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까지 쫓아와 구타
증 언 자 : 김광영(남)
생년월일 : 1951.(당시 나이 29세)
직 업 : 동구청 미화요원(현재 만화가게)
조사일시 : 1988. 11
박철웅에게 땅을 빼앗기고
우리 집은 증조부 대까지 화순 이양에서 살다가 할아버지대에 광주 서석동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원래 서석동에 있는 집은 적산땅이었는데 조선대학교의 학교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쫓겨나야만 했다. 이사를 하기까지 박철웅의 횡포는 실로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우리 집은 높은 지대에 있어 물난리 걱정은 안 하고 살았었는데 어느 날은 비가 조금 정도 왔는데도 집안에 물이 들어와 물바다가 되어버렸다. 박철웅이 불도저로 흙을 우리 집 부근에 쌓아놓았기 때문이다. 집 앞에다 쓰레기 더미를 잔뜩 쌓아놓은 경우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박철웅의 협박과 공갈에 못 이겨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14여 평의 대지 값으로 40만 원을 받았을 뿐이었다. 간신히 전셋방 하나를 얻을 수 있는 돈이었다. 집단적 항의 한번 못 한 채 그 마을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억울하게 쫓겨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6·25 때 포탄 등을 져나르는 하역인부 즉 노무자로서 국군에 차출되었다가 전쟁이 끝나자 통조림 몇 개를 가지고 내가 3, 4살 때 돌아오셨다. 서석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는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공부도 못했지만 무엇보다도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연필, 공책 등 학용품과 막걸리, 과자 등을 파는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셨다. 어머니는 시내를 돌며 구정물을 얻어다가 돼지를 기르셨다. 생활은 빠듯했지만 우리 6남매는 굶지 않고 컸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는 이발소에 들어가 일하다가 18세가 되던 해에는 이발소 대우가 서울이 더 좋을 거라는 소리를 듣고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의 이모집이 있는 이태원 부근의 이발소에서 근무했지만 역시 그곳 생활도 불안정하고 비참했다. 일당으로 받은 120원으로는 혼자 생활하기도 벅찼다. 이태원에서 나이 어린 애들이 미군들 틈에서 어렵게 생활해 가는 것을 볼 때 울분과 분노를 느꼈다. 그때부터 외국인, 특히 미국인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7-8년 서울생활 후 입대해 1978년도에 제대해서는 광주 지산동 형님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내가 군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친구에게 10만 원을 빌려 사글세 방을 하나 얻은 뒤 나보다 10세나 아래인 아내와 어떻게든지 살아보기 위해서 치열한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때는 장발이 유행했기 때문에 10개 업소 중 4-6개가 문을 닫을 정도로 이발업소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이발소보다는 다른 직장을 구해야만 했다. 장사를 해보려 해도 땡전 한푼 없었기 때문에 조선대 부속중학교에 급사로 들어가 하루 1500원씩을 받아 저축을 하여 10여만 원을 준비했다. 그 돈으로 리어카를 구하여 군밤장사를 시작했다. 시골 장에서 물건을 가져다가 팔았기 때문에 군밤장사는 그런대로 할 만했다. 하루에 만 원에서 2만 원어치 정도 팔면 6천 원에서 8천 원의 순이익이 남았다. 아내는 농공장에 페인트칠 작업조로 몇 달 동안 일을 했다. 그러나 너무 힘들어서 그 짓도 그만두었다. 군밤장사를 하다가 1979년 1월 학동 제일시장을 담당한 미화요원의 소개로 동구청 미화요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5시에 시작된 일은 저녁 5시에야 끝났다. 나는 그 일을 하면서 2시간 시간수당까지 합하여 월 8만 원씩을 받았다. 우리는 25만 원짜리 전셋방에 이어 방림동에서 학운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거기서 아내는 친구의 소개로 찬값이라도 벌어보겠다며 만화가게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특히 군대에서 고생했던 것이 큰 힘이 되어 어떠한 궂은 일을 하더라도 창피한 줄을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남광주시장도 내가 맡은 구역이었는데 그곳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면서 내 생활을 채찍질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80년 5월을 맞게 되었다. 5월 18일이었다. 오후 3시경, 학강국민학교 앞에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최루탄 냄새도 났다. "다 죽인다. 다 죽인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 다 죽인다",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냈다", "여고생의 유방을 도려냈다" 등의 살벌한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울분이 일었다.
