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수] 박정희 경제개발계획의 비밀(上): 대한민국 경제사(8)

[우보(牛步)]

박정희 경제개발계획의 비밀(上)

4.19민중항쟁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독재를 무너뜨린 희극도 잠시뿐이었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박정희가 이 땅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탄압한 독재정권의 최고책임자였다는 사실은 크게 이견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박정희가 남긴 성과에 대해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 경제를 일으켜 가난에서 벗어나고 선진사회로 나가는 기초를 세웠다는 평부터, 지금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재벌중심의 왜곡된 경제구조가 박정희 시절에서부터 비롯됐으며 수많은 국민들을 열악한 노동착취의 현장으로 내몰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명하게 갈리는 일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경제대통령 박정희, 하면 많은 사람들이 ‘경제개발계획’을 떠올린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권력을 잡고 있던 시절에는 경제가 무척 어려웠는데 박정희가 5.16쿠데타 이후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해서 드디어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박정희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경제개발계획과 관련해 이런 시각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박정희 정부 이전에도 경제개발계획은 존재했다.

예를 들어서 이승만 정부 시절이었던 1956년에는 부흥5개년계획이 있는데, 사실 이것은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 방한을 앞두고 며칠 만에 졸속으로 준비한 계획이었다. <한국일보> 1956년 2월 29일자 기사에 의하면 부흥부 5개년계획은 2월 26일부터 부흥부에서 작성에 들어가 28일에 이르러 시안이 완료됐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하루 동안 수정해서 같은 해 3월 17일에 내한한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제출했다. 우리에게 이런 경제개발계획이 있으니 미국에서 원조를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라고 주장하기 위한 용도로 급히 마련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원조자금 구걸을 위해 급조한 자료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국내에서는 1956년 6월 21일자 경향신문에서 “同계획목표가 덜레스 장관의 내한을 계기로 하여 아무런 구체적인 기초자료도 없이 한국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작성된 가공적인 수치에 불과하였던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으며 미국 관리들도 경제계획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더 우스웠던 것은, 정부가 전달한 계획안에 대해서 강한 비판이 나오자마자 담당 부처였던 부흥부는 원조자금 액수를 축소하여 수정된 계획안을 제출한 것이다. 원조 구걸이 통하지 않자 구걸 액수를 금세 낮춘 것이다. 결국 이 계획안은 비판의 포화 속에서 폐기됐다.

하지만 어쨌든 경제계획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던 상황이었다. 미국의 원조가 감소하면서 경제개발계획 수립을 통해 자립적으로 경제를 성장시켜야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해서 한미합동경제위원회는 1956년 9월에 경제계획을 입안하기로 합의했다. 합동경제위원회에서는 1957년 5월 6일, 1인당 국민소득 300달러를 목표로 하는 경제부흥 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입안과정에서 미국의 고문단을 초빙하기로 합의했으며,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하기 위해 1958년 4월 1일에 산업개발위원회를 부흥부 산하로 발족했다. 산업개발위원회는 국내의 경제관료, 경제전문가, 그리고 미국이 파견한 고문단이 참여했는데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성향이 강한 인사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정부의 통제를 최소화하고 민간기업이 주도하는 것을 경제계획의 원칙으로 했다.

