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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 / 우충좌돌, 김훈과 홍세화 사이로 |
우충좌돌, 김훈과 홍세화 사이로
1 사자성어 ‘좌충우돌’은 괜한 짓 하는 모습을 싸잡아 비난하는 말이다. 그 말은 그러면서 은근히 중도를 칭송한다. 얼마 전부터 나는 이 말을 비틀고 싶어져서, ‘우충좌돌’이란 말을 쓰고 있다. 우선 그 말에 붙어 있던 괜한 부정적인 뉘앙스를 뒤집고 싶었다. 양쪽으로 부딪치는 일은, 그것이 그저 공허한 양비론에 그치지 않는다면, 매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양쪽으로 충돌하는 데에도 순서가 있을듯하였다. 이제까지 너무 우익적으로 치우쳤던 한국의 사회정치적 혹은 이념적 상황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부딪쳐야 할 쪽이 있다면 그것은 장기간 기득권을 누려왔던 오른쪽일 것이다. 그 다음에, 혹은 그와 동시에, 왼쪽에도 부딪칠 구석이 있을듯했다. 그럼으로써 가까스로 균형을 잡을 수 있을듯했다. 이렇게 기우뚱한 균형을 잡음으로써 ‘좌충우돌’이 너무 쉽게 점유하고 있었던 중도적 가치를 다시 확보하고 싶었다. ‘좌충우돌’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너무 쉽게, 너무 게으르게, 중용을 지키고 중도를 가는척했다. 그러나 가만히 보건대 그것은 제대로 된 중용도 중도도 아닌듯하다. 일단 고전적인 의미의 중용은 그렇다 치고, 현재 사람들이 말하는 중도에 대해서만 말해보자. ‘좌충우돌’을 그저 부정적으로 보는 한, 중도가 적극적인 의미로 확보될 리 없다. 중도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의미로 확보되려면, 오른쪽과 왼쪽 양편의 극단과 부딪치는 일이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중도는 너털웃음 지으며 신수 좋은 얼굴로 가는 길이 아니라, 매우 힘겹게, 매우 예민하게, 그러나 그렇다고 우거지상을 하고 갈 필요는 없는 길로 드러날 것이다. 또 그래야만 지나치게 보수와 진보로 편향된 풍경 속에서 가까스로 기우뚱거리는 균형을 잡을 수 있을듯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도에게 무작정 우월성을 부여해야 할 필요는 물론 없다. 다만 보수와 진보, 혹은 극우와 극좌가 극단적으로 맞부딪치면서 아우성치는 현재 상황에서 바람직한 중도적 의미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는듯하다.
2 김훈과 홍세화를 보수적 비탈과 진보적 비탈에 놓는 이유는 어쩌면 우연적일 수도 있다. 몇 년 전에 그 두 사람이 ‘우연히’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했었다. 서로 상이한 아니 상반될 정도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진보적인 신문사에 특채되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었고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던 것 같다. 그 후 전자는 잠깐 있다가 나왔고 후자는 그 안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듯하다. 어쨌든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한겨레신문사는 당시 뚜렷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사람들을 포용하면서 중도적 스펙트럼을 넓히려는 시도를 공식적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심오한 뜻이 있는지 오리무중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특히 김훈은 그 몇 년 전 〈한겨레21〉에서 자신의 보수적인 취향과 기질을 용감하다 못해 호탕하게 밝혀 화제가 되었다. 〈한겨레21〉과 쌍벽을 이루는 시사주간지의 편집국장을 겸하고 있던 김훈에게 그 화제는 물의로 확대되었는지, 그는 〈시사저널〉 편집국장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이런 전력의 김훈을 보란 듯이 홍세화와 한 묶음으로 특채했으니, 한겨레신문사의 용감한 시도는 또 다른 화제를 불러일으킬만했다. 그런데 그 시도의 모호함은 그 후 한겨레가 대표하는 성격에도 부분적으로 옮아붙지 않았는가 싶다. 한겨레는 강력하게 진보를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포용력 있는 중도를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모호한 중도를 하려는 것인지, 내 머리는 때때로 갸우뚱거린다. 그것을 한겨레 탓으로만 돌리기도 힘들다는 것은 나도 안다. 현재 개혁 국면에서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기 어려운 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과 좌우에서 부딪치려는 다른 우연적인 이유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아는 선배이기 때문이다. 이 우연적인 요인이 이 글을 쓰는 데 적잖이 부담으로 작용한다. 다소 불쾌한 부딪침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부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부담’은 다만 글 안에서 그들과 부딪치는 데 그치지 않는듯하다. 문화의 공적인 차원에서 대립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두 사람을 사적으로 안다는 부담도 있는데, 그 사적인 성격을 나는 글이라는 공적인 공간을 통해 조절하고 싶은 것이다. 