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석 유영모의 “우리말로 철학하기”
이기상 교수 특강
다석 유영모의 “우리말로 철학하기”
- 벼 리 -
1. ‘언어’는 세상을 보는 ‘눈’이며 인식과 사유의 ‘틀’
2. ‘언어’는 세계와 우리 사이에 놓인 ‘투명한 유리’
3. “철학은 우리말로!”
4. 20세기 ‘한국 현대 철학’과 다석 유영모
5. 다석의 ‘우리말로 철학하기’
1) 우리말로 철학한 최초의 사상가
2) 말은 ‘하느님의 소리’
3) <훈민정음>에 담긴 우주관
4) 우리말 속에 녹아 있는 ‘천지인 합일’ 사상
5) ‘얼’과 ‘알’ 그리고 ‘얼굴’
6. ‘우리말’ 속에 담겨 있는 ‘철학’
1) 몸, 맘, 믐
2) ‘바탈’, ‘가’, ‘깔’, ‘꼴’
3) ‘사이’
4) 우리말 철학의 ‘바탕’
1. ‘언어’는 세상을 보는 ‘눈’이며 인식과 사유의 ‘틀’
인간이 ‘철학적 동물(animal philosophicum)’임은 잘 알다시피 인간이 이성적인 사유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일 수 있는 것은 그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찍부터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을 ‘언어능력이 있는 생명체(ζωον λογον εχον)’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이 그리스적 인간규정이 로마문화권으로 번역되면서 ‘이성적 동물’로 변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간은 말하기 때문에 이성적인 동물인 것이다(Homo animal rationale quia orationale).”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언어를 말하는가? 개인의 언어는 그가 그 속에서 성장한 일정한 공통어이다. 이 공통어는 바로 그의 ‘모국어’이다. 그 모국어에서 개인은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의 경험은 그가 ‘알고 있는’ 것
의 지도를 받는다. 경험은 개인 자신이 소화하는 인상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국어의 인도를 받는다. 일상생활에서도, 과학[학문]에서도 모국어가 개인의 해석과 사유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으로 간섭하고 있다는 것이 확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모국어가 우리를 대신해서 ‘사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모국어는 모든 사람에게 그의 ‘언어공동체’의 언어이다. ‘한글’은 한국의 언어공동체에 속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 소유재이다. 그 공동체 속에서 인간들은 언어의 소유자들이다. 바로 언어에서는 어떤 인간도 이 소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언제나 한 언어공동체에 속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가장 일반적인 문화재이다. 어떤 인간도 그 자신의 개인적인 힘으로 말미암아 그의 언어재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언어의 소유는 언어공동체에 대한 소속성으로부터 인간에게서 생겨나며, 인간은 그의 모국어를 습득하면서, 즉 인간은 이 언어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자라난다.
모든 민족에게는 그 언어 속에 하나의 ‘세계관’이 갈무리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언어공동체의 운명, 그 지리적, 역사적 형세, 그 정신적이고 외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그 민족의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상태가 두 민족에게 동일하지 않듯이, 이러한 다른 상태에서 생겨난 두 언어 속에 갈무리되어 있는 세계상 역시 같은 것일 수 없다. 언어보다도 한 민족의 운명과 견고하게 결합된 것은 없으며, 한 민족과 그 언어와의 사이보다 더 밀접한 상호작용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언어공동체는 다른 모든 공동체의 전제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기 때문만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의 토대가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많은 공동생활과 공동작용에 대한 전제가 어디엔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언어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한 언어의 효력범위는 한 민족에게 자연적인 영역이 된다. 한 언어에 속하는 모든 이들은 그 어떤 다른 공동체보다도 서로 가까이 있으며, 그들은 운명적으로 서로,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결합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체험내용’을 정돈하는 데에도 모국어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의 ‘인식’을 개념적이고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도 모국어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우리의 ‘행위’ 역시 모국어의 안내를 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대체가 우리는 잘 갈무리되어 있는 세계관을 모국어를 통해 전수받으며 그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국어 사용 집단의 ‘사유의 동일성과 동종성’ 역시 모국어에 감사해야 함을 보았다. 따라서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주체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 땅의 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모국어인 우리말에 통달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말로 철학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이다. 철학함에서 우리말을 사용하는 언어공동체는 운명적으로 서로 사이에 우리말로 결속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언어’는 세계와 우리 사이에 놓인 ‘투명한 유리’
20세기의 유명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재미있는 주장을 한다. 철학은 “파리병에 빠진 파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밖에 있던 파리가 열려 있는 유리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가 들어왔던 곳을 찾지 못하고 유리창에서 맴돌고 있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유리창이 있는데도 무식하게 그 사실을 모르고 그냥 돌진하다 유리창에 부딪치고 만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 투명한 유리가 언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저 파리와 다를 바가 없다.
밖에 전나무가 한 그루 있다. 겨울인데도 그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모든 나무들이 옷을 다 벗고 앙상한 가지로 떨고 있는데, 전나무는 푸른 외투를 걸쳐 입고 자신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저 밖에 있는 전나무를 직접 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와 저 밖의 전나무 사이에는 “언어라는 유리창”이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언어가 워낙 투명하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 줄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밖의 세상 또는 현실과 관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의 매개 없이 세계 또는 현실과 관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라는 유리병의 존재를 모르고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파리에게 출구를 찾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철학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인식은 “~로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아도 항상 어떤 것“으로” 본다. 우리에게 처음에 어떤 것이 어떻게 이 “~로서”에 잡히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제대로 보기도 하고 착각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마주칠 때 직접 대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직접”이라는 것은 사실 이미 매개되어 있는 것이다. “~로서 구조”라는 인식의 구조는 언어로 짜여져 있다. 우리의 눈은 강아지의 눈과 틀리다. 사람의 눈은 단순한 생물학적 눈이 아니라 언어로 짜여진 의미의 그물망이다.
