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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 큰스님의 마지막 법연불자(法緣佛子)
보적 김지수(寶積 金池洙)|전남대 법학과 교수
2.
글을 쓰려고 작정한 오늘 아침엔 빛고을에도 한 바탕 새하얀 눈꽃송이들이 흰 연꽃마냥 춤추듯이 하염없이 흩날렸다. 엊그제 서울 중부지방에 눈이 내렸다더니, 이곳 남녘에도 함박눈이 나부꼈다. 한낮에도 잠시 이어졌다. 도대체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청화 큰스님한테는 벌써 여러 차례 친견하여 자상하신 법음을 듣고 공식 법회는 스무 번 가량 참석했다. 인연이 자못 지중하여, 『인광대사가언록(印光大師嘉言錄)』의 한글 번역판 권두 법문도 권청해 실었다. 그런데 광덕 큰스님은 사실 딱 한번밖에 친견할 인연이 없었고, 법담도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서 육신을 친견한 직접 인연담은 거의 쓸 게 없다. 허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법신으로 친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접의 불법 인연은 역시 지중하기 짝이 없다. 나한테 그걸 좀 써서 알리라고 일깨우심이 분명하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광덕 큰스님과 법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인광대사가언록』을 한글로 번역해 「불광」지에 연재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봄․가을에 걸쳐 두 번이나 서울대 교수 공채에 응모했다가(지금 생각하니 학문적 실력과 지혜가 뒤떨어져서가 아니라 인격과 복덕이 부족한 탓에) 밀려난 뒤, 나는 더 이상 어떠한 목표도 희망도 전혀 없었다. 오직 좌절과 분노의 거센 풍랑만 내 영혼을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었다. 자친(慈親)과 친족들에게까지 허탈과 배신을 전염시킬 수는 없어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입 딱 다물고 시치미 뗐다. 그러자니 그 엄청난 울분을 혼자 속으로 삭여야 했다. 한때는 그때까지 연구하려고 모아 온 천여 권의 책을 몽땅 피라미드처럼 쌓아 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 화염 속으로 소신공양이나 하려는 엄청난 망상까지 했다.( 그 한순간의 일념이 지핀 뒤, 불가에서는 어느 노스님이 진짜 소신공양을 했다고 하며, 속가에서는 사촌 형님 한 분이 음독 자살했다. 이 얼마나 엄청나고 끔찍한 과보인가? 두고두고 깊이 참회한다.)
그러다가 이렇게 부질없이 죽을 수만은 없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뭔가 새 삶의 계기를 부여할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했다. 눈에 띄는 대로 케케묵은 부처님 가르침을 뒤적이다가, 대만 유학 시절 채식 식당에서 집어온 볼품없는 『인광대사가언록(印光大師嘉言錄)』을 읽게 되었다. 몇십 년 전 활판 인쇄로 갱지에 적힌 팥알만한 글씨들, 띄어쓰기도 없고 물에 불은 라면발처럼 잉크가 번진 조잡한 글씨들!
그런데 이 글씨들이 그토록 거센 좌절과 분노의 폭풍우와 격랑에 표류하던 내 영혼의 눈을 번쩍 뜨이게 일깨우는 것이 아닌가?!
1997년 여름부터 두어 달 차분히 통독하면서, 정토염불법문(淨土念佛法門)의 본래 진면목을 확연히 통찰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내 마음에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훌륭한 책(가르침)을 나 혼자 보고 말 수는 없다’는 생각이 거의 강박 관념에 가까울 정도로 절실하게 끊임없이 일었다.