비평을 하는 자는 사적으로 쓸 수 있는 말과 공적으로 써야 할 말의 무게를 되도록이면 같게 만들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두 선배를 비평하면서 정치성에 대한 판단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일 것이나, 그렇다고 정치적인 관심사가 이 글의 핵심은 아니다. 그것도 약간 떨어진 옆에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그것보다는 더 중요할듯하다. 세상, 세상이란 대체 무엇일까? 가까이 가려고 하면 멀어지기만 하는 세상이라니. 아무튼 우충좌돌하기를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는 말자. 칼싸움 보듯이 혹은 하듯이 재미있게 생각해도 된다. 칼싸움 이야기는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우충좌돌하기는 단순히 편한 길에서 유유자적하는 중도는 아주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쿵쿵 부딪치면서 가운데를 뚫거나 다지는 일도 아니다. 가운데 길의 좁음은 다 아는 일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좁은가를 느끼는 일은 역시 그 길을 가는 사람에 달렸다. 내가 보기에 칼 같은 중(中)이 있다. 칼로 베어야만, 아니 칼로 벤다는 말도 사실 너무 진부해졌는데, 칼로 비집어야만 드러나는 중도, 가운데 길이 있다. 그것은 공간이라 하기에는 너무 좁은 길이다. 칼은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며, 자르고 들어가고, 헤치면서 겨우 나온다. 나오는가 하면 다시 자르고 들어간다. 다시, 다시, 다시……. 그렇게 중도는 중도(中刀)가 된다.
3 김훈이 앞의 〈한겨레21〉 대담에서 보란듯이 도발적으로 보수성을 표방했을 때 진보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비판적이었던듯한데, 사실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자신의 보수성을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헛보수들이 허다한 판에 당당하게 보수를 드러내는 태도는 괜찮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념이나 거대담론으로 정당화되거나 정리되지 않는 삶의 누추한 모습이나 완강한 태도들 그리고 도덕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적인 밀고 당김이 인간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이 그의 글의 장점이기도 하다. 화려한 이념이나 거대담론으로 사물들을 설명하고 정리하려는 어설픔 혹은 어쭙잖음을 우습게 아는 것. 산문도 그렇지만 기사를 쓸 때도 그는 사람들의 악하고 약하고 추한 면을 슬며시 내놓거나 아예 뻔뻔하게 내놓는다. 악하고 약하며 추한 면들은 마치 옛날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여전히 있을 것처럼 드러난다. 그래서 역사적인 사실들을 관찰하는 그는 악착같이 그 역사성을 넘어, 여전했으며 그래서 또 여래할 풍경을 슬슬 불러낸다. 세상에서 불러준 이념과 개념으로 사물을 설명하지 않으려는 집요한 시각이 그의 글 속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념과 도덕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물들의 모습과 인간들의 행위가 꼭 악하고 약하고 추한 것만은 아니다. 꽃과 여자들과 바퀴들을 묘사하는 그의 산문들은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넘치며, 굴러가는 바퀴처럼 날렵하다. 색과 선으로 넘치는 사물과 인간의 모습이 폭력적이면서도 무구하다는 점을 파악하는 호모 루덴스의 시각은 악동의 시각 같다. 악하고 약하고 추한 면에 대한 예민한 시각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는 육체 가진 것들의 무구함에 끼어들어 즐기려는 한없는 시각을 소유하고 있다. 이 두 시각이 적당하게 혹은 재미있게 합체하면서 유장한 관점을 합성할 때, 그의 글은 더 멀리 보게 하고 더 넓게 보게 한다. 그러나 악하고 약하고 추한 면을 서술하려는 그의 의지 혹은 욕망 그리고 사회적 가치 판단에서 도망가려는 그의 욕망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첫 번째 경우는 그가 인간의 악한 면을 위악적으로 과장하면서, 그와 동시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에 대해 역사적인 판단을 훌쩍 유보한 채, 너무 넓고 너무 높은 비역사적 관점에서만 보려고 하는 때이다. 그 관점은 너무 비역사적이어서 자연주의적 적나라함으로 넘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인간이 사회적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빌리는 사회적 판단을 쉽게 경시하거나 무시하는듯하다. 사회과학적이고 역사적인 판단의 중요성을 말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이 꼭 옳거나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유한성을 알면서도 인간은 그 유한성 안에서 가능하면 사회적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일 뿐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제한된 맥락 안에서 행위와 실천을 하는 인간은 또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위대함이자 왜소함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너무 완강하게, 한편으로는 너무 한가하게 가소로움을 표시한다. 