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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 대망 -
(88) 우리의 예배도 역대하 29:29-36
성전문을 열고, 수리한 히스기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성전을 성결하게 하고 정돈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백성들과 함께 여호와의 전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성소를 위하여, 유다를 위하여 속죄제 제물을 드립니다. 수소 일곱 마리, 숫양 일곱 마리, 어린양 일곱 마리, 숫염소 일곱 마리가 제단에 드려지고, 그 피가 뿌려집니다. 그렇게 온 이스라엘을 위한 번제와 속죄제가 드려졌지요. 그리고 어떻게? 얘, 선지자들의 명령대로, 찬양이 시작됩니다. 다윗이 만든 악기를 들고,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시로 노래합니다. 번제가 다 드려질 때까지, 저 짐승들이 다 태워져 한 줌도 남김없이 하나님께 다 상달될 때까지 오늘 이 찬양이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그간 잃어버리고 있던 자신들의 본분, 다시말해 이스라엘의 존재가치와 목적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사야 4321입니다. 다 아시는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무엇이죠?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지금까지 어떻게 했다고요? 이어지는 본문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사43:22-23)
그랬던 이스라엘이, 오늘 히스기야와 함께 이 찬송과 예배를 회복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똑같습니다. 이쯤에서 신약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이유, 구원의 목적을 확인해볼까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이지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여 예배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시작인 출애굽의 이유와도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내보내라고 하시지요? 그간 애굽의 학대와 멸시속에 당신 백성이 너무 고생하고 힘들어서요? 그것도 이유이지만,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또한 모세가 바로에게 나아가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입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8장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26b-27, 29b)
그리고 찬송입니다. 저희가 살펴보고 계시는 에베소서 보시지요? 우리를 창세전부터 당신의 아들들이 되도록 예정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그래요. 이것이 우리의 본분, 우리의 가치요 목적입니다. 우리의 성전, 건물성전과 인생성전은 깨끗하게 치우고 정돈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구원받고 감격하여, 지으신 뜻대로 회복되어 기도소리와 찬양소리가 가득해야 합니다. 건물성전에도, 인생성전에도 더욱 기도와 찬양이 넘치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게 먼저, 나라와 성소와 온 이스라엘을 위한 공식적인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집에 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시금 백성들의 예배와 제사가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온 백성들이 나아와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고 정결케 하는 제사가 드려졌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31절, 이제 드디어 공식적으로 성전이 다시 하나님 앞에 그 기능을 시작하게 되니까, 온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시작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 증언하고 있는 히스기야와 백성들의 예배의 모습, 몇 가지로 함께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즐거움이 가득한 예배입니다. 3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과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령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그들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예배하니라”(대하29:30)
히스기야왕은 귀인들과 레위사람들에게 다윗과 아삽의 시로 찬송하게 합니다. 그때 찬송하는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이 임했던 것이지요. 이때의 즐거움을 ‘쉬므하’라는 단어인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 열광적으로 기뻐하는 상태를 뜻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찬송과 예배도 즐겁고 기쁨이 넘치는 예배이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맛본 기쁨이 세상에서 경험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이내 사라지고 소멸되고 마는 즐거움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영원한 기쁨, 빼앗길 수 없는 이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되길 원합니다. 나아가 공적인 예배의 자리만이 아니라, 파송받아 흩어진 자리, 그러나 늘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매일 우리의 삶이 이러한 예배의 기쁨이 넘치길 축복합니다. 힘든 순간 담배 한 개비 피워무는 우리 입술 말고, 괴로운 순간 술 한잔 기울여 머금는 우리 입술 말고, 힘들고 괴로운 순간 더욱 하나님을 향한 찬양 한 자락 읊조릴 수 있는 우리 입술로, 시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는 우리가 되시고, 그렇게 찬양하며 기쁨을 누리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보이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복된 종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두 번째, 자원함이 넘치는 예배입니다. 3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히스기야가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제 스스로 몸을 깨끗하게 하여 여호와께 드렸으니 마땅히 나아와 제물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전으로 가져오라 하니 회중이 제물과 감사제물을 가져오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또한 번제물도 가져오니”(대하29:31)
제물을 가져오라! 히스기야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행한 것이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이제 성전을 정화하고 재 봉헌예식이 끝났음을 알렸을 뿐이지요. 아하스의 우상숭배, 나라의 범죄함이 모두에게 기쁨이고 즐거움이 아니었던 것, 저 아하스가 추구한 악행이 모든 백성의 뜻으로 추진된 일이 아니었음도 확인됩니다. 오히려 신실한 주의 백성들이 그 오랜 기간동안 탄식하고 고통 중에 있었던 것이지요? 성전이 정화되고 속죄 제사가 드려지자, 성전과 예배를 사모하던 이들이 달려나와 하나님께 감사와 제사를 올려드리기 시작하는데, 어느 정도였다고요? 32-33절을 먼저볼까요? “회중이 가져온 번제물의 수효는 수소가 칠십 마리요 숫양이 백 마리요 어린 양이 이백 마리이니 이는 다 여호와께 번제물로 드리는 것이며 또 구별하여 드린 소가 육백 마리요 양이 삼천 마리라”(대하29:32-33) 그래서 어떤일이 벌어지지요? 34절.
