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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노례왕 9년에 처음으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6성을 주었다(32년 (음))
노례왕 9년에 처음으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6성을 주었다 ( 32년 (음) )
위에 쓴 글로 보건대 이 6부의 조상들이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 9년에 처음으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6성을 주었다.註 412412 이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조의 기사와 더불어 사로(斯盧) 육촌에서 육부로 개편된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사료이다. 신라 초기 육촌에서 육부로 전환되었다고 전하는 본 기사에 대해서 일부 연구자들은 본 기록을 신빙하여 유리이사금대에 육촌이 육부로 개편되었다고 보기도 하고(이종욱, ≪신라국가 형성사 연구≫, 1982, 222~225쪽), 일부는 그 시기를 뒤로 늦추어 파악하기도 한다. 또는 육촌 관련 사료의 신빙성을 문제 삼아 아예 그에 관한 내용이 후대에 정리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주보돈, 「삼국사대의 귀족과 신분제 -신라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1990, 10~11쪽).닫기 지금 풍속에서 중흥부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를 아버지로 삼고 임천부를 아들로 삼고 가덕부를 딸로 삼으니 그 까닭은 자세치 않다. 전한 지절(地節)註 413413 전한 선제의 연호로 기원전 69년~66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 임자(壬子)(69년) 고본(古本)에 이르기를 건호(建虎-建武)註 414414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虎)로 썼다. 건무(建武)는 후한 광무제의 연호로 25년~55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25년)이니 건원(建元)註 415415 전한 무제의 연호로 기원전 140~기원전 135년에 사용하였다.닫기 3년(138년)이니 한 것들은 다 잘못이다. 3월 초하룻날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閼川)註 416416 알천(閼川)에 대해서는 현재 경주시 북천(北川)에 비정하는 견해(三品彰英, 1975, ≪삼국유사考證≫ (上), 416)와 경주시 남천(南川)에 비정하는 견해(김원룡, 「사로육촌과 경주고분」, ≪역사학보≫ 70, 1976) 등이 있다.닫기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랴!” 하였다.
註 412
이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조의 기사와 더불어 사로(斯盧) 육촌에서 육부로 개편된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사료이다. 신라 초기 육촌에서 육부로 전환되었다고 전하는 본 기사에 대해서 일부 연구자들은 본 기록을 신빙하여 유리이사금대에 육촌이 육부로 개편되었다고 보기도 하고(이종욱, ≪신라국가 형성사 연구≫, 1982, 222~225쪽), 일부는 그 시기를 뒤로 늦추어 파악하기도 한다. 또는 육촌 관련 사료의 신빙성을 문제 삼아 아예 그에 관한 내용이 후대에 정리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주보돈, 「삼국사대의 귀족과 신분제 -신라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1990, 10~11쪽).
註 413
전한 선제의 연호로 기원전 69년~66년에 사용하였다.
註 414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虎)로 썼다. 건무(建武)는 후한 광무제의 연호로 25년~55년에 사용하였다.
註 415
전한 무제의 연호로 기원전 140~기원전 135년에 사용하였다.
註 416
알천(閼川)에 대해서는 현재 경주시 북천(北川)에 비정하는 견해(三品彰英, 1975, ≪삼국유사考證≫ (上), 416)와 경주시 남천(南川)에 비정하는 견해(김원룡, 「사로육촌과 경주고분」, ≪역사학보≫ 70, 1976) 등이 있다.