우리의 눈은 의미의 그물망이라는 “유리”로 싸여 있다.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이 보고 지적하였다.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칸트는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직관과 사유의 공동작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감관에 주어지는 자료를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범주라는 사유의 틀을 갖고 정리한다.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려 설명한다면, 칸트가 얘기하는 범주가 실은 언어다. 칸트는 그 범주가 모든 인간들에게 다 똑같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근대와 현대의 차이다. 칸트는 이성적으로 보편적으로 인간의 주체가 다 똑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서양 철학자들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사유의 틀인 범주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화적인 차이를 처음에는 야만성으로 보고,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런 식으로는 진정한 문화와 문화의 만남,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서양 중심의 철학이 한계에 봉착함을 인정해야 한다.
현대에 와서 철학은 ‘언어비판’이다. 이제 제일철학은 언어철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근대에서의 제일철학은 인식론이었다. 고대에서는 그것이 신학이었다. 이제는 인간이 자기가 속해 있는 그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언어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현실을 해석함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언어가 철학적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된다.
현대철학자인 칼 오토 아펠(Karl Otto Apel, 1922~ )은 “의사소통 공동체”를 얘기한다.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보고 생각하고 말할 때 남들도 나와 똑같은 것을 보고 생각하며 말한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초월론적인 자아가 우리 모두에게 들어있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다 똑같은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모국어가 ‘사유의 동질성’도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비슷한 감정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생물학적인 면과 지정학적인 특성에 기인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것으로 우리 자신과 세계를 서로 나누며 공유하고 있는 ‘언어’에 바탕하고 있다.
우리를 서양 사람과 구별시켜 주는 독특한 점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언어에서 드러난다. 우리의 지정학적, 민족적, 심성적인 독특함이 언어에 간직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철학자들은 언어의 “심층문법”이라고 이름한다.
예를 들어보자.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조기 영어교육이 유행하고 있다. 어느 집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냈다고 한다. 하루는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 나 영어 할 줄 안다” 하더란다. 그래서 엄마가 “그래 무슨 말을 할 수 있는데?” 하고 물으니, 아이가 “Excuse me!”라고 말했다. 엄마는 아주 흐뭇하여 우리 아이는 말도 저렇게 예의바른 말부터 배우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니?”하고 물으니, 아이는 “네. ‘비켜! 비켜!’ 라는 말이야”라고 말했다. 그 말에 엄마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아이에게 왜 그 말을 ‘비켜! 비켜!’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단다. “오늘 학원에서 비디오를 보았는데 ‘Excuse me!’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모두 비켜 주던데요. 그러니까 ‘Excuse me!’는 비키라는 말이지요”.
이처럼 언어는 단순히 낱말을 다른 낱말로 옮기면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Exsuse me!’는 ‘실례합니다’라는 의미다. 외국에서 그 나라 사람들은 ‘실례합니다’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매일 수십 번씩, 수백 번씩 하며 산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을 하는 데 아주 인색하다. 그러기에 아이들은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비디오에서 ‘Excuse me!’라는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비켜주는 것을 보고서 아이는 ‘아하 저 말은 비키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말이라는 것은 단순히 낱말의 뜻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 문화, 생활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말 속에는 우리의 세계, 문화, 삶이 깃들여 있다. 남의 말, 남의 이론이 난무하는 우리의 생활세계는 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다.
3. “철학은 우리말로!”
인간은 이미 형성된 세계 속에 태어나서 그 세계 속에서 통용되는 삶의 문법을 배우며 거기에서 지켜지고 있는 삶의 규칙과 사유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국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칼 오토 아펠(Karl Otto Apel)은 모국어로 결속되어 있는 ‘언어공동체’가 의사소통을 위한 선험적 토대를 이루는 전제조건이라고 보았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오로지 사유, 인식 그리고 행위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앞에서 논리적인 사유능력 역시 언어를 통해서 습득됨을 보았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란 어떤 보편적인 이성적 언어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라면서 습득하는 자연어, 즉 모국어이다. 따라서 한 민족의 언어에는 그 민족의 세계관이 갈무리되어 있으며, 민족 구성원은 모국어를 통해 이 세계관 속으로 교육되는 것이다. 삶의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언어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사유내용의 동일성과 사유의 동종성을 보장한다. 우리는 모국어를 사용함으로써 같은 사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들을 나누면서도 서로를 연결해 주고 있는 의사소통의 같은 지반 위에서 열린 마음으로 논쟁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사유의 깊이가 철학이나 사상의 깊이를 결정한다면 개념적인 차원에서 언어의 깊이와 넓이가 사상을 규정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절대중심의 시대에서 다극화한 다중심의 시대로 가고 있는 탈중심의 시대에 각자가 서로 다른 세계와 문화에서 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 그래서 그러한 중심잡기 위에서 가능한 억압받지 않는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의 토대 내지 전제는 ― 오직 그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언어, 곧 모국어이다.
언어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주장을 정리할 수 있다.
① 언어는 세계를 보는 눈이다. ② 언어는 민족을 묶는 끈이다. ③ 언어는 사고방식을 형성해주는 틀이다.④ 언어는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는 무의식이다. ⑤ 언어는 정서의 공감대이다. ⑥ 언어는 자주와 자율의 바탈이다. ⑦ 언어는 자유와 평등의 조건이다. ⑧ 언어는 학문[과학]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⑨ 언어는 사람 사이의 다리이다. ⑩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철학은 철학함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단순히 이론적 앎만을 뜻하지 않고 실천적 앎[능력, 살아감, 삶]도 함축한다. 철학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공동체적으로 행위하는 주체들이 전개해 나가는 비판적이고 논증적인 상호이해의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철학을 철학함으로서 이해할 때 철학의 주체적 연관, 상황적 연관, 실천적 연관이 부각된다. ‘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우리말로 철학해야 하는 우리들이 처해 있는 철학함의 상황 연관과 주체 연관을 강조하기 위해, 이론적 앎과 실천적 능력의 단일성 속에서 공동으로 문제를 발견하고 그 해결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철학함을 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화두’이다.
