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5월7일 유고슬라비아의 주재 중국 대사관에 미국 전투기 오폭 사건이 발생했다. 전 세계가 놀랐다. 중국내에서도 동요가 감지됐다. 정치투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장쩌민, 주룽지를 위시한 제3세대 지도자들이 추진한 대외개방 확대정책이 큰 타격을 받았다. 국민감정이 불타올랐다. 학생들의 항의 운동이 시작됐다. 군도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때 해결사로 등장한 인물이 당시 국가부주석이었던 후진타오(胡錦濤)였다. 그는 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를 대표해 TV카메라 앞에 앉았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미국을 비난하고 대중의 냉정한 대응을 호소했다. 그의 주도로 사건은 평화적으로 수습됐다. 황태자 후진타오는 그렇게 실권을 장악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당시 장쩌민의 자리에는 후진타오가, 후진타오의 자리에 시진핑이 있다. 후진타오는 돌발사건에 강한 정치형 지도자다. 시진핑은 준비·계획에 강한 경제형 리더다. 그는 2012년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회를 통해 중국 최고 권력을 넘겨받아 그 뒤 10년 동안 거대 중국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시진핑의 모든 것을 4회에 걸쳐 살펴본다.
◇ 고급간부이자 반당(反黨)분자 가문에서 자라다
시진핑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농촌에 하방 됐을 당시 나는 아직 젊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하방을 피할 수 없었다. 장래를 생각할 수 없었을 뿐더러, 주위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했다. 보통 하방되 내려가면 매일같이 산으로 나가 작업을 해야 했다. 나는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줬다. 수개월 후 나는 베이징으로 돌아와 다시 ‘학습반’에 들어갔다. 반년 후 석방돼 나는 농촌으로 다시 내려갈 지 여부를 고민하던 중 당시 외가 쪽의 숙부(그도 고참 간부였다)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돌아가라. 대중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는 그의 말을 따랐다.”
시진핑이 인민공사로 다시 돌아갈 때는 기분을 바꿨다. 그곳의 일반 사원들과 같이 일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대중과의 관계도 의식적으로 개선했다.
시진핑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 숙소는 점차 그 지방의 중심인 마을 센터로 변해갔다. 매일 밤이 되면 노인과 젊은이들이 차례차례 찾아왔다. 그들이 모이면 내가 그들을 위해 고금동서의 여러 문제에 대한 풀이를 해줬다. 문제가 생기면 대대의 당지부 서기도 점차 나와 상담을 시작했다. 그는 “젊은 사람이 지식도 많고, 우리들 보다 세상사를 더 잘 안다”고 말했다. 이렇게 나는 마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됐다.”
노동작업 면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눅들지 않게 됐다. 시진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보통 작업도 할 수 있었다. 100킬로그램의 소맥을 짊어지고 10킬로미터의 산길을 걸어도 지치지 않았다. 힘도 셌다. 그 마을의 젊은이들에게 지지 않았다.”
‘당원’ 자격에도 변화가 생겼다. 1972년8월 시진핑은 적극분자로 발탁돼 펑자핑(馮家坪)공사 자오자허(趙家河)대대에서 노선교육을 하는 입장이 됐다.
시진핑은 발탁될 기회를 잡자 입당신청서를 제출했다. 그 전에 시진핑은 이미 10여 차례 입당신청서를 제출했지만 부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인가 받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공사에서 입당신청서를 중공 옌촨현위원회에 제출했다. 현위서기는 ‘이 마을은 씨족간 모순이 복잡해 현지 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기 어렵다. 그가 마을 활동을 주재하는 편이 좋다’며 게다가 ‘부친의 결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아들의 입당문제를 취소할 수는 없다’고 의견을 표명했다. 현위서기가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시진핑은 1973년 입당을 인정받았다. 그 해 겨울에는 시진핑은 량자허(梁家河)대대 당지부서기로 발탁됐다.
이 입당에 대해서 시진핑은 비교적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
“그곳은 부친이 옛날에 활동한 근거지였다. 활동 당시 19살이었던 아버지는 ‘산간(陝甘)변 소비에트정부(산시성과 간쑤성에 걸쳐 중공지배하의 혁명근거지정부)주석’이었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주고 도와줬다. 또한 내 자신도 끝까지 노력했기에 입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진핑은 대대당지부서기가 된 이후 다음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
첫째, 마을에 세 개의 소형 댐을 건설했다. 게다가 대형 우물을 파 용수로를 만들었다. 수리건설로 식량증산을 실현했다.
둘째, 인민공사 사원들과 공동으로 메탄가스 발생장치를 설치해 연료문제를 해결했다. 당시 산시성정부 관련 부서는 량자허촌에서 메탄 가스 이용현장촉진회를 개최했다.
시진핑은 산시성에서 7년간 농민으로 가난하고 어렵게 노동자로서 시절을 보냈다. 그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에 따르면 시진핑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7년간 농촌에 있던 당시 돼지고기를 먹지 못했다. 한번은 생산대에서 100그램 정도의 돼지고기를 배급했다. 그 때는 요리할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생고기를 그대로 한 입에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 시운을 타고 칭화대학 입학을 허가 받다
시진핑은 ‘당시, 마을 간부를 맡고 있었지만 항상 기회만 있으면 학교에서 조금 더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선 공부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1975년 여름 중국 대학은 아직 추천 받은 노동자와 농민, 병사만 입학하던 시절이었다. 칭화대학으로부터 2명의 입학 쿼터가 옌안(延安)지구에 배분됐다. 그 중 한 명이 옌촨현에 할당됐다. 시진핑은 현 교육국 지도자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칭화대학 입학을 신청했다. 시진핑에게 시운이 찾아온 것이다.
