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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대왕
정조(正祖, 1752년 10월 28일 (음력 9월 22일) ~ 1800년 8월 18일 (음력 6월 28일))는 조선의 제22대 임금이다. 성과 휘는 이산(李祘)[주해 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형운(亨運)[1], 호는 홍재(弘齋)이다.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하였다.[3]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 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을 등용,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벽파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노론이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노론, 특히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김종수,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기간 중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음으로써 세도 정치의 씨를 뿌렸다. 박지원 등의 진보적 문장에 반대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켰고, 서인의 성리학자이자 예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존경하여 그를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능은 수원(水原)의 건릉(健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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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대왕
[정조대왕의 효성에 대한 일화]
조선 정조대왕은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정조대왕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끔찍히 존경했습니다. 억울하게 비명에 돌아가신 어버지에 대한 효행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성심 또한 지극정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경기도 수원)에 모시고 능행을 자주했다 합니다.
어느 날 점심을 마치고 한가한 시간을 갖고 있는데 갑자기 천둥번개를 치며 소나기와 우박이 심하게 쏟아졌답니다. 이때 갑자기 정조대왕은 사도세자인 아버지를 생각케 되었는데 '난 아버지 덕분에 호의호식하며 천하를 호령하는데 지하에 계신 아버지는 얼마나 추우실까? 그런데도 능참봉 이란 놈은 아버지 산소를 지키기는커녕 술이나 마시고 따뜻한 방에서 낮잠이나 잘게 아니냐' 라고 생각을 하니 화가 치밀어 갑자기 능행을 지시했답니다
그 전날 저녁에 능참봉이 꿈을 꾸었는데 백발노인이 나타나 '내일은 무슨일이 있어도 사도세자 능 앞에 엎드려 있기만 해라' 해서 그 장대비가 쏟아지는데도 비를 맞으며 엎드려 있었답니다.
정조대왕이 아버지 능에 거의 당도했는데 멀리 아련히 능 앞에 사람이 있는 겁니다. 다가가 보니 술이나 퍼마시고 따뜻한 방에서 낮잠이나 잘 줄 알았던 능참봉이 아버지 능 앞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감복한 정조대왕은 그 자리에서 즉시 능참봉을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으로 승격시켜 능참봉은 벼락출세를 했다고 합니다. 일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심을 되돌아 보게 하는 일화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정조대왕의 업적]
1.규장각 설치
-기존의 여러학문 연구소의 기능을 병합하여 일원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왕실도서관으로 창덕궁에 설치하였다.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등 서얼출신들을 검서관에 등용하였다(1779)
2.초계문신제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하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당하관 이하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켜, 등용하였다.
통상 37세 이하 과거급제자가 선발되었으며 초계문신은 새로운 인재양성을 위한 하나의 제도가 되었다.
3.수원 화성 축조
-정조 13년 수원 화산 아래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정약용으로 하여금 화성을 세우도록 하여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4.수령의 권한 확대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5.대전통편 편찬
-1785년 법전 재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집권체제를 확림합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6.신해통공
-영의정 채제공의 건의에 의해 신해통공을 실시함으로써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고, 이로써 사상의 자유로운 시장활동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7.저수지 축조
-저수지 축조와 관련된 제언절목을 반포하였고, 수원화성을 개발하면서 대유둔(국영시범 농장)을 설치하기 위해서 만석거. 축만제 등의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8.활자의 주조(임진자.정유자.한구자.생생자.정리자)
-도합 80여만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배치하여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9.천주교에 관대
-정학인 성리학이 제 기능을 다하면, 서학은 저절로 없어질꺼라 보고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진산사건이 일어났을때에도 사건을 크게 확대하지 않았다.
10.남인의 중용
-사도세자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벽파를 배제하고, 그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계열의 시파등을 중용하였따. 시파들의 대부분은 영조대에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들이었다.
[정조대왕의 명언]
낮에 한 일을 밤에 스스로 점검해 보아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많거늘
어떻게 평생 동안 한 일이 자기의 마음에 다 만족하기를 바라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잠시라도 놓아 버려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줄곧 구속만 해서도 안된다
잠시라도 놓아 버리면 달아날 우려가 있고 구속만 하면 가로막히는 폐단이 있으니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이 점을 잘 살펴서 두가지 공부를 병행하여야만 한다.
산보다 더 높은 게 없고 바다보다 더 넓은 것이 없지만 높은 것은 끝내 포용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바다는 산을 포용할 수 있어도 산은 바다를 포용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가슴속은 진실로 드넓어야지 한결같이 높은 것만 추구해서는 안된다.
