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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사과 요구하기 전에 베트남에게 사과하자...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보세요.
전 아시아인 수십만명을 학살한 일본 VS 100여명의 베트남인들을 사살한 한국군
더구나 베트콩들의 전형적인 수법이 민간인 복장을 하고 파병군들에게 대항하는 것
한국군 역시 베트콩과 구별이 안되서 민간인 사살
하지만 사과의 뜻으로 민간인 한명한명 명단 다 적어서 추모비 세워주고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사죄와 보상
한국인 당신들의 용기를 사랑한다”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돼 있다”
정말 한국인의 마음이 가깝게 다가온다'
“한국인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인 줄 몰랐다.”
“한국이 왜 경제발전을 이룩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많은 베트남인들은 지금 한국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보내고 있다
한국 베트남 평화음악회
일부 한국군의 베트남 학살에 대한 사죄 교육용 교재와 반성 CD
베트남전 교육시디 CD 발매
베트남전에 관한 교육용CD가 나왔다
제작진들은 매뉴얼북 머리말에서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통해 평화를 세기를
다져보고자 하는 바람으로 CD작업을 시작했다”며
“전쟁과 인권, 평화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고찰해볼 수 있는 교육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더불어 베트남의 역사,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배경, 민간인학살의 증거, 한국군의 고엽제 피해상황, 평화를 위한 노력들이 텍스트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으며, 주요
참고논문들의 원본파일도 첨부돼 있다. 텍스트 사이사이엔 토론거리 주제를 제공해
교육현장에서 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국제민주연대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베트남전 학살 만행 진상 조사 위원회 ,
베트남 평화 의료 연대, 나와 우리,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작가들의 모임과 함께
‘전쟁의 기억으로 쓰는 평화이야기-베트남전 교육용 CD와 매뉴얼북을 제작해
7월부터 각 교육기간에 무료로 배포하고 일반에게도 판매하고 있다.
CD는 1부 전장과 전쟁, 2부 전쟁과 기억, 3부 기억과 진실, 4부 진실과 평화로
이뤄진 30여분 분량의 동영상과 텍스트 자료로 구성돼 있다. 동영상에선 베트남전
참전군인들과 학살 피해자들의 증언, 베트남전 평화운동에 참여한 활동가들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나레이션은 영화배우 오지혜씨가 맡았다.
구입문의 02-2610-4741
demos@mail.s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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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참전 한국군이 현지에 기증한
베트남 학살 양민 사죄 위령비!
사진/ 한국 참전군인들의 지원으로 건립한 하미마을 위령비.
전면에 ‘1968년 학살당한 동포에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기립니다..라는
큰 글씨와 아래 희생자 명단이 적혀 있다.
쿠앙남성 디엔반현 디엔증사 하미마을.
퐁니·퐁넛촌으로부터 승용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이곳에서도 1968년2월25일
청룡부대원들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됐다고 한다.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이사장 김문구) 회원 30여명은 지난해 5월2일 이곳을 방문해
현지주민들과 함께 ‘위령비 기공식’을 가진 바 있다.
종전 뒤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더구나 위령비 건립장소는 바로 집단학살이 실제
이뤄진 장소이기도 했다.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위령비 건립금액 2만5천달러를 전달했고, 주민들은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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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성금으로 한국-베트남 평화공원’은 총면적 8500㎡로
주민들의 휴식공간과 산책로로 이용될 나무그늘과
잔디밭, 인공호수가 조성된다.
한국 정부는 학교와 병원을 짓기로 하여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학교 기공식을 열었다.
푸옌(8개)·빈딘(10개)·칸호아(2개) 등 3개성에 동시에 지어지는
20개 학교의 기공식과 푸옌성은 종합병원 건립 했다.