현에서는 현교육국 지도자가 소개한 추천장을 받았고, 중앙에서는 칭화대학당위지도자 류빙(劉冰)이 시진핑의 입학결정의 판단하게 됐다. 류핑은 덩샤오핑 계열에 속하는 고참간부였다. 당시는 덩샤오핑이 복권돼 권한을 잡고 교육부문 정돈을 추진하고 있었다. 게다가 ‘문혁파’인 츠쥔(遲群, 77, 마오쩌둥의 호위부대출신으로 문혁을 추진. 칭화대학혁명위원회 주임. 문혁후기에 쎼쩡이(謝靜宜)와 함께 저우언라이·덩샤오핑을 비판. 사인방 몰락 후 체포되어 징역 18년 형 판결 받음)과 쎼쩡이(謝靜宜, 73, 문혁 초기 칭화대학혁명위원회 부주임을 문혁 후기에 베이징시혁명위원회 부주임을 역임. 사인방 몰락 후 체포돼 당적 박탈 처분을 당함)은 마침 칭화대학을 떠났기 때문에 류빙이 ‘입학시켜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
그 무렵,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은 뤄양(洛陽)의 내화자재공장의 부공장장을 맡고 있었다. 뤄양은 당시 중앙정치국위원 지덩쿠이(紀登奎, 1923~1988, 1973년8월부터 1980년2월까지 중앙정치국위원. 1971년3월부터 1978년10월까지 중국공산당 허난성 당서기 겸임)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는 시중쉰을 잘 보살펴줬고, 생활면으로 여러 배려를 해줬다.. 이 지덩쿠이의 원조를 받은 뤄양내화자재공장은 ‘시중쉰 동지의 문제는 인민내부의 모순으로 자제의 입학·취직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라는 증명서를 써주었다.
시진핑은 천리(天利)와 지리(地利), 인간관계의 운을 타고 칭화대학 화학학부에 입학 추천을 받았다. 그는 1975년 두 상자의 책보따리와 함께 베이징으로 상경했다.
지난 3월1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전인대 폐막식이 끝난 후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시진핑 국가부주석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
◇ 겅뱌오 국방부장의 비서를 거쳐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서기로
‘문혁’이 끝나자 시중쉰은 1978년2월 특별초청위원으로 제5기 정협전국위원회에 출석해 그 해 4월부터 활동을 재개했다. 덩샤오핑이 시중쉰과 이야기를 나눈 뒤 후야오방(胡耀邦)이 중앙의 결정으로 ‘시중쉰 동지는 광둥성에서 국가의 남문을 지킨다’라고 발표했다. 1979년8월 왕전(王震)과 후야오방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중공중앙은 소설 ‘류즈단’의 명예를 회복했다. ‘소위 소설 ‘류즈단’을 이용하여 반당활동을 했다는 사건은 캉성(康生)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중앙조직부의 보고를 인정했다.
1979년 여름 칭화대학을 졸업한 시진핑은 첫 직장으로 중앙군사위 판공청에 배치됐다. 당시 겅뱌오(耿"112;, 1909~2000, 개혁 개방기의 국무원 부총리, 국무위원. 또 당중앙군사위원회상무위원겸 비서장, 국방부장, 전인대 상무위원회부위원장을 역임) 국방부장 겸 중앙정치국위원의 비서를 담당했다. 지위는 높아졌고, 생활도 향상됐다.
1982년 시진핑은 스스로 기층 업무를 담당하고 싶다고 희망했다. 시진핑은 당시 상황에 대해 “자극 없는 생활이 오히려 불안했다. 나는 기층에 들어가 대중과 함께 살고 싶었다. 1982년 당중앙은 나와 웡융시(翁永西), 류위안(劉源, 류샤오치 전 국가주석의 장남)를 스스로 지원한 기층으로 배치했다”라고 회상한다.
당시, 겅뱌오는 “기층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데 야전부대로 가는 것이 좋다. 꼭 지방 농촌으로만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군입대를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진핑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허베이성 정딩현 현위부서기로 취임했다.
정딩현에서 시진핑은 크게 두 가지 성과를 거뒀다. 생산링크 청부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정딩현 개혁을 허베이성의 모범이 되도록 적극 추진했다. 또한 고전 홍루몽의 묘사를 기초로 ‘영국부(榮國府)’를 재현했다. 여기에 삼국지의 명장 조운이 허베이성 정딩현(옛 상산 진정(常山 眞定)) 출신이라는데 착안해 상산공원 등을 건설하여 현지 관광업 발전을 촉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 공원 건설로 정딩현은 매년 1000만 위안의 수입을 거뒀다고 한다.
당시 소설 작가 커윈루(柯雲路)가 시진핑의 사적을 근거로 장편소설 ‘신성(新星)’을 창작했다. 소설 ‘신성’은 후에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만들어져 시청률이 92%에 달할 정도로 큰 사회적 영향을 끼쳤다.
◇ 푸젠(福建)성에서 17년 반…성장으로 승진해 경제성장을 촉진
1985년6월 시진핑은 푸젠성 샤먼(厦門)시 부시장으로 전임된다. 시진핑은 그 후 1985년부터 2002년까지 17년6개월을 샤먼시 부시장에서부터 링더(寧德)지구위서기, 푸저우(福州)시위서기, 푸젠성장 직무를 역임했다.
시진핑이 푸젠성에서 거둔 커다란 정치적 성과는 다음과 같다.