실제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한 경제개발3개년계획안에는 “정부는 자유경제원칙을 존중하여 민간 기업 활동을 최대한으로 조성하는 방침을 견지”하며 “경제실현을 위하여 직접적인 통제수단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정부와 민간의 밀접한 협동으로써 계획 작성을 추진시킬 작정”이라고 명시했다.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1960년 정부통령 선거 직후 3개년계획을 발표했는데 연평균 성장률을 5.2%로 상정했으며 농업과 공업의 균형, 중공업과 경공업의 조화, 국제수지의 균형 등 자립적 균형성장을 목표로 삼았다.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과제로는 ①식량자급을 위한 생산력의 극대화 ②중소기업 발전을 통한 고용기회의 증대 ③수입대체산업 및 수출산업 육성을 통한 국제수지 개선 ④국민소비지출의 조절을 통한 민간자본 축적의 촉진 ⑤사회기반시설의 확충과 산업구조의 근대화 등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을 위한 재원은 국내저축과 정부 투자, 그리고 해외의 원조 및 차관 등을 고려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개발론자들은 균형성장론을 강조했는데, 3개년계획안에도 그런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1950년대에 넉시(Nurkse)가 주창한 균형성장론은 저개발국가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농업과 공업 등 사회 각 분야의 산업이 균형을 이루며 발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어떤 한 부분이 단독으로 발전하면 결국 다른 부문과 선순환 구조를 이루지 못해 경제가 기형적으로 왜곡된다고 본 이론이다. 3개년계획에서 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중시한 이유도 그런 이론적 기반에 입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3개년계획은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4.19혁명 이후에 잠시 들어섰던 제2공화국 민주당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준비했다.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옮겨간 세력들이 지도부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준비하며 미국과의 공조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사실상 민주당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준비한 사람들은 기존 이승만 정부 때에 산업개발위원회에서 3개년계획을 준비했던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당시 부흥부 경제고문으로 와있던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의 울프Charles Wolf 박사가 참여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당시 한국의 민주당 정부는 미국에서 가장 이름난 전략연구소인 랜드연구소의 경제부장으로 있던 울프 박사에게 경제개발계획 수립의 자문역을 맡겨 이를 근거로 미국 케네디 행정부에 원조 및 차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울프 박사는 케네디 행정부의 새로운 저개발국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울프 박사가 저개발국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대외원조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균형성장론이 아닌 불균형성장론을 도입할 것을 권고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연스럽게 이쯤에서 케네디 행정부의 새로운 저개발국정책을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알다시피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한국의 경제 상황은 무척 어려웠다. 한국전쟁 휴전 후 경제성장률은 평균 4.7% 정도 수준이었는데 1960년 이후에는 2~3% 수준으로 하락했다. 미국의 원조가 감소하니 상황이 매우 어려워진 것이다. 한편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됐지만 진보당의 조봉암 대통령 후보가 높은 지지를 받으며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등장했다. 경제가 계속 어려운 가운데 기존의 친미 정치세력이 흔들리고 진보적인 세력이 힘을 얻고 있었다. 결국 4.19민중항쟁이 일어나 이승만 정부가 무너졌는데, 반면 북한은 남한에 비해 성공적으로 경제개발을 해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정세 속에서 미국의 대한정책은 변화가 필요했고 실제 변화하고 있었다. 단순히 미국의 대한정책뿐만 아니라 저개발국에 대한 정책 자체에 변화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 변화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 로스토우의 근대화론이다. 50년대에 미국 내부에서 후진국 정책에 대한 비판이 광범위하게 제기됐는데 이를 이론적으로 종합한 이가 로스토우였다. 로스토우는 자신의 근대화론에서 1950년대 미국의 후진국 정책이 군사원조에 치중됐다는 점을 비판했다. 미국의 군사원조 때문에 원조를 받는 나라들이 과도하게 군사 부문을 확대하게 되며 이로 인해 경제 성장이 저하된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그동안 유럽에만 치중하면서 아시아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러한 나라들(후진국)의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의 저개발사회가 현대화되고 힘이 강해졌을 때 그러한(미국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면 미국은 심대한 위협을 맞게 된다. 그러한 진화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들 나라들의 식민주의적 전통, 피부색깔 문제에 대한 감정 등은 (후진국들이 미국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미국은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그러한 경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Rostow, A proposal: Key to on Effective Foreign Policy(New York: Harper & Brothers, 1957), 141~142쪽)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면, 인구가 많은 중국이 공산화되고 인도와 이집트 등 남아시아, 중동 등지에서 비동맹 운동이 일어나며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에서 민족주의 게릴라 운동이 활성화되고 있었는데 이는 미국의 이익에 배치되는 움직임이었다. 로스토우는 기존의 미국 대외정책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저개발국에 대한 경제개발원조를 제안했다. 경제개발원조를 통해 후진국의 공산화를 막고 미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며 후진국의 경제개발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진영의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후진국이 발전하면 이를 통해 선진국들의 상품시장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으며, 결과적으로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일본 같은 산업화된 국가들이 계속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고 주장했다. 후진국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면 다양하고 더 많은 상품이 필요하므로 결국 미국과 선진국들의 수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후진국의 발전이 선진국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후진국의 경제가 선진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선진국은 후진국에게 경제개발원조를 하는 과정에서 긴밀한 경제적 연결구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선진국 입장에서는 후진국이 자립적이고 자주적인 경제구조를 갖게 되면 선진국 경제에 대한 의존이 줄어들고 후진국에 대한 선진국의 영향력이 축소 및 단절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것은 선진국의 이익 측면에서 보면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경제개발원조를 받는 후진국은 원조를 제공하는 선진국의 필요와 의도에 따라 특정 선도산업 중심의 불균형성장을 추구하도록 유도되며 이를 통해 세계무역 질서에 깊숙하게 편입되는 것이다. 로스토우의 이론은 1950년대 경제개발론자 중 쿠즈네츠, 허쉬만 등의 불균형성장론을 적극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경제개발원조는 기존의 군사원조에 비해 상당히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존의 무상원조 형식을 벗어나 유상차관으로 원조의 형식을 바꿀 것으로 주장했다. 그냥 주던 원조 대신에 낮은 이자이긴 하지만 빌려주는 형식으로 바꾸자는 얘기이다. 그리고 후진국을 원조하는 과정에서 서구유럽과 일본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할 것을 조언했다. 미국을 최정점에 두고 서구유렵과 일본이 해당 지역에서 미국의 하위파트너로서 역할분담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역할분담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긴밀한 정치경제군사적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면, 미국의 재정적인 부담을 일부분 일본에 넘기면서도 결국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로스토우는 경제개발원조를 통해 후진국을 선진국의 필요와 의도에 따라 불균형적 발전으로 이끌고 이를 통해 미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식민지 경험을 통해 형성된 후진국의 ‘민족주의’를 경제개발의 원동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족주의를 통해 국민들이 단합을 하고 이에 기초해서 중앙집권적인 국민국가를 수립하면 경제개발계획을 잘 실행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한다면 공산주의 세력이 민족주의를 활용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으며 민족주의의 에너지를 미국의 이익에 맞게 유도할 수 있다. 또한 로스토우는 저개발국가의 정체가 과도기적으로 꼭 미국식 민주주의 형식을 취할 필요는 없으며 그 지역의 특수성을 용인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저개발국가의 군사독재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논리가 됐다.