공원 안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조형물
평화공원은 한국 국민 성금으로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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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베트남' CD .....UN 및 세계로 전달
이 음반은 전세계에 20세기의 전쟁 가운데 하나인 베트남전의 진실을 알리는 의미뿐
아니라 ” 베트남전의 진실을 호소하는 한장의 음반을 통해 전쟁이라는
인류 공통의 문제를 이끌어내고 전쟁희생자에 대한
미국과 한국 등 가해국가의 사과운동을 위한 연대의 끈을 만들겠다는 것이
참가음악인들과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의 CD이다.
<미안해요 베트남>은 베트남전의 희생자들에게 보내는
진혼곡이자 <아시나요>가 범한 ‘무심한 결례’에 대해
베트남의 동시대인들에게 전하는 사과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음반은 지난 7월 서울 숭실대 한경직기념관에서 열렸던 베트남전쟁 희생자를 위한 진혼공연 ‘사이공, 그날의 노래’에 참가했던 음악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평화의 손 맞잡고’ 프롤로그 ‘절규’부터 에필로그 ‘평화의 손 맞잡고’까지 과거의 상처를 딛고 평화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노래와 춤,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공연행사를 공동주최한 베트남평화의료연대(건치),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국제민주연대),
나와우리 3단체는 모두 1천장의 동영상 음반을 만들어 베트남을 포함한
세계 평화단체 100곳에 보내고, 나머지는 전화로 주문 판매한다고 밝혔다.
베트남인에 대한 한국인의‘진실의 사과의 결과’
베트남 호치민의 유력 일간지 <투오이쩨>(Tuoitre)가 <한겨레21>의 베트남 캠페인이
이룬 결실과 ‘한-베 평화공원’(Han-Viet Peace Park)기공식을 상세히 보도
베트남인에 대한 사과의‘진실의 결과’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인터뷰 기사에서
최 사장은 “베트남에서의 과거를 해결하려는 진보적 개인들의 노력이 하나로 모여
한국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에 베트남 정부 첫 공식 반응
“한국인 여러분 고맙습니다”
“양국간의 관계에 악 영향없을 것”
판 투이 탄 베트남 외무부 대변인은 4월21일 와의 회견에서
“한국인 정부와 단체, 개인들이 베트남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벌인 반성 사죄 활동과 물질적 지원에 대단히 감사한다”
고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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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베트남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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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와 베트남 정부간의 매년 배트남
200만달러 이상 무상지원과 함께
대외경제협력기금(ODA) 2,846만달러 관한 약정
2000년 9월 29일 하노이에서 서명했다.
백낙환 주베트남 대사 “과거사 부담 더는 게 첫째 관심
베트남을 가장 가까운 나라로
백낙환(55) 주베트남 대사는 “과거사 문제가 외교하는 입장에서는
늘 부담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무상원조를 포함한 지원과 양국간 교류촉진을
통해 ‘과거사’라는 단어가 더이상 큰 걸림돌처럼 떠올려지는 일이 없어지도록
재임중 기여할 것”이라며
이 문제가 주베트남 대사로서 으뜸 가는 관심사항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올해 베트남에 배정된 무상원조 액수는 학교건축은 물론 기존에 진행되던
프로젝트 사업과 연수생 초청을 포함해 총 400만달러 초과하는 규모다.
또한 한국 외교통상부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세계 130개국에 지원하는
ODA자금(Official Development Assitant·개발원조자금) 규모 중 가장 많은 액수다.
베트남 전쟁]
한국 베트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차 파병에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친 박정희 정부하에서
미국 &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군을 파병한 것을 말한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한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차관 마련 등의 군사, 경제적인 이유로 집요한
파병제안을 했으나,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할 경우 북한의 도발과 중국.소련등의
공산권을 자극할 수 있다하여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원래 구상했던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중심으로 한 베트남 지원 계획이 프랑스와
파키스탄의 반대로 어려워지자 1964년 5월 《남베트남 지원》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게 된다.
