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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문학
동촌 김재경
(상략)
한국의 이른바 근현대문학은 서구 및 일본풍 개화 흐름과 연계되어 기존 전통과의 단절,또는 차별화를 전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친일파 이완용의 비서이기도 했던 이인직이1) 신소설의 대표자로 거명되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이광수가 연재한 소설 「무정(無情)」이 근현대소설문학의 효시로 지칭되기도 한다.2) 이광수는 소설 뿐 아니라 논설,기행문 등 다양한 글쓰기로 전래의 정신문화,선비류 전통을 매질하고 쓰러뜨리는데 선봉을 자임하였다.3)
그러나 그뿐인가? 이른바 최초의 문예지라는 『창조』의 주역 김동인은 기존도덕 파괴를 예술의 중심부로 착각했을 정도로 탈도덕적이었고4) 본인의 생활 또한 무절제한 방탕으로 피폐하게 마쳤다.가장 주리적(主理的)으로 시대적 문제를 대결했다할 『폐허』동인들도 기존 정신문화가 파괴된 폐허 위에 새문화 창조를 당위로 여길만큼 여전히 전통에 회의적이었다.5)
그리고 그것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극복에 몸부림치던 당대 지식인들에게 일정수준 이해할 점이기도 하다.그런 노력들이 한국 근현대화의 중요 에너지원이 되었을 것임도 수긍할 수 있다.그러나 그것이 다일 수는 없고 큰 눈에서 주류 흐름이 되기엔 위험한 점도 많았다.그것은 또한 일제 식민지 통치술에 말려들 우려도 컸으니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쓴 후 동포들에게 피습되고 사과를 요구받았던 것도 이런 민족적 경계심을 발로였던 것이다.6)
이러던 형편이 해방 후 경제개발 과정에는 전날의 반작용으로 민족고유문화를 되찾자는 열풍이 오히려 강력히 일어났고7)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는 카피용어가 성행하기도 했다.
이제 이 모든 과정을 거친 작금의 우리는 보다 냉철하고 균형된 자세로 현실과 미래를 전망하고 합리적 행로를 선택해야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하겠다.
한 민족과 한 시대에는 부지불식간에 모델적 인간상이 형성된다.
서양 중세는 용맹한 기사가 모델상이었다면 일본의 전시대는 무예 절륜한 사무라이가 이상형이었고 미국은 개척시대 총잡이 카우보이가 모델이 되어 그 전통은 오늘까지 음양으로 이어지는 감이 있다.
동양은 대개 군자를 이상형으로 삼아왔으나 한국에서는 상기한 ‘선비’상으로 이를 자기화하였다.한문으로는 선비 사(士)자로 쓰니 문치사회 하에 글 읽어 과거에 합격한 귀공자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러나 일제 침략을 겪으면서 문약에 대한 반성으로 무인적 성격이 추가되기도 했으니 필봉(筆鋒)의 전위(前衛)였던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 출신8)의 전통 선비였으나 스스로 항일 무장 테러조직인 의열단의 단원이 되어 무시무시한 「조선혁명선언」을 쓰기도 했다.9) 따지고보면 사(士)란 글자 자체 문사(文士)만이 아니라 무사(武士)에도 함께 쓰니 괘(軌)를 벗어난 일은 아니겠다.
한편 일제시대 개혁세력의 축이었던 안창호 계열은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는데,흥사의 사는 응당 선비사자로 민족엘리뜨들의 동맹된 힘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여기엔 안창호의 지론인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의 실천지향적 성격이 중추가 되었고10) 이런 시류 하에 유림(儒林)들도 과거의 사변적 주자학에서 행동적 양명학으로 변화되는 유의미한 추향을 보였다.
일방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브나로드(v narod)’운동 등 기층민중 속에 들어가 그들과 일체화되기를 기도했으나 지도부와 피지배 민중 간의 이질감은 일정수준 불기피했다.지식계층인 지도부 내의 잠재된 사류(士類) 의식을 급격히 탈색하기는 어려웠던 듯하다.11)
이처럼 유구한 전통 위에 시세에 따라 약간씩 색갈을 달리해온 선비 사(士) 개념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정의하고 현실에 적용할 것인가?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겠으나 여기서 필자 나름 요약하면
첫째,진리 지향인임과,
둘째,그중에도 한국 전통적 양식(良識)과 예감(藝感)을 겸비한 지식인
이라는 두가지로 성격을 압축할 수 있지 않나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리 지향 본능을 가지나 강약과 농염에는 차이가 있으니 선비는 이 부분 상위 그룹을 뜻할 것이다.그러나 이만으로는 세계 보편 지식인일지언정 한국적 선비라 하기는 부족하니 ‘한국 전통 양식(良識)과 예감(藝感)을 겸비’할 필요성이 뒤따르는 소이이다.양식이란 이성적 영역이요 예감은 감성 영역이니 이성과 감성,그중에도 특히 감성 영역은 한국적 이상(理想) 성격을 공유해야한다는 뜻도 된다.
그리고 이 준거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간 선비 개념에 소외되어온 여성이나 상공인,노동자 등 누구도 민주시대 선비 범주에 포함 가능할 것이다.