정치>행정>군현>주·부
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이름 : 노례왕
지명 : 알천
국명 : 전한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며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리다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며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리다
이때에 모두 높은 데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및 나정(蘿井)註 417417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와 관련된 우물로,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비정된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조와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혁거세왕조에 나정과 관련된 탄생신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닫기 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웬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 또는 푸른 빛 큰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 보니 형용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벌(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매 몸에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조리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따라서 이름을 혁거세왕아마도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설명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註 418418 서술성모에 관한 설화는 ≪삼국유사≫ 감통(感通) 선도성모수희불사조(仙桃聖母隨喜佛事條)를 참조할 수 있다(≪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닫기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의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미하는 글에 ‘어진 인물을 배어 나라를 창건하라.’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으니,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왕위의 칭호는 거슬한(居瑟邯) 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자신을 일컬어 말하기를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 크게 일어난다 하였으므로, 그의 말에 따라 이렇게 불렀으니 이로부터 임금(王者)의 존칭으로 되었다.이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여 말하기를 “이제 천자가 이미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군(女君)을 찾아서 배필을 정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註 417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와 관련된 우물로,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비정된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조와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혁거세왕조에 나정과 관련된 탄생신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註 418
서술성모에 관한 설화는 ≪삼국유사≫ 감통(感通) 선도성모수희불사조(仙桃聖母隨喜佛事條)를 참조할 수 있다(≪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
정치>신이>생물>동물
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이름 : 혁거세왕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나이가 열세 살이 되자 남자는 왕이 되고 여자는 왕후가 되다(57년 (음))
나이가 열세 살이 되자 남자는 왕이 되고 여자는 왕후가 되다 ( 57년 (음) )
이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 또는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도 한다.에서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옆구리로부터 동녀(童女) 혹은 용이 나타나 죽으매 그 배를 가르고 얻었다고도 한다.를 낳으니註 419419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혁거세거서간조에서는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본 기사와 차이를 보인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닫기 자색이 뛰어나게 고왔다. 그러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은지라 월성(月城)註 420420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도성(都城). 둘레 2,400m이고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성안의 건물지가 있다. 이 성은 모양이 반달 같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는데,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문화재관리국, ≪문화재대관(하)-사적편≫, 1976).닫기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퉁겨져 떨어졌으므로 그 천의 이름도 따라서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궁실(宮室)을 남산 서쪽 기슭 지금의 창림사(昌林寺)註 421421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남산 서쪽 기슭에 있던 신라시대의 절이다. 남산에 있는 절터 가운데 이름이 뚜렷할 뿐 아니라 남산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탑이 남아 있다.닫기이다.에 짓고는 두 명의 신성한 아이를 모셔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지라 [그] 알은 박과 같이 생겼고 향인(鄕人)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므로 따라서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계집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써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되자 오봉(五鳳)註 422422 전한 선제의 연호로 기원전 57~기원전 54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 갑자(甲子)에 남자는 위에 올라 왕이 되고 이어 여자로써 왕후를 삼았다.
註 419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혁거세거서간조에서는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본 기사와 차이를 보인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
註 420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도성(都城). 둘레 2,400m이고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성안의 건물지가 있다. 이 성은 모양이 반달 같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는데,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문화재관리국, ≪문화재대관(하)-사적편≫, 1976).
註 421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남산 서쪽 기슭에 있던 신라시대의 절이다. 남산에 있는 절터 가운데 이름이 뚜렷할 뿐 아니라 남산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탑이 남아 있다.
註 422
전한 선제의 연호로 기원전 57~기원전 54년에 사용하였다.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신이>기타>용
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나라 이름을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 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 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지금 경(京)자의 뜻을 우리말로 서벌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더러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났으므로 혹은 일러서 계림국(鷄林國)註 423423 계림(鷄林)을 한자의 훈에 따라 ‘닭수풀’, 즉 닭이 많다, 집단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풀이하여 신라 김씨 족단은 닭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겨 숭배하고 신성시했던 닭 토템 세력이라고 이해한 견해가 있다(주보돈, 「사로국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신라문화≫ 21, 동국대학교신라문화연구소, 2003, 22쪽).닫기이라고도 하니 계룡(鷄龍)이 상서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註 424424 신라의 제4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57~80년이다. 토해(吐解)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에 의하면 기원전 19년, ≪삼국유사≫ 권2 기이편 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44년경에 바다를 통하여 금관국을 거쳐 신라에 도착하여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유리왕을 이어 즉위하였다.닫기 때에 김알지(金閼智)註 425425 경주 김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로, 탈해왕대 시림(始林)에 내려온 금궤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알지는 우리말로 ‘小兒’ 곧 아기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알지 탈해왕대).닫기를 얻으면서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계림(鷄林)으로 고쳤다고 한다. 후세에 와서는 드디어 신라라고 이름을 정하였다.註 426426 지증왕대 국호를 신라로 정한 내력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에 자세히 보인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4년).닫기
註 423
계림(鷄林)을 한자의 훈에 따라 ‘닭수풀’, 즉 닭이 많다, 집단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풀이하여 신라 김씨 족단은 닭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겨 숭배하고 신성시했던 닭 토템 세력이라고 이해한 견해가 있다(주보돈, 「사로국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신라문화≫ 21, 동국대학교신라문화연구소, 2003, 22쪽).