1. 1988년 당시 천광이(陳光毅, 86, 푸젠성위서기, 전인대화교위원회주임 등 역임) 성위서기, 왕자오궈(王兆國) 성장, 자칭린(賈慶林) 성위부서기 겸 성조직부장이 검토한 결과 시진핑을 샤먼시 부시장에서 푸젠성에서 가장 발전이 지체된 지역인 링더(寧德)지구위 서기로 임명할 것을 결정했다. 시진핑이 링더에 취임 하자마자 가장 먼저 손 댄 것은 간부들이 개인주택을 위법으로 건설한 현황을 조사한 것이다. 조사 후에는 적절한 처분이 취해졌다. 주택·자재·자금의 반환처분·행정처분을 받은 간부 가운데 부현장급 간부이상이 242명, 과장급이상 간부가 1399명에 달했다. 그리고 나서 그 지역에서는 오직(汚職)과 불법 개인주택건설 같은 관리들의 부정한 풍조가 사라졌다. 이를 공산당 중앙기관지 ‘인민일보’가 “한 가지로 만인의 마음을 얻다”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2. 1990년5월 시진핑은 푸저우시위서기로 승진했다. 푸저우시는 여덟 현을 관할하는 중국의 14개 대외개방항만의 하나였다. 시진핑은 취임하자마자 첫 번째로 물가 안정과 농산물시장 건설, 구도시의 개조, 2만호 주택에 가스 공급 등 열 건의 현실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두 번째 공약은 5개년, 10개년 발전계획 제정이다. 그 가운데 푸저우 공항과 푸저우역 확장, 푸저우~푸칭(福淸)고속도로 건설, 마웨이(馬尾) 신항만구 개발 확대, 민장(閩江)신교 가설, 500만 평방미터 주택건설 등이 포함됐다. 그리고 시진핑은 10년간 푸저우시위서기 임기 안에 열 가지 항목의 공약과 발전계획 프로젝트를 기본적으로 완성했다.
3. 1995년 시진핑은 푸젠성위부서기로 승진했다. 2000년에는 푸젠성장에 취임했다. 한 성의 행정장관으로 시진핑은 취임하자마자 ‘경제구조를 조정하여 종합경제력을 높이겠다’라는 발전방침을 확정했다. 2001년 초에는 ‘구조조정을 추진하여 경제 발전을 촉진하겠다’라는 제목의 논문을 ‘구시(求是, 중공중앙기관지)’에 발표했다.
관련자료를 종합해 보면 당시 시진핑의 시정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1. 전자정보·기계전기·석유화공 등 푸젠성이 우위를 지니고 있는 수출산업의 발전을 촉진하여 2005년까지 전성 GDP에서 점하는 비중을 4.24%에서 6.5%까지 높인다.
2. 방직패션·식품·건재·전력산업을 개조하여 이 산업이 전성 GDP에서 점하는 비중을 15.8%에서 18.5% 전후로 높인다.
3. 바이오프로젝트기술·환경보호신기술·해양기술·신소재 등 하이테크산업을 육성·지원하여 2005년까지 하이테크산업의 비중을 4%에서 7%까지 끌어 올린다.
또한 이상 구조조정을 실현하기 위해 구조조정과 동시에 몇몇 핵심 기업을 육성하기로 결정했다. 제1차 산업과 제3차 산업에서 각각 연 매출 10억 위안 이상인 대규모기업 두 세 개 회사를 육성하고, 제2차 산업에서 전자 등 산업에서 연 생산액 100억 위안 이상 대규모 기업을 두 세 개 회사를 육성한다. 동시에 30여 개의 이름이 알려진 브랜드 제품의 전국시장진출을 지원하기로 했다.
시진핑은 5년간 구조 조정을 거쳐 푸젠성의 GDP를 전국 10위 이내로 향상 시켰다. 경제성장속도를 전국 평균 이상으로 올렸다. 1인당 GDP는 8위 2375달러, 수출액은 전년 대비 21% 증가했다. 네 개 지표가운데 세 개 지표를 완성했고 한 가지 지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성과를 보면 시정 계획이 처음부터 실무적으로 착실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시진핑은 푸젠성장 포스트에 2년 여 있은 후, 2002년 10월에 경제대성인 저장(浙江)성으로 전임하여 성장대리를 맡게 된다.
◇ ‘영광의 낙선’과 ‘특수한 당선’
1985년 정딩현위서기로 3년간 단련을 거친 시진핑은 푸젠성 샤먼시위상무위원에 발탁되어 시 상무부시장에 임명됐다.
샤먼시는 진먼다오(金門島)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저명한 화교의 고장으로 대만인의 고향임과 동시에 중국 4대 경제특구의 하나다. 또 푸젠 남부 델타지역의 중심이기도 하다. 80년대 중국에서 샤먼시가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중요했다. 시진핑은 작은 현 서기에서 출발해 경제특구의 상무부시장으로 발탁됐다. 그 책임 역시 수 배 증가했다. 그러나 그는 3년간의 상무부시장 당시 상당한 업무 성과를 거뒀다.
그가 중심이 되어 제정한 ‘샤먼경제 2000년 사회발전전략’과 샤먼경제체제개혁방안 및 계획단열시(計劃單列市, 성 수준의 일급행정구 관할에 속하지만 성레벨과 같은 경제관리 권한을 부여 받은 도시) 방안 등은 샤먼시가 계획단열시로 지정되는데 크게 공헌했다.
1988년 말 샤먼시에서 시장선거가 이뤄졌다. 후보자는 취얼쥔(鄒爾均)과 시진핑 2인이었다. 상부에서는 취얼쥔을 미리 시장으로 점지했다. 시진핑은 단순히 ‘부속품’이었지만 대표들의 의향은 시진핑 선출로 기울었다. 하지만 상급지도자의 강한 암시와 설득으로 대표들은 최종적으로 취얼쥔을 선출했다. 이 사건은 샤먼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샤먼시 시민들은 시진핑의 낙선에 불만을 표명했다. 이는 시진핑의 정치경력 가운데 ‘빛나는 낙선’이라고 일컬어진다.