그러면서 어느 쪽에도 끼지 않아도 당당할 수 있다고 그는 표표히 말한다. 문학적 글의 이름으로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아니 어느 정도가 아니라 꽤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사건들의 역사성이란 때때로 어느 한쪽으로의 정당한 개입을 요구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정치적 개입을 초월하는 듯한 그의 말들은 그의 당당했던, 어떤 점에서는 여전히 당당한 보수성에 상응하지 않는다. 또 정작 그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실존성을 탈각시키는듯하다. 정치적 판단 속에서 기어가는 인간조건이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사실 그것을 떼고 나서 존재하는 실존이 또 무어 그리 대수이겠는가. 변덕스럽고 불완전한 사회적 실천에 진지하게, 진지한 시늉을 하고, 임하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그가 그토록 우습게 여기는 말과 크게 다를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한 예로 김대중 정부 때 있었던 언론사 세무사찰을 들어보자. 그 사찰이 치밀하고도 장기적인 일관성을 띠지도 못했고 따라서 정치적 당당함을 결여했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따라서 단순히 신문사들이 주장하듯 언론 자유가 액면 그대로 핵심인 것도 아니고 정부가 말하듯이 조세 정의가 액면 그대로 핵심인 것만도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 둘 가운데서 어느 쪽 하나만을 진리의 차원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역사과정의 제한된 유한성의 틀 안에서 합리적 가치판단을 하기 위해 애쓰고 싸우는 경우, 우리는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이나 차악의 차원에서 사회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 경우 언론사들의 탈세는 나름대로 적발되고 고발될 수 있는 사회적 사건이라는 점이 부정될 필요는 없을 터이다. 그런데도 김훈은 다 헛소리라고, 자신은 모든 정치성을 초월한 것처럼, 일갈한다.
이 판국에 술이 약해 보이는 여성 국회의원이 제 맘에 안 드는 신문칼럼을 쓴 소설가를 향해 “지식인이라면 어느 편인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삿대질을 했다고 한다. 나는 경악했다. 어느 편인지를 밝히라니!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이 나의 지성일 수가 있는가. 당신들은 또 어느 편인가. 나는 이른바 언론의 ‘자유’ 편인가. 나는 이른바 조세의 ‘정의’ 편인가. 내가 ‘자유’의 편이라면 ‘정의’를 배반하는 것이고 내가 ‘정의’의 편이라면 ‘자유’를 부정하는 것인가. 이러니 어느 편인가를 밝히라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잠꼬대인가 술주정인가. 언어는 더 이상 인간의 말이 아니다. 아무런 의미도 담겨져 있지 않은 음향처럼 들린다. 지옥의 모습은 본래 이러하다.1)
역사성을 초월한 자유와 정의 가운데에서 양자택일하는 문제가 핵심인 것은 어차피 아니다. 시대적 상황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좋든 싫든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란 동물의 존재조건이겠다. 그런데도 김훈은 이 역사적 제한성 혹은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마치 문제의 핵심이 절대적 진리의 싸움인 것처럼 문장을 가파르게 이끈다. 그 싸움판은 절대적 진리에 못 미치기에 지옥이라고, 그는 호기 있게 깽판을 놓는다. 피할 수 있으면 사회적 위악을 피하는 것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위악을 피한다면서 그것보다 훨씬 크고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위악(僞惡)을 저지르는 게 아닐까. 곧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천상의 언어와 지옥의 언어 사이에서 어느 쪽인지를 말하라고 다그치는 위악에 빠지는듯하다. 정치적 대립을 가소롭게 여기며 표표히 움직이는 그의 산문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정치적 언어의 사용은 제약이기도 하지만 또 인간극장에서 빠져서도 안 될 것이다. 그가 생각하듯이 정치적 최선은 존재하기 힘들며, 나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 최선이 부재할 때 인간은 무모한 일인 줄 알면서도 정당한 권력을 구성하고 행사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부당한 권력에 대해서는 비판하려고 애를 쓴다. 만일 이 모든 일이 다 개수작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인간 언어야말로 더 이상 소리를 낼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이 나라의 모든 사태는 권력투쟁이 아닌 것이 없다. 지역간의 갈등과 대립도 권력투쟁이고 민노총의 파업도 권력투쟁이다. 색깔론과 역색깔론이 모두 권력투쟁이고 의약분업도 권력투쟁이고 통일조차도 권력투쟁의 제물이 되어간다. 권력만이 이 지옥의 헌법인 것이다. 여당과 야당의 싸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와 신문, 야당과 신문, 크다는 신문과 작다는 신문, 진보라는 신문과 보수라는 신문, 신문과 방송 사이의 이 아수라 싸움만이 모두 다 말짱 권력투쟁인 것이다(같은 책, 84쪽).
