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는 정보공유 부족이 부른 실수” 주장 제기
美 기밀문건 디지털화 시작 ‘외교 데이터베이스’ 구축
합참의장부터 병사들까지 기밀정보 검색 가능해져
美 기밀문건 디지털화 시작 ‘외교 데이터베이스’ 구축
합참의장부터 병사들까지 기밀정보 검색 가능해져
▲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샌지 |
1971년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가 베트남전에 관한 미국 정부의 거짓말을 발가벗긴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했을 때, 문건 유출자에 대한 방첩법 위반 혐의 재판을 맡았던 포터 스튜어트 대법관이 한 말이다. 그는 “시스템이 냉소적이거나 부주의한 사람들에 의해 무시당하기 시작하면, 곧 스스로를 보호하려 하거나 과시하고 싶은 이들의 손에 놀아나기 마련”이라고도 했다.
위키리크스가 차례차례 공개하고 있는 미국의 외교 전문은 모두 25만1287건. 이 중 2급 비밀이 1만5652건, 3급 비밀이 10만1748건, 일반 문서가 13만3887건이다. 1996년부터 올해 2월까지 미 국무부와 274개 외국 대사관·영사관·이익대표부가 주고받은 전문들이 여기에 포함됐다. 이 모든 정보를 흘린 혐의를 받는 사람은 이라크 주둔 미군 정보병으로 근무했던 브래들리 매닝(23) 일병. 그는 미군이 이라크에서 TV 카메라 기자를 포함해 12명의 민간인을 군용 아파치 헬리콥터 공격으로 살상하는 동영상을 팝가수 레이디 가가의 CD 음반으로 위장해 빼돌렸다. 이른바 ‘위키 가가’ 사건이다. 위키리크스가 미 외교 전문 폭로를 시작한 다음날 아침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오늘은 매닝 일병이 ‘힐러리 클린턴과 세계의 많은 외교관들이 아침에 깨어나 심장마비에 걸릴 것’이라고 했던 바로 그날”이라고 했다. 스물두 살의 미군 병사 매닝과 서른아홉 살의 은발 무법자 줄리안 어샌지가 초강대국 미국을 뒤흔들고 세계 외교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정보화의 병폐 ‘투명성 독재’?
사실 냉전시대라면 위키리크스는 존재할 수 없었다. 미국은 소련의 끈질긴 첩보활동에 맞서 민감한 정보를 관리하는 데 큰 공을 들였다. 모든 비밀 정보의 복사본마다 번호를 매겼고, 매일 업무를 마칠 때마다 금고에 보관할 문건의 숫자를 장부와 맞춰가며 확인했다. 문서에는 생산자를 명확히 하는 동시에 불법 복제를 막는 역할도 하는 워터마크(투명한 무늬)가 심어졌다. 전신(wire transmission)은 극도로 제한적으로만 사용됐으며, 꼭 써야 할 때는 국가안보국의 수학자들이 개발한 2중 3중의 암호화 기술이 정보 보호 역할을 맡았다. 정부 부처와 기관들은 각자의 비밀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꼭꼭 싸매 숨겼다. 2차 세계대전 때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중앙정보국(CIA)조차 연방수사국(FBI)이 소련의 비밀 암호 체계를 풀었다는 것을 몰랐을 정도였다. 9·11테러 전에 FBI는 알카에다 조직원 자르카이 무사위가 민간 항공기로 미국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항공 테러음모를 밝히려 백방으로 뛰었던 CIA에 이 사실을 알려주지는 못했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디지털화한 비밀의 보안 취약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그 병폐에 대한 성찰도 함께 불러왔다. 위베르 베드랭 전 프랑스 외무장관은 “막무가내식 ‘정보 쏟아내기(outpouring)’와 ‘투명성(transparency)’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 외교전문 공개는 ‘표현의 자유’를 신장시킨다기보다, 오히려 실질적인 ‘표현의 재량’을 축소시킨다는 지적이다. 자신의 발언이 시시콜콜 미 정부에 보고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외국 외교관들은 이제 더 이상 미국 측 파트너들과 예전처럼 속내를 털어놓고 대화할 수 없게 됐다. 미국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베드랭 장관은 위키리크스식의 폭로가 국가 간에 존재하는 최소한의 신뢰를 붕괴시켰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위키리크스가 각광받는 현상은 ‘음모를 깨뜨리는 시민정신’이라는 대중적 환상에서 비롯됐다는 지적도 있다. 파리대학의 프랑수아 길라드 교수는 “무수한 TV 드라마들, 특히 ‘X파일’이나 ‘24’처럼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개인을 우상화하는 대중문화의 한 경향이 위키리크스의 역할을 더욱 과대 포장하게 하는 결과를 불러온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기밀은 폭증, 보안은 둔감?