1992년 중국공산당 푸젠성위는 제14회 당대회 참가 대표를 선출한다. 그 선거에서 시진핑은 득표순위 3위의 고득표를 얻어 제14회 당대회 대표로 선출됐다. 하지만 1988년 말 샤먼시 시장선거에서 적수였던 취얼쥔은 샤먼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해 낙선했다.
그 후 1995년 42살이었던 시진핑이 중공푸젠성위부서기로 임명된 그 해는 제15회 당대회개최 2년 전이었다. 당시 중공정책 결정그룹은 장래 중국 공산당 후계자 2명 내지 3명을 특별히 선발할 것을 결정했다. 그 조건으로 다음 네 가지 점을 들었다.
1. 정치적 소질이 우수하고 당성이 강고하며 스스로 당 중앙의 방침과 고도의 일치를 갖출 수 있으며 대국적 관념을 보유하고 있을 것.
2. 고도의 실무능력을 갖고, 사상은 활발하고, 시야가 넓으며, 지식은 전면적일 것.
3. 스스로 규율하고, 청렴하며, 작풍이 솔직하고, 좋은 명성을 갖고 있을 것.
4. 제16차 당대회 개최 시점에서 나이가 50세 이하일 것.
이 요건에 기반하여 중앙조직부는 3명의 후보를 찾아냈다. 중앙정치국은 토의 결과 최종적으로 리커창(李克强)과 시진핑 두 사람을 선택했다.
제15회 당대회에서 리커창은 공청단 제1서기로, 공산당 자격으로는 중앙위원에 순조롭게 선출됐다. 하지만 시진핑은 푸젠성위부서기로 공산당 자격으로는 중앙후보위원 후보가 됐다. 득표순위는 151위로 낙선의 쓴 맛을 봐야했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대회주석단비서처가 협의한 결과 이는 시진핑의 과실이 아니라 시진핑을 장래 지도자후보로 선출하려는 중앙의 의도를 대표들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않아 발생한 ‘사고’였다. 그래서 ‘낙선’ 결과를 은폐하기 위해 원래 150명으로 결정했던 중앙후보위원 범위를 특별히 한 명 더 증원했다. 그 결과 시진핑은 우여곡절 끝에 15기 중앙후보위원에 최하득표로 포함됐다.
▶ 중국을 방문한 휴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는 시진핑 국가부주석
◇ 군대의 여가수와 만남에서 결혼까지
마침 당시에 그에게 적극적으로 결혼을 권한 사람이 있었다. 시진핑에게 당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군대의 여가수 펑리위안(彭麗媛)을 소개해줬다.
펑리위안은 시진핑보다 9살 어리다. 산둥(山東)성 시골의 보통 농가의 딸이었다. 하지만 천부의 목소리를 타고나 15살에 산둥예술학원 중등전문부에 선발돼 성악을 배웠다. 1980년 열여덟 살에 산둥TV 방송국에 추천 받아 베이징서 개최된 전국가요콩쿠르에 참가해 보기 좋게 입선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문공단(文工團, 중국에서 공산당 지도방침을 기초로 가요·무용·연극 등의 문예활동을 통해 선전활동에 종사하는 종합적 문예단체)에 띄어 같은 해 군에 입대해 군부대 여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펑리위안은 총명했다. 보다 높은 학력을 희망했다. 그 후 그녀는 중국음악학원 성악부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저명한 성악교사인 진톄린(金鐵霖)의 가르침을 받으며 대학본과와 대학원서 공부했다. 민족성악석사학위도 받았다.
진톄린은 가수양성의 명수로 알려져있다. 일찌기 ‘민족가수’로 중국대륙을 풍미한 저명한 여가수 리꾸이(李谷一)의 최초의 교사이자 첫 남편이었다. 리꾸이는 명성을 얻은 후 진톄린과 헤어져 전 해군사령원 샤오진광(蕭勁光)의 아들 샤오쭤넝(蕭卓能)과 재혼했다.
진톄린은 펑리위안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녀의 선천적인 목소리를 미성창법으로 연마시켰다. 노래 소리를 한층 더 달콤하게 지도했다. 펑리위안은 ‘희망의 전야에서(在希望的田野上)’란 노래 한 곡으로 중국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게 됐다.
친구가 시진핑에게 펑리위안을 소개할 즈음 펑리위안은 아직 한창 청춘이었다. 게다가 군부에서 가수로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할 때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시진핑이 샤먼에서 근무한다는 말을 듣고 ‘떨어져 사는 것은 안된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본래 만남 자체도 그만두려 했지만 친구가 시진핑이 ‘빼어나게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해 일단 얼굴이라도 보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당일 펑리위안은 친구 집에 일부로 따뜻한 군용 바지를 입고 갔다. 그녀는 시진핑이 겉모습을 중시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려 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 펑리위안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시진핑이 언뜻 보기에 시골 사람같이 보였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꽤 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한마디에 그녀는 생각을 바꿨다.
시진핑은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 뭐죠?”라던가 “출연료는 얼마죠?”라는 것들을 묻지 않고, 처음부터 “성악에는 노래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나요?”라고 물었다.
펑리위안이 대답하자, 다시 “미안한데 내가 TV를 안 봐서 모르는데 당신은 요즘 어떤 노래를 부르나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희망의 전야에서’를 불러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시진핑은 “네! 그 노래는 들어본 적이 있어요. 아주 좋아요”라고 맞장구 쳤다.