그래서 우선 자상하고 친근한 말씀 투의 편지 설법 몇 통을 시범적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전화번호부를 펼쳐들고 불교 잡지사를 찾았다. 지금도 그러한 편이지만, 그때는 말할 것도 없이 나는 한국 불교계에 대해 깜깜 무소식이었다. 세간의 언론에 오르내리는 불교계의 대표적 스님 한두 분 정도밖에 몰랐다. 전화번호부에서 눈에 띈 것은 「여성불교」․「대중불교」․「불광」이었다. 무조건 전화를 걸어 번역한 법문을 실을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원고를 보내고 나서 「여성불교」가 가장 먼저 흔쾌히 싣겠다고 답신을 보내왔다. 그리고 네댓번 연재해 주었다.「대중불교」도 조금 머뭇거리더니, 감옥 죄수 불자한테 보내신 인광대사님의 편지 십여 통을 특집 기획으로 실었다.
그런데 「불광」은 도시 깜깜 무소식이었다. 나중에 짐작한 추측이지만, 지명도가 높고(잘 나가는 잡지라) 아주 바쁜 편이어서, 나의 투박한 번역투가 편집부의 시선을 전혀 끌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달쯤 지나 확인 전화를 걸자, 그때서야 졸던 불보살님께서 번쩍 눈을 뜨셨는지 다시 읽어보더니, 1998년 1월부터 새로이 연재를 시작하겠다고 곧장 답전(答電)을 걸어왔다. 이렇게 해서 「불광」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때도 ‘광덕’ 큰스님의 어떤 분이지 존함조차 몰랐다.
처음부터 나는 『인광대사가언록』의 첫머리에 나오는 정토염불법문의 진수를 싣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의 불자들에게는 아직 너무 낯설고(화두선 일변도이기 때문에), 또 그만큼 충격과 거부감도 클 것이라는 편집부의 우려 섞인 판단 때문에, 부득이 한걸음 양보하여 우선 ‘인과응보’의 법문부터 싣기로 하였다. 인광대사님의 적확(的確)한 비유와 명쾌한 해설이 설득력 있었던지, 「불광」독자님의 관심이 서서히 일기 시작하였다. 법문 책 전부를 번역해 출간해 달라는 불자들의 요청이 있었는지, 출판부에서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돌아서는 눈치였다.
시절 인연이 점차 무르익고 있었다. 그렇게 1년간 연재한 뒤, 이듬해부터는 ‘참선과 염불의 관계’를 정면으로 부각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영명연수(永明延壽) 대사님의 그 유명한 사료간(四料簡)을 인광대사님이 자상하게 설법하신 법문을 번역하여, 1998년 12월 초순 몸소 원고를 들고 불광출판부를 찾아갔다. 그 전에 이미 한두번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광덕 큰스님을 친견해야 하겠다는 염원이 별로 일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이번에는 꼭 한번 친견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그토록 훌륭한 선지식이신 줄 알았더라면 진작 기를 쓰고라도 친견을 간청했을 텐데, 그저 「불광」지를 창간하고 불광사를 세워 포교하시는 노스님 정도로 생각했다. 게다가 법체가 편찮으셔서 누워계시다는데, 사람들 만나시는 일이 몹시 귀찮고 힘드실 것 같았다. 내 자신의 허약한 몸과 사람 귀찮은 마음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번역 원고를 1년씩 꼬박 실어준 「불광」지의 발행인에 대한 예의상으로만 보아도, 꼭 한번 친견하고 문안과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편집부장님한테 원고 가져온 김에 한번 친견하고 싶다고 말했다. 막 점심공양이 지난 시각이라 좀 쉬실 텐데, 전화로 시봉을 통해 친견 요청을 전해 들으신 광덕 큰스님께서 편집부장님도 뜻밖에 놀랄 만큼 선뜻 허락하셨다. 그래서 편집부장님 뒤를 따라 큰스님 계신 불광사 마니당에 있는 2층 방(법주실)으로 찾아갔다.
자리에 누워 계셔야 할 편찮으신 법체를 일으켜 앉으신 광덕 큰스님께서는 가사를 단정히 입으신 채, 참으로 뵙기도 민망할 정도로 피골이 상접한 법안(法眼)으로, 그러나 그지없이 해맑고 순수한 모습으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속인을 온화하고 자비로이 맞아 주셨다.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영적 만남(法緣)이었다.