이에 한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 최초로 1964년에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1965년부터 휴접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파병-
1964년 9월 1개 의무중대 및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후방지원부대 파병
1965년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 파병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 의 조인으로 백마부대 추가 파병
군수지원단 및 백구부대 등 1개군단 병력을 파견
베트남전 참전 8년간 총 31만 2천853명(최대 5만 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사망자수-32만명 중 5,099명의 사망/ 11,232명의 부상자/31만명이 생존 귀국.
또한 159,132명의 고엽제 피해자와 화공약품 후유증으로 귀국후 병사자가 다수 발생.
이 파병기간 중 미군의 미라이 학살사건과 파월 한국군에 의한 빈호아사 커우 마을 학살사건
(1966년 12월 131명 사망) 등의 민간인 학살들이 있었다.
월남전에의 참전은 한국으로서는 최초의 해외파병으로서, 이를 통해 국위를 선양하는데 의의가 있고
동시에 월남전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외화획득이라는 경제적 이득이 부수되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또 한국안보 문제와 관련, 한국군 현대화를 골자로 한 브라운각서(1966년)를 낳았고, 전투 경험도 얻었다.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한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 받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도 일부 충당되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2005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베트남전 관련 문서를 공개>
이 문서에는 브라운 각서의 이행 상황과 1970년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주한 미국 대사인 포터의 증언 내용과 한국의 대응과정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의 통킹만에서 미국 해군 구축함 매독스 호가 북베트남에 의해 공격을 받는
통킹만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빌미로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강화하여 2차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케네디 대통령은 당시 전 세계가 공산화 도미노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판단, 베트남 파병을 확대하고
주변국들에게 지원을 요청 하였다.
미군은 후방지원 병력이 추가로 필요하게 되자, 1964년 12월 브라운 주한미군 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남베트남에서 후방지원을 담당할 비전투부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존슨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대한민국군의 참전은 조약상의 의무에서가 아니라 미국측이 파병의 대가로 한국군의 전력증강과 경제발전에
소요되는 차관공여를 약속함으로써 이루어졌고, 미국이 한국군을 참전시킨 이유는 1차적으로 미국내에서
광범위하게 일고 있던 반전여론을 무마시키고 미국군 봉급의 1/3 수준인 한국군을 전선에 투입함으로써
전비절감을 꾀하고자 한 계산에서였다.
2005년 8월 26일 공개된 베트남 참전 외교문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964년 5월 /존슨 미국 대통령 자유우방 25개국에 남베트남 지원 요청
1964년 7월 / 응웬칸 남베트남 총리, 한국군 파병 요청
1964년 7월 /국회 제1차 파병동의안 가결
1964년 9월 /제1차 파병단 사이공 도착(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교관단)
1965년 1월 / 국회 제2차 파병동의안 가결
1965년 3월 / 건설지원단(비둘기 부대) 사이공 도착
1965년 8월 / 국회 제3차 파병(전투부대) 동의안 가결
1965년 10월 / 제2해병대여단(청룡부대) 깜리인 상륙
1965년 10월 / 주월 한국군 사령부 사이공 개소
1965년 11월 / 수도사단(맹호부대) 본대 뀌년 상륙
1966년 3월 / 국회 제4차 파병동의안 가결(전투부대 증파)
1966년 4월 / 수도사단 제26연대 본대 뀌년 상륙
1966년 10월 / 제9사단(백마부대) 닌호아 및 깜라인 상륙
1966년 10월 / 박정희 대통령 남베트남 방문
1971년 12월 / 주월 한국군 제1단계 철수 시작(제2해병 여단)
1972년 4월 / 주월 한국군 제1차 철군 완료
1973년 1월 / 베트남 전쟁 평화협정 발효
1973년 3월 / 주월 한국군 제2차 철군 완료(본대)
1973년 3월/ 주월 한국군 후발대 철수 완료
<브라운 각서>
존슨 정부는 반전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1965년 12월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이동원 외무부장관에게
러스크 국무부 장관을 통해 전투부대 추가파병을 공식 요청하였다.