그렇게 첫 만남부터 마음이 통한 것이다. 여자 친구가 계단아래서 펑리위안을 불러도 그녀는 아래로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을 뿐만 아니라 다음에 다시 만날 약속까지 주고받았다. 펑리위안은 다음과 같이 당시를 술회한다.
“그 때 나는 흔들렸어요. ‘이 사람이 내가 기다리던 사람일까? 순수하고 생각도 깊은데’ 후에 그가 나에게 ‘만난 지 40분도 안돼 나는 당신이 내 아내가 될 사람으로 결정했다’고 말했어요”
두 번째 만남에서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둘의 마음은 한층 더 서로에게 빠져들어갔다. 그는 펑리위안의 구애와, 순박하고 선량함에 마음을 뺏겼고, 그녀는 시진핑의 깊은 마음씨와 성실함, 인내심, 특히 그의 업무에 대한 열정에 호감을 갖게 됐다.
시진핑은 그녀에게 “나는 행정을 담당하고 있어, 하루에 10시간 이상 집안 일을 챙길 수 없을 지 모른다”라고 정직하게 말했다. 펑리위안은 “공무를 잘 해내지 못하면 집안 일도 할 수 없다. 양쪽 모두 소중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둘은 역사, 현재, 중국, 해외, 추구하는 것 등 여러 가지 공통의 관심사를 이야기했다. 헤어질 무렵 그는 “우리는 똑같이 애쓰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천성이 순진하고 선량하다. 또 만나고 싶은데…”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마음은 곧 하나가 됐다. 서로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펑리위안의 부모는 딸의 상대가 고급간부의 아들, 게다가 시중쉰의 아들이란 것을 알고는 만남을 동의하지 않았다.
시중쉰 부부는 슬하에 다섯 아이가 있었다. 그 중 아들은 시진핑과 시위안핑(習遠平)이다. 시위안핑은 당시 동생으로 어렸기 때문에 당시 광둥성 제1서기에 취임한 양친과 함께 광저우에 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용생구자(龍生九子, ‘龍生九子 各有所好’라는 성어로, ‘용이 아홉 아이를 나았지만 모두 각각이다’라는 의미로 부모가 같더라도 아이들은 모두 다르다는 뜻)’라는 말이 있다. 시위안핑은 주위에서 ‘도련님’ 대접을 받았고 특히 여성문제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펑리위안 부모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펑리위안은 후에 “부모님들은 딸이 고급간부의 아들과 결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양친은 고급간부의 아들 가운데 ‘도련님’이 많고, 게다가 허황된 꿈을 꾸고 싶지 않아 하셨다. 게다가 딸에게 힘든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진핑은 그녀에게 “내 아버지는 농민의 자식이든 아니든 누구던지 상관없어 하신다. 우리 집 형제들은 모두 평민의 자식들과 결혼했다. 게다가 내 가족들이 우리와 평생 같이 사는 것도 아니다. 내가 당신의 부모님들께 확실히 설명하면 꼭 허락하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가수 펑리위안과의 만남서 저장성 당서기까지
<사진: 시진핑과 펑리위안>
◇ 부인은 노래로 군 소장에, 남편은 중국 정계의 샛별로
시진핑은 결혼이란 암초를 만나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1987년9월1일 서둘러 식을 올렸다. 결혼 사진 촬영도, 결혼 등기증 제출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당시 시장에게 결혼보고로 ‘밤 7시 집합, 식사’라는 초대장을 보냈고, 결혼 수속을 단 하루 만에 모두 끝냈다.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함께 지내기 보다 헤어져 지낸 시간이 더 길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매우 돈독했다. 이는 당나라 시인 진관(秦觀)의 시 작교선(鵲橋仙)에 나오는 “두 사람의 정이 영원하기만 하다면, 어찌 아침 저녁으로 만나길 더 구하랴(兩情若在長久時, 又豈在朝朝暮暮)”라는 구절과 일맥 상통했다.
펑리위안이 어느 날 홍콩에서 열린 해방군 예술단 공연 ‘향강명월(香江明月)의 밤-중추절 종합 연예의 밤’에 참가했다. 펑리위안은 홍콩에서 브랜드 옷가지와 화장품을 사는 대신 지방에서 일하는 시진핑을 위해 당시 홍콩에서 평판이 좋던 컵라면 한 상자를 사 보냈다.(이는 이유가 있다. 펑리위안이 시진핑 숙소를 방문했을 때 보좌관은 시진핑이 컵라면을 너무 먹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당시 일을 마치고 늦게 돌아오는 일이 잦았는데 이미 닫힌 식당을 열게 하기가 껄끄러워 스스로 사두었던 중국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자주 있었다. 당시 컵라면은 맛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 놓은 지 오래돼 곰팡이가 생긴 경우도 많았다. 건강에 안 좋은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래서 펑리위안은 홍콩에 간 기회를 이용해 평판이 좋은 상표의 컵라면을 사 보낸 것이다)
두 사람 사이는 긴밀했지만 시진핑은 스스로를 엄격히 규율했다. 펑리위안을 만나러 갈 때에도 외부에 전혀 표시내지 않았다. 부인 동반이 가능한 장소에도 ‘하루 종일 아내를 따르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듣겠는가. 나쁜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동반하지 않았다. 시진핑은 게다가 펑리위안에게도 엄격함을 요구했다. “나는 당원간부이기 때문에 당신은 결코 조직에서 주최하는 것 이외의 공연에 절대 참가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펑리위안도 이를 엄수하겠다고 말했다.