미 정보 보안 감찰국(USISOO) 집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새로 지정한 비밀 문건은 1996년 10만5163건에서 2009년엔 75% 늘어난 18만3224건으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비밀 문건을 활용해 만들어진 문서의 수는 10배 가까이 늘어, 1996년 568만5462건에서 2009년에는 5465만1765건이 됐다. 펜타곤에서 비밀 취급 인가를 받은 사람 수만 미 회계감사국(GAO) 추산 63만명에 달한다. 국무부 등 다른 정부 부처와 관계 기관, 협력업체 등까지 더하면 300만명이 비밀 취급 인가를 갖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비밀 문건 수가 늘고 취급하는 사람이 함께 늘어나면서, 위키리크스 같은 조직이 허점을 틈타 비밀을 가로채갈 여지 역시 함께 커진 것이라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분석했다.
기밀 폭로의 기폭제는 정보통신혁명이었다. 특히 2001년 9·11테러 뒤 ‘정보 공유 부족이 9·11테러를 불러들인 미국 정부의 유일하며 최악의 실수였다’는 지적이 나오자, 갑자기 부처 간의 정보 공유가 과거엔 상상할 수 없던 규모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국무부는 ‘네트워크 집중형 외교 데이터베이스(NCD)’를 구축했다. 3급에서 1급까지 기밀 문건들이 차곡차곡 디지털화해 쌓였다. 국방부는 ‘시프르넷(SIPRNet)’으로 불리는 내부 전산망을 국무부 네트워크와 연결했다. 합참의장부터 야전 현장의 병사들까지,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기밀 정보의 바다를 헤엄쳤다.
무엇이 비밀인지를 판단하는 정부의 능력도 신뢰를 잃어갔다. 1995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대통령령 12958호를 통해 대통령을 포함해 단 20명의 정부 최고위 인사만이 1급 비밀을 지정·분류할 수 있도록 했다. 비밀이 양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동시에 1336명의 각급 관리들에게 비밀 지정에 관한 권한이 이양됐다. 비밀 지정 권한은 계속 가지를 쳐 나가, 2년 뒤에는 정부 관리 200만명과 군 협력업체 관계자 100만명이 권한을 나눠 갖게 됐다.
인터넷과 ‘올드 미디어’의 동거?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위키리크스는 디지털 급조폭발물(IED)”이라고 했다. IED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미군과 나토군 최대의 적이다. 주로 배관용 파이프나 LP가스통 속에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볼트·너트와 질소비료로 만든 화약 등을 가득 채우는 조악한 형태다. 격발 장치로는 주로 휴대전화가 사용된다. 위키리크스 역시 조악한 구성의 웹사이트에 단순한 링크 기능을 덧붙여 ‘어둠의 경로’로 입수한 정보들을 전문(全文) 공개하는 형태를 취한다. 둘다 방식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 폭발력은 지금껏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수준에 다다랐다.
‘올드 미디어와 인터넷 미디어의 어색한 동거’로 보는 분석도 있다. 위키리크스의 ‘낙점’을 받은 언론은 영국 가디언, 프랑스 르몽드, 독일 슈피겔, 스페인 엘파이스, 그리고 가디언으로부터 전문을 넘겨받은 미국 뉴욕타임스까지 총 5곳이었다. 이들 거대 언론은 위키리크스 없이는 외교 전문을 입수할 수 없었다. 위키리크스는 가공되지 않은 ‘1차 정보’를 넘겨주는 대신, 전세계에 그 내용이 보도되는 것은 물론 올드 미디어만이 갖고 있는 ‘신뢰성’이라는 무엇보다 더 큰 이득을 얻었다. 미 조지워싱턴대 마크 펠드스타인 교수는 인터넷 정치매체 폴리티코에 “조직범죄와 다국적기업처럼 탐사보도도 글로벌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샌지의 무책임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971년 펜타곤 페이퍼를 유출시킨 대니얼 엘스버그와 위키리크스의 줄리안 어샌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책임과 맞섰는가 여부’라고 했다. 하버드대 박사 출신으로 미국 최고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잘나가는 학자였던 엘스버그는 폭로 뒤 방첩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법정에 섰다. 