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문학관 <김우진 작가 전시실>
1층 전시실을 관람하고 김우진 극작가의 전시실을 가기 위해 2층으로 오르는데 목포 앞바다의 비릿한 내음이 간간이 바람을 타고 유달산 자락을 돌아 나의 온몸을 휘감고 갔다. 한국현대희곡사에서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김우진극작가의 흉상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우리 일행을 반겼다. 흉상 뒤에 새겨진 “창공은 내 위에/ 살려는 힘은 내 안에”란 글귀가 두 눈을 시리게 했다. 일찍이 세상을 떠나야 했던 그의 죽음을 무언으로 전하려는 누군가의 간절한 메시지인 것 같다.
오랫동안 작품 설명을 들었던 머리도 식힐 겸 잠시 흉상 앞에서 학예사님과 기념사진 한 컷을 남기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우진 흉상 앞에서 목포문학관 학예사님과 함께
우리 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길만한 아까운 인물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안타까움을 잠재우면서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그의 생애를 알리는 연대표가 전시되어 있었다
김우진 작가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11살 때 목포로 이사하여 열일곱 살 때 처녀작인 소설 “공상문학”을 썼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문학에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일본으로 건너가 영문과에 입학하여 희곡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조명희·유엽·홍해성·고한승·김영팔 등과 '극예술협회'를 조직해서 '동우회순회연극단'을 만들어 국내에서 40여 일 동안 문화계몽 운동을 벌이기도 한 인물이라고 한다.
김우진 작가의 연대표 --->
짧은 생애를 살고 간 그의 연대표를 보면서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였다. 만약에 김우진 작가가 일찍 세상을 등지지 않았다면 우리 희곡무대에는 어떤 파문이 일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김우진 작가의 생애와 문학
대다수의 사람에게 생소한 이름인 김우진 작가의 문학세계를 살펴보면 30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고 몇 작품만을 남겼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한국 근대 희곡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대 서연호 교수는 그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파극만이 연극의 전부였던 1920년대에 그의 희곡은 우리나라 언어로 쓴 최초의 근대극이며 명실 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극작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평가(마지막 작품 산돼지)했는데, 김우진의 문학적 근대성은 그의 시보다는 산문에서 더욱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김우진은 당시 한국 문단을 주름잡던 이광수 문학의 허구성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생의 절실한 체험을 구체성과 개별성에 입각해서 기술하게 될 때 문학이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고 합니다” -인터넷 발췌-
김우진 작가의 작품 코너---->
최근 들어 그에 대한 연구가 여러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딘가 모르게 내내 아쉬웠던 마음을 달래보았다. 바로 옆 육필 원고 전시코너에는 아기를 어르면서 행복해하는 평범한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김우진 작가의 모습이 보였다.
가족사진 아래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대신 말해주려는 듯 빛바랜 그의 육필원고가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산돼지”라는 작품에 시선이 멈추었다. 그리고 사전 자료 검색에서 보았던 내용중 원봉이 조명희의 시 "봄 잔디밭 위에"를 읊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는 희곡의 마지막 내용이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듯 자꾸만 되뇌어 졌다.
“미칠 듯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엄마! 엄마! 소리를 내었더니
땅이 우애! 하늘이 우애! 하오매
어느 것이 나의 어머니인지 알 수 없어라”
여러 번 잘근거리다 보니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식민지 지식인의 저항과 좌절 의식을 그려낸 내용을 말해 주고 있는듯하다.
당시의 연극 풍토에서는 공연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근대극을 시도해 보려는 김우진 작가는 한국 근대 희곡 문학사상 인습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창조를 위해 노력한 작가였다고 한다.
다른 전시관보다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옆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작품과 함께 시대적 배경을 디오라마로 꾸며 놓은 것을 보니 김우진 작가를 홍보하기 위해 문학관 관계자들이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디오라마로 전시된 그의 작품 “이영녀”에 대한 작품을 잠시 살펴보면 1920년대 신경향파 문학의 주제인 빈궁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자각이라는 주제를 아울러 취급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버림받은 사회의 처절한 내면을 묘사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 작가는, 이영녀라는 한 개인의 구체적 삶의 연대기를 통하여 당대 여성의 보편적인 삶과 그 전망을 제시하고, 여성의 인간적인 삶을 획득하기 위한 고민을 모색하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 "이영녀"가 디오라마로 전시 된 코너
짧은 시간에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내어 그에 대한 자료를 더 살펴 볼 것을 다짐하면서 그의 집필실이 보이는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숨결이 닿았을 낡은 가구 하나와 빛바랜 원고지에 찬바람이 느껴지면서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여인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마지막 생을 맞이한 그가 한창 창작 활동을 할 나이에 그런 것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김우진 작가의 집필실--->
그에 대한 구설수는 어떤 것이 진실인지 자료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딱히 그렇다고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단 진실은 죽은 둘만의 것이려니, 어지럽던 생각을 정리하고 마지막 코너인 그의 작품집을 둘러보았다
<-----그의 작품 코너
그는 많은 희곡을 남기지는 못하였지만 “이영녀”, “난파”, “산돼지” 등 20년대의 문제작을 남겼다는 점에서 희곡사적 가치를 확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리얼리즘을 대표하는“이영녀”, 표현주의 극을 실험한 “난파”, 그리고 리얼리즘 무대를 바탕으로 삼아 표현주의의 극적 요소를 끌어들인 “산돼지”는 그가 리얼리즘 인식을 토대로 희곡 양식에 적극적인 관심을 쏟았음이 이미 입증되었다고 한국 극예술협회는 말한다고 한다.
3곳 전시관을 안내하느라고 긴 시간을 소요한 학예사님과 고맙다는 인사를 나눈 후 나는 그곳에서 생소했던 김우진 작가의 흔적을 천천히 더듬으면서 다시 한 번 더 전시관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김우진 작가의 전시관은 1층 박화성 작가와 차범석 작가의 전시관보다는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 희곡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인물이라는 것을 그곳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알리기에는 그만한 자료로도 충분하게 느껴졌다.
박화성문학관 하나만 생각하고 달려가 이전하기 전 박화성 문학관 자리에서 헤매었던 고단함도 잊고 한 번의 문학기행으로 세 사람의 작품 세계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이 가슴 가득 뿌듯하게 벅차올랐다. 4시간을 소요하고 만남의 광장으로 나오니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기울며 집으로 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번 12월호로 그동안 수고해 주신 목포 문학관 학예사님께 감사를 전하면서 목포 문학관 문학기행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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