필자는 이와 관련해 잘 아는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시진핑이 저장성 당서기를 맡고 있을 때, 펑리위안이 군부대 선전활동의 일환인 어떤 공연에 참가하고 있었다. 폐막 후에 주최측에서 기념촬영을 하지 않겠다고 조건으로 펑리위안을 위로연에 초대했다. 펑리위안은 참가하려다가 먼저 시진핑에게 이야기를 했다. 시진핑은 보좌관에게 내빈들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 내빈 가운데 여러 명의 저장성 출신 상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진핑은 이용당했다는 풍문이 돌 것을 염려해 펑리위안에게 참석하지 말도록 했다.”
이렇듯 시진핑의 마음 씀씀이는 깊고, 장래를 위해 명예를 소중히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펑리위안은 소장으로 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부인은 노래로 소장 계급장을 달았고, 남편은 중국공산당 정계에서 가장 빛나는 샛별이 됐다. 중국의 장래를 담당할 ‘왕’으로 빛나고 있다고 말하기에 손색이 없다. 시진핑과 펑리위안은 슬하에 딸이 한 명 있다. 이름은 시밍쩌(習明澤)로 어릴적 이름은 무쯔(木子)였다. 현재 항저우 외국어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 ‘평안저장(平安浙江)’, ‘법치저장(法治浙江)’, ‘녹색저장(綠色浙江)’의 실적을 쌓다
2002년10월 제16회 당대회가 소집됐다. 당시 한 중앙정치국상무위원이 10년 전 후진타오와 같이 아직 쉰 살이 안된 리커창과 시진핑 중 한 명을 16기 중앙정치국상무위원에 발탁해 중점적으로 테스트하자고 주장했다. 제5세대 지도자를 새롭게 중앙정치국상무위원에 발탁하느냐 마냐의 문제가 토의 안건에 오른 것이다. 정치국상무위원 다수는 제14차 당대회의 선례를 따라 50세 이하의 동지 한 명을 상무위원 그룹에 넣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장쩌민이 이 의견에 반대했다. “현재 50세 이하의 동지는 아직 연공을 많이 쌓지 않았다. 장래에 보다 큰 정치적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그들이 여러 곳에서 활동시켜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했다. 그들을 정치국이나 서기처 혹은 국무원, 그리고 주요 성시에서 적당한 직무를 맡기자고 제안한 것이다.
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는 장쩌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16차 당대회가 끝나자 시진핑을 저장성 당서기로 임명했다. 2004년 원자바오의 제안을 받아 리커창은 랴오닝성 당서기에 임명해 동북진흥이란 중책을 담당케 했다. 확실히 중남해 최고층의 의지를 받들어 2002년10월에 시진핑은 저장성 성장에 임명됐다. 한 달 후에 그는 저장성 당서기에 선출됐다.
저장성은 경제대성으로 GDP 전국 4위로 광둥, 산둥, 장쑤성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시진핑의 앞 길은 보다 넓은 탄탄대로로 접어들었다.
시진핑은 저장성에 전임된 후 9개월 동안 전성의 90개 현·시 중에서 69개 현·시를 시찰했다. 저장성 경제의 급속한 발전을 주도하는 민영경제의 호조에 발맞춰, 민영경제가 저장성 경제의 엔진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저장성이 한층 더 발전하기 위해서 ‘저장성은 적극적으로 외자를 도입하고, 각 산업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저장성 기업가들의 국제시장 진출을 외국 상인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어 저장성을 장강델타에 연결시켜 상하이·장쑤성과 장강델타 경제 일체화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성공하면 ‘상하이·장쑤·저장 세 성의 자원공유가 촉진되어 호리호혜의 공동 발전이 가능해 져 세계적인 도시 벨트 건설을 촉진할 수 있다”고 구상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저장성 100명 이상의 시·지구 위원회 서기들과 지방 청장과 국장들을 인솔해 상하이와 장쑤성을 시찰해 그곳의 경험을 배우고 협력사항에 대해 협의했다. 또한 시진핑은 후진타오가 제기한 조화사회와 과학적 발전관 사상에 기반해 ‘평안저장’, ‘법치저장’, ‘녹색저장’이라는 통치이념을 주장했다.
이후 저장성은 연평균 14%정도의 성장을 계속했다. 시진핑은 큰 개혁과 특필할만한 정치적 성과는 없지만 시세를 타고 정치를 움직이는 적극적인 실무가로서 지도자의 풍격을 엿보였다.
시진핑은 저장성에서 업무를 하는 동안, 투서와 불만제기를 중시했다. 그 중에서 주목할 점은 ‘광이고지(廣而告之, 널리 전한다는 의미 광고는 이 말의 약칭)’ 즉 널리 전하는 것을 강조했다. 지도자가 시찰에 나설 때 신문과 텔레비전 등 미디어를 통해 투서와 불만 수리 부서에 예고해 대중들의 불만 제기를 미리 예약 받았다.
물론 그의 업적이 칭찬 일변도는 아니었다. 예를 들면 2003년 홍콩 ‘태양보’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게재했다.
‘베이징 사스 사건’ 당시 후진타오 원자바오 정권은 멍쉐넝(孟學農)을 해임하고 왕치산(王岐山)을 베이징 시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번 미윈등회(密雲燈會, 2004년2월 베이징시 미윈현에서 발생한 정월대보름 등회에서 대중이 몰려 37명이 압사한 사건)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누가 책임을 졌는가? 저장성의 화재(2004년4월 발생해 40여명의 사상자를 낸 저장성 대화재)는 누구의 책임인가? 시진핑 저장성 당서기에게 책임은 없나? 뤼쭈산(呂祖善) 저장성장은 책임이 없나? 현재까지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린성 훙후(洪虎) 성장은 지린성의 사고에 관해 “나는 성장으로 안전한 생산공작의 제일 책임자로 활동 실패에 대해 중요한 지도책임을 져야 한다. 일반 인민들과 죽고 다친 대중들에 대한 깊은 반성과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된다”는 발언을 공개한 바 있다…….”