내가 깊이 경계하는 것은 '쾌快' 한 글자에 있나니 매사에 만약 쾌락을 ?으려 한다면 후회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산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마지막을 잘 경계하였기 때문이고 평지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것은
시작을 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무리를 잘하는 것이 진실로 드물지만 처음을 잘하는 것도
어렵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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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릉
사도세자(1735-1762)의 릉이 융릉, 정조대왕(1752-1800)의 릉이 건릉입니다.
수원화성에서 20여분 거리의 화산(花山)에 있습니다.
이곳은 정조대왕이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원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삼육병원 뒤 배봉산에 묻혀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한 릉입니다.
풍수에 밝았던 정조대왕이 직접 잡은 자리이지요.
정조대왕은 풍수가 후손들의 화와 복을 가져온다는 화복설(禍福設)은 믿지 않았습니다.
정조대왕은 묘소 이전을 결심하고 그에 대해 수백, 수천 번도 더 생각했고 명당들도 미리 조사를 해놓았습니다.
조선의 최고풍수가들은 여러 곳을 추천했지만 임금의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정조대왕이 이장지로 점찍은 곳은 수원의 용복면 화산(花山)이었습니다.
그곳을 살펴본 지관들의 말은 한결같았습니다.
“지극히 길하고 모든 것이 완전한 묏자리입니다.”
경기도 이천 세종의 영릉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길지로 꼽히는 곳입니다.
용복면(龍伏面)이라는 지명도 용이 엎드린 곳이란 뜻입니다.
정조대왕도 아버지 옆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수원은 정조대왕의 도시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입장료 천원.
561년 조선역사에서 조선왕릉은 예법에따른 일정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1. 도성 10리 밖, 100리 이내.
교통과 통신이 열악했던 그 시기, 임금의 능행길에 갑작스런 변고가 생기면 즉시 환궁할 수 있는 조치입니다.
2. 배산임수.
조상들은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는 곳을 선호했습니다.
3. 상설제도.
세종 때 집대성한 오례의(五禮儀)에 따랐습니다.
4. 자연주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에 순응해, 능침 아래 언덕을 각(角)을 주어 깎지 않고 완만한 곡선으로 단장했습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황제릉과 왕릉이 있습니다.
능역에는 소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소나무를 송(松)이라 하는 것도 나무(木)에 귀할 공(公)을 써서 최고의 나무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요.
소나무 숲을 지나면 속계와 영계를 가르는 금천교가 있습니다.
다음은 홍살문, 신성한 곳이니 잡귀는 범접하지 말라는 문입니다.
홍살문 오른쪽에 네모 형태로 돌을 깔아 놓은 배위(拜位)는, 참배온 임금이 능으로 가기 전 네번 절하는 곳입니다.
홍살문에서 똑바로 깔린 길이 참도(參道)인데, 왼쪽은 혼령이 다니는 신도(神道),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입니다.
참도 끝에 정자각(丁字閣)은 정(丁)자형 건물로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입니다.
홍살문과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왼쪽에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과, 오른쪽에 릉을 지키는 참봉이 거주하는 수복방이 있습니다.
정자각 뒤 왼쪽에 축문을 태우는 예감, 오른쪽에는 제향을 마친 제관이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산신석과 왕의 행적을 적은 비각이 있습니다.
능 구역에는 뒤에 쌓은 작은 담인 곡장이 있고,
봉분 뒤쪽 주변에는 석호(호랑이 모양), 석양(양 모양)이 네 개씩 있습니다.
봉분을 둘러싼 돌이 병풍석이고, 그 주변을 한 번 더 둘러싼 돌이 난간석입니다.
봉분 앞에 있는 네모형태의 돌이 혼유석으로 왕의 혼이 놀다가 들어간다는 곳이고,
혼유석 앞의 석등이 장명등입니다.
그 좌우에 서 있는 돌이 망주석입니다.
그 앞으로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습니다.
문인석, 무인석 뒤나 옆에 말모양의 돌이 석마입니다.
왕릉은 단릉과 쌍릉, 합장릉과 삼연릉(세개의 봉분, 景陵, 헌종과 왕비, 후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왕릉은 위압적이거나 인위적이지 않고 편안한 자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서가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융릉과 건릉을 가리키는 표지판.
융릉으로 가는 길의 숲.
가족단위의 나들이 객이 많았습니다.
