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창조와 창조 이후의 가치들
창세기 1장에서 보면, 첫 창조의 대상으로서 빛에 대한 창조가 있고 그 창조의 방식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창조의 대상과 방식 뒤에 있는 인간의 물음은 가장 원시적인 물음이 아니라 가장 첨담적인 물음으로 가치화되어야 있다. 그런 창조에 대한 서술방식이 애굽의 중왕조시대의 ‘메리카레 왕을 위한 교훈서’에서 나타난 서술방식과 비슷한 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일치점들은 고대에 있어서 그 당시 최고 객관성을 띠지 않고는 동시대인들에게나 그 후 인간들에게 전달이나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틀들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창세기의 창조 기록에 있어서 낮과 밤과 구별된 빛과 어두움의 개념들이나 광명체들의 기능들과 발생순서에 대한 이해도 그렇게 그 시대의 사고방식과 인간이해의 한계에 따라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내용과 기록의 주체가 하나님으로 표현된 이상,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동일한 말씀으로 주어져 있다.
그런 시대를 초월한 성격을 넘어 모세오경의 전문맥에서 본다면, 그 기록에 있어서 중심점은 창조의 주체와 창조의 방식에 있다. ‘빛이 있으라’라고 명령하시는 자인 하나님과 그 명령으로 존재하게 된 피조물의 창조방식과 그 성격에 그 기록의 중심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론인 창세기 2장 3절이 십계명의 첫 세가지 계명의 마지막인 안식일의 준수의 계명의 근거내용(출 20:11)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기록의 방식과 그 자세한 성격은 십계명의 첫 네 가지 계명들을 지켜야 하는 근거와 전제로서 역할하고 있다고 봄이 정당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고귀한 가치성은 십계명의 나머지 여섯째 계명들의 배후에 있는 근거로서 있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창조 주체자와 창조의 방식과 그 성격도 그 배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을 빛으로서 표상 한다든지, 또는 태양이나 달의 형상, 어떤 피조물의 형상 혹은 인간의 형상을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을 금하는 강한 명령이 그 창조기록에는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당연히 명령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질적인 거리를 의미한다.
더구나 세계창조에 대한 기록 이외에 그 뒤에 나오는 인간의 근원적 역사에 대한 기록에는 인간세계에 대한 근원적 물음들에 대한 대답으로 나타나 있다. 거기에서 분명히 모든 시대의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 묻는 물음들과 전혀 다른 물음들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창조한 가장 순수한 인간은 이 세상에 살았는가? 아니면 다른 장소에 있었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그런 아름다운 동산에서 어떻게 해서 쫓겨나게 되었는가? 가정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였는가? 인간의 타락은 어떤 문제와 얽혀 있는가? 첫 타락은 개인의 타락인가? 가정의 타락인가? 가족 중 누가 먼저 타락했는가? 타락의 유혹자는 있었는가? 유혹자가 있었어도, 타락한 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는가? 타락의 근원적 내용은 무엇인가? 양심은 타락의 증거인가? 피하는 행위는 어디에서 나오고 옷의 발생은 왜 생겼는가? 그런 질적인 변화는 돌이킬 수 있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첫 징조는 어디에 있는가? 죄를 짓고 핑계하는 일은 어느 단계의 타락인가? 인간에게 고통이 왜 있게 되었는가? 남자의 수고와 여자의 해산의 고통은 무엇을 의미한가? 직업의 기원은 얼마나 다양하고 최초의 형태는 무엇인가? 살인의 근원적 형태는 무엇이었는가? 양심과 더불어 죄의 소욕이 있는가? 살인한 죄인들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가? 어떻게 베푸셨는가? 도시의 근원은 어디로부터 생겼는가? 인간의 다양한 문화는 어디로부터 발생하였는가? 그것들이 모두 타락의 축적된 과정으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언어들이 왜 다양해 졌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가? 한 민족과 국가의 이상주의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서 무너졌는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인가? 인간의 타락은 세계의 멸절로 인하여 없어 졌는가?