권력투쟁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인간 행위가 꼭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권력투쟁인 것은 또 아니다. 싸움과 갈등의 눈금에도 미세하나마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일정한 범위 안에서 사람들은 그 눈금의 차이에 따라, 바로 인간 언어의 덕택 혹은 바로 그 탓으로, 선택을 한다. 이 점을 그가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인문적 제도와 잣대의 중요성을 종종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언어에 취해 사회적 판단의 필요악을 왕왕 초월한다. 사회적 선택을 화려한 이념이나 거대담론으로 지나치게 포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선택의 여지 혹은 택일의 자유의지가 전혀 없다고 위악을 부릴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이렇게 사회적 위악을 피한다면서 그는 지옥의 위악을 불러내는데, 그 와중에서 그는 알게 모르게 약함을 과장한다. 위약(僞弱)한다. 마치 자신이 한없이 힘없는 민중이자 산골처사인 듯 말한다.
정치권력이 되었건 언론이 되었건, 힘센 것들이 많은 힘없는 사람들을 이처럼 능멸하고 조롱해도 좋은 것인지, 치가 떨리고 이가 갈린다.
만일 이 말들이 조금만 해학적으로 씌어졌다면 어쩌면 펑펑 웃으면서 즐기고 지나갈 수 있을듯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구절들은 적지 않은 경우 위악을 동반한 위약(僞弱)으로 넘쳐서 부담스럽다. 정말 힘없는 사람의 언어라고 하기에는 그의 언어는 매우 화려하고 매우 힘이 있다. 자신의 언어를 소중히 하다못해 자신의 미학적 언어의 힘에 취한 듯이 보일 때가 적지 않다. 자신의 언어로 어떤 사회적 판단과 선택도 넘어설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실제 그의 산문은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데―, 자칫하면 언어의 탐미에 경도되기 쉬운듯하다. 이 순간 그의 언어는 위악과 위약 사이에서 흔들거린다. 그래서 위악적 당당함이 매력인 그의 언어는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위약적(僞弱的) 감상에 빠지는듯하다. 여기서 과장된 감상을 느끼는 것은 나뿐일까? 앞의 ‘치가 떨린다’는 말은 아마도 이 경계에 있을 것이다. 외로움에 과장적으로 호소하는 경향들도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그가 자주 불러내는 ‘무참함’의 정서도 한편으로는 선비적 실존에 호소하지만, 동시에 감상적 외로움을 과장하는듯하다. 여러 신문사의 여러 직위를 초개처럼 버릴 정도로 당당했던 그가 아닌가. 또 그는 자신의 개인주의적 기질을 호방하게 글에서 드러냈었다. 나는 그의 그런 당당함이 부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힘없음과 무참함을 과장하곤 한다는 데 마음이 걸렸다. 보통사람, 정말 힘없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런 과장은 위악과 위약을 뒤섞는 일이리라. 그런가 하면 그는 빈번하게 장엄함의 정서에 호소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 호소가 절절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이미 그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사회적 판단에서 벗어나 있기에 그 호소는 다만 말의 잔치에 그치는듯하다. 허무에 호소할 때도 그렇다. 맹목적인 이념과 거대담론의 틈으로 비치는 허무의 풍경을 직시하는 것이 그의 날카로움이기는 하지만, 종종 그는 허무를 과장한다. 더구나 매우 탐미적인 언어로 장엄하게 과장한다. 이 경우 미학적인 언어에 사로잡혀 독자는 자칫하면 맹목적으로 허무의 정서에 탐닉하게 된다. 끊임없이 언어의 하찮음을 고백하는 그는 왜 스스로 언어의 미학에 과도하게 탐닉하는 것일까. 위악과 위약의 꼬리 물기, 당당함과 외로움의 꼬리 물기도 정말 그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사람도 선택을 하지 않고 초연하게 버티기는 힘들다. 아무리 무심하고 무구한듯한 언어도 그 언어가 작동되는 문학적 장(場) 안에서의 일정한 정치성을 초월할 수는 없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 그는 보수를 선택하고 있다.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의 보수가 아니라, 육체의 원시적인 움직임과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의 근원적인 보수다. 그리고 현재적 경향을 기본적으로 소외된 것으로 본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그것 자체는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실제로 그가 자신이 선택한 보수를 당당하게 말할 때가 좋았다. 그런데 거기에서 벗어나 마치 자신이 어느 쪽도 아니며 어떤 정치성도 띠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너무 무구함을 과장하는 일이 될듯하며, 당당한 보수가 아니라 무책임한 보수가 될 위험이 있다. 사실 지난해 코미디 중 하나는 『칼의 노래』를 둘러싸고 일어난 것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결의안이 기각되기 전 대통령이 청와대 안에서 즐겨 읽는 몇 권의 책 중 그것이 있음이 보도되었다. 당시 탄핵에 반대하는 범국민적 촛불의 물결이 요동치는 때이니 만큼 그 책에 대한 관심은 거의 구국적인 관심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데에는 대통령의 ‘의도하지 않은’ 오버액션이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실제로 김훈은 극우 경향의 신문들에 대해 비판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 참여정부에 대해 호의적이지도 않으니, 대통령이 그 책을 즐겨 읽는다는 보도는 소극(笑劇)이었다. 아니 그 책을 즐겨 읽는다는 대통령의 ‘고독한 결의의 시간’도 소극이 된 셈이다. 의도하지 않았던 우연적인 사건들의 와중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지만, 사태의 우연성에 희극적인 요소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던 셈이다. 