註 424
신라의 제4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57~80년이다. 토해(吐解)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에 의하면 기원전 19년, ≪삼국유사≫ 권2 기이편 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44년경에 바다를 통하여 금관국을 거쳐 신라에 도착하여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유리왕을 이어 즉위하였다.
註 425
경주 김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로, 탈해왕대 시림(始林)에 내려온 금궤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알지는 우리말로 ‘小兒’ 곧 아기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알지 탈해왕대).
註 426
지증왕대 국호를 신라로 정한 내력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에 자세히 보인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4년).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지명 : 계정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국인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내쫓아 못하게 하므로 5체(五體)를 5릉(五陵)註 427427 현재 경북 경주시 탑정동 67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오릉(五陵)을 말한다.닫기에 각각 장사지내고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註 427
현재 경북 경주시 탑정동 67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오릉(五陵)을 말한다.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신이>생물>동물
정치>왕실>왕위계승>계위
사회>의례>관혼상제>상제
이름 : 남해왕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2대 남해왕(第二 南解王) >남해거서간은 차차웅이라고도 하다(4년 (음))
남해거서간은 차차웅이라고도 하다 ( 4년 (음) )
제2대 남해왕(第二 南解王)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또한 차차웅(次次雄)註 428428 신라 초기 왕의 칭호로서 자충(慈充)이라고도 하였다. 차차웅과 자충은 같은 말을 달리 표기한 것으로, 이는 남해왕에게만 붙여졌던 칭호이다. 김대문에 의하면 차차웅은 원래 무당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후에 존장자의 칭호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차차웅을 군장이 영릉자(靈能者)의 역할을 하였던 제정일치시대 왕의 칭호로 해석하기도 한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닫기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의 칭호이니 오직 이 임금만 이렇게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요 어머니는 알영부인이요 왕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혹은 운제(雲梯)라고도 하는데 지금 영일현(迎日縣)註 429429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연일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본래는 신라의 근오지현(斤烏支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임정(臨汀)으로 개칭하여 의창군(義昌郡)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때 영일현으로 고쳤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영일현 건치연혁조).닫기 서쪽에는 운제산 성모가 있어 가물 때에 기도를 드리면 영험이 있다.이다. 전한평제(平帝) 원시(元始)註 430430 전한 평제(平帝)의 연호로 1~5년에 사용하였다.닫기 4년 갑자(甲子)에 즉위하여 2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지황(地皇)註 431431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의 연호로 20~23년에 사용하였다.닫기 4년 갑신(甲申)(24년)에 죽으니 이 임금을 3황(三皇)註 432432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세 명의 임금으로 천황씨·지황씨·인황씨를 뜻하거나 수인씨·복희씨·신농씨를 가리킨다. 또는 복희씨·신농씨·황제로 보기도 한다. 본 기사의 삼황에 대해서는 혁거세·남해·노례로 보는 견해와 남해·노례·탈해로 보는 견해가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이회문화사, 2002, 238쪽)닫기의 첫 번째라고들 이른다.
註 428
신라 초기 왕의 칭호로서 자충(慈充)이라고도 하였다. 차차웅과 자충은 같은 말을 달리 표기한 것으로, 이는 남해왕에게만 붙여졌던 칭호이다. 김대문에 의하면 차차웅은 원래 무당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후에 존장자의 칭호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차차웅을 군장이 영릉자(靈能者)의 역할을 하였던 제정일치시대 왕의 칭호로 해석하기도 한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註 429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연일읍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본래는 신라의 근오지현(斤烏支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임정(臨汀)으로 개칭하여 의창군(義昌郡)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때 영일현으로 고쳤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영일현 건치연혁조).