그는 과연 천하를 손에 넣을 것인가
▶지난 2008년 3월 전인대 기간에 신임 국가부주석에 취임한 시진핑이 국가부주석 자리에서 물러나는 쩡칭훙과 포옹하고 있다.
◇ 천량위(陳良宇) 오직사건으로 동요하는 상하이로 발령받다
2006년 8월 제17차 당대회를 앞두고 후진타오는 원자바오, 쩡칭훙(曾慶紅), 우관정(吳官正)과 함께 ‘상하이 그룹’의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당서기를 비판하고, 사회보험기금 부정 대출 혐의로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그를 입건 수사했다.
상하이의 정치·경제 및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후진타오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중앙은 상하이 후임 지도자 인사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우선은 상하이시장 한정(韓正)을 시위 서기 대행으로 겸임시켰다.
한정이 당서기 대리를 담당하는 사이 공산당 수뇌부의 각 정치 파벌은 자신의 이익을 대표할 인물을 ‘동방의 진주’로 불리는 상하이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암투를 펼쳤다. 공산당 최고지도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뒤 시진핑을 상하이 당서기에 임명했다.
최종 낙점에 앞서 류옌둥(劉延東), 리위안차오(李源朝), 보시라이(薄熙來), 리커창(李克强), 시진핑 등의 이름이 상하이시 당서기 후보로 거론됐다. 2006년9월30일 보시라이 부인 꾸카이라이(谷開來)가 움직였다. 해외 한 블로그 사이트가 “상하이시위서기로 보시라이가 적임이다”라며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흘렸다. “보시라이는 상하이의 축소판인 다롄(大連)시를 다스린 경험이 있으며, 국제적으로 상하이 대(大)정부라 할 수 있는 상무부장을 역임했다. 상하이시위서기로 최적의 경력을 갖고 있다”, “류옌둥은 상하이 경제에 적응할 수 없으며, 시진핑도 큰 기백이 부족하다. 리위안차오는 상하이에 어울리는 화려함이 부족하고, 리커창도 틀에 박힌 관료기질 때문에 상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진핑이 지목된 것일까?
첫째, 시진핑은 ‘태자당’이지만 ‘태자당’의 ‘도련님’스러운 화려함이 없다. 파벌 색채도 엹다. 따라서각 파벌이 그를 받아들이기도 쉬웠다.
둘째, 천량위 사건을 주도한 후진타오와 쩡칭훙은 모두 중앙집권통치의 유지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대에 시장 경제가 발전하고 중앙권력의 일부를 하부로 이행함에 따라 지방의 제후 세력이 확대됐다. 그 가운데 베이징의 천시둥(陳希東)이 장쩌민에 도전했고, 이어 천량위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에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 따라서 공청단 출신 후진타오와 ‘태자당’ 출신 쩡칭훙 두 사람의 이익과 시각이 공산당에 의한 통치와 중앙의 권위를 우선한다는 점에서 일치한 것이다.
천성이 바른 시진핑이 상하이시위서기에 임명된 것은 시진핑의 중앙에 대한 복종과 이상의 역사적 추세를 옹호하려는 그의 자세를 후진타오와 쩡칭훙이 신뢰했음을 보여준다.
2007년3월24일 오후, 허궈창(賀國强) 전중앙조직부장이 상하이 당·정 간부들에게 시진핑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정치적으로 강고하고, 사상과 정책 수준이 높으며, 당무와 경제활동을 숙지하고, 거시 정책의 결정 능력도 강하다. 지도경험이 풍부하고 조직 지도와 통솔 능력이 우수하다”라고.
◇ ‘천량위 일파 비판’, ‘충성을 선서하면 임관’하는 조치를 취함
시진핑은 2007년3월23일 상하이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그 때부터 2007년10월27일까지 도합 7개월 4일 동안 상하이에서 근무했다. 시진핑이 상하이에서 수행한 업적은 시진핑 자신의 말, 즉 그의 이임연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중점적으로 다음 네 가지 면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 첫째, 중국공산당 제9회 상하이시 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지도그룹을 선출했다. 목표를 명확히 하고 힘을 응집해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둘째, 경제·사회가 보다 뛰어나고, 보다 빠르게 발전하게끔 온 힘을 다했다. 셋째, 민생문제 해결을 특히 중시했다. 넷째, 당 건설을 착실하게 강화했다. 그밖에 장애인올림픽 개최와 여자월드컵 축구에도 힘을 쏟았다”
이 가운데 중점은 바로 첫째 항목에 있었다. 즉, 지도 그룹을 선출함으로 목표를 명확히 하고 힘을 응집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주지하는 대로 천량위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상하이 사회보험기금의 위법 조작과 수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상하이 그룹’이라는 이익집단을 손 본 것이다. 당시 후진타오·원자바오 지도체제와 거시경제조정정책에 대해 상하이 그룹이 반항했다. 그 가운데 천량위가 선봉에 황쥐(黃菊)가 부대장에 장쩌민이 막후 대장으로 존재했다. 천량위를 타도한 것은 ‘상하이 그룹’ 전체 이익집단에 관련이 있다. 이 ‘돈으로 안되는 것이 없는’ 시대에 만약 천량위를 돌파구로 해 관련된 인사들을 더듬어 가면, 아마 다 체포할 수 없을 정도의 오직범(汚職犯)이 나왔겠지만 그로 인해 중국 정국도 대동란에 빠질 것이다. 이는 후진타오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으며 또 바란 바도 아니었다. 후진타오, 원자바오, 쩡칭훙은 감히 중앙과 대결하려는 소두목 천량위만을 겨냥했고, 대국적으로 ‘조화사회’라는 새로운 질서를 재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시진핑은 후진타오를 우두머리로 하는 중앙 수뇌부의 의도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다. 중국 공산당 상하이시위의 지도그룹을 재선할 때 이미 정치적 생명이 끝난 천량위 패거리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태도를 바꾸면 ‘관직을 수여’하고, ‘관직을 유지’해 주는 ‘두루뭉실하게 수습하는(和稀泥)’ 책략을 취했다. 불안해하는 상하이 고위 간부들을 안심시킨 것이다.