결국 혐의는 풀렸지만, 그는 본인의 폭로가 불러올 결과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또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노력했다. 반면 어샌지는 스웨덴, 아이슬란드 등 세계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국가의 법 시스템을 교묘히 이용하며 숨어 다녔다. 떳떳하게 기존의 법 제도에 맞서기보다, ‘자신을 노리는 CIA·펜타곤의 음모’라는 마타도어 뒤에 숨어 은신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의 미국 외교 전문 폭로 내용 대한민국 서울 - “1990년대 북한에서 3차례 쿠데타 시도”(2010. 2) - 유명환 외교 “북한, 남북정상회담 논의하며 대가 요구”(2010. 1) - 유명환 외교 “해외 근무 북한 고위관리 다수, 최근 한국으로 망명”(2010. 1) - “북, 이산가족 상봉 전 평양서 좋은 식사와 비타민으로 살찌워 내보내”(2009. 8) 중국 베이징 - “북한 미사일 부품이 베이징 거쳐 이란으로 간다. 막아라”(2007. 11) - “이란, 북한으로부터 BM-25 미사일 19기 도입”(2010. 2) - “차기지도자 유력한 시진핑 국가부주석은 할리우드 전쟁영화광… 돈·술·여성에 관심 없는 사람”(2007. 3) -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이익 나눠먹는 기업 이사회 같은 조직. 각자 산업부문별로 이권 장악해”(2009. 7) - “중 최고지도부인 리창춘 정치국 상무위원, 구글 해킹 직접 지시”(2009. 12) - “북, 대만서 정밀기계, 스위스서 컴퓨터 선반, 중국서 특수강 수입해 미사일 만들어 수출. 이란, 이집트, 우간다, 예멘, 스리랑카 등이 주고객”(2009. 7) 중국 선양 - “김정일, 건강 악화돼 결정 뒤집는 일 잦고 결단력도 상당히 약해져”(2010. 1. 11) - 남한 여성사업가 “김정일은 줄담배. 건강 좋고 정신도 또렷했고 식사 내내 위스키와 칵테일 마셔” 중국 상하이 - “북한, 연안에 비밀 해저 핵시설 갖고 있으며, 중국도 알고 있다”(2008. 9) 몽골 울란바토르 - 김영일 북한 외무부상 “영원한 적은 없다”며 미국에 대화 요청 메시지 미얀마 양곤 - “미얀마 핵개발에 러시아가 ‘소프트웨어’, 북한이 ‘하드웨어’ 지원… 북한 기술자들 미얀마서 목격” 러시아 모스크바 - “경제위기로 영향력 줄어든 푸틴, 결근 잦고 외톨이”(2009. 2) 아프가니스탄 카불 - “카르자이 대통령은 편집증 환자. 권력 지키려 범죄자에 의존한다” - “카르자이 이복동생이 아프간 부패의 대명사. 최고위층이 부패에 가장 깊숙이 연루”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 “왕자가 비호하는 비밀 지하파티는 술·여자·마약 판치는 딴 세상”(2009. 11) - 알 파이살 사우디 외무장관 “아랍 연합군 만들어 레바논 헤즈볼라 칠 테니 나토가 지원해달라” 미국에 제안(2008. 5)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 “파키스탄 핵무기 통제 느슨… 테러조직에 유출 위험 높아” 예멘 사나 - “아라비아반도 알카에다, 휴대용 대공미사일 대량 보유한 듯” -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예멘서 총기·로켓 등 무기 수입” 시리아 다마스커스 - “레바논 헤즈볼라, 시리아에 주둔군 유지 의혹” 벨기에 브뤼셀 - 크리스 패튼 전 EU외교대표 “EU는 우유부단… 진정한 강대국이 될 수 없다” -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나토가 러시아를 적으로 상정하고 동유럽 방어선을 폴란드에서 발트해 3국까지 확대하는 계획 입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동부 폴켈 공군기지에 미 전술핵 20기 배치” 이탈리아 로마 - “베를루스코니 무기력, 자만, 비효율 지도자. 밤늦게까지 광란의 파티에만 집중” 스페인 마드리드 - “러시아는 푸틴 정점으로 한 ‘마피아 공화국’… 정부와 범죄조직 활동 구분 모호” - “푸틴, 옛 KGB 동료 내세워 경영하는 스위스 석유업체로 수십억달러 축재” 영국 런던 - 미 외교관들 “영국은 미·영 관계를 특수하게 여긴 나머지 편집증적 태도 보여” 냉소 멕시코 멕시코시티 - “미국, 멕시코 마약조직과 전쟁에 해병 특수부대 지원” 미국 워싱턴DC -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국방 “북한의 2차 핵실험에도 강력히 대응하지 않으면 이란은 미국을 종이호랑이로 여길 것”(2009. 6) - 미 국무부, 세계 전역에 자국 안보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기반시설과 자원 목록 작성(2009. 2) |
첫댓글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