그런 우연적인 사건의 흐름에 대해서도 김훈은 다소 인색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그 책을 훌륭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2004년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그가 조금은 아량을 베풀었으면 좋겠다. 아마도 〈한겨레21〉 대담을 둘러싼 ‘진보적’ 비판이 정치성에 대한 그의 개인적 염증을 불러일으키는 데 역할을 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탈정치적 태도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가 넓은 뜻의 정치성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사건에 대해 개인이 일정하게 거리를 둘 수 있지만, 넓은 의미로 현재의 문화적 사건에 대한 개인과 집단이 철저하게 탈정치적이기는 힘들다. 그들의 태도는, 아무리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낙태가 그렇고 도롱뇽 살리기가 그렇다. 많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제 몫의 위악을 끌고 다니며,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의 다소 위악적 보수성에 대해서 나는 크게 불편하지 않다. 다만 그가 그 위악에 위약을 섞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무구함을 과장하지 않았으면 하며, 덧붙여 하찮은 인간사를 초월한 장엄함을 과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꼬집는 게 나의 위악이다.
4 김훈이 드물게 혹은 은밀한 방식으로만 정치적인 흐름들에 개입하는 것과 달리 홍세화는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바로 공식적인 기사를 통한 그의 정치적 개입의 적극성이 아마도 나로 하여금 그 글에 대해 비판적인 지적을 하기로 마음먹게 한 중요한 요인인듯하다. 물론 그가 글과 기사 혹은 방송을 통해 단지 정치적으로만 개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여러 방식으로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개입을 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아마도 그의 엄격하게 진보적인 관점이 사회와 정치에 대해 엄격한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일 게다. 처음부터 그는 참여정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 이후 줄곧 강한 비판과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다. 출범 당시부터 이 정부는 북한 핵문제 때문에 미국에 끌려 다니는 불행한 형국이었고, 당당하지 못한 외교는 숱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었다. 출범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2003년 3월에 홍세화는 벌써 다음과 같이 극단적인 말을 한다.
노무현은 지지자들의 반대 속에 그가 개혁 대상으로 삼았던 수구세력의 품에 스스로 들어간 것이다.2) 노무현이 당시 ‘수구세력의 품에 스스로 들어갔다’는 표현은 지나치다. 미국에 당당하지 못한 점은 진보적 관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지언정, 수구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수의 시민들이 속으로는 미국에 대해 당당해지고 싶지만 막상 정책적 결정을 내릴 때에는 신중해진다. 홍세화는 이들 모두가 수구적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2003년 6월, 노무현 정부 1백일 평가토론회를 가졌다. 당시 외교 분야 발제를 맡은 윤영상 평화군축운동본부장이 “한미정상회담과 북한 핵문제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대응에 화가 나 있지만 민노당은 한반도 정세의 더 큰 불안정과 긴장을 가져올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원하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와 달리 같은 자리에서 홍세화는 나름대로 가졌던 기대가 벌써 “허물어졌다”고 극단적으로 말하면서, 정부는 “분명 수구적인 의식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를 내렸다.3) 비판할 수는 있지만, 백 일밖에 안 된 상황에서 너무 냉정하고 극단적인 평가가 아닌가 싶다. 이런 극단적인 평가는 줄곧 이어졌다. 그래서 2004년 12월에 이르러서는 개혁은 완전히 “끝났다”고 극언한다. “타락한 개혁에 나중은 없기 때문이다.” 진보적 관점에서 너무 느릴 뿐 아니라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행보를 혹독하게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출범한 정부를 출범 시작부터 계속 이렇게 혹독하게 비방하는 태도는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 아량도 없고 관용도 없는 것은 아닐까? 나도 지금 정부를 두둔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느려터진 개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정부에 대한 비판과 조금 다른 태도가 존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필요하다는 점을 나는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홍세화는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과 현 단계에서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을 모두 같은 통속으로 수구로 몰아가는데, 이런 일방적인 태도는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개혁이 더디게 진행되는 것은 정부의 무능 탓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도 잘 알듯이 아직도 완강하게 저항하는 보수와 극우 탓이 크다. 그들은 2004년 4월까지만 해도 대통령을 탄핵할 정도로 의회를 장악했었고, 그 이후 비록 의회 과반수를 놓치기는 했지만 2004년 말까지도 아직 120석을 가진 거대야당으로 국보법의 폐지를 막고 있는 게 아닌가. 정부는 비판하더라도, 개혁을 지지하는 다수는 그 정부와 좀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은 선거에서는 특정 정당을 지지했지만 단순히 그 정당에 예속되지는 않은 채 정부를 끌어당기며 단계적인 개혁을 이루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시민은 그저 단순하게 정당이나 정부를 지지하면서 거기에 예속되고 또 거기에 끌려가지는 않는다. 