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 李滉(퇴계이황)
1502년 1월 3일(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1년 1월 3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교육자, 화가, 시인이다.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사상가, 교육자이자 화가, 대성리학자였다.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직을 사퇴한다.
1528년(중종 23년) 27세때 생원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다가
1534년 문과에 급제, 관직에 나갔으며
홍문관의 관직을 거쳐 풍기군수 등을 역임했다.
풍기군수 재직 시절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45년 형 온계 이해가 을사사화로 희생된 뒤,
여러 번 관작이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공조참판,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사상은
그의 직제자 김효원(金孝元)이
동인의 당수가 된 이후 동인으로 전달되었으며,
남인으로 이어졌고,
북인 일부에게도 계승된다.
소고 박승임, 서애 류성룡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는데,
후일 동인이 분당된 뒤
박승임의 제자는 남인 일부와 북인 일부로,
류성룡과 그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이어진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퇴도(退陶)·퇴도만은·도수(陶叟),
본관은 진보(眞寶) 혹은 진성(眞城)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871년 70세에 별세한 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 子는 스승, 夫子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스승을 말함
진사(進士) 증 의정부좌찬성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그는 안동부사를 지낸 송재 이우의 조카이자 문하생이다.
이해(李瀣) 1496년 ~ 1550년)는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할아버지는 진사 이계양(李繼陽),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埴),
어머니는 춘천박씨(春川朴氏)이다.
동생이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다.
栗谷 李珥(율곡 이이)
1537년 1월 7일(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가 환속한 자 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1584년 48세로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 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 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중종 때의 재상 이기, 이행 형제의 재종손이자
통덕랑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휴암 백인걸의 문인이다.
백인걸(白仁傑, 1497년 - 1579년 9월 29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사림파 정치인이며 성리학자, 작가이다.
정암 조광조, 모재 김안국, 김식(金湜)의 문인이며,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은 그의 문하생이었다.
조광조와 김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기묘사화로 스승과 동료를 모두 잃고 실의속에 금강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뒤에 김안국을 찾아가 그로부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537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근무하다가 출사하였으나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반대하였으며,
그의 밀지 정치를 비난하다가 파직당했다.
그 뒤 을사사화 등으로 출사하지 않다가
1547년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그 뒤 윤원형의 몰락 이후 출사하여
1567년(명종 22) 70세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그 뒤 이조참판, 사간원대사간, 대사헌, 공조참판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을 지내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했다.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의 한사람으로 녹선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학문에 정진하여 후일 대학자가 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하에 배출하였다.
그의 종증조부는 백효연으로,
후일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는 그의 13대 종외손이다.
사후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되었다.
한성부 출신으로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이며 본관은 수원이다.
시호는 충숙(忠肅)이었다가 개시(改諡)되어 문경(文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