2007년5월23일 중공상하이시 제9회대표대회가 개최됐다. 시위서기에 임명된 시진핑이 회의를 주재했다. 5월28일 대회에서 새롭게 상하이시위원회를 선출했다. 이전 위원회 정원은 56명 뿐이었지만, 새로운 위원회 정원은 83인으로 늘었다. 게다가 주의 깊은 상하이 시민이라면 새로운 상하이 시위원회 멤버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상하이시 관할의 많은 구·현 당과 정부의 1인자들이 상하이시위원회위원에 선출되지 않았던 것에 반해, 이번에는 상하이시 관할의 19개 구 ·현의 최고위직 2명이 동시에 위원에 선출된 것이다.
이같이 ‘천량위만 비판하고, 나머지는 비호’, ‘충성을 맹세하면 임관’한다는 시진핑의 정책에 대해 시류에 민감하고 정치 풍향을 잘 파악하는 상하이 관료들은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임명을 받았고, 상층부에 순순히 복종했다.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이익집단이 구성된 당일, 시진핑은 안팎의 언론에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우리는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유지하며, 중앙의 권위를 자각적으로 지키며, 중앙의 정책이 상하이에서 순조롭게 시행될 수 있도록 확실히 보장한다.”
시진핑은 상하이에서의 7개월 4일 동안 매우 주의 깊고 신중했다. 공적인 장소에서는 말을 삼갔다. 중앙문서를 전달할 때에는 문서를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낭독했다. 발언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에는 관료적인 말로 일관했다. 그의 언행에는 풍채가 없고 특징도 없고 강직함도 없었지만 지나침도 없었다.
중국에는 최근 ‘관료 기본 소양(官場基本功)’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민요가 유행하고 있다. “처리 할 것은 안정이 우선이며, 정리하는 것은 기량이 있어야 하고, 일이 없는 것은 곧 재능이 있는 것이며, 타협할 것은 조화롭게 처리 한다”는 내용이다. 시진핑의 ‘관료 기본 소양’은 확실히 우수하다. 푸젠성 링더현에서 거뒀던 부정퇴치 업적은 단지 과거의 일로 잊혀졌다.
상하이시 간부들은 안심했다. 상하이 간부들의 실무능력은 중국 최고 수준이다. 경제발전의 촉진, 민생 촉진, 장애인 올림픽 개최, 여자 축구월드컵 등은 문제도 아니었다.
시진핑이 상하이에서 보여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어하고’, ‘무위의 정치’라는 집정방침에 후진타오가 만족했음은 분명하다. 2007년10월1일 즉 제17차 당대회가 개최되기 전날 후진타오는 특별히 상하이를 직접 시찰했다. 시진핑과 한정 등의 안내를 받아 상하이시를 시찰하고 참관했다. 그는 두 사람의 활동 보고를 듣고 평가했다. 동시에 후진타오는 단독으로 시진핑을 만났다.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를 중국공산당 제5세대 지도자로 임명하겠다는 중앙의 결정을 전했다.
◇‘황제는 돌고 도는 것 내년은 내 차례?’
제17차 당대회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은 중국공산당 5세대의 후계자가 됐다. 중공중앙정치국상무위원으로 승진했다. 두 사람의 서열은 5위와 6위다. 시진핑은 순위에서 리커창보다 한 단계 위다.
현재 시진핑의 새로운 직무는 중공중앙정치국상무위원, 중공중앙서기처서기, 중공중앙당교교장, 중공중앙 홍콩·마카오 공작소소조장, 국가부주석이다. 이는 후진타오가 총서기를 인계 받을 때의 직무와 기본적으로 같다. 따라서 시진핑이 제18차 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제5세대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중국은 포스트 덩샤오핑 시대부터 이미 포스트 권위시대로 들어섰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과 같은 권위자가 후계자를 지정하는 것과 같이 쉬운 방식의 후계자 계승은 이미 역사적 과거사가 됐다.
장쩌민은 자신의 의중에 있는 사람을 후계자로 지정하지 못했다. 천량위의 앞길을 지켜주지도 못했다. 후진타오는 천량위를 무너뜨릴 수는 있었지만, 리커창을 후계자로 지정할 정도의 성망을 갖추게 도와주지 못했다.
중국공산당 5세대 새로운 지도자 자리는 결국 누가 차지할까? 현시점은 아직 경합하는 시기다. 최종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천하를 다스리는 자리는 지모만으로 얻을 수 없다. 안정과 신중함으로 큰 그릇은 될 수 있을지라도, 공적을 갖추지 못한 채 단순한 무위의 다스림 만으로는 천하를 얻을 수 없다.
포스트 권위시대는 범용의 시대다. ‘황제는 돌고 도는 것, 내년은 내 차례?’의 시대이기도 하다. 시진핑이 현재 후계자 레이스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해도 승리의 날까지 지금같이 계속 달릴 수 있을까? 아니 중간에 도태할 것인가? 세월과 지혜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