한글 학자 허웅은 우리글 한글의 의의를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적는 데 실패한 우리 ‘한아비’들은 드디어 독자적인 글자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이것이 ‘훈민정음’, 즉 한글이다. 한글 창제의 동기는, 외부 세력에 대해서는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민족주의적 정신과, 국내적으로는 모든 국민이 다 글자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사상이 밑바닥이 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시대사적 현실을 의식하여 주체적으로 철학하기 위해서는 우리말로 철학해야 한다는 데 대한 충분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4. 20세기 ‘한국 현대 철학’과 다석 유영모
얼마 전에 나는 큰 책방에서 철학책들을 훑어보다가 『한국철학의 흐름』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 반가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그러나 흐뭇한 기분도 잠시 차례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깜짝 놀랐다. 한국철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다루고 있다는 그 책이 마지막으로 다룬 사상가가 다산 정약용이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나서 1836년에 명을 달리한 사상가이다. 그를 끝으로 하여 한국철학의 흐름은 멈추었다는 이야기다. 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가? 한국철학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는 이야기다. 독일을 예로 든다면 마치 헤겔(1770〜1831)을 끝으로 독일철학이 끝났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아니 그 예도 충분치 못하다. 헤겔이 독일 관념론의 철학자로 통하는 것은 그가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하면 정약용은 한 권도 자신의 사상을 한글로 써서 펴낸 적이 없다. 서양에서의 근대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라틴어가 아닌 그들의 지방어인 민족어로 사유하고 글을 썼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정약용을 한국 근대 사상가로 분류하는 데에도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철학을 ‘시대의 자식’이라고 하며 자신의 ‘시대정신을 개념으로’ 잡는다고 말한다. 정말로 정약용 이후 이 땅에는 ‘우리의 시대정신’을 개념으로 잡은 사상가나 철학자가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지난 170년 동안 이 한반도에는 우리의 현실과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인간이 무엇인지, 세상이 왜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했는지, 이 달라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으로 고민한 학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인가? 지금이라도 우리 철학인들은 왜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인지, 20세기 들어서서 ‘한국철학’은 무엇을 했는지, 21세기 한국철학의 전망은 어떠한지 등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독일어로 기술되지 않은 독일철학, 프랑스어로 쓰이지 않은 프랑스철학을 생각할 수 없듯이 우선 우리는 엄격히 우리말인 한글로 서술되지 않은 사상들을 ‘한국철학’으로 분류하는 데에는 조심해야 한다. 물론 신라, 고구려, 고려, 조선 등이 다 한국역사에 속하듯이 그 시대의 사상들을 넓은 의미에서 한국사상 또는 한국철학에 소속시킬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때에도 우리는 한국 고대 사상, 중세 사상, 근대 사상, 현대 사상 등의 시대구분을 하고 그 구분의 기준을 마련하고 그 철학적 독특함이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그럴 경우 정약용을 한국 근대 사상가로 분류할 수 있는지, 어떤 근거에서 근대 사상가인지 논의해봐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언어’와 ‘사상’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하지 않고 한국에서 낳아서 자라 사상 활동을 한 사람은 모두 한국 사상가로 간주했고 단순하게 산 시기 또는 왕조를 염두에 두고 사상가들을 분류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20세기 들어서서 세계철학의 흐름 자체가 ‘언어’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언어를 철학의 핵심주제로 삼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보편 언어’란 없고 언어는 모두 말하는 민족의 기억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에 사상을 표현한다는 철학의 언어도 어쩔 수 없이 그 시대 그 민족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철학’은 어디 다른 곳보다도 한민족의 기억과 세계관을 담고 있는 ‘한글말’ 속에 가장 잘 표현되었을 것이고 어떤 다른 언어보다도 한글말로 가장 맞갖게 기술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상과 언어와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하고 철학은 우리말인 한글로 해야 하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한글로 표현된 말과 글에서 우리의 세계관, 인간관, 신관을 찾아 해석해내야 한다고 주장한 사상가가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한국의 현대 사상가라고 불리기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나는 주저 없이 그런 사람은 바로 다석 유영모라고 주장한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보며 우리말을 통해 우리말 안에서 일반 민중들에게 말건네온 하느님[존재]의 소리를 읽어내려고 노력했다.
아래에서 우리는 유영모가 20세기 한국의 현대철학자로서 손색이 없음을 입증해보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20세기 초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떤 문제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 당시 지식인들은 거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고찰하기로 한다.
5. 다석의 ‘우리말로 철학하기’
1) 우리말로 철학한 최초의 사상가
배움과 말의 관계에 대한 다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배운다는 것은 말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어 사귀게 합니다. 물건과 물건 사이를 설명해주고 밝혀주는 것도 또한 말입니다. 말은 ‘너를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 할 때에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이치상관(理致相關)이라 물건과 물건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치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다석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실존을 찾아갈 수 있고 하느님도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말씀을 모르고서는 도무지 사람 노릇을 못한다. 말을 모르면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 또 말을 알지 못하면 무엇을 갖고 사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도(道)라는 것도 말의 길을 안다는 것이다.
다석에 의하면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신이 있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신과 연락하는 것, 곧 신이 건네주는 것이 생각이다. 신이 건네주지 않으면 생각이란 없다. 생각을 한다면 신과 연락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람을 보고 나온다. 거의 들리지 않는 가느다란 소리로 말씀이 나온다. 정말 믿으면 그 사람에게서 말씀이 나온다. 말씀이 나오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 수가 없다. 언젠가는 우리가 말씀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결단이 난다. 하느님의 얼이 끊어지면 그렇게 된다. 생각하는 데 하느님이 계시고, 생각 없이 지내는 것은 짐승이다.
다석은 우리말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계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한자말을 우리말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별(別) · 의(義) · 친(親) · 정(正)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닳(별) · 옳(의) · 핞(친) · 밣(정)’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야 우리말로 문화예술의 사상을 그릴 수 있습니다. 너무 어려워도 안 되고 간단히 뜻을 나타내야겠는데, 그러한 표식이 없고서는 큰 사상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한문으로 적어 놓으면 설명하여야 하고, 자꾸 설명하다 그만두게 됩니다.”
“진 · 선 · 미, 이것도 우리말로는 없습니다. ‘참(眞) · 좋(善) · 곻(美)’으로 나타내면 어떨까 합니다. 이렇게 해놓아야 후세 사람도 그 뜻을 알고 이어서 다시 큰 사상을 담게 되는 것입니다.”