조선 국왕 27명 가운데 최장기 52년을 집권했던 영조(1724-1776)는
숙종(1674-1720)이 후궁 침소를 찾았다가 본 후궁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에 반해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보수 노론 세력은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1720-1724)을 4년 만에 독살하고 자신들의 편인 영조를 즉위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노론은 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을 낳은 장희빈을 죽이는데 가담했기에 경종은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영조는 태생적으로 노론에 빚을 지고 있었고 노론 일색으로 정권을 꾸렸습니다.
영조는 왕비 2명과 후궁 4명에게 아들 둘을 얻었는데,
첫째 아들은 어려서 죽고(효장세자) 둘째 아들을 세자로 삼아 사도세자라 했습니다.
영조는 세자를 홍씨 집안과 결혼시켰습니다.
장인 홍봉한과 그 동생 홍인한은 골수 노론이었습니다.
1759년 66세의 영조는 2년 전에 사망한 왕비의 뒤를 이어 15살 정순왕후 경주김씨를 왕비로 삼았습니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오빠 김귀주, 사촌 오빠 김관주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노론 유생이었지만,
단번에 정계의 핵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군주가 약하고 신하가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였습니다.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힘을 합쳐 나라를 개국했고, 왕은 자신들의 대표라는 것이지요.
대신들이 정한 결정을 왕이 뒤집기는 어려웠습니다.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당론에 따라 왕을 바꿀 수도 있었습니다.
세조의 쿠데타(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과 같이 쿠데타로 왕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새로운 왕을 세우거나,
조용히 왕을 독살시키고 새로운 왕을 옹립했습니다.
7명의 국왕이 쿠데타나 독살 또는 독살추정으로 제거되었습니다.
영조는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세력의 비호아래 52년을 재위하면서 비교적 강한 왕권을 누린 왕이었습니다.
왕과 지배층은 ‘국가개혁, 백성보호’라는 기본적 통치철학을 말로만 하고 잊기 쉬웠습니다.
관리들이 말하는 ‘부국강병’은 탁상공론에 불과했고 성리학은 실천 없는 말뿐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자기 가문의 권세를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나라가 약해빠지든, 백성이 굶주리든 그것은 안중에 없었지요.
그런 결과가 임진왜란(1592-1598), 병자호란(1636-1637)이었지만, 이후에도 지배층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도세자(1735-1762)는 영특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자는 왕으로 적당히 권세를 누리다가 가는 삶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전 국왕들과는 달리 세자는 점점 힘을 잃어가는 국가의 안위를 생각할 줄 알았고, 점점 핍박해지는 백성들의 처지를 볼 줄 알았습니다.
국가의 부흥과 백성의 안위... 이것이 사도세자가 꿈꾼 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도세자는 노론을 중용하는 아버지 영조의 국정운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세자는 노론을 국가와 백성의 안위보다 자기 가문의 영화를 유지하는 무리로 보았습니다.
장차 자기가 집권하면 이것을 개혁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세자의 생각은 아버지 영조와 집권 노론세력의 반발을 불렀습니다.
결국 오랜 대립 끝에 사도세자는 김상로, 홍계희와 같은 노론 중진들과 김한구, 김귀주 부자와 같은 정순왕후의 가문, 홍봉한, 홍인한 형제와 같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가문의 협공으로 비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28세.
1762년 5월 13일(음력) 운명의 날, 영조는 창덕궁 휘녕전(徽寧殿)으로 사도세자를 불렀습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가 자신을 죽이려는 속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세손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담담히 의관을 차려입으면서 혜경궁 홍씨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학질을 앓는다 하려 하니, 세손의 휘항(揮項, 조선시대 남자의 방한모)을 가져오라.”
부인 혜경궁 홍씨가 말을 받았습니다.
“그 휘항은 작으니 본래의 휘항을 쓰소서.”
홍씨가 세자의 휘항을 건네자 세자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서
세손 휘항을 내게 안 씌우려 하니 내가 그 심술을 알겠네.”
세자는 혜경궁이 자신을 버렸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세자는 아들을 죽이는 것이 자신이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죽여 아들을 살리고자 했습니다.
휘녕전에 세자가 나타나자 영조는 칼을 주면서 자결을 명했지만 세자가 거부했습니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뒤주를 가져와 가두어 죽이기를 청했고, 결국 세자는 좁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절명했습니다.
세자가 절명하는 날 장인 홍봉한은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11살이었던 세손(훗날 정조)는 영조 앞에 엎드려 절규했습니다. “아비를 살려주소서...”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는 자기가문을 위해 이를 도왔습니다.