註 430
전한 평제(平帝)의 연호로 1~5년에 사용하였다.
註 431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의 연호로 20~23년에 사용하였다.
註 432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세 명의 임금으로 천황씨·지황씨·인황씨를 뜻하거나 수인씨·복희씨·신농씨를 가리킨다. 또는 복희씨·신농씨·황제로 보기도 한다. 본 기사의 삼황에 대해서는 혁거세·남해·노례로 보는 견해와 남해·노례·탈해로 보는 견해가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이회문화사, 2002, 238쪽)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왕족>선조·선대왕·선왕
정치>왕실>왕족>왕모후·왕태후·왕대비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이름 : 남해왕,남해거서간,혁거세,알영부인,운제부인,평제
국명 : 전한
제2대 남해왕(第二 南解王)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고 하고 혹은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고 하다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고 하고 혹은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고 하다
≪삼국사(三國史)≫註 433433 고려 인종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가리킨다.닫기에서 다음과 같이 이른다.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으니 진(辰)나라 말로는 왕이란 말이며, 혹은 귀인(貴人)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註 434434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혁거세거서간조에 보인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조).닫기 혹은 차차웅(次次雄) 또는 자충(慈充)이라고 한다. 김대문(金大問)註 435435 신라 중대 귀족출신 학자이자 저술가로 ≪계림잡전(鷄林雜傳)≫, ≪화랑세기(花郞世記)≫, ≪고승전(高僧傳)≫, ≪한산기(漢山記)≫, ≪악분(樂本)≫ 등의 여러 저술을 남겼다(≪삼국사기≫ 권46 열전6 김대문) 본서에 인용된 신라왕명에 관련한 김대문의 설명은 그의 저술 ≪계림잡전≫으로부터 인용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이기백, 「김대문과 그의 사학」, ≪역사학보≫ 77, 1978).닫기이 이르기를 “차차웅은 방언에 무당을 이름이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므로 이를 외경하다가 마침내 높은 어른을 자충이라 하였다. 또는 이사금(尼師今)이라고도 하였으니 잇금을 이른 말이다.”라고 하였다.註 436436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南解次次雄條)에 보인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조(南解次次雄條)).닫기
註 433
고려 인종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가리킨다.
註 434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혁거세거서간조에 보인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조).
註 435
신라 중대 귀족출신 학자이자 저술가로 ≪계림잡전(鷄林雜傳)≫, ≪화랑세기(花郞世記)≫, ≪고승전(高僧傳)≫, ≪한산기(漢山記)≫, ≪악분(樂本)≫ 등의 여러 저술을 남겼다(≪삼국사기≫ 권46 열전6 김대문) 본서에 인용된 신라왕명에 관련한 김대문의 설명은 그의 저술 ≪계림잡전≫으로부터 인용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이기백, 「김대문과 그의 사학」, ≪역사학보≫ 77, 1978).
註 436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南解次次雄條)에 보인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조(南解次次雄條)).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법률>행정>시호
이름 : 김대문
서명 : 삼국사
국명 : 진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2대 남해왕(第二 南解王) >처음에 남해왕이 죽고 그 아들 노례가 왕위를 탈해에게 사양하다
처음에 남해왕이 죽고 그 아들 노례가 왕위를 탈해에게 사양하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고 그 아들 노례(弩禮)가 왕위를 탈해(脫解)에게 사양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매 거룩하고 슬기로운 사람(聖智人)은 이가 많다더라.” 하면서 곧 떡을 씹어 시험해 보았다.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가 이렇다.註 437437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조(儒理尼師今條)에 보인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닫기 혹은 또 마립간(麻立干) 立은 혹 袖라고도 쓴다.이라고도 하니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마립(麻立)이란 것은 방언에 말뚝(橛)이란 말이다. 궐표(橛標)는 직위에 맞추어 설치하므로 왕의 말뚝이 주장이 되고 신하의 말뚝은 아래로 벌려 서게 되므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註 438438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조(訥祗痲立干條)에 보인다(≪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닫기
註 437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조(儒理尼師今條)에 보인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註 438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조(訥祗痲立干條)에 보인다(≪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정치>왕실>왕위계승>계위
제2대 남해왕(第二 南解王) >거서간 또는 차차웅이 하나씩, 이사금이 열여섯, 마립간이 넷이다(18년 (음))
거서간 또는 차차웅이 하나씩, 이사금이 열여섯, 마립간이 넷이다 ( 18년 (음) )