먼저 삼배의 예를 올리고 앉자, ‘불광지에 『인광대사가언록』을 번역해 연재하고 있는 필자’라고 편집부장님이 나를 큰스님께 소개해 드렸다.
피차 처음이라 익숙지 않고 또 기운조차 별로 없어 알아듣기 쉽지 않은 어투로, 광덕 큰스님께서는 인광대사님이 어떤 분인지 물으셨다. 그래서 내가 간단히 답변을 올렸다.
“인광대사님께서는 중국 청나라 말엽부터 민국 초기에 걸쳐 오로지 정토염불법문을 수행하시고 가르치셨는데, 특히 재가 불자들한테 일일이 자상하게 편지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 분량이 하도 많아서, 그 가운데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 주제별로 편집한 책이 『인광대사가언록』입니다. 그런데 그 법문이 어찌나 훌륭하고 미묘하던지, 근대 중국의 대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가 ‘문자삼매(文字三昧)에 드셨다’고 칭송할 정도였습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대충 이러한 내용을 말씀 드렸다. 그러자 광덕 큰스님께서도 아주 호의적으로 호응해 주셨다.
“나도 예전에는(나무아미타불)염불을 한동안 열심히 했지. 먼저 염불로 힘(아미타부처님의 자비광명 가피력:他力)을 얻고, 그 다음에 참선 수행에 정진해야 돼. 먼저 염불로 힘을 얻어야 해.……”
이러한 어조의 말씀을 한참 계속하셨는데, 애석하게도 발음이 또박또박 알아듣기 쉽지 않았고, 또 내게는 모두 당연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 밖의 내용은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않아 기억을 재생하기 어렵다. 그런데 곁에서 듣던 최측근 재가 제자인 편집부장님에게서는 상당히 참신한 충격(?)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법담은 아마도 반 시간 이상 지속된 것 같다. 시간도 잊고 불법의 만남에 몰두해 버렸다. 시종 자상하고 온화한 분위기에서 내 마음은 물론 온몸이 화기애애하게 후끈거렸다. 그러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용기를 내어 이렇게 여쭌 기억이 뚜렷하다.
“광덕 큰스님께서 창간하여 발행하시는 「불광」지에 인광대사님의 『가언록』법문을, 제가 대만 유학시절에 받은 도명(道名)이 광책(光策)인데요, 저 광책이 번역해 연재하고 있으니, 부처님 법 인연이 참으로 미묘하고 감사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맨 처음이자 맨 마지막으로 단 한번 친견하여 뜨거운 영적 교감을 나눈 불법의 인연도 이제 매듭지어야 할 때가 다가왔다. 어쩌면 광덕 큰스님한테는 마지막 불법 인연을 맺은 불자였을 나에게 아마도 마지막 부촉을 하시는 것 같았다.
“앞으로 편집부장과 함께 문서포교 잘 하시게…….”
“예, 그러하겠습니다.(인연 따라 힘닿는 대로……)”
“그럼 됐어, 이제 그만 가봐.”