한편 후진국이 선진국의 원조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토지개혁, 세제개혁, 정부조직 개혁, 부패구조 개혁 등의 일련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후진국에 미국식 자본주의의 구조적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런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후진국 내의 지배세력을 교체해야 하며 전근대적인 생산관계와 연결되지 않고 해당 지역에서 가장 근대화된 기구와 관련이 있는 계급계층을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시켜야 한다. 새로운 지배세력은 젊으며 농촌 출신이 바람직하고 지식인-상인-군인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고 로스토우는 주장했다. 특히 군인이 역할이 강조됐는데 후진국에서 군대는 다른 영역에 비해 기술과 행정 분야에 능숙한 사람을 배출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후진국의 군사정권을 통해 미국 정부가 군사 및 경제적인 지원을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군사정권은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길들여져야 하며 이를 통해 미국은 해당 지역에서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것이다.

로스토우는 1950년대 중반부터 당시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이었던 케네디의 자문역을 맡았으며 1960년 케네디의 대통령 선거운동 캠프에서 활동했다. 케네디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는 대외안보에 관한 대통령 특별 부보좌관으로 임명됐으며 주로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를 담당했다. 케네디 정부는 대외정책에 변화를 가져오면서 기존의 상호안전보장법MSA을 폐기하고 대외원조법Foreign Assistance Act(FAA)을 제정했으며, 대외원조법 중에서 경제원조 분야인 국제개발법Ac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AID)에 근거해서 차관을 제공했는데 이 차관을 AID차관이라고 불렀다. 이를 통해 미국의 대외원조 방식은 무상원조에서 차관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다시 돌아와서, 5.16 쿠데타를 통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야심차게 경제개발계획을 준비했다. 1962년 1월에 박정희 군사정부의 지휘 하에 경제기획원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경제기획원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두 개의 안을 토대로 작성됐다. 하나는 앞서 민주당 정부에서 준비했던 경제개발계획안을 초안으로 건설부에서 보완 작성해 발표한 건설부안이었다. 건설부안은 군사정부 초기에 건설부가 발표했는데 사실상 민주당 정부의 경제계획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5.16쿠데타의 지도자였던 박정희가 의장으로 있던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만든 종합경제재건계획안(최고회의안)이다. 최고회의안은 쿠데타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인 유원식이 중심이 되어 재정경제위원회 안에 ‘종합 경제재건 기획위원회’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이 기구에 당시 서울대 박희범 교수가 참여해 작성됐다.

건설부안과 최고회의안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건설부안은 연평균 성장률을 5.6%로 잡았는데 반해 최고회의안은 7.1%로 잡아서 상대적으로 성장을 중요시했다. 건설부안은 외자에 많이 의존하는 재정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 재정부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은 17.2%로 설정되어 있었으나, 최고회의안은 정부 재정부문을 29.6%로 설정해 재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건설부안은 전체적으로 경제개발에서 정부에 비해 민간기업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중시했고 미국과의 공조를 최우선으로 설정했지만, 최고회의안은 민간기업에 보다는 국가의 역할을 더 중요하게 다뤘다. 사실 민주당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의 복사판인 건설부안은 미국의 의도가 충실하게 반영된 경제개발계획이었다. 당시 정부 내의 경제관료들은 대부분은 미국에서 연수를 받거나 유학을 한 친미파들이었다. 건설부안은 이들의 주도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본주의식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미국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됐다.