사론(史論)에 이르기를 “신라에서 거서간 또는 차차웅으로 부른 임금이 하나씩이요 이사금으로 부른 자가 열여섯이요 마립간으로 부른 자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註 439439 신라 하대의 학자로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한다. 12살에 당(唐)에 유학하여 17살에 과거에 급제했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황소를 정벌하는 격문을 지어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닫기이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註 440440 최치원의 저작이라고 하나 현전하지 않아 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제목에서 여대기적인 글로 추정된다.닫기에는 모두 ‘아무 왕’이라 불렀고 거서간 등으로 부르지 않았으니 그 말이 어찌 비루하다 하여 칭하지 조차 않는단 말인가. 여기에 신라의 사적을 기록함에 있어서 방언들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역시 옳은 일일 것이다.註 441441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智證麻立干條)에 보인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닫기 신라 사람들이 대개 추봉하여 갈문왕(葛文王)註 442442 주로 국왕과 혈연·혼인 등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에게 봉해진 칭호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 ≪역사학보≫ 58, 1973). 그 연원과 피봉(被封) 범위, ‘갈문’의 어의(語義)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 당시에도 이미 확실치 않았던 듯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총 19명의 갈문왕이 나타나며, 금석문상에서는 냉수리비(冷水里碑)와 봉평비(鳳坪碑), 천전리서석(川前里書石) 그리고 창령비(昌寧碑) 등에서 보인다. 특히 냉수리비(冷水里碑)에 나오는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은 지증왕(智證王)으로 비정되는데, 이를 통해 지증왕은 정식 왕이 되기 전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 현재까지 발견된 금석문 상의 갈문왕은 모두 沙喙部 소속으로 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왕은 喙部, 갈문왕은 沙喙部 소속이라는 의견도 제기된 바 있다(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2, 가락국사적개발연구소, 1992, 239~240쪽).닫기이라 일컬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註 443443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이사금조에 보인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일성이사금 15년).닫기 이 왕대에 낙랑국 사람들이 금성註 444444 신라의 왕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 및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성곽조에 의하면, 부(府)의 동쪽 4리에 있고 토축으로서 둘레가 2,407척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닫기을 침략해 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註 445445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의 연호로 14~19년에 사용하였다.닫기 5년 무인(戊寅)에는 고[구]려에 예속되었던 일곱 나라가 항복해 왔다.”
註 439
신라 하대의 학자로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한다. 12살에 당(唐)에 유학하여 17살에 과거에 급제했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황소를 정벌하는 격문을 지어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註 440
최치원의 저작이라고 하나 현전하지 않아 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제목에서 여대기적인 글로 추정된다.
註 441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智證麻立干條)에 보인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註 442
주로 국왕과 혈연·혼인 등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에게 봉해진 칭호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 ≪역사학보≫ 58, 1973). 그 연원과 피봉(被封) 범위, ‘갈문’의 어의(語義)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 당시에도 이미 확실치 않았던 듯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총 19명의 갈문왕이 나타나며, 금석문상에서는 냉수리비(冷水里碑)와 봉평비(鳳坪碑), 천전리서석(川前里書石) 그리고 창령비(昌寧碑) 등에서 보인다. 특히 냉수리비(冷水里碑)에 나오는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은 지증왕(智證王)으로 비정되는데, 이를 통해 지증왕은 정식 왕이 되기 전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 현재까지 발견된 금석문 상의 갈문왕은 모두 沙喙部 소속으로 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왕은 喙部, 갈문왕은 沙喙部 소속이라는 의견도 제기된 바 있다(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2, 가락국사적개발연구소, 1992, 239~240쪽).
註 443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이사금조에 보인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일성이사금 15년).
註 444
신라의 왕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 및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성곽조에 의하면, 부(府)의 동쪽 4리에 있고 토축으로서 둘레가 2,407척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註 445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의 연호로 14~19년에 사용하였다.