그래서 나는 다시 하직 인사로 삼배를 올리고 편집부장님과 함께 방에서 물러 나왔다. 그리고 두 달 반쯤 지난 이듬해 2월 하순경, 광덕 큰스님께서 마침내 사바세계를 하직하고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편집부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부산 범어사에서 광덕 큰스님의 영결 및 다비가 봉행되기에, 불광사에서 관광버스 수십대가 서울 불자들을 태우고 내려갈 예정인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평범한 인연으로 여겼는데, 십여 년 동안 큰스님 곁에서 시봉해 온 편집부장님한테는 큰스님과 나의 만남이 보통이 아닌 각별한 인연으로 느껴진 모양이다. 그래서 큰스님 열반 소식과 다비 안내를 나한테 알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고 한다. 큰스님한테나 나한테나 모두 마음의 빚을 질 것만 같아서라고
열반을 앞두고 육신이 극도로 쇠약해지셔서, 시봉하는 스님들을 제외하고는 일반 제자들은 곁에 얼씬할 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전혀 면식도 없던 바깥 사람이, 그것도 단 한번에 친견을 허락 받아 그렇게 오랜 시간 부처님 법에 관해 진지하게 대담했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아주 비범한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하도 우매하고 둔감해서 금방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나는 2년 만에 비로소 시간 강의를 맡게 되어, 그것도 가톨릭대 신부님한테 요청을 받아 수락한 형편인데(이 또한 인광대사님 법문을 번역 소개한 인연 공덕이 막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으리라), 하필이면 다비가 3월 개강 첫날과 겹쳤더란 말인가? 소식을 알려온 성의는 고맙지만, 다수 학생과의 공식 수업을 첫 시간부터 일방적으로 빼먹기가 나의 평소 양식으로는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나는 몸도 허약하고(특히 장거리) 차 타는 게 딱 질색 아닌가? 그래서 사정을 말하면서 아무래도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일단 대답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기운이 감돌며 마음이 움직여졌다. 첫 시간 휴강하는 세속의 일반 관행에 내 양심을 팔아먹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요청하면 양해를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퇴근시간 직전에 가톨릭대 법경학부장 신부님께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통화가 되었고, 부산에 스승님 장례식(거짓말이 안 될 정도로 정직하면서도 융통성 있게 표현했다) 참석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 나중에 보강해도 괜찮은지 여쭈었다. 한번밖에 만난 적이 없는데도, 천주님의 사랑으로 선뜻 동의 말씀이 계셨다.
그래서 다시 편집부장님께 전화를 걸어 갈 수 있다고 통지하고 늦은 밤 불광사로 갔는데, 자정 무렵 수십대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대학 초년 야간열차를 몇 번 타본 이후, 실로 근 이십 년 만에 밤차를 타고 뜬눈으로 날을 새우게 되었다.
새벽 4시나 되었을까? 아직 깜깜한 밤중에 부산 땅을 난생 처음 밟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긴 행렬을 지어 차례로 어두운 새벽 범어사 경내로 들어갔다. 생판 모르는 곳이라 단체 행동에 따라 움직이는 것 밖에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곧바로 광덕 큰스님 법체가 모셔진 큰 누각 안으로 줄지어 들어가 추모하는 마음으로 참배하였다. 마치고 나오니 날씨는 추운데, 동이 틀 때까지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마땅히 있을 곳도 몰라, 영당 건물의 한쪽 구석 출입문 안쪽에서 찬바람이나 피하면서 희미한 불빛에 독경이나 하기로 했다. 큰스님께서 번역하신 적 있다는 『지장보살본원경』을 한문본으로 독송하기 시작했다.
큰스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어떤 거사님인가 와서, 경건한 장소이고 출입에도 방해가 되니 자리를 비키라고 하였다. 그래서 밖에 나와 한데를 어정거리다가, 나중에야 위쪽 지장전에서 사람들이 기도 독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 들어가 독경을 마쳤다. 마치자 옆에서 독경하던 부산 보살님 한 분이 백일간 지장기도 중이라면서, 내가 보고 있는 한문본 지장경을 한 권 구할 수 없는지 쪽지 글을 써 건네 왔다. 그래서 연락처를 받아 와 가지고 있던 다른 판본을 우송해 드렸다.
날이 새고 아침 공양이 배달되어 허기와 한기를 조금 풀었나 보다. 주위를 돌아보니, 그 엄청난 규모의 조화가 정말로 광덕 큰스님의 생전 보현행원을 여실히 웅변해 주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하여,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회창 야당 대표, 저 멀리 내 고향 변산반도 내소사에서 보내온 화환의 명패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의식 행사 자체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성미인데다가, 잠도 못 자고 추위에 떠느라 자세한 관찰을 못했다. 기억력도 둔한데다가 시간마저 한참 지난 뒤라,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도 별로 없다. 다만 가장 인상 깊었던 감동이나 한두 가지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큰스님께서 창립하신 불광사 마하보디합창단이 부르는 헌가(獻歌)가 감명 깊었다. 그 가운데 특히 광덕 큰스님께서 작시하셨다는 ‘빛으로 돌아오소서’는 정말로 심금을 울리고 영혼을 사로잡는 감동의 선율이었다. 이 선율은 만 2년(광덕 큰스님의 3년喪)이 지날 무렵인 2001년 2월 26일, 가야산 해인사에서 청화큰스님 법문을 들으러 갔을 때, 또 경내에 울려 퍼지는 걸 다시 들었는데, 범어사 영결식(다비식) 때 감동이 되살아나면서 한동안 심금을 울렸다. 그런데 그 가사(詩)를 보니 더 기막힌 인연이었다. 옮겨본다.