반면 박희범 교수, 박정희, 그리고 유원식은 국가주도형 경제개발론적 입장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국가가 경제개발 과정에서 강력하게 개입해야 경제가 효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봤다. 외국의 원조 및 대외무역을 의한 자본축적에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주로 수입대체 산업화와 균형성장을 통해 자주적인 경제구조를 만드는 데에 관심이 많았다. 물론 외부와 단절하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내적으로 중공업과 경공업, 그리고 농업이 균형감 있게 발전해 점차적으로 수입품을 대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경제적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국가주도 경제개발론자의 또 하나의 특징은 거대기업의 국유 및 국영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무상원조와 정부 보유 외환, 그리고 귀속재산 불하를 통해 성장한 재벌기업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거대기업은 국가가 통제하고 중소기업은 민간이 담당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런 경제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가 경제개발계획을 짜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박희범 교수는 당시 국가주도형 경제개발론의 대표적 학자였고, 박정희는 자신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나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나세르의 이집트 혁명 등을 강조하며 국가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박정희와 함께 군사정부의 핵심 인사였던 유원식은 아버지가 무정부주의자로 유명한 유림이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유원식은 외자에 의존하지 않고 정부 주도로 자주적인 경제를 건설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와 유원식은 일본 군인으로 함께 활동했으며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군을 탈출 해 광복군에 참여하기도 했다. 게다가 박정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해방 정국에서 군인으로 활동하며 남로당의 군부 내 프락치 역할을 했다.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는 이름이 꽤 알려진 공산주의자였다. 때문에 최고회의안은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 색채가 강했다.

이 건설부안과 최고회의안을 기초로 해서 작성된 경제기획원안은 “최고회의에서 결정한 정책이 상당히 세부적이었기 때문에 관료들이 조정하거나 수정할 내용은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로 박정희가 의장으로 있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도가 세세하게 반영됐다. 예컨대 경제기획원안이 발표되기 직전인 1962년 1월 8일에 박정희가 직접 지시를 내려 ‘수정 및 조치사항’을 전달했을 정도였는데, 당시 수정된 중요한 내용 몇 가지를 살펴보자. 경제기획원안의 2-2)-15에는 원래 ‘…민간부문의 자발적인 활동을 기대하는…’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민간부문의 자발적인 활동을 자극하는…’으로 바꿔 민간활동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했다. 또한 원안에는 없는 내용을 4-2)항에 삽입했는데 ‘금융-마) 물가안정을 위주로 한 외환관리체제에서 국제수지 및 생산중심의 외환관리체제로 전환한다’는 내용이었다. 1950년대에 미국이 한국 정부에 강요했던 경제안정을 우선시하는 경제정책에서 벗어나 성장 중심으로 방향을 틀겠다는 의미를 담은 내용이다. 7-2)항도 새로 삽입됐는데 ‘광업-다) 철, 비철금속, 비금속, 광업은 각각 국영기업체를 중심으로 동종광업의 조합체를 편성하여 조합제도에 의한 광업발전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7-2)항을 삽입한 것은 중요한 사업에 대해서는 민간에 맡기지 않고 국영을 원칙으로 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1월에 발표한 경제기획원안은 수입대체화전략과 균형성장을 지향하고 있었다. 경제의 자립도를 높여 나가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공업화의 목표에서 중요한 순서대로 우선순위를 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에너지원의 개발’, ‘경제구조의 균형적 개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고용의 증대’, ‘수출증대’, ‘기술의 진흥’ 순서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박정희 정부 시절하면 수출을 떠올리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경제구조의 균형적 개발’이 2순위이고 ‘수출증대’가 5순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경제기획원안은 외자보다는 상대적으로 내자의 동원이 강조되었다. 예컨대 1960년에는 자본형성 구성비를 내자 68.5%, 외자 31.5%의 비율로 시작해 목표연도인 1966년에는 내자 74.9%, 외자 25.1%의 비율로 자본형성 구성비를 설정하고 있다. 점차적으로 내자의 비율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경제기획원안은 민간기업보다는 정부가 경제를 주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경제개발계획기간 중 동원되는 자본의 원천도 정부 55.6%, 민간 44.4%로 정부가 우위서 서도록 설정했다. 박정희와 쿠데타 주도세력의 국가주도형 경제개발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계획이었다.

요컨대 박정희 군사정부가 처음에 발표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수출지향적이기보다는 수입대체화전략 및 산업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면서 점차적으로 외자의 의존에서 벗어나 경제의 자립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런 방향설정이 왜 이후에 크게 바뀌어 박정희 정부는 외자에 의존하고 수출에 목메게 되었는지, 경제개발계획은 왜 수정이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방향전환에는 당시 박정희 군사정부의 경제계획을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이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