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22. 주일설교
에베소서 5장 15~17절
전지적 주님 시점(전주시)
■ 2018년 3월 3일부터 MBC TV에서 방송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약칭하여 <전참시>라는 프로그램입니다. 혹시 보셨습니까? 많이들 아시는군요.☺ 이 프로그램의 풀 네임은 <전지적 참견 시점>입니다. 요즘 방송의 추세처럼 진행자가 여럿인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진행자의 시점에서 출연자들의 모습과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과 속마음까지도 분석하고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진행자의 시점/시각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더군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오늘 본문이 오버랩(overlap) 됐습니다. 그리고는 “아, 이 말씀이 ‘전지적 참견 시점’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본문을 통한 이 깨달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바울은 우리가 읽은 본문 앞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과 연관하여 눈에 띄는 권고가 있습니다. 5장 10절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여기서 “시험하라”는 것은 ‘잘 살피고 깊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5장 10절의 말씀은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지를 잘 살피고 깊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10절의 말씀이 17절의 말씀과 같은 의미/맥락임을 아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17절을 보실까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0절에서의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것이 17절에서는 무엇일까요? “주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자주 ‘신앙생활’을 언급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에 관련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신앙과 관련 없는 삶을 살고 싶다면, 이는 모순이고 어폐(語弊)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다면서 신앙적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 신앙은 좋지만, 신앙적 삶은 부담스럽다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것은 선호라는 선택적 취사이기에 주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태도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앙생활은 기본이고 필수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신앙생활이고, 어떻게 해야 신앙생활이 되는가를 두고 매일, 매순간 고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은 우리의 신앙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는, 주님의 뜻을 이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질문을 하나 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어렵기도 하고 막연하기도 합니다. 매번, 매순간, 매사건마다 달리 드러내시는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A에게 해당한 주님의 뜻이 B에게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주님의 뜻이냐’를 ‘어떻게 해야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까요? 가까이서 알아볼까요? 17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7절에서 제안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간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분 못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이래도 좋다고 하고, 저래도 좋다고 하는 것은 줏대 없거나 멍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분 못하는 것,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떨어지는 것 등을 두고는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어리석음은 악과 근친(近親)일 수 있습니다. 이를 15절과 1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우리는 15절과 16절에서 어리석음의 반대되는 개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입니다. 말씀은 이 지혜의 필요성을 설명하는데 16절에 있는 대로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절이 악하기 때문에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악이 만연한 시절에 악에 빠지지 않고, 악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절대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악에게 굴복하거나, 악에 빠지거나 악과 동지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은 악과 근친(近親)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분명합니다. 악과 근친인 어리석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없게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없게 합니다. 참으로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 절대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악과 근친이 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에 지혜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되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가 되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지혜 있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사실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지혜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지혜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알아내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문제는 방법인 것입니다. 어떻게 지혜 있는 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를 주목하면 방법론을 찾을 수 있습니다. 15절의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16절의 “세월을 아끼라”는 사실입니다.
1. 15절의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를 보겠습니다. 이것은 신앙인인 자신이 내 딛는 발걸음의 방향을 잘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은 방향성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첫 번째 방향성은 그리스도입니다. 내 발걸음이 그리스도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두 번째 방향성은 내 발걸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애에 공헌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이는 공공적(公共的) 책무(責務)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방향성은 내 발걸음이 하나님의 선택적 창조물로서의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이 세 방향성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에 기초한 이해입니다.
이처럼 늘 방향성이 바르게 되어 있는지, 바른 방향을 잘 가고 있는지 예민하게 주의해야 합니다.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신앙생활을 행하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2. 16절의 “세월을 아끼라”를 보겠습니다. 혹시 이것은 시간을 아끼라는 말로 들릴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기회를 얻게 되면 그 기회를 잘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 사용하라는 것은 선용(善用)의 뜻입니다. 알맞은 곳에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어진 기회를 엉뚱한 곳에 쓰곤 합니다. 더욱이 악을 창궐하게 하는 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선용하라고 주신 기회인데 악용(惡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알고 이러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모르고 악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모르고 했지만, 이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있다는 사실을 조심해야 합니다.
모르고 그랬다는 사실이 이해가 될 수는 있어도, 결과는 비참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결과를 두고 전체를 매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결과는 비참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주신 기회, 주님이 주신 시간을 선용하기 위해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 우리는 15절의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와 16절의 “세월을 아끼라”를 통해 ‘신앙의 바른 방향성’과 ‘기회의 선용’이라고 하는 주님의 뜻을 찾는데 따른 큰 이해가 생겼습니다. 이제 여기에 17절의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를 기관차로 앞세우면 방법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기관차는 무엇일까요? 어떤 경우에도 생각 없이 경솔하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관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반응하고 예리하게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양보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17절에 한정사가 보이시지요? “오직”입니다. 오직 주님의 관점과 관심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내 관점, 내 관심이 아닙니다. 누구의 관점, 누구의 관심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관점과 관심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오직 주님의 관점과 관심에만 집중하여 신앙의 바른 방향성을 매순간 놓치지 않고, 매번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는 것이 ‘거룩한 신앙생활 방법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전지적 주님 시점’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지적 주님 시점’이란, 전적으로 주님의 관점으로 세상사를 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전지적 주님 시점’이란, 전적으로 주님의 관심으로 사람들과 생명체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전지적 주님 시점’이란, 온 우주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을 이행하는 신앙생활입니다.
■ ‘코로나19’로 전세계가 불안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전시(戰時)에 준하는 비상상태로 선언할 정도로 불안과 공포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라며 이를 대비한 전세계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인할 만한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계적 재난 상황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전지적 주님 시점’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세상의 짐이 되는 일부터 하지 않아야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교회가 세상의 짐을 덜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의 짐이 되고 있습니다. 염려와 불안을 증폭시키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만 아니면...’이라는 분노를 듣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를 향한 이런 세상의 분노를 종식시키기 위한 수고를 해야 합니다. 혹시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세상과 불화하는 공동체 운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시죠? 불화는 이런 때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해놓고는 면피하기 위해 상대에게 불화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은 못나거나 못된 사람들의 상습입니다. 소위 양아치 짓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염려가 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예컨대 감염예방을 위해 실천하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우리 교회가 협조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가정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짐이 되는 일을 하지 않음과 동시에 세상의 아픔을 치료하는 일에 수고해야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정신적·영적 환자들이 늘어갈 것입니다. 벌써 곳곳에서 감염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영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일들도 늘어날 것입니다. 예배당 중심의 삶을 살던 분들이, 목사 의존성의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영적 갈증을 넘어 영적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과 불안, 그리고 혼란에 대해 도움을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서기’, ‘단독자로서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뵙기’ 등을 안내하고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 세상에서 가장 속상한 일들 중 하나가,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니 호들갑 떨지 말라고 핀잔 받을 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이렇게 핀잔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지, ‘너만 수고하고 짐을 졌느냐?’고 핀잔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코로나19’로 생기는 수많은 어려움, 즉 경제적·문화적·심리적 어려움에 호소하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웃들을 ‘전지적 주님 시점’으로 품는 비전 교인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형편을 ‘전지적 주님 시점’으로 관찰하고 대응하는 비전 교인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곧 웃음 가득한 얼굴로 뵙는 날을 고대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