빛으로 돌아오소서(광덕 글․서창업 곡)
1. 영원한 광명 아미타 부처님
그 품에 안기려 님은 가셨네
지난 시절의 정다운 모습
살아 계신 듯 가까이 있네.
2. 끝없는 수명 아미타 부처님
크신 은혜 고이 잠드소서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연꽃 수레로 맞아주시네.
3. 광명의 나라 아미타 극락세계
연꽃 봉오리에 태어나소서
부처님 뵙고 큰 법 깨치어
찬란한 빛으로 돌아오소서.
아마도 광덕 큰스님께서 처음에 ‘나무아미타불’ 정토염불을 하시던 당시의 본래 서원[本願]을 그대로 표현해 놓으신 게 거의 분명했다. 그 서원이 서린 게송[詩]이 애잔하고 맑게 승화된 비원의 선율로 합창 화음을 통해 당신의 마지막 극락정토 왕생의 길을 찬탄하면서 배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장엄한 법회에 아미타불님과 관세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을 비롯한 법계의 성중님들이 친히 왕림하셔서 무형으로 주석하실 것 같았다. 그리고 사바의 유형 세계에서는 수많은 사부대중 불자들이 인간적인 슬픔을 머금은채 찬송하고 있다. 그러한 전체 모습을 내(寶積居士)가 관상하며 지켜보고 있다.
인광대사님의 정토염불법문을 광덕 큰스님께서 펼치시던 「불광」에 옮겨 실은 미묘한 인연으로! 어쩌면 인광대사님께서도 극락정토에서 광덕 큰스님을 반겨 맞으며 정토염불법문의 인연을 서로 함께 찬탄하실 것만 같다.
또 하나 인상 깊게 기억나는 것은, 호상(護喪) 운구행렬이 끝난 뒤 다비식장에서 마침내 ‘불’이 들어가고 주위에 둘러선 불자들이 염불을 하는데, 그 소리가 두 가지로 들렸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소리와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소리가 뒤섞였다. 여기서 내 정신은 다소 어지럽게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불광사 식구들은 평소 수행하던 습관대로 ‘마하반야바라밀’을 합창하고, 그밖에 각지에서 모여든 불자들이 큰스님의 극락 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한 것이리라. 주최 측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자연스럽게 벌어진 것일 텐데, 내 마음속에는 다소 아쉬움이 맴도는 장면이었다.
사실 내가 광덕 큰스님을 뵙기 전에 불광사 보광당 법회에 한두번 동석해서 참관할 때, 나는 그 많은 대중이 한글로 번역한 ‘천수경’이나 ‘반야심경’, 기타 법요의식을 상당이 통일된 소리[和聲]로 함께 낭송하는 걸 보고 크게 감동 받았다. 그리고 ‘마하반야바라밀’을 몇 백 번씩 합창하는 소리는 정말로 심금을 울리는 감동 그 자체였다. 거기서 음악 합창으로 증폭되는 시너지 효과를 몸소 절감하였다.