앞에서 열거된 여러 가지 물음들은 성경에서 묻고 있는 고유한 것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물음들이 어떻게 그런 오래된 인간에게 물을 수 있었느냐에 있다. 그 대답의 탁월성만이 아니라, 그 물음들의 모든 시대들을 뛰어 넘는 초월성이 있다는 점이 성경의 지극히 큰 가치성이다. 그것의 천상적인 성격, 그렇게 큰 위엄과 그렇게 아름다운 조화에 대한 칼빈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 지극히 당연하다.
3. 과학과 신학과의 관계에 대해서
최근 과학적 실험결과들은 인문과학 뿐만 아니라 신학에 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과거에 지구구형설과 태양중심설이 경험에 기초하지 않고 순수하게 과학적 추론에 기초하여 세워졌던 가설들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서 기독교 안에 수용되어 있는 것과 같이, 그런 최근 과학적 실험결과들 중 기독교 진리에서도 고려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들이 있다. 불치의 병을 유전자의 조작이나 성장점의 조작에 의해서 다른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뿐만 아니라, 인공세포 이식 및 전이, 뇌의 기억활성 유전인자를 약으로 공급받아 지능인간이 되는 기술들33)이 그런 것들이다. 우주배경복사에너지에 대한 관찰에 의해서 창조흔적이 발견되는 결과도 있었지만, 시공간을 열 수 있는 기술문제에 도전하는 Wormholes이나 Quantum Teleportation에 대한 연구가 시공간여행을 할 수 있는 기술들로 발전할 수 있고 아마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그 사실이 기술로서 증명이 된다면, 신학에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현재로서 인간존재의 본질과 가치에 대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과학적 사실들은 각 종 장기들의 이식수술에 대한 실험적 결과들이다.
손이나 발등의 이식수술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심장이나 뇌와 같은 기관들의 이식수술은 한 개인의 인격체와 영혼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 천국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한 개인의 개체성에 대한 입장은 침범할 수 없는 문제로 그 해답이 마무리지어 졌다. 그러나 지금 한 개인의 개체성이 어디에 중심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영혼과 육체를 분리될 수 없는 사실을 강조하거나 영혼이나 육체의 어느 하나에 개체성이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사람 안에 다양한 개체성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오늘날 인간복제가 확증된 사실로 더 분명히 드러나고 배아 줄기세포들이나 몸 안에 있는 다른 줄기세포들에 대한 응용이 좀 더 발전이 되고 유기물합성이라는 기술이 거기에 결합하여 정교한 유전정보들이 함께 어울러 인간과 같은 인조인간이 생산이 되는 날에도 그런 문제가 더 심각하게 등장하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상식과 결정론의 몰락인데, 그런 결과들이 성경적 진리와 그것에 기초한 기독교적 진리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해석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예상과 달리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맺은 말
성경의 물음들은 제 과학들이 세계의 근원에 대해서 묻고 있는 물음과는 전혀 다르다. 아브라함을 소개하는 단계에 와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과 전혀 다른 은혜의 성격을 소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과 부귀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택들을 누릴 수 있지만, 그런 은택들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부와 보상과 상급은 전혀 다른 데 있음을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런 것은 과학이 중심으로 하는 가치의 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과학이 아무리 긴 역사를 가졌다고 해도, 그 지향점들은 성경의 지향점들과는 전혀 다르다. 가치화의 과정부터 다르다. 자연과 인간이 갖는 기존의 가치들을 파괴하지 않으면, 과학은 발전할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의 가치를 인간 스스로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가치에 대해서 조금도 손상을 주지 않고 그 분이 이루는 뜻과 목적을 이루시고 계신다. 지금도 원수와 나그네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가를 그런 창조와 섭리의 방식에서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하나님만이 그 부와 보상으로 되어 있는 인간으로 발전할 때의 그런 인간으로까지 높이고 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인간으로 만들기까지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런 은택들을 받을만한 가장 고귀한 틀이다. 하나님이 그저 주신 모든 은택들을 스스로 누리는 것처럼 살도록 하신 은택들의 틀이다. 그렇게까지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 인간을 사랑하신다. 신비의 미시세계로부터 감추어진 거시세계의 신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의지의 출발과 내용조차도 자신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추어진 상태로 인간이 스스로 누리는 것처럼 사는 영원한 틀을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이것이 과학이 제시하는 유익이나 물음과 근원적으로 다른 성경에서 고유하게 주어지고 있는 내용의 진정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