좋다, 정치적 비판이야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하자. 내 질문의 초점은 다른 데 있다. 개혁이 처음부터 끝까지 없다고 일방적으로 비난할 때 홍세화는 정치적 관점에서 그런 비난을 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정치적 차원에서 보자면, 그는 현재 민주노동당과는 다른 정치적 방식으로 개혁을 원하는 상당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최소한 인정은 해야 하지 않을까? 노무현과 개혁의 지지자를 단순하게 일방적으로 동일시하면서 모두 수구라고 싸잡아 비난하는 대신, 민주노동당의 노선에도 심정적으로 동의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한 표뿐인 표를 선뜻 민주노동당에 던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은 무엇보다도 보수 세력이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 형국에서 전략적으로 판단할 부분도 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혁의 지지자는 무조건 민주노동당 노선의 지지자와 동일해야 한다고 가정한다. 이런 동일시는 지나치다. 그런 판단은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이념적 도그마에 불과하지 않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대선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민노당을 지지했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현실적 개혁의 차원에서는 여러 변수를 고려하여 꼭 민노당 노선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결선 투표제도 없이 단순 과반수를 선택하게 만드는 선거제도가 그렇게 만들 터인데, 아마 다른 적지 않은 사람들도 그렇게 판단한다고 생각한다. 개혁에 대한 진보적 비판과 독선적 비방이 다르다고 할 때, 홍세화는 진보적 비판의 금도를 너무 쉽게 넘어간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점은 그가 개혁방식을 줄곧 정치적으로 비난은 하면서도, 정작 정치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진보적인 관점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야 충분히 존중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개입만큼 다른 정치적인 선택도 존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오로지 진보적인 방식의 정치만이 존재한다고 믿는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에 대한 과도하게 도덕적인 규정으로 흐를 수 있다. 현 단계 한국 사회에서 심정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중도적으로 투표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 특히 국제관계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탈냉전을 추구하면서도 막상 현실정치의 틀 안에서 판단할 때는 조금 보수적으로 판단한다. 아마도 한국이 처한 국제적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상황인식 때문일 것이다. 이 상황인식은 나름대로 상식적 균형을 잡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순수주의적 진보의 관점에서 이들 모두를 한심한 수구로 지칭하고 만다. 정말 민노당의 미래를 위해 생각하더라도 꼭 그의 방식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진다. 지금 아쉽게도 다소 보수적이거나 중도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 중 다수는 민주주의가 진행되는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민노당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4) 최소한 이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그들을 수구라고 비난하고 적으로 삼으면서만 정치적 역량을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오거나 독단일 터이다. 그들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개혁이 이루어지면 얼마 후에 우리 사회가 충분히 사회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중도 좌파 혹은 좌파적 사회를 기대하면서 현 단계에서는 중도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그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정체성을 배반한 허위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허위의식을 이렇게 엄격하게 규정하면 자칫하면 독단적인 엘리트주의로 빠지기 쉬운데도, 그는 이 점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 이유를 극우 혹은 보수 매체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다수의 사회구성원이 그저 허위의식에 빠져 있다고 여긴다. 이 점은 그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민노당 지지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정치적 진보주의자라면, 서민과 민중은 많은데 왜 그들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홍세화는 여기서 사람들이 무조건 잘못된 의식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모두 자발적으로 자본권력에 굴종하고 있다고 관념적이며 엘리트주의적으로 혹독하게 평가한다.
19세기 사회주의에 기초해서 이야기하자면 1천3백만 노동자가 노동자의식을 가져야 하지만, 우리가 알듯 그중에서 노동자의식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그야말로 배반하고 노동자라는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서 자발적으로 자본권력에 순응하는 것이 그대로 보인다(앞의 민주노동당 토론대회 발표문. 강조는 나에 의한 것임).