다석은 자신이 여기서 이렇게 시험 삼아 말하지만 후에 우리나라 철학이 있게 되면 이 말들이 잘 쓰일 것이라고 예언한다. “우리 민족에게 철학이 필요하면, 누가 되었건 우리말로 철학 용어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조상이 있어서 우리 몸이 있는 것같이, 우리가 쓰는 말도 꼭 필요한 자식처럼 필요한 말이 마침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쓰는 말을 억지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지만 무리가 되더라도 만들어야 할 때는 만들어야 합니다.”
2) 말은 ‘하느님의 소리’
다석 사상의 뛰어남 가운데 하나는 그 동안 언문, 암글이라고 무시되고 천시받아 온 <한글>로서 학문할 수 있고 철학할 수 있음을, 아니 철학해야 함을 보여준 데 있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서 말건네 오고 있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고 믿었으며, 바로 우리말 속에 우리의 독특한 삶의 방식, 사유방식, 철학이 들어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말을 보이게 하면 글이고, 글을 들리게 하면 말이다. 말이 글이요, 글이 말이다. 하느님의 뜻을 담는 신기(神器)요 제기(祭器)이다. 하느님의 마루뜻[宗旨]을 나타내자는 말이요, 하느님을 그리는 뜻[思慕]을 나타내자는 글이다. “이렇게 몇 자가 분열식을 하면 이 속에 갖출 것 다 갖춘 것 같아요, 말이란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말도 정말 이렇게 되어야 좋은 문학, 좋은 철학이 나오지 지금같이 남에게(외국어) 얻어온 것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 돼요. 글자 한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 있고 말 한 마디에 영원한 진리가 숨겨져 있어요.”
우리의 한글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글이다. 사람만이 만들어 낸 말과 글은 어느 말이나, 어느 글이나 하느님의 계시로 안 된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 말이 생긴 것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의 기도에서 얻은 산물이다. 글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글은 진리를 통해야 한다.
다석은 우리의 한글도 한자와 다름없는 뜻 글자의 구실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세종 임금이 한글을 지을 때 자연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모음 자음이 나름대로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한글의 자음은 입(목구멍 · 입천장 · 혀 · 입술 · 이)의 모양을 본떠 만들고 음의 강도에 따라 삼단계화하였다. 한글의 모음은 · (天), ㅡ(地), ㅣ(人)을 으뜸으로 하여 만든 것이다. <·>음은 아오(AU, AO)로 읽는다. 본디는 원음(原音)으로 아기가 옹아리 할 때 처음 내는 소리이다. 벙어리가 분화되지 못한 소리를 내는 것도 · 음이다. 원음이 수직으로 내려 사람인 <ㅣ>가 되고, 원음이 수평으로 건너가 땅인 <ㅡ>가 되었다. 원음 · 이 사람(ㅣ) 뒤에 가 <ㅏ(아)>가 되고, 원음 · 이 사람(ㅣ) 앞에 와 <ㅓ(어)>가 된다. · 가 땅인 ㅡ 위에 가서 <ㅗ(오)>가 되고 ㅡ 아래에 와 <ㅜ(우)>가 된다.
원음인 <·>는 빈탕한데에 점 하나를 찍은 형상이다. 그것은 텅빈 무에서 이제 무엇인가 생겨나오는 존재생기, 우주발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가 발생돼 나오는 태초의 시작을 감탄하며 <·(아)>라고 외치는 형상이다. 다석은 <아침>도 그러한 의미로 풀이하여 아침은 <아 처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이 태초의 <·>에서 계속 발생되어 나오는 우주의 생성은 그 전체를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하나>로서 다름 아닌 <한 ·>, 즉 <한아>인 것이다. 이렇게 천·지·인이 아우러져 하나로 포개지는 우주적인 사건을 우리말의 구조가 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3) <훈민정음>에 담긴 우주관
우리글 제작의 대원칙. 그것은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고 저술한 『훈민정음』의 <글자 지은 풀이[制字解]>에 이렇게 씌어 있다.
“하늘과 땅의 이치는 하나의 음양(陰陽)과 오행(五行)뿐이다. 곤(坤)괘와 복(復)괘의 사이가 태극이 되고 움직이고 고요한 후에 음양이 된다. 무릇 생명을 지닌 무리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자 음양을 두고 어디로 가랴. 그러므로 사람의 목소리도 다 음양의 이치가 있건마는 도리어 사람이 살피지 못할 뿐이다. 이제 정음 지으신 것도 애초에 꾀로 일삼고 힘으로 찾아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목소리에 따라 그 이치를 다하였을 뿐이다.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닌즉 어찌 천지 귀신으로 더불어 그 용(用)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음 28자도 각각 그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
-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태극, 음양, 오행의 지배를 받는다. ⇒ 인간도 그 존재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그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 특히 인간의 발음과 발성 역시 그 영향을 받고 있을 터이기에 거기에 바탕하여 글자를 짓는다. ⇒ 정음 28자는 음양, 오행 등의 철학사상에 바탕.
- 자음, 즉 첫소리[初聲]의 경우는 어금니[牙]․혀[舌]․입술[脣]․이[齒]․목구멍[喉], 다시 말해 구강오행(口腔五行)의 소리로서 ㄱㅋㅇ․ㄴㄷㅌ․ㅁㅂㅍ․ㅅㅈㅊ․ㅇㅇㅎ․(ㄹㅅ = 반혓소리, 반잇소리) 등이다.
“첫소리 17자의 제자 원리는 다름 아닌 태극과 음양과 삼재와 오행의 원리이며, 이 이치에 의하여 구강(口腔) 안의 발음 부위를 다섯 부위로 나누고, 각각 그 발음 기관의 형상을 본떠서 그것을 기본형으로 삼고, 소리의 변화에 따라 획을 더하여 부위마다 세 층씩을 만든 것이라 하겠다.”
- 모음, 즉 가운데소리[中聲] 11자는 하늘, 땅, 사람을 본떠서 만들었다.