“그런데 제사장이 부족하여 그 모든 번제 짐승들의 가죽을 능히 벗기지 못하는 고로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그 일을 마치기까지 돕고 다른 제사장들이 성결하게 하기까지 기다렸으니 이는 레위 사람들의 성결하게 함이 제사장들보다 성심이 있었음이라”(대하29:34)
그래요. 제사장이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보다 못한 레위인들이 짐승 가죽벗기는 일을 도와야 할 만큼 백성들의 마음이 컸고 간절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자, 여기입니다. 백성들의 헌신도 헌신인데, 오늘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지요? 제사장들보다 더 큰 사랑과 헌신으로 오늘 저 레위인들이 수고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발적인 헌신이 오늘 히스기야와 백성들의 예배를 더욱 값지게,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게 하였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예배도, 다른 사람들 눈치를 봐야해서, 체면을 차려야 해서, 우리의 성심과 열심을 줄이거나 멈추지 마시길 축복합니다. 더욱 하나님을 향한 마음,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듯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과 감격을 마음 껏 표현하고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 성결함이 준비된 예배이어야 합니다.
자신과 성전을 성결하게 하기 위한 예배에 힘써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을 만나 제사만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 늘 확인하지만, 우리의 삶을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십니다. 오늘 본문이 또 한 가지, 34절 하반절이 증언하는 바가 무엇이지요? 제사장들이 성결하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질 않아, 레위사람들이 제사장들의 일을 해야 했고, 제사장들이 성결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는 것이지요. 제물을 잡고 가죽을 벗기는 일은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었는데, 백성들이 자원하여 드리는 제물은 많고, 성결하게 준비된 제사장들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래요. 내가 성결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내 몫까지 일을 해야 합니다. 제사장들 때문에 다른 이들이 수고하여야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제사장이 성결하지 못하고 제 몫을 못해 우리 성도님들이 늘 도와야하고 기다려야하고 수고하셔야 하는 것, 하나님께서 다 세밀하게 기억하시고 갚으실 것입니다. 그래요. 제사장들은 누구보다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성전을 성결하게 하고 예배를 성결하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 했지만, 그들은 레위인들보다 소극적이었다고 기록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기론, 아직 아하스의 우상숭배에 가담하고 지지했던 이들이, 히스기야의 갑작스런 성전정화와 예배에 준비되지 못했던 것으로, 이리 저리 눈치보며 때를 놓치고 냉큼 뜻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게 저들이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며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성전은 단 15일 만에 비워지고 고쳐지고, 제사가 드려지는 일련의 일들이 이렇게나 빨리 일이 될 줄 모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바르게 섬기기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 늦춰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한 마디로 표현하면, 건물성전의 준비보다 인생성전의 준비가 늦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모두가 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지요? 제사장들이 미련하여 그릇된 일을 행하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여전히 우물쭈물하며 미련스레 눈치보고 있더라도, 오늘 본문의 레위인들처럼 하일교회 성도님들 모두는 제사장들보다도 더 큰 열심과 사랑으로 언제나 더욱 앞장서서 하나님을 향하여 서시고 제사장들보다 먼저 그리고 더욱 존귀하게 모든 순간에 쓰임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직분의 중함이 아니라 순전하고 순결한 마음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성결해야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남을 기다리게 만들고 남을 탓하고 남에게 짐을 지우는 여전히 성결하지 못한 우리로 남아있지 마시고, 나의 성결함, 내 인생성전의 준비가 건물성전의 준비보다 뒤처지지 않게, 더욱 성결하게 함에 힘을 내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더욱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늘 우리를 성찰하여 돌아보고, 악한 유혹과 욕망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진정한 감격이 있는 예배, 기쁨과 자원함이 넘치는 예배는 그래요. 바로 이 성결함에서 나옵니다. 성결하지 못하니 참여할 수 없고, 성결하질 못하니 기쁘지 않습니다. 성결하지 못하니 자원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다른 이들의 ‘쉬므하’, 바지가 벗어지는 것도 모르고 춤추는 저 즐거움에 함께 하지 못하고, 오히려 방관자가 되어 평가하고 비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을 받지 못하는 미갈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예배는 늦어지는 이 없는, 방관자 없는, 모두가 즐거움과 감격이 넘치는 예배, 하나님 앞에서 늘 자신을 바르게 가꾸는 순결한 신부들의 예배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6절 한번 더 읽겠습니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
그래요. 수십 년 하나님을 떠나 살던 남유다에 이러한 성전 예배의 회복은, 언제나 이뤄질까? 누가 이룰 수 있을까 싶었던 그 일은, 그쵸? 오늘 본문이 증언하듯,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뤄집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시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 일어나는 한 사람, 그 마음에 공명하여 함께 일어나 움직이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 일은 순식간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제사장들만 똑똑한 체 하며 상황을 판단하려다 자신들의 성결만 늦어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남들 다 일하는데 일하지 못했고, 나중에 얼굴 뜨뜻하게 레위인들이 자기를 대신해 제물 잡고 있던 자리에 ‘늦어 죄송합니다’ 하면서 들어서지 않았겠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예배는 물론 그 어떤 교회의 일에도 벌써 끝났대요? 하면서 늦게 오셔서 얼굴 뜨뜻한 분들 되지 마시고, 이 일에 버릇이 되어 늘 늦게 오는 분들도 되지 마시고, 그게 민망해서 방관자가 되고 비판하는 역할을 맡는 미갈이 되지도 마시길 축복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바야쉬켐, 쉬므하입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민감하게 또 일찍부터 부지런히 쓰임받는 종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시대 히스기야와 백성들, 우리 모두가 그렇게 갑자기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하나님의 질서와 기쁨과 즐거움을 이 땅에 선물하는 성결한 주의 종들이 다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제입니까? 언제까지입니까? 하며 우리가 울며 기도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응답도, 우리 예수님의 다시오심처럼, 오늘 히스기야의 예배와 제사처럼, 갑자기 될 것입니다. 그 날, 그 자리에 늦지 않게 오늘도 자리를 지키며 등불의 기름을 잘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는 우리, 준비된 인생성전 우리 모두이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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