 수 있었다.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이듬해인 1802년, 토머스 제퍼슨은 다음과 같이 썼다.
“지구상에 단 하나의 장소가 있다. 이곳의 소유주는 본래 우리의 적으로, 그곳은 다름 아닌 뉴올리언스다.”
프랑스는 골치 아픈 주인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해결책은 전쟁이 아니었다.
1803년, 미합중국은 프랑스로부터 뉴올리언스가 있는 루이지애나 지역 전체의 지배권을 사들였다. 이 지역은 멕시코 만에서 시작해서 북서쪽으로 로키 산맥의 미시시피 강 지류드르이 상류까지 뻗어있다. 이 땅의 면적은 오늘날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그리고 통일 독일을 합친 넓이와 맞먹는다. 신생 미합중국은 이 땅을 흐르는 미시시피 강의 유역을 기반으로 번영으로 가는 길을 닦는다.
1천5백만 달러짜리 서명 하나로 1803년에 미국은 루지애나를 구입하여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이는 곧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내륙 수로 수송권>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역사학자 헨리 애덤스는 이렇게 썼다.
“미합중국이 투자 대비 이렇게 많은 것을 얻은 일은 이제껏 없었다.”
거대한 미시시피 유역에는 전 세계 다른 하천들에 비해 훨씬 긴 가항수로들이 많다. 수원이 산악지대에 있지도 않으며, 그토록 광대한 거리를 가로질러 대양으로 가는 길 내내 그만큼 차분하게 흐르는 강은 그 어디에도 없다. 풍부한 유역 수계(水系)의 공급을 받는 미시시피 강은 미니애폴리스 부근에서 발원해서 남쪽으로 약 2,897킬로미터를 흘러 멕시코 만에서 끝난다. 이렇듯 강들은 큰 항구로 이어지며, 수상기를 이용한 운반은 예나 지금이나 육로 운송보다 훨씬 싸게 들어 당시 한창 상승일로이던 교역을 위한 천연 수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처럼 미국은 지리적으로 전략적 깊이를 확보함과 동시에 방대하고 비옥한 토지, 그리고 사업을 펼치기에 적합한 대서양 항구들이라는 대안을 얻었다. 또한 동부 해안을 새 영토와 연결해 주는 동서 루트를 확보했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수계는 인구 밀도가 희박한 지역들을 서로 묶어주면서 단일 통합체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당시 신생 국가는 거인, 다시 말해 대륙의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의식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점차 서쪽으로 전진하면서도 남쪽을 호시탐탐 엿본 것은 물론 <왕관에 박힌 보석>인 미시시피의 수호에도 신경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1814년, 영국은 물러갔고 프랑스는 루이지애나를 포기했다. 이제 스페인 사람들만 내보내면 됐다. 그리고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미국이 세미놀족을 스페인령인 플로리다까지 밀어내자 스페인 본국은 머지않아 정착민 물결이 밀려오리라는 것을 감지했다. 1819년, 스페인은 플로리다뿐 아니라 덤으로 꽤 넓은 토지까지 미합중국에 넘겼다.
루이지애나 구입은 미국 입장에서는 심장부를 얻은 격이었다. 그런데 1819년에 맺은 대륙횡단조약도 거의 이에 버금가는 가치를 안겼다. 스페인은 미국이 현재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의 경계인 북위 42도선 위인 극서부 지역에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했다. 반면 스페인은 그 아래인 미국 영토의 서쪽을 지배한다는 계약 내용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미합중국은 ‘태평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즈음 대다수 미국인들은 1819년에 플로리다를 얻은 것을 가장 큰 승리로 여겼지만 당시 국무장관인 존 퀸시 애덤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결정적으로 태평양 방향의 경계선을 획득한 것이 우리 역사에 위대한 시대를 열게 한다.”
그런데 스페인어 사용자들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멕시코였다.
멕시코와의 영토 분쟁,
역사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루이지애나 구입 덕분에 미합중국의 면적은 두 배로 늘었지만 1821년에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뉴올리언스에서 불과 3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두 나라가 마주보는 상황이 되었다. 21세기에 멕시코는 불법 노동자나 마약 공급 등 미국과의 근접성으로 인한 문제점을 야기하고는 있지만 영토 문제로 위협을 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1821년에는 사정이 달랐다. 멕시코는 캘리포니아 북부 끝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미국이 어느 정도 눈을 감고 있었지만 멕시코는 당시에도 루이지애나와 맞대고 잇는, 오늘날 텍사스를 포함한 동쪽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당시 멕시코의 인구는 620만 명이었고 미국은 960만 명이었다. 미국 군대는 강력한 영국군을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영국군은 대양을 건너야 하는 보급 라인 문제와 본국에서 4천 8백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싸워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하지만 멕시코는 코앞에 있었다.
미국은 기존의 미국인들과 새 이주민들에게 은근히 멕시코 접경지대 정착을 장려했다. 하지만 이주민의 파도가 주로 서부와 남서부에 치우치다 보니 오늘날의 멕시코에 해당되는 지역에 주민들이 뿌리 내릴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은 그곳의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 동화와 진흥책을 실시했다. 반면 멕시코는 미국만큼 축복받은 땅은 아니었다. 경작지의 질도 형편없었고 수송에 편리한 수계도 없었을 뿐 아니라 민주적 체제도 갖춰지지 않아서 이민자들이 무상으로 토지를 불하받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한편 미국은 텍사스 지역에는 지속적으로 침투해 들어가면서도 먼로 독트린을 발표했다.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이 독트린을 발표한 것은 서반구에서 더 이상 땅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경고를 유럽 세력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유럽인들이 기존 영토 일부를 잃더라도 돌려받을 수 없을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1830년대 중반이 되자 텍사스에는 멕시코와의 쟁점을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잇을 만큼 많은 수의 백인 정착민들이 자리 잡았다. 가톨릭 신자에 스페인어를 쓰는 멕시코인 인구는 수천 명을 조금 넘긴 반면 신교도 정착민들의 수는 2만 명에 육박했다. 1835년부터 이듬해까지 벌어진 텍사스 혁명으로 백인 정착민들이 멕시코인들을 몰아냈지만 전세는 대접전이었다. 새 정착민들이 패했고 멕시코군이 뉴올리언스를 향해 진군해서 미시시피 강의 남단을 지배할 수 있는 형국이 돼버렸다. 만약 실제로 그렇게 됐다면 어땠을까? 이것이야말로 근대 역사상 가장 엄청난 가정의 하나다.
하지만 역사는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의 돈과 무기, 사상의 수혜를 받은 텍사스가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텍사스는 1845년 미합중국에 귀속되었고 1846년부터 2년간 벌어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는 미국과 힘을 합쳐 싸웠다. 두 연합군은 남쪽의 이웃을 제압했고 멕시코는 결국 리오그란데 강의 남쪽 제방 모래밭에서 끝나는 영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캐릴포니아, 뉴멕시코, 그리고 현재 애리조나인 지역,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일부가 포함된 미합중국의 대륙 경계가 형성됐다. 오늘날의 경계와도 대략 비슷해 보이는 이 국경선은 대체로 천연 경계선이다. 남쪽에는 리 오그란데 강이 사막을 통과해 흐르고 있고, 북쪽에는 오대호가 있고, 국경 인근 지역의 동쪽 절반은 거주자가 드문 암석지대다. 또한 동쪽과 서쪽은 대양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에 이르러 원래 히스패닉 땅이었던 남서부 지역의 문화적, 역사적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다. 주민의 주 구성원이 히스패닉계 주민들로 빠르게 교체되고 있으며 이 추세라면 몇 십 년 안에 그들이 다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