이런 관념적 엘리트주의는 실천적으로도 전략을 방기한 무책임한 방식이 아닌가 싶다. 노동자들은 단순한 의식화의 대상이 아니다. 극우 매체의 영향이 상당히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포함해서 지역적 혹은 세대적 보수성까지도 정치적 지형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대응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정치개혁을 원하는 집단이 사람들에게 좋은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면서 그들을 설득하는 노력을 하지는 않고 그저 노동자나 민중이 그저 자발적으로 자본과 권력에 굴종하고 있다고 훈계한다면, 구시대적 오만이 아닐까? 그런 오만에 빠진 사람은 그렇게 비굴하게 자발적으로 자본권력에 굴종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저주만 하기 십상이다. 그는 다수의 시민들이 현재의 미흡한 민주주의적 상황에서 나름대로 정치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을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주 극우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 중도적인 혹은 심지어 보수적인 판단을 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지난 시대의 왜곡된 역사적 구조를 거쳐 지금도 계속되는 왜곡된 구조 속에서 살고 있기에 많건 적건 왜곡된 정치적인 판단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민주정치란 것이 최소한 원칙적으로 모든 개인에게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그 인정 위에서 그들을 정치적으로 계몽하거나 혹은 설득하도록 노력하는 태도가 합리적이다. 그런데 그는 내가 보기에 엄격한 진보주의자의 높은 단상에서 내려다보면서, 지금 당장 진보적 이념과 이상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자본권력에 자발적으로 굴종하는 배반자라고 판결한다. 독단적인 인식일 뿐 아니라 민노당의 미래를 위해서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관념적인 판결로 보인다. 그의 극단적 진보주의가 정치 영역에서 그치기만 하면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사회에 대한 판단에서 도덕적 근본주의의 성격을 띤다. 나는 다원적 민주사회는 다소 잡종적이며, 많건 적건 순수하지 못한 세속성을 전제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이 점이 자본주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여긴다. 혹은 최소한 자본주의의 진행에 대해 나는 거대담론적 결론이나 저주를 내리는 것을 되도록이면 피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충실하게 설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현재 자본주의는 모두 신자유주의에 종속되어 있으며, 따라서 모두 타락한 상태에 있다고 평가한다. 더 나아가서 현재 한국 사회는 전체적으로 ‘물신숭배에 빠져 있다’고 이념적으로 판단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이나 행위가 그런 경향을 띤다고 말해야 마땅한데도, 그는 총체적이며 무차별적 이념의 잣대로 한국 사회 위에 그 저주를 퍼붓는다. 우습지 않은가. 이런 저주는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이 내리는 바로 그 저주가 아닌가.
물신숭배에 휩쓸려 물질적 가치로 인간의 가치를 압도해버린 사회구성원들.5)
동지는 보이지 않는다. 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누가 가치를 인정하겠는가.6)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배반한 채 자본권력에 자발적으로 굴종한다고 여겨진 사회구성원들은 이제 물신숭배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한심한 인간들로 간주된다. 그러면서 그는 동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투정하고 힐난한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잠재적 동지들을 도덕적 엄숙주의의 관점에서 비난하고 비방하면서 내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 개혁이 여러 점에서 미흡하고 답답하게 여겨지더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선호한다는 것이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난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답답함과 분노를 참고 이들을 정치적으로 설득하고 견인하도록 애써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도 인정하듯이 많은 점에서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그렇다면 무능한 정부와 정치가는 비판하더라도, 민중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버리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정작 그는 민중에 대하여 아주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평가를 일삼는다. 한국 사회와 정치가 그동안 책임 없고 부패한 궤적을 겹겹이 그린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사 청산은 중요하며, 지지부진한 청산 작업은 비판해도 된다. 그러나 비판하더라도,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에 대해 해야 한다. 혹은 문제적인 사회구조에 대해 심층적인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총체적으로 한국 사회를 싸잡아 비난하고 저주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개혁의 동력 자체를 포기하고 방기하는 일로 귀착하기 쉽다. 무책임한 과거 역사의 뻘밭에서도 한국 사회는 여러 점에서 나름대로 진보했다는 점에 차분하게 주의를 기울이자. 분노의 와중에서 넉넉함과 여유를 간직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 대한 애정이고 관용이 아닐까. ‘경제동물의 사회’라고 제목이 붙은 다음 칼럼은 애정이나 관용을 찾아보기 힘든 저주로 보인다.