노론세력의 국가기록은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몰았고 죽음을 정당화했습니다.
정순왕후 오빠 김귀주의 상소,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것은 모든 신하가 ‘해와 달처럼’ 흠앙하는 대처분이옵니다!”
융릉에서 건릉 가는 길.
조선 최고의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건릉(健陵).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세손도 죽이려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1776년 결국 즉위에 성공했습니다.
즉위도 끝까지 방해했고, 위기의 연속이었지만 즉위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정조 주변은 온통 적들뿐이었습니다.
지뢰밭을 가는 듯, 살 떨리는 아슬아슬한 국면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영조는 죽기 전 세손에게 유훈을 남겼습니다.
“사도세자의 일을 거론하지 마라. 그 일을 거론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려라!”
정조는 모순의 왕이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판정하면 영조가 잘못된 임금이고,
영조가 올바른 처분을 했다고 하면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복수, 국가개혁’ 이 두 가지가 정조의 뜻이었지만 섣부른 처신은 곧 죽음이었지요.
시간이 필요했고, 노론에 맞서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키워야 했습니다.
이후 재위 24년은 정조의 정치력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정조는 먼저 아버지의 복수를 ‘즉위방해죄’라는 다른 명분으로 갚았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나 즉위방해 세력은 결국 같은 노론이었지요.
즉위방해죄는 분명한 명분이었기에 노론에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즉위방해죄로 아버지의 원수를 일부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즉위 다음 해인 1777년, 제거기회를 엿보던 노론은 자객을 보내 정조를 암살하고자 했습니다.
왕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낸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자객 전흥문은 지붕의 기와를 벗기고 정조 침실로 들어가 살해하고자 했지만,
밤늦게 독서하는 것이 습관이었던 정조가 알아차림으로써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국왕 살해기도 사건으로 배후의 노론 세력이 다시 제거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들 일부가 또 다른 명분으로 제거되었지요.
그 후에도 두 차례 쿠데타기도(1784년 문인방 이경래 역모사건, 1785년 이율 홍복영 역모사건)를 정조는 천운으로 넘겼습니다.
노론에게 정조는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원수들이 제거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원수의 뿌리는 깊고도 깊었습니다.
법적인 할머니 정순왕후 김씨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그 원수의 뿌리였지요.
두 사람이 궁중에 있는 한 뿌리는 발본색원되기 어려웠습니다.
정조는 평생 이런 한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정순왕후가 주도해 훗날 정조를 독살하게 된 것이 정조의 운명이었습니다.(유력한 추정)
국가개혁
즉위방해와 암살기도 명분으로 아버지의 복수를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고 판단한 정조는 국가개혁에 나섰습니다.
우선, 계속된 암살위기에서 노론 일색의 군부를 대신하는 임금 친위부대인 장용위(훗날 장용영)을 창설했습니다.
장용영은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가 되었습니다.
드라마 ‘무사 백동수’의 백동수가 장용영의 무사였지요.
그리고, 규장각이라는 기관을 세워 신진 학자들을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정약용과 같은 불세출의 학자가 나왔습니다.
점점 신진학자들이 커가자 정조는 자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재위 13년(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수원을 신도시로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수원화성에는 정조의 국가개혁 꿈이 담겨있습니다.
성은 평산성(平山城)으로 계획되어 도성 안에 백성이 살고 왕의 행궁이 있는 형태였습니다.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모든 노역에 임금을 지불했고, 그 모든 기금을 왕실비용을 아껴 모은 내탕금으로 사용했습니다.
성축조는 늘 국가부역으로 백성을 강제동원 했는데, 임금노동으로 성을 축조한 것은 수원화성이 처음이었습니다.
수원성은 총괄 채제공, 현장건축소장 조심태, 설계 정약용으로 완공되었고,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정조가 기획한 화성은 평산성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품성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솜씨가 참 대단하지요.
농업혁명
정조는 화성 옆을 흐르는 진목천을 막아 큰 저수지를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해 거대한 농토를 조성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정조가 오랜 동안 꿈 꾼 ‘농업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저수지가 만석거였고, 농토가 대유둔이었습니다.
정조는 대유둔의 2/3는 수원성을 지키는 장용영의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수원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따로 국방비를 들이지 않고도 강군을 육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었습니다.
가뭄이 들면 농사를 포기해야 했던 백성들에게 만석거의 물을 이용하는 영농방법은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생산물의 반은 경작자가 갖고 나머지 반은 수성고(脩城庫)에 넣어 화성의 보수와 관리비용으로 사용했습니다.
