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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이 모호한 단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 후 모든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의심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위에서 거론한 전설은 일본 역사가들이 주장하듯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원후 146년 한반도와 황해를 사이에 둔 산동지방의 가묘에 있는 석판에 묘사되어 있다. 1429년 단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원이 한국전쟁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기 전까지 평양에 온존하였다.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단군이 출현했던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한민족은 단일하고 동종의 혈통으로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왕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단군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연속적인 존재이며 다른 시대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채워진 사람이며, 이러한 영원한 가계로부터 합법성을 부여받는다. 예를 들어 초대 대통령 하에서 B. C. 2333년에 맞춰진 단군의 탄생을 기원으로 한 달력을 사용했다. 1993년 9월에 북한은 평양 근처에 위치한 단군 묘와 유골의 발견을 대대적인 축하행사와 함께 발표함으로써 미국이 관련된 진행 중인 핵 위기를 단절시켰다.
5 천 년 전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립은 한국의 국가 형성에 있어서 신기원이다. 고조선 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통합된 정치 통일체가 건립되었고, 인구의 문화적 동질성과 혈연적 유대관계가 강화되었으며, 정치 경제적 귀속성이 더욱 밀접해지고, 이러한 것들은 국가 형성에 탄력을 주었다....... 한국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내려온 단일한 피와 문화를 물려받은 단일 민족 국가이다.
김일성은 그 달 후반에 그곳을 방문했으며 일 년 뒤 김정일은 같은 곳에 박물관을 헌정하였다. 모든 저술가들은 한국인들은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일하게 지속되는 역사계보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며 따라서 가장 순수한 민족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누군가가 웅녀신화나 최근의 발견을 조작했던 간에 이것은 명백하게 한국인의 이야기다.:소수의 다른 민족들(이스라엘과 일본인이 생각난다)은 현대에 까지 지속적으로 내려온 독특한 언어와 민족성을 갖고 외떨어진 기원을 주장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탕아에 관한 여성적 주제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거나 아들의 천재적 재능(북한은 단군의 풍화되지 않은 치골이 비상하게 크다고 주장했다.: 고대 문서들은 때때로 왕의 생식기 크기를 다루지만 대서특필할 만 할 때에만 그렇다.) 소수의 민족들은 마늘과 같은 것을 먹는다. 무엇보다도 세계의 민족들 중의 소수만 민족, 종족, 언어에서의 특별한 차이가 없는 국가에서 산다.: 한국은 민족성과 국가성이 일치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단일민족적인 국가의 하나이다. 한국인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이러한 상대적인 균질성이 공통의 “혈족”을 나타내거나 모든 한국인들은 비슷한 성격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잘못이다.
불행하게도 기원 직전의 세기 까지 글로 쓰인 한국사가 없었으며, 그 역사는 중국의 저술가들에 의해 연대순으로 기술되었다. 구석기 유적지의 발굴로 한반도에 오십 만 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으며, 후세에 남겨 놓은 마제석기나 항아리와 주거지에 의해 밝혀진 신석기 시대인 칠, 팔 천 년 전부터 인간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원전 이 천 년경 중국으로부터 채색하고 끌로 판 게 분명한 새로운 도자기 문화가 전파되었다. 이러한 신석기인 들은 정착하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짓고, 동일혈족의 씨족을 사회의 기본 집단으로 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현대의 한국 역사가들은 종종 씨족 지도체계는 그 다음 신라시대에 나타난 헌법기관인 화백이라 불리는 귀족들의 협의체로 특징져지며, 단군신화처럼 신석기 시대 종족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추정한다. 그러나 한민족에게는 소수의 재야사학자들이 기꺼이 믿고 싶어 하는 북한에서의 최근 발견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상상의 기원을 뒷받침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경에 한반도에는 몇 몇의 작은 국가들이 중국의 이목을 끌만큼 오랫동안 살아남았고 가장 걸출한 나라는 고조선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고조선이 남만주에 있는 요하 연안을 강역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며 일부 학자들은 평양과 한반도 북서쪽을 흐르는 대동강을 주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은 청동기 문화와 수많은 성곽도-(중국 측 평가에 따라) 오만하다고 보일만큼 가공할 정도-의 정치적 연합체에 기초한 문명으로 번성하였다.
청동무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기마민족으로 구성된 조선은 자신의 영향력을 요동유역의 대부분을 취하면서 북쪽으로 넓혀갔다. 그러나 북중국의 신흥세력인 연(1122-255 B, C)은 조선의 성장을 저지하고 궁극적으로 압록강과 대동강 사이에 위치한 청천강의 남쪽으로 몰아내었다.
연이 중국에서 진 제국과 한 왕조(206B. C-A. D. 200)에 항복함으로써 조선은 쇠퇴하고 피난민들은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위만이라 불리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194-180 B, C 사이의 어느 때에 조선의 왕권을 잡았다. 위만조선은 중국의 영향과 연합화 한 구조의 고조선의 혼합물이며, 위만 하에서 명백하게 활기를 찾은 이 나라는 다시 수백 마일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위만의 야망은 한나라의 침략을 자주 불러일으켜, B. C 108년에 망했다. 이러한 발전은 철기문화의 출현과 동시에 일어났으며, 보습과 괭이 낫과 같은 도구에 기반을 둔 수준 높은 농업을 가능하게 하였다. 쌀과 다른 곡물의 경작이 놀랄 만큼 증가하였으며, 따라서 인구가 증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서부터 많은 세기가 흘러 우리가 여전히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한국인”이라고 부르기를 기꺼이 부르려고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통일된 한국의 출현이 있기 까지 농업 사회가 계속되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남으로 한강(서울을 관통해 흐르고 있는) 까지 지배하기 위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핵심지역은 현재 평양 근처에 위치한 낙랑이었다. 낙랑은 오늘날 남한과 북한이 -양측 모두 참여하고 있는 한국 국가주의의 모호한 투사 배경과 마찬가지로 - 역사기록학에서 가장 대립적인 견해를 보이는 예시이며, 북한의 역사가는 낙랑군이 한반도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거부하며 가능한 북경 가까이에 위치한 한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이러한 견해는 낙랑군이 명백하게 중국의 도시이기 때문이며, 1913년 식민지 총독의 감독 하에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발굴된 풍화되지 않은 공예품이 많이 출토된 유적지가 그곳에 살았던 중국 상인이나 지배자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아마도 북한인들도 결국 같은 견해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