한국은 3차 파병시 합의했던 한국군 장비현대화 등의 약속이행을 촉구하며, 〈선약속 이행, 후파병〉을 요구하였고
미국은 〈선파병, 후약속이행〉을 주장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다급해진 미국은 1966년 특사로 파견하여 약속 이행을 선언하며, 추가 파병을 요청했고
이동원 외무부 장관은 브라운 미대사와의 협상을 통해 한국에 약속한 것을 서면화한 《브라운각서》를 받아냈다.
<한국 - 베트남 사과와 외교관계 재개>
1975년 베트남에서 대사관을 철수한 이래, 1992년 4월 노태우 대통령의 재임시 양국 연락대표부 설치에
합의하여, 12월에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상주대사관이 설치되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호찌민 묘소에 참배하고 양국의 불행에 대해 사과 하며,
2001년 베트남 국가주석 한국 방한시
<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공식 사과,양국의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하였다.
2004년은 노무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호찌민 묘소에 헌화하고 묵념하며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빛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하였다.
이때 한국 베트남참전전우회에서는 반발하며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경솔한 말이라고 비판하고
한국 인권단체는 정부가 베트남 전쟁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범죄라는 과거사에 대해 솔직하게
사과한 것은 긍정적이지만,어떤 짓을 했는가에 대한 규명과 베트남에 대한 범국민적 사과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2009년 10월 20일 이명박 대통령도 베트남 방문 하고 호찌민 묘소를 참배한뒤,베트남 참전 유공자들을
한국 전쟁 유공자와 동일하게 대우하기로 결정했으나 세계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라는 문구에서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운동〉으로 자부하고 있던 베트남 정부가 이에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다.
결국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10월 12일 하노이를 방문하여, 외무부 장관을 만나 월남전쟁이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일단락 지었다.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수교할 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 등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기로 했었다.
(파병은)냉전 체제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선의 의견 교환에 베트남 정부가 동의했던 것이다.
베트남 정부는 승전국으로서 굳이 사과를 받을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고,
한국과의 수교에서 얻는 실리도 중요시했다.
이에 대해 한국 야당은 외교적 과오와 실책을 공개하지도 않고 자화자찬했다고 비난하였다.
<베트남 전쟁 국군 참전의 경제적인 기여>
미국으로부터 파병 대가로 받은 경제적 비용 획득/
브라운 각서와 공개된 베트남전쟁 자료에서 미국에서 지급한 한국군 해외근무 수당은 총 2억 3556만 달러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로 호황을 누림.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였으나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에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이 향상.
월남 참전으로 재래식 병기와 군용장비의 근대화와 개량.
<베트남전 부정적시각>
야당인사인 윤보선, 김대중 등은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베트남 파병 당시
야당인 신한당과 신민당의 지도자였던 윤보선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정책은 박정희가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군의 파병이 안 되면 주한미군을 빼내어 베트남으로 보내겠다는 반협박적인 상황에
신중하게 대처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김대중은 당내 의견 수렴과 국회대정부 정책질의를 통해 예비역,퇴역군인중에 지원자를 파견하자고 제안하고
전두환은 이 전쟁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여 세운 무훈으로 군대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세으며 이를 바탕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켜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학계비판>
학계에서는 베트남 참전을 베트남의 민족 해방 운동을 방해하였다며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하고
동국대학교 교수이자 시민사회단체 운동가인 강정구 등에 의해 베트남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사건의
책임자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여,2000년 한국 대통령 김대중은 베트남을 방문,베트남 국민들에게 사과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베트남 참전 전우회 등 참전유공단체 및 참전 유공자 등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은 방한한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 단체에서는 베트남에 그 이상의 사죄와 보상을 하라는 요구하는 소리도 있었다.
한편 전쟁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대한민국 기업인들과 군인들이 현지에서 베트남 여성들과의 사이에 낳은
2세들인 라이따이한과 대한민국군 일부가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과 부녀강간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양국 관계에 잠재적 문제가 될 소지를 안고 있다.
[출처] 한국정부- 베트남전 참전 사과|작성자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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