마을마다 ‘잘살아보세!’가 울려 퍼졌고, 교육과정을 이용한 전일적인 국가주의 의식화가 이루어졌으며, 대중매체는 권력과 자본의 하위수단으로 동원되어 물신주의를 이 땅에 깊이 뿌리내렸다. 인문학적 기초는 설 자리가 없었고, 사람들은 점차 인간 자체에 대해 채울 수 없고 갚을 수 없었던 부채의식을 점차 물신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그리고 물신에 몸을 내맡긴 삶이 몸만 편한 게 아니라 마음까지 편하다는 점을 차차 알게 되었다. 경제동물의 사회가 탄생한 것이다.7)
아무리 국가주의 및 과도한 경제화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의 큰 틀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경제동물을 빙자한 이런 식의 저주는 위험하다! ‘경제동물’이란 표현은 서구가 일본에 대해 남용한 말 아닌가? 조심하자. 좌파라고 모두 이런 식으로 개발도상국의 현대화 과정에 대해 비난을 퍼붓지는 않으며 그럴 권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가 그렇게 신봉하는 프랑스의 좋은 마르크스주의자조차도 자본주의의 공과 과에 대해서 복잡하고 차분한 분석을 했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식으로 물신주의를 비난하는 태도는 극단적 보수주의자의 태도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채울 수 없고 갚을 수 없었던 부채의식을 점차 물신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대신하였다”는 표현도 신학적 근본주의의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민중에게 무슨 갚을 수 없는 부채의식이 있단 말인가? 왜 그런 신학적 잔재를 억지로 민중에게 투사하는가? 이론적으로 보자면 좌파, 아니 극좌 일각의 ‘물신’ 비판은 거꾸로 선 신학적 근본주의에 다름 아닌 경우가 많고, 그 점에서 극보수와 통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점에서 극우와 극좌는 만난다. 대중들이 근대적 자본주의에 자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임지현 등이 말하는 ‘민중의 자발적 동원’을 빼닮았다. 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말과는 달리 민중을 깔보고 멸시하는 것이다. ‘똘레랑스’란 멋들어진 표현을 유행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던 홍세화가 이런 식으로 관용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게 유감스럽다. 물론 사회적 약자에 대해 관용을 가지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얼마든지 혹독하게 비판해도 좋다. 그러나 그는 알게 모르게 한국 사회 전반의 개혁적 동력과 민주적 가능성을 비난하면서, 힘겹게 현대화를 하는 세속적인 사회에 대해 따뜻한 관용을 잃어버리고 있다. 약자를 위한 관용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가 부끄러움을 많이 잃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사회의 보통 인간들과 그들이 사는 국가는 아울러 힘을 필요로 한다. 힘 없이는 어떤 주체도 주체성을 견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이 점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미국에 대해서도 그저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뿐, 어떤 현실적인 힘의 균형 속에서 미국과 상대를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 대책도 없다.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존재에 대한 부끄러움을 잃지 않아야 하지만, 동시에 존재의 힘을 획득해야 한다. 넓은 뜻의 관용을 위해서는 부끄러움과 아울러 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약자에 대한 관용이 우선 필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사회와 국가의 힘에 대한 관용도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프랑스의 공화국 정신은 그렇게 칭송하는 그가 그 몇 분의 일만이라도 한국 사회와 민중의 힘에 신뢰를 줄 수는 없는가. 프랑스 사회의 관용도 단순히 그 사회의 선한 의지나 계몽정신 덕택에 생긴 것은 아니다. 대외적 주체성 확보를 위하여 국가가 강력한 힘을 견지하고 요구하기 때문이며, 그 힘을 바탕으로 국가는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오랜 기간에 걸쳐 식민지를 운영하면서 얻은 힘과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관용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와 달리 한국 사회는 부끄러움과 힘에 대한 현대적 계몽성을 확보할 충분한 기간을 얻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짧은 기간 동안에 모든 것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많은 상처가 도지는 와중이다. 현재 사회는 말 그대로 세속적인 사회다. 이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많이 존재하지만 그저 물신주의가 사회를 지배한다고 도덕적으로 일갈한다면, 현대 사회가 견지해야 할 중요한 세속화 원칙을 깨뜨리기 쉽다. 현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가지는 관계는 생각보다 매우 복잡하며, 따라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은 섣불리 자본의 영향을 폄하하거나 부정하기는 어려운 구석이 있다. 또 물신적 경향이 부분적으로 혹은 꽤 있더라도, 그 이유만으로 사회에 저주를 퍼붓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처사인듯하다. 더구나 일부의 물신적 경향 탓으로 전체 민중의 가능성을 폄하하고 맹목적으로 부정한다면 민중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또 물신적 경향 자체만을 보자면, 아무리 민주화가 발달되었더라도 서구 선진국에서 그것이 더 깊이 존재한다. 다만 충분히 오랜 기간을 거쳤기 때문에 여러 방식으로 순화되고 다양한 완충지대를 가질 뿐이다. 세속화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진보주의는 맹목적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용과 더불어, 세속화된 개도국의 보통 인간에 대해, 그리고 그 사회의 힘에 대해서도 관용을 갖기를 바란다. 이 관용이 보다 넓은 뜻의 관용일듯하다.
우파는 힘을 과장하기 쉽고 좌파는 부끄러움을 과장하기 쉽다. 다르게 말하면 전자는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말하기 쉽고, 후자는 부끄러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어느 하나만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우파와 좌파 모두와 나는 부딪치고 싶다. 전자는 위악으로 흐르기 쉽고, 후자는 위선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이다. 힘과 부끄러움 사이에서 기우뚱, 균형을 잡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