맑고 기운찬 부처님 광명의 법력 같은 것을 강렬히 느꼈다. 동서고금의 모든 성현이 음악의 조화를 중시하신 뜻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심성의 함양과 영혼의 순화에 더 없이 중요하고 막대한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님도 항상 ‘예(禮)’와 ‘악(樂)’을 나란히 일컬었고, 플라톤도 이상 『국가론』에서 어릴 적부터 체육 교육으로 신체를 단련함과 동시에 음악으로 심성(영혼)을 함양하여 심신의 조화(文武兼備)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주교나 기독교에서는 미사나 예배 때 특유의 오르간 연주에 맞춰 온갖 장엄한 찬송가를 합창하지 않는가?
그 음악 화성으로 경건하고 장엄하면서도 환희에 찬 찬탄의 마음이 한층 쉽게 일고, 또 더욱 증폭되는 것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청화 큰스님의 말씀을 나중에 들으니, 우리나라 불교도 예전에는 염불당이 있어서 대중들이 함께 염불 합창했다고 하며, 앞으로 다시 이러한 염불당의 전통이 되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때 내가 불광사 보광당의 ‘마하반야바라밀’염송 분위기를 느낀 대로 간단히 말씀드렸더니, 청화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왕에 ‘나무아미타불’을 염불로 합창하면 더욱 좋겠다고 하셨다.
여하튼 광덕 큰스님의 다비식장에서 ‘나무아미타불’과 ‘마하반야바라밀’합창소리가 뒤섞여 울리는 걸 들으면서, 나 자신도 이왕이면 극락정토 왕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통일했더라면 더더욱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광덕 큰스님을 딱 한번 밖에 뵙지 못하고, 그것도 두 달 만에 영결하면서 피상적으로 느끼고 생각한 게, 역시 정토염불법문의 존재와 위상이었다. 광덕 큰스님의 본래 서원과 마지막 회포도 궁극에는 정토염불이 아니었을까 감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광덕 큰스님의 ‘마하반야바라밀’ 법문과 염송은 석가 세존의 한 평생 교화 가운데 반야(般若) 공(空)의 법문이 차지했던 위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무튼 광덕 큰스님 덕분에 부산 땅도 처음 밟아 보고, 불교의 다비식 광경도 처음으로 참관하고, 모든 일정을 순조롭고 원만히 마친 뒤 귀경길에 올랐다. 그 뒤 『인광대가사언록』은 번역을 거쳐 2년간의 연재를 마치면서, 단행본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순전히 불법승 삼보의 자비광명 가피로 이루어졌다. 내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출판부가 기획한 것도 아니다. 단지 인광대사님의 정토염불법문 자체가 지닌 법력과 불보살님의 가피력일 따름이다. 바로 광덕 큰스님을 처음 친견하러 가던 날 가지고 간 「참선과 염불의 관계」「영명선사의 사료간」법문이 결정타가 되었다. 7회에 걸쳐 이 법문이 연재되는 동안, 출판부는 물론 나한테까지 독자님들의 찬탄과 격려 전화가 왔다. 그 가운데 잊지 못할 감명 깊은 인연이 두어 번 있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첫댓글 오늘 글은 조금 길지만 중간에 나누기가 어려워 다 올렸습니다.
큰스님과의 마지막 법연의 제자라는 말씀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의 몸으로도 가사를 수하시고 30분이 넘게 법담을 주고 받으셨는데 그 내용이 세세히 기록되지 않아 조금 아쉽긴 합니다만 장례식 장면이 자세히 표현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보적거사님의 공덕을 아셨기에 그 몸으로 친견을 허락하셨겠지요?
나무아미타불이나 마하반야바라밀이나 구분없이 다 같은 염불하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인광대가사언록』을 구해서 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다음 주에도 계속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다 읽다 지각할 지경입니다. ^^
감동적으로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읽고 싶어집니다. _()_
정말 감동적입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지난번 연재 글을 읽고 바로 주문을 해서 인광대사님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직 다 읽지 못해서 소감을 말씀드리긴 좀 그렇습니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염불의 실체(?)와 같은 가르침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을 떠나지 않는 것...보현행원에 섭수되는 가르침이 되겠지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아바라밀_()()()_
진지하게 끝까지 찬찬히 읽으며 큰스님의 법향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