대유둔에서 나온 비용만 가지고도 화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장용영 병사들에게 있어 군역은 무조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아니라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즐거운 일이 되었습니다.
상업혁명
먼저 정조는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독점하던 '금난전권'을 폐지했습니다.
금난전권은 상인명부에 등록한 시전상인들이 특별세를 내는 대신 쌀, 소금, 옷감, 생선 등 주요 생필품을 독점하던 권한이었습니다.
이것은 재정부족을 메우기 위해 시행한 제도였습니다.
일반 상인들은 한성 시전상인들에 막혀 수도권에서는 물건을 팔수가 없었습니다.
시전상인들은 금난전권을 무기로 물가를 마음대로 조절해 거부가 되었고,
그 일부를 유력 벼슬아치들에게 뇌물로 바쳐 특권을 유지하는 정경유착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재정부족을 메우기 위해 시행한 금난전권은 점점 조선의 상업발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정조는 여섯 가지 품목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모든 물품에 대한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명했습니다.
이것이 조선 상업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신해통공(辛亥通共)이었습니다.
신해통공이 반포되자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습니다.
며칠 만에 생필품 가격이 크게 내렸습니다.
노론 벌열들의 충격은 컸습니다.
당장 신해통공을 폐지하고 금난전권을 부활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뜻은 확고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의 상업은 발전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소수의 특권이 무너지자 다수가 만족하는 상황이 실현된 것입니다.
개혁군주의 역량이 국가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이어 정조는 화성 안 중심지에 인위적으로 십자가로(十字架路)를 조성했습니다.
상인들에게 1천 냥을 무이자로 빌려주고 3년 내 갚는다는 조건으로 상인들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화성의 십자로에 수많은 상점들이 들어서서 흥성거렸습니다.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요지인 화성의 십자로에서 시작된 상업혁명은 삼남 각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화성은 조선 후기 상업혁명을 선도하는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정치개혁
정조는 오랫동안 노론 일당으로 일관된 조정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정조는 그 대안으로 남인을 주목했고, 남인 학자들을 키웠습니다.
보수적인 노론, 개혁적인 남인, 중도의 소론...
하지만 남인등용의 가장 큰 걸림돌이 천주교였습니다.
오직 성리학에만 매몰되어 말장난 수준에만 머물러 있던 노론에 반발해,
남인들은 이론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성리학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성리학을 근거로 자신들의 권력유지만을 생각하던 노론에 비해,
남인은 양반과 평민이라는 신분, 남녀불평등, 병역, 세금제도 등 잘못된 국가시스템을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노론의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안 본 책이 없다고 할 만큼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정조의 시야도 넓었습니다.
정조는 천주교를 서양학문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해했고,
무엇보다도 남인을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해 최소한의 제한에 그쳤습니다.
벌떼 같은 노론의 천주교공격에 정조는 기막힌 방법으로 그 예봉을 피해갔습니다.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과 같은 뛰어난 남인 인재들이 점점 국정을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국가개혁의 원대한 꿈이 조금씩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성군(聖君) 정조
정조는 성군(聖君)이라 이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군주였습니다.
“나는 별다른 장점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품성이 그리 나태하지는 않아 공부에 유의하기를 상당히 좋아했다...”
“예로부터 궁중에는 시간을 보낼 만한 일들이 꽤 있지만 나는 천성적으로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환관이나 궁녀들과 수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조용히 앉아 책을 보는 그 맛이 매우 깊다.”
정조는 즉위 당시 만 24세에 불과했지만 이미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정조는 매일 밤 하루의 일과를 점검하고 반성했습니다.
“남을 위해서 일하는 데 정성을 다했는가? 벗들과 사귀는 데 신의를 다 했는가? 배운 가르침을 실천했는가?”
“제왕에게는 사(私)가 없다. 신하는 혹 휴가라도 내지만 나는 일찍이 잠시도 쉬어 보지 못했다.”
정조는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고 실천했습니다.
정조는 비단옷도 사양했습니다.
"나는 사치스러움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옷은 모시와 목면에 지나지 않고, 음식은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대개 화려한 옷을 입으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사치는 재물을 축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끝없는 폐해와 연관된다...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
정조는 무명옷도 여러 번 빨아서 입었습니다.
대개 군주들은 옷을 빨아 입지 않고 새 옷만을 입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습니다.
규장각 각신들은 정조의 식사를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반찬이 두세 가지에 지나지 않는데다 그릇은 모두 흠이 있거나 일그러진 것뿐이었습니다.