정치>법률>행정>시호
이름 : 최치원
지명 : 금성
서명 : 제왕연대력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3대 노례왕(第三 弩禮王) >노례왕이 즉위하고 니질금 명호가 탄생하다(23년 (음))
노례왕이 즉위하고 니질금 명호가 탄생하다 ( 23년 (음) )
제3대 노례왕(第三 弩禮王)
박 노례니질금한편 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한다.이 처음 매부(妹夫)인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하자 탈해가 “대개 덕이 있는 사람이 이빨[齒]이 많다고 하니 이빨의 수로서 그것을 시험해 봅시다.”라 하였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해 보니 [노례]왕의 이빨이 많았으므로 먼저 즉위하였다. 이로 인하여 니질금이라 하였으며 니질금의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유성공(劉聖公)註 446446 후한 광무제의 족형(族兄) 유현(劉玄)을 이른다. 신(新) 말기 유인·유수 등 여러 장수가 군사를 일으켜 왕망에게 반기를 들고 유성공을 추대하여 천자로 삼았는데, 후에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시해당하였다.닫기 경시(更始)註 447447 후한 회양왕(淮陽王) 유현(劉玄)의 연호로 23~24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 계미(癸未)에 즉위하였다 연표註 448448 ≪삼국사기≫의 연표를 가리킨다.닫기에는 갑신(甲申)년에 즉위하였다고 한다..
註 446
후한 광무제의 족형(族兄) 유현(劉玄)을 이른다. 신(新) 말기 유인·유수 등 여러 장수가 군사를 일으켜 왕망에게 반기를 들고 유성공을 추대하여 천자로 삼았는데, 후에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시해당하였다.
註 447
후한 회양왕(淮陽王) 유현(劉玄)의 연호로 23~24년에 사용하였다.
註 448
≪삼국사기≫의 연표를 가리킨다.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왕위계승>계위
정치>법률>행정>시호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3대 노례왕(第三 弩禮王) >육부명을 정하고 육성을 하사하다
육부명을 정하고 육성을 하사하다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에 육성(六姓)을 하사하였다.註 449449 ≪삼국유사≫ 권1 기이1 시조혁거세마립간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조(儒理尼師今條)에 육부(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육성(六姓)을 하사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삼국유사≫ 권1 기이1 시조혁거세마립간,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닫기
註 449
≪삼국유사≫ 권1 기이1 시조혁거세마립간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조(儒理尼師今條)에 육부(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육성(六姓)을 하사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삼국유사≫ 권1 기이1 시조혁거세마립간,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정치>행정>군현>주·부
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3대 노례왕(第三 弩禮王) >도솔가를 짓다
도솔가를 짓다
이때에 비로소 도솔가(兜率歌)註 450450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5년조에서 도솔가를 짓게 된 이유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유리이사금이 백성들을 아껴 선정하자 백성들의 풍속이 즐겁고 편안해져 도솔가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5년).닫기를 지었는데 차사(嗟辭 ; 구절)와 사뇌격(詞腦格 ; 음격)註 451451 차사(嗟辭)는 슬픔을 표현하는 말로 ‘아으’와 같다. 사뇌격(詞腦格)이란 곧 사뇌가의 격식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사뇌가의 끝장은 반드시 차사로 시작됨이 그 특이한 격식이다. 차사와 사뇌격을 붙여 ‘차사사뇌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44쪽).닫기이 있었다.
註 450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5년조에서 도솔가를 짓게 된 이유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유리이사금이 백성들을 아껴 선정하자 백성들의 풍속이 즐겁고 편안해져 도솔가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5년).
註 451
차사(嗟辭)는 슬픔을 표현하는 말로 ‘아으’와 같다. 사뇌격(詞腦格)이란 곧 사뇌가의 격식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사뇌가의 끝장은 반드시 차사로 시작됨이 그 특이한 격식이다. 차사와 사뇌격을 붙여 ‘차사사뇌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44쪽).
경제>수공업>물산>금속
경제>농업>농업시설>창고
경제>상업>유통>운송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