“·”: 혀를 바싹 오그리고 구강의 깊은 데서 나는 소리니, 마치 하늘이 제1차로 자(子)에서 열린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늘을 본떠서 만드니 그 형상이 둥글다. 가 수직으로 움직이면 ㅣ가 되고, 수평으로 움직이면 ㅡ가 된다. 그 밖에 는 ‘ㅗ ㅏ ㅜ ㅓ’와 ‘ㅛ ㅑ ㅠ ㅕ’의 여덟 소리에 두루 꿰어 있으니, 이것은 마치 양이 음을 거느리고 만물에 두루 흘러 있는 것과 같다. ······
‘ㅡ’: 혀를 조금 오그리고 구강의 깊지도 얕지도 않은 데서 나는 소리니, 마치 땅이 제2차로 축(丑)에서 벌어진 것과 같다. 그러므로 땅을 본떠서 만드니 그 형상이 평평하다. ······
‘ㅣ’: 혀를 오그리지 않고 구강의 얕은 데서 나는 소리니 마치 사람이 제3차로 인(寅)에서 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을 본떠서 만드니 그 형상이 곧게 서 있다. ······
- 이상 ‘·’, ‘ㅡ’, ‘ㅣ’ 세 소리는 천지인(天地人) 삼재의 원리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니,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는 태극이요, ‘ㅡ’와 ‘ㅣ’는 양의(兩儀)이기도 하다. 즉, 주역에 이른바 ‘태극이 양의를 낳았다’는 것이 이 삼재 원리의 바탕이 되는 동시에, 훈민정음의 모든 가운뎃소리는 그 첫소리의 경우와 같이 모두 태극과 음양의 원리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 가운데 소리에서는 무엇보다도 하늘의 역할이 강조되며 그 다음으로 인간의 구실이 도드라지고 있다.
“‘·’가 여덟 소리에 다 꿰어 있는 것은 마치 양이 음을 거느려서 만물을 두루 흐르는 것과 같고, ‘ㅛ ㅑ ㅠ ㅕ’가 다 사람[‘ㅣ’]을 겸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되어, 능히 하늘과 땅의 일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형상을 하늘과 땅과 사람에서 취하니 삼재(三才)의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삼재는 만물의 선두가 되고, 하늘은 또 삼재의 시초가 되는 것이, 마치 ‘· ㅡ ㅣ’ 3자가 여덟 소리의 머리가 되고, ‘·’가 또 3자의 갓이 되는 것과 같다.”
- 첫소리와 가운뎃소리와 끝소리가 어우러져 형성된 독특한 한글이 함축하고 있는 우주질서를 훈민정음 해설자들은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첫소리와 가운뎃소리와 끝소리가 합하여 이룬 글자를 가지고 말하면, 움직이고 고요함이 서로 뿌리박고, 음과 양이 사귀어 변하는 뜻이 있으니, 움직이는 것은 하늘이요, 고요한 것은 땅이요, 움직이고 고요한 것을 겸한 것은 사람이다. 대개 오행이 하늘에 있어서는 신(神)의 운행이요, 땅에 있어서는 질(質)의 이룸이니, 사람에 있어서는 인(仁)과 예(禮)와 신(信)과 의(義)와 지(智)는 정신의 운행이요, 간과 염통과 지라와 허파와 콩팥은 질의 이룸이다. 첫소리는 피어나 움직이는 뜻이 있으니 하늘의 일이요, 끝소리는 그쳐 정(定)하는 뜻이 있으니 땅의 일이요, 가운뎃소리는 첫소리의 생(生)하는 것을 받아서 끝소리의 이루는 데에 접(接)하니 사람의 일이다. 대개 자운(字韻)의 요긴함이 가운뎃소리에 있으니, 첫소리와 끝소리가 (가운뎃소리와) 합하여서 글자의 음(音)을 이루는 것이 마치 하늘과 땅이 만물을 생하고 이루되, 그 마르재어 이루고 보필하여 돕는 것은 반드시 사람의 힘에 자뢰함과 같다.”
4) 우리말 속에 녹아 있는 ‘천지인 합일’ 사상
우리말 속에 녹아 들어가 있는 한국인의 독특한 ‘천지인 합일’의 세계관은 우리 배달겨레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한 마리의 호랑이와 한 마리의 곰이 같은 굴에서 살면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환웅[神雄]신에게 빌었다.
“곰은 ‘곰/고마’로 표기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고마(곰)’는 태음신으로서 물과 땅, 결국은 생산을 주재하는 여성신이었으며, 환웅은 ‘니마(님>임)’계의 태양신으로 하늘과 불을 다스리는 제우스격의 신이었으니, 님과 곰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단군왕검이었던 것이다.”
- 고마와 니마: 하늘신과 땅신. ‘고마’는 태음신을, ‘니마’는 태양신을 드러내는 대립개념. ⇒ ‘니마’: ‘태양 ․ 앞 ․ 붉은색 ․ 불 ․ 남성 ․ 여름 ․ 혓소리 ․ 군왕 ․ 남칠성 ․ 낮 ․ 벌판’의 뜻. 단군왕검은 ‘고마/니마’와 연관됨.
“‘단군’은 비는 제사장이고, ‘왕검’은 ‘님금’으로서 ‘님(니마; 태양신)+금(고마; 태음신’으로 풀이된다. 결국은 태양신 ‘니마(님>임)’와 태음신 ‘고마(>곰)에 제사지냈던 부족 대표자가 단군왕검이라고 보는 것이다.”
- 일상어 ‘···님’의 깊은 의미. ⇒ 천지인 합일의 의식구조가 스며 있다.
“상대방을 ‘…님’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관습은 태양신과 같은 존재로 본다는 의식이 그 밑바닥에 있으니 참으로 소중한 인본주의의 드러냄이 아닐 수 없다. …… 태양처럼 빛나는 밝음에의 지향을 갖고 사는 배달겨레는 예부터 어두움, 사악하고 불의에 찬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가장 종교적인 개념에서 비롯한 ‘임’의 뜻과 정서가 이제 인간적인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하늘과 땅에 사는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전제가 없고서는 참다운 임의 세계는 저만치 있을밖에.”