신하들은 정조의 의식주가 자신들보다 못한 사실을 여러 차례 목도하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정조는 모든 잡기도 멀리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말하는 기예(技藝)를 하나도 알지 못한다. 바둑도 잘 두지 못한다.”
정조는 여색 또한 멀리했습니다.
"나는 본래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아, 정사를 하는 여가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직 독서뿐이다."
정조에게 여색은 후사를 낳기 위한 방도일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시간을 학문에 몰두했고, 이런 노력을 통해 정조는 신하들의 스승으로 자리 잡아 갔던 것입니다.
1800년 6월 28일, 국가개혁의 꿈이 무르익어가던 때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48세.
등에 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의관들이 올린 탕약이 문제였습니다.
임종 직전에는 정조의 철천지원수 정순왕후가 혼자 있었습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는 즉시 노론으로 정권을 갈아치우고 대대적인 남인 토벌을 시행했습니다.
1801년 1월 신유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인을 천주교 덫을 씌워 절멸시킨 것입니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정은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질주했습니다.
정조 사후 조선에는 1811년 홍경래의 민란을 시작으로 민란이 빈발했습니다.
진주민란, 동학혁명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조선 전체의 멸망이었습니다.
한 개혁군주의 자리는 이토록 컸던 것입니다.
정순왕후(1745-1805)는 1804년 섭정을 거두고 1805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조(1800-1834)가 1804년에 성년이 되면서 더 이상 섭정은 불가능했습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정조가 몇 년 만 더 살고, 순조에게 왕위가 이어졌다면 신유박해도 없었을 것이고,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같은 남인이 주요 요직에 등용되어 조선의 개혁을 주도했을 것입니다.
천주교도 큰 박해 없이 정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순조가 친정을 했을 때 조정은 이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가문이 장악해 세도정치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조정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1863년 대원군(1820-1898)이 등장할 때까지 대를 이어 50여 년 동안 권세를 누렸습니다.
노론의 세도정치에 눌려 순조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에 사대하던 노론은 일본에 나라를 바치고 친일로 권력과 재산을 유지했습니다.
해방 후 친일세력은 친미로 돌아서 오늘까지 권력과 재산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카이사르(BC 100-BC 44)가 터를 다지고 이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집권 41년 동안(BC 27-AD 14) 토대를 놓은 로마제국이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AD 180년 사망) 200년 동안 ‘PAX ROMANA(로마의 평화)’, ‘인류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이어갔지만, 정조 24년 치세의 국가개혁이 단명으로 끝나고 만 것이 한스럽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정조를 몇 년 더 살게 하시지 못했을까...
돌아나오는 길의 진달래꽃.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과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성 아오스딩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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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패기
정조 대왕은 조선의 왕 중에서도 몹시 입이 험한 편이었는데
이 사실은 최근에 발견된 비밀 편지 299통으로 밝혀졌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서영보에게
"호로 새X야!(胡種子)"
김매순에게
"입에서 젖비린내나고 사람 같지도 않는 놈이 경박하고 어지러워서 주뒹아리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황인기와 김이수에게
"이놈들이 어떤 놈들이기에 주뒹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서매수에게
"늙고 힘없는"
김의순에게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하고 졸렬한"
이노춘에게
"약하고 물러터진 X"
심환지에게
"갈수록 입조심을 안하는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그외에
개에 물린 꿩 신세’ ‘볼기까고 주먹 맞기’ 등의 속담도 마구 구사하였다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다"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
近日僻類爲뒤 & #51565;박 & #51565;之時, 有時有此無根之
말하다가 너무 빡쳐서 생각이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안났는지 한글로 뒤 & #51565;박 & #51565;이라 적어주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빡치느라 마구 쓰다보니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
이건 마치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 정신없이 천플을 달며 키배를 벌이다 보니 새벽이 된 이치와 같다
편지를 쓰다가 중간에
呵자를 세번 써서 呵呵呵
이 단어의 의미를 찾자면 껄껄껄 요즘 식으로 하면 "ㅋㅋㅋㅋㅋㅋ"
그는 경연 중에
"경들에게는 더 배울것도 없다." 하며 경연을 폐지하기도 하였으며
신하에게 대놓고
"공부 좀 하시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담배를 정말 사랑하여 신하들의 빗발치는 금연 상소도 물리치고 끝까지 담배를 피웠으며
심지어 조선의 대학자들을 모여놓고 시험 주제로 담배를 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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