나는 다음날의 작업상황이 궁금해서 5시가 못 된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가톨릭센터 앞으로 돌아서 동구청으로 갔다. 가톨릭센터 맞은편에 사람 통행을 막기 위해서 공수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산업은행과 제일은행 사이에서 시위군중과 거리를 두고 서 있었는데 그들 바로 앞에는 시민 200여 명이 대치중이었다. 갑자기 공수부대가 충장로 쪽으로 쫓아왔다. 시민들은 우르르 도망갔다. 나도 죽어라 달음을 쳐서 셔터가 조금 열려 있는 동해물약국 옆 건물로 뛰어들어 막 셔터를 내리는 순간 네거리에 나타난 공수부대가 그것을 봐버렸다. 건물 맨 위층 화장실에 몸을 숨겼으나 곧 쫓아 들어온 M16을 착검한 공수부대원 한 명이 목에 칼을 대며 "손 들어" 했다. 그 뒤 그는 나에게 달려들어 무차별 구타를 가했다. 정신없이 맞으면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난 동구청 미화요원이오. 학생이 아니오. 이 제복을 보면 알 것이 아니오?" 청소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곧 허리띠를 풀고, 상의와 신발은 벗은 채로 동해물약국 사거리로 끌려나왔다. 갑자기 거기서 공수부대 한 놈이 군화발로 내 턱을 강타했다. 입술이 터졌다. 그런 상태에서 원산폭격을 시켰다. 그 찰나에 충장로파출소 쪽에 있던 시위군중이 공수부대에 돌을 던졌다. 공수부대가 그쪽으로 갔다. 순간 나는 우체국 쪽을 향해 죽어라고 뛰었다. 공수부대가 나를 잡으러 뒤쫓아왔으나 그들을 향해 계속 돌을 던지는 시위군중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온몸이 시퍼렇게 멍든 상태로 근처 복음외과로 갔다. 그곳에서 터진 입술을 꿰매는 등 응급치료를 받은 뒤 치료비는 다음날 계산하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또 "헌옷이 있으면 좀 주십시오. 내일 빨아다 드리겠습니다"라고 웃옷을 벗은 상태인 내가 부탁하자 의사는 매우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치료해 주었으면 그만이지 옷까지 주란 말이오?"하고 툭 쏘았다. 참으로 무안하고도 서글펐다. 맨발에다 상의를 벗은 상태로 황금동 콜박스 사거리로 걸어가고 있자니까 시민들이 다가와 입고 있던 와이셔츠와 슬리퍼를 벗어주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약국에서 박카스도 사주었다. 고마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아무 죄 없이 맞은 것에 대한 억울함이 일었고 공수부대의 잔인함을 생각할 때 울분도 생겼다.
그 다음날인 19일, 의료보험카드로 병원에서 타박상 치료를 받고 일도 못 하고 출근부에 도장만 찍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같은 미화요원 중에서도 몇 명이 공수부대원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동구청에서는 별다른 신경은 써주지 않았다.
총을 받아 들었으나
21일 아침 9시경, 병원에 가기 위해서 숭의실고 앞까지 걸어간 뒤 도청 쪽으로 가려고 지나가는 트럭에 올라탔으나 그 트럭은 전남대학교 앞까지 가버렸다. 나는 전남대 정문 앞에서 내려 정문다리 옆에서 시위대의 시위를 구경했다.
'전두환이 물러가라!', '계엄령을 철폐하라!'