5) ‘얼’과 ‘알’ 그리고 ‘얼굴’
다석은 즐겨 쓰는 우리말에 <얼>과 <알>이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 내지 <아>는 무엇인가 어둠을 뚫고 생겨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 <아>에 <ㄹ>이 합쳐진 것이 <알>이다. <ㄹ>은 다석에 의하면 바로 변화 그 자체를 나타낸다. 변화의 한 가운데 있음을 바로 이 <ㄹ>이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은 모든 변화를 품고 이제 그 변화를 자신 안에서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하는 단계를 표현한다. <씨알>은 바로 그러한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온갖 가능성의 씨를, 모든 변형의 속알을 자신 안에 품고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이에 비해 <얼>은 다른 의미를 띠고 있다. <어>는 태극점 <·>을 안고 있는 것으로서 태극점이 밖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수정란인 <알>이 세상 빛을 보아 <아이>가 되듯이, 그렇게 태어나기 이전의 태아를 몸에 품고 있는 산모는 <어머니>이며 수정란을 가능케 한 그 부모는 <어버이>인 것처럼 <어>는 <아>로 나타나기 이전의 상태를 형상화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얼>은 모든 변화를 가능케 하는, 생겨나와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그런 어떤 것이며,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형상을 갖추지 않고 있는, 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형상을 갖추면 더 이상 <얼>이 아닌 것이 된다. <어>에서 밖으로 나와 하늘 아래 땅 위에 서게 되는 것이 <이>이다. 하늘을 이고 땅 위에서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 마주치고 있는 지금 여기의 <긋>으로서, 살아 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자신의 바탈을, 속알을 이루어나가야 하는 인간의 과제가 곧 <일>인 것이다.
다석은 <우주알>에서 터져 나와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우주전체를 가득 채우고 붙잡고 유지해 주고 있는 것이 곧 <얼>이라고 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감싸며 지탱시켜 주고 있는 <한아>의 <얼>을 <한얼>이라고 한다. 그리고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 거기에서 마주치고 있는 <긋>으로서의 인간에서 이 한얼은 얼로서 깨어나게 된다. 그래서 다석은 영원한 생명인 <한아님>의 긋이 <나>라고 본다. <긋>자의 가로로 그은 막대기(ㅡ)는 세상이다. 가로 막대기 밑의 시옷(ㅅ)은 사람들이다. 가로 막대기 위의 기역(ㄱ)은 하늘에서 온 정신 곧 얼인데 그 정신(얼)이 땅에 부딪쳐 생긴 것이 사람이다. 정신(얼)이 육체를 쓴 것이 사람이다. 사람의 생명은 정신(얼)이다. 이 영원한 얼(한얼)의 긋이 제(자기)긋이며, 그것이 나다. 나는 이제 실제로 여기 있는 이 제 긋이다.
보이지 않으며 볼 수 없는 얼이 나타나는 곳이 바로 <얼굴>이다. <얼굴>은 얼의 골자기 이기 때문이다. 링컨도 일찍이, “인간은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모양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제긋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은 <몸나>에 사로잡혀서도 안 되고 <맘나>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 되고 <얼나>로 솟나야 된다. 우리는 이렇게 <얼나>로 솟나 얼이 온전한 사람을 <어른(얼온이)>이라고 한다. 그리고 얼이 나간 사람, 얼이 빠진 사람, 얼이 뜬 사람, 얼이 썩은 사람들은 <얼간이>, <얼뜨기>, <어리석은 자>라고 부른다. 일상언어에서 드러나고 있는 얼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다석은 한 걸음 더 멀리 나가 우리글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읊는 글임을 강조한다. 다석에 의하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꾸 말씀을 사뢰어야 한다. 무슨 말을 사뢰나.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희망으로 목적으로 생명으로 사랑한다고 사뢰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때 살은 것이요, 생각할 때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 사뢰는 소리는 바른 소리로 해야 한다. 그 바른 소리가 우리 글씨의 이름이요 사명이다. <하루>란 뜻은 하느님을 위하여 일할 오늘을 말한다. <할 우[上]>. 우[上]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을 위하여 일거리를 받아 놓은 오늘이란 우(위)이기도 하다. 하느님을 위하여 짓고 만들고 하면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의 앞이 훤히 트여질 것이다. 참 잘 밝아질 것이다. 우리 씨알들이 하느님과 영통하여 얻은 진선미란 말씀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한글의 모음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는 <아가야 어서 오너라, 위[하느님 아버지께]>로 라는 뜻이라고 유영모는 말하였다.
다석에 의하면 우리말은 하느님의 계시이며, 훈민정음은 하늘 글이다. 우리말은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다고 다석은 생각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알려면 우리말을 풀어보면 된다.
다석은 우리말의 <가나다라>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나들이 (1956.2.8.)
가 나드리 머 바소오 조차
커터피 하이
가나드리 머바소오
조차커터 피힌(힘 힝)
가니 누구 힘
“가 나드리 머 바소오.” 나들이 여행을 가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느님을 보아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좇아 커지고 터지고 피어야 되지 않느냐. 인간의 목적은 하느님을 보아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인간은 하느님처럼 커지고 터지고 피어나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
또 한번 가서 나들이 가서, 머 무엇을, 바, 보았소, 하느님을 보아야지. 하느님을 보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커지고 터지고 피어나서 힘있게 독립하고 자유롭게 힝하고 날 수가 있다.
가니, 하느님 앞에 가니 누구나 힘을 얻고 힘이 될 수 있다. 가니 누구나 힘이다.”
6. ‘우리말’ 속에 담겨 있는 ‘철학’
1) 몸, 맘, 믐
우리말의 ‘ㅁ’은 모든 것이 모여 있음을 형상화하고 있다. 우리말로 말놀이를 할 때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다. ‘ㄱ’에서 대표적인 중요한 말은 ‘가다’다. 모든 것은 남아 있지 않고 다 간다. 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있다가 가는가일 뿐이다. 그런데 가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다 없어져버렸을 것이다. 그러기에 가는 것이 있으면 나는 것이 있어야 한다. ‘ㄴ’은 ‘나다’다. 이처럼 가고 나고 가고 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세계다. ‘가온 찍기’는 가고 나서 가고 오는 그 가운데에 태극점[․]을 찍은 것이다. 이것이 ‘[가온]’이다. ‘ㄷ’은 ‘ㄴ’에 덮개를 하나 씌운 것이다. 나서 되고 나서 되는 되풀이를 생각하면 된다. ㄷ은 ‘되다’며 되어 가는 것이다. 되어 가는 것을 강조하여 ‘됨됨이’라는 말도 생겨난다. ‘ㄹ’은 그야말로 ㄱ․ㄴ․ㄷ이 합쳐진 것이다. 가고 나고 되어 가는, 계속되는 모든 끊임없는 변화와 활동 그 자체를 뜻한다. 다석은 그러기에 ㄹ에 태극점[․]을 찍는다. 이것은 한자의 ‘中’과 같다고 하였다. 우리말에서 ㄹ이 들어가는 것은 모두 다 변화를 간직하고 있다. ‘알, 얼, 깔, 꼴, 일’ 등처럼 ㄹ이 들어가는 것들은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살살, 솔솔, 탈탈, 털털’처럼 변화와 활동을 표현하는 부사에는 어김없이 ㄹ이 들어 있다. 변화가 모인 것이 ㅁ이다.
우리말의 ‘몸’에서 아래의 ㅁ은 땅을 모은 것이고 위의 ㅁ은 하늘을 모은 것이다. 우리의 몸은 하늘과 땅을 모은 것이다. 우리말 몸에는 ㅁ에 담겨 있는 활동하며 움직이는 움직임의 원리까지 간직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말의 닿소리를 가지고 한 말놀이다. 이처럼 우리말에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오행(五行)이 들어 있다. ㅁ은 오행에서 흙[土]에 해당된다. ㄱ은 나무[木]에, ㄴ은 불[火]에, ㅅ은 쇠[金]에, ㅇ은 물[水]에 해당된다. 이렇게 한글 속에는 우리들의 고유한 삶의 철학이 들어 있다.
홀소리를 살펴보자. 모음은 우리말의 생명이고 그 시작은 아래아[․]다. ‘․’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빔 속에서 무언가 하나 막 생겨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서양 과학자들의 말을 빌린다면 빅뱅(Big Bang, 대폭발)이다. 무(無)에서 유(有)가 생성되어 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이것은 하늘[天]의 세계다. 하늘인 이 태극점 ‘․’이 양 옆으로 움직이면 ‘ㅡ’가 되고, 그것은 땅을 말한다. 하늘인 태극점이 위 아래로 움직이면 ‘|’가 되고, 그것이 곧 사람이다. 우리말은 ․(天)․ㅡ(地)․|(人)이 어우러져 모음을 이루고 있다. 우리말은 이와 같이 천지인 합일의 사상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말 속에는 이미 영성적인 존재로서의 심성이 결과 태로서 무늬지어 들어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 사물, 자연을 대하고 보는 방식과 양태들이 우리말 속에 새겨져 있다. ‘․’가 ㅡ, |와 만나서 ㅏ, ㅓ, ㅗ, ㅜ 등으로 변한다. 그리고 여기에 인간인 ‘ㅣ’가 한 번 더 붙으면 ㅑ, ㅕ, ㅛ, ㅠ 가 된다.
천지인(天地人) 사이에서 그 사이를 잇는 존재가 인간이다. 우리말에서는 인간이 중요하다. 우리말은 태극점[․]을 안고 있는가 아니면 밖에 두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태극점을 안고 있으면 아직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어떤 것이다. 그리고 태극점이 밖으로 나가면 이제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태극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아’로 시작한다. ‘․[ㅇ]’은 입을 벌여 목구멍을 동그랗게 연 채 놔두고 내는 소리다. 인간이 맨 처음 하는 옹알이도 받침이 없는 소리들이다. ㅇ 위에 덮개 하나를 얹으면 ‘ ’가 되고 그것에다 덮개 하나를 더 얹으면 ‘ㅎ’가 된다. ‘ ’[덮개]는 ․[ㅇ] 소리가 나오는 것을 막는 것이다.
2) ‘바탈’, ‘가’, ‘깔’, ‘꼴’
인간은 빔 사이에 있다. 우리말에는 매우 철학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물체와 관련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우리말 ‘바탈’이다. 이 말을 사용하면 출판사에서 바탈을 제 멋대로 바탕으로 바꾸어버린다. 사전에 그런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던 낱말도 사전에서 빼버리고서는, 사전에 없다고 없는 말로 치부해버린다. 사전에 있는 말들은 기록이라는 흔적으로 남은 것들을 모아서 담은 것들이다. 즉 흔적의 산물이다. 흔적이 생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사용되었어야 하는가. 사용된 것들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하여 담지 않다가 나중에는 담겨 있지 않다고 하여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언가 뒤바뀌었어도 한참 뒤바뀌었다.
‘바탈’은 바탕이 되는 물체, 물질이다. 이것을 ‘속알’이라고도 한다. 속안에 들어 있는 알맹이, 알갱이,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물질을 뜻한다. 다석은 바탈이 ‘받할’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한다. ‘받할’은 ‘받’과 ‘할’이 모여 만들어진 글자로서, ‘받’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의미하고, ‘할’은 그 받은 것을 갖고 해야 할 바를 뜻한다. 따라서 ‘바탈’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으로서 살아가면서 실행해내야 할 바를 가리킨다.
바탈, 속알에는 우리말로 ‘깔’, ‘꼴’, ‘결’이 무늬져 들어 있다. 전체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틀이 있고 그것은 일종의 얼개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한자를 사용하여 바탈을 질료 또는 원질료, 그리고 깔, 꼴은 형태, 이데아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순수 우리말을 가지고도 철학적인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깔’은 사전에 ‘물건의 바탕이나 맵시’로 풀이되어 있다.