2시경 전남대로부터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그와 동시에 시위군중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 어느 틈에 나도 철로 굴다리를 넘어 사거리까지 도망갔다. 놀란 심장이 온통 방망이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도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지나가던 미니버스를 세웠다. 시내 쪽으로 간다고 하기에 올라탔다. "도청에서 집결하니까 공원보다는 도청으로 갑시다" 차 안에서 시민들은 말했다.
MBC방송국 앞에서 내린 내가 장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노동청 쪽에서 총소리가 나더니 옆에 가던 사람 두 명이 쓰러졌다. 한 명은 즉사한 것 같았고 다른 한 명은 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나는 겁이 나서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선대를 지나 신당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내가 서석국민학교 뒷골목에 있는 광주여고 근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손들어"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공수부대원이었다. '호랑이 굴로 들어왔구나!'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공수부대는 "다른데로 돌아가"라고만 했다.
내가 전남대병원에 이르렀을 때 병원 옥상에서 시민군들이 옥상에서 낮게 떠 있는 헬기에 총을 쏘는 것을 보았다. 총을 쏘자 헬기는 고공비행으로 도망갔다. 숭의실고 다리에서 트럭 위의 사람들이 시민들에게 무기를 분배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총을 받는 시민들 틈에 끼여 들었다. 나는 처음에 M1 소총을 받았다. 그러나 몸이 아프니까 가벼운 카빈을 달라고 해서 막 총을 받아든 순간이었다. 걱정이 되어 나를 찾아나선 아내에게 들키고 말았다. 아내의 만류에 할 수없이 다시 총을 반납한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계엄군이 물러가고 난 22일, 복음외과에 가니까 의사가 이런 말을 했다. "선생께 옷을 드리려고 했는데 그냥 가버리시대요." '참, 세상이 변하니 의사까지 변했네. 나한테 선생이란 호칭까지 써가며 말이야'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의사는 치료비를 꼬박꼬박 받았다.
26일 이후로는 집에만 있었다. 시민들이 무장을 한 이후부터는 오발사고의 위험도 있었을 뿐더러 아내가 큰애를 낳은 지 몇 달 안 되었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다가 27일 새벽에 직장일이 궁금해서 집을 나와 남광주 건널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쿵, 쿠르르 쿵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청 쪽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집으로얼른 도망갔다. 그때가 바로 계엄군이 광주 진압작전을 시작한 때였다.
날이 밝자 동사무소에서 출근하라는 방송을 듣고 동구청으로 갔다. 군인들이 거의 청소를 했기 때문에 별다르게 할 일은 없었다. 나중에 소리를 들어보니까 청소차에 시체를 싣고 어디론가 갔다고도 했으나 보지는 못했다. 1980년 5월 이후 몸이 불편해 더 이상 미화요원으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 구호 양곡이 나왔을 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주라고 거절을 했으나 동장이 귀찮게 해서 받은 적이 있다.
나는 5·18 이후 지금까지 아내가 해오던 만화가게를 하고 있다. 사회가 불안하기 때문인지 이상한 만화가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꼭 심의필이 찍힌 만화만 받는다. 만화가게는 현재 800만 원짜리 전세이다. 한 달 수입은 30-35만 원 정도로 4식구가 먹고사는 데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다. 걱정이 있다면 집안식구가 병이 났을 때다.
내가 5·18 부상자회(이지현 회장)에 신고하게 된 것은 1987년 12월이었다. 단순히 보상을 받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만약 기념탑이 세워지면 내 이름도 적혀질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신고하게 된 것이다. 5·18 부상자회에 몇 번 참가한 후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회원들이 너무나 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나가지 않지만 부상자회에 나가서 배운 것도 많았다. 군부독재의 속성과 전두환의 비리를 알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정치에 대한 관심도 얼마만큼 가질 수 있었다. 또 빈부의 차가 심하다는 것과 소외계층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날의 악몽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군용트럭만 보면 가슴이 깜짝깜짝 놀란다. 광주문제는 순리적으로 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은 보복의 차원을 떠나서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먼저 진상규명이 철저히 된다면 보상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