바탈이 어떤 형태를 갖추려면 ‘가’가 있어야 한다. ‘가이 있음’이라는 표현이 있다. 무한한 것은 ‘가이 없음’이다. ‘가’는 물건이나 어떤 것의 둘레, 언저리를 말한다. 만일 ‘가’가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바탈, 속알이 무언가 둘레, 언저리 속에 간직되어 어떤 형태의 모양이든 갖게 되면 가를 갖게 되는 것이다. 모든 ‘가’는 가이 없는 ‘가’가 아니라 가이 있는 ‘가’다. 모든 존재하는 유(有)는 가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이 있는 있음이다. 그런 가를 갖게 되면 그 거기에는 빔 사이의 차원이 포함되어 들어간다.
‘깔’은 때깔, 빛깔이나 맵시로 볼 수 있고, ‘꼴’은 모양새, 형태를 뜻한다. 이 둘을 합쳐서 그리스 철학에서는 실체라고 이름했고 그것은 질료에 대비되어 형상 또는 형태라는 의미를 가졌다. ‘결’은 주름과 연관지어 설명될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우주 진화의 결이 새겨져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게끔 된 나름대로의 ― 변화의 나이테처럼 ― 변화의 결(태)을 가지고 있다. ‘결’의 사전적인 의미는 ‘빛의 파동’, ‘겉에 보이는 무늬’, ‘주름의 형상’이다. 프랑스 철학에서 ‘주름’이라는 낱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결’로 소화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용어를 ‘결’에 대한 분석으로 정리해 나간다면 우리말로 철학함이 충분히 가능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틀’, ‘얼개’는 구조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사물은 그 안에 이러한 사물의 있음의 구조를 간직하고 있다. 즉 빔 사이에 있는 것은 이런 차원을 다 가지고 있다. 바탈, 얼개가 있고 깔, 꼴을 갖추면서 그 안에 결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의 있음은 고정된 있음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어감(됨)의 있음이다. 되어가서 되고, 되고 되어서 사물이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됨됨이’라고 한다. 됨됨이는 사람이나 물건의 된 품을 말한다. 우리말에 이런 좋은 말들이 있으니, 그것을 본질, 속성, 존재라는 어려운 말들로 표현해야 할 이유가 없다. 모든 사물들에게서 우리는 이런 됨됨이를 볼 수 있다.
3) ‘사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빔 사이에 있다. 동양의 사상은 일종의 조화사상이다. 천지인(天地人) 조화, 자연조화 같은 말에 있는 조화를 순수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사이좋게 사이 나눔’으로 볼 수 있다. 조화의 사상은 바로 사이좋게 사이 나눔을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모든 ‘사이’를 사이좋게 사이 나누면서 있다면 바로 그것이 조화다. 우리말의 ‘사이’는 간격, 공간도 의미하지만 모양새라는 의미도 있다. 모든 사이에 나타나는 것들이 모양새다. ‘~새’는 됨됨이나 상태, 정도 등을 나타내는 접미어라고 한다. 즉 됨됨이와 관련되어 있다. 꾸밈새, 쓰임새라고 말한다. 사이에서 ‘가’를 갖고 ‘깔’과 ‘꼴’을 갖추고 있는 모든 것들은 ‘새’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새’에는 또 새롭다, 새 사람이란 의미도 담겨 있다. 모든 것이 사이에 있는데, 사이에 있다 보니 워낙 자연스러워 사이에 있는 것을 사이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이에 있음이 눈에 뜨이게 되면 그것을 새것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는 전에는 눈에 뜨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을 ‘새롭다, 새것’이라고 한다. 참새나 독수리와 같은 새도 사이를 날고 있는, 사이에 있는 전형적인 것이다. 또 사이는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 ‘새’를 써 ‘새빨간, 새파란’에서처럼 강조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처럼 우리말에는 ‘사이’(새)가 아주 많이 들어 있다.
4) 우리말 철학의 ‘바탕’
가) 홀소리: 하늘 (·), 땅 (ㅡ), 사람 (ㅣ)
나) 닿소리
- ㄱ: 보냄: 거룩, 검
- ㄴ: 받음: 나다, 날다
- ㅁ: 입, 언어: 먹다, 마신다, 문다
- ㅅ: 인간: 사람, 삶, 숨, 싹, 씨
- ㅇ: 공, 근원, 근본: 〜이다
다) ‘되어감’의 원칙
- 하늘의 기운, 땅의 기운을 모아 몬(物)이 된다
- 바탈이 바탕에 모여 가이 있는 깔과 꼴을 갖춘 다양한 몬이 되어간다
- 끊임없는 되어감 속에서 새겨지는 됨됨이는 몬의 특정한 결과 무늬를 만들어낸다
- 그것이 그 몬의 독특한 바탈과 속알이 되며 거기에는 됨됨이의 결이 주름져 있다
- 몬은 바탈과 속알에 간직돼 있는 결을 풀어나간다
- 끊임없는 됨과 풀음(되풀이) 속에 됨됨이가 이루어진다
- 됨 → 되풀이 속에서 질서, 형태, 구조가 생긴다 (몸 → 짓 → 품 → 틀)
물질(양, 질료)에서 질적 변화가 생긴다
물질(양, 질료)을 바탕으로 다양한 형상이 생겨 나온다.
- 있음은 사이에 있음이다: 빔-사이, 때-사이, 몬-사이, 하늘-땅-사이에 있음
모든 것은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그물코를 이루고 있다
- 되풀이의 패턴이 바탈(속알)에 갈마듦(번갈아 듦)의 결을 새겨놓는다.
- 됨됨이 속에는 탈, 깔과 꼴 그리고 결이 응축되어 있다.
* 있음 → 모음 → 되어감 → 됨 → 됨됨이 → 부대낌 → 되풀이 → 물음 →
되삭임 → 배움 → 되먹임 → 앎 → 삶 → 살림
다석의 우리말로 철학하기를 이어받은 제자 함석헌 선생의 말로 글을 마무리 짓자.
“우리말로 할 수 없는 종교·철학·예술·학문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해도 그만 두시오. 그까짓 것 아니고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글월[문화(文化)]이 돋아나오지, 공작의 깃 같은 남의 글월 가져다 아무리 붙였다기로 그것이 우리 것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좋아요3
공유하기
글 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