(중략)
물론 그동안 질탕한 서풍(西風) 속에도 동방(東方) 전래의 맥락이 단절되었던 것만은 아니다.여러 사례를 들겠지만 안동 퇴계 가문의 고절(高節)한 시인 이육사를 비롯,화랑정신과도 연계된 고유 토착신앙의 의미를 집요히 파고들었던 김동리의 정신사적 위상도 간과할 수 없다.12) 민초의 정서를 절절한 한의 가락으로 표출한 김소월,불교적 심오 명상의 한용운,도가적 전원풍의 신석정 등 많은 문인들을 주마등처럼 회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장 전형적인 인물의 하나로 청록파시인 조지훈을 예거함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많은 사람들이 그를 현대의 선비라 평하거니와 그만큼 그는 동시대 전업 시인의 틀에만 넣기에는 여분이 넘쳤던 전통적 종합체질의 인물이었다.이를테면 수다한 논문을 쓴 문화사학자(文化史學者),민속학자이자 교육자이며 논객으로 현실 문제에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고 민족의 대사(大事) 앞에는 자못 지사적(志士的)이었다.그가 쓴 「선비와 직언」이란 글에서는
“지성인은 고인(古人)이 이른바 식자인(識者人) 또는 독서인(讀書人)이요 우리말로는 선비다.(중략) 지성인 곧 선비는 나라의 기강이요 사회정의의 지표이다.(중략) 직언하는 선비는 함부로 죽이지 못한다. 역사의 준엄한 감시가 있기 때문이다”13)하고
유명한 「지조론」에서는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14)
라 하였는데 이런 글들은 4.19 전야의 무도하고 살벌한 시대에 쓰여졌던 것이다.왠만한 배짱과 기개 없이는 적어나가기 여러운 글인 점에서 그의 풍모를 예증하는 사례가 된다.
이같은 지훈에게 시(詩)는 전통 선비적 정서와 풍류감을 현대적 어법으로 풀어낸자취였으며 거기엔 자연친화적인 성향이 짙게 스몄다.옛 사류(士類)들이 선호한 문인화에 사군자(四君子)나 산수화와 같은 기류라 할까.
(중략)
각설(却說),조지훈에게서 호쾌한 풍류남아적 선비상을 연상할 수 있다면 위당(爲堂) 정인보는 보다 학인지향적 선비상의 대표적 인물의 하나일 것이다.그는 시조집을 출간한 문인이었고 국경일 노래나 각종 학교의 교가를 다수 썼으며15) 전조선문필가협회장을 지낸 문필인 전반의 지도자였다.역사학자로서는 특유의 ‘얼’을 중시하는 『조선사연구』를 저작했고 유교철학자로서 논구한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은 당대 가장 심오한 논필(論筆)의 하나였다.
그는 칸트의 별빛 하늘과 병칭된 ‘도덕법’16)이나 주자·퇴계의 ‘이(理)’와 같은 ‘참’개념을 한국적으로 친근히 ‘본밑 마음’이라 표현하고 “어떤 것이 본밑마음인가?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 없나니 속이려는 것을 사념이라하고 속일 수 없는 것을 본심이라 한다. 그런즉 엄격하게 마음을 말할진대 본밑마음이 이 마음이요 그 외 것은 곧 마음의 적이다. ”17)라 하여 초시대적 진리의 등불을 이어 들었다.
근대 자연과학적 진리와 도덕적 진리의 성격적 구분은 과제로 남는다 하더라도 흑암의 시대에 빛났던 참의 열정 자체 진인(眞人)의 정맥을 잇는 선비임을 확인시켰다할 것이다.
얼이란 무엇인가?
정상적 인간정신일 뿐이다.
얼이 빠지면 비정상적이 된다.
안 빠지면 정상이요 얼 차린 사람인 것이다.18)
대단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이면 다 갖추는 것일 뿐이다.
다시 묻거니와 선비란 무엇인가?
응당 또한 정상적 인간일 뿐이다.
다만 참되고 인간적 제반 자질이 공유되며 한국의 전통미를 망각하지 않은 인간일 터이다.
그런 인간성 지향 속에 그 일부로 내재하는 것이 선비문학일 것이다.
이상 더듬은 전통 선비풍과 그 문학 흐름이 유일 절대하다거나 구태어 문단의 주류가 되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한국은 앞으로도 계속 세계의 다양한 사조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역량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다만 한편으로 민족 전래 문맥을 계승하려는 상기(上記)한 움직임 또한 일각에서 존재해야 하고 성숙해 나가야한다.그것은 배타가 아니라 민족적 개성이며 세계화 시대에 또 하나의 한류의 자산(資産)으로서 정체성을 다듬는 작업일 수 있을 것이다.19)
(하략)
(<푸른문학>,2017.여름)
1) 전광용,「한국소설발달사」하,(고려대학교,『한국문화사대계』10,언어문학사<하>),1183쪽.
홍이섭,「한국 작가의 사회적 지위의 변천」『홍이섭전집』4,398쪽.
2) 학생 신분에 불과한 약관(弱冠)의 이광수에게 총독부 기관지의 논설류 글을 게재케하고 장편소설까지 연재시킨 데는 당시 한국 언론을 주관하던 '도쿠도미 소호(德富蘇峰)' 측의 후원이 있었다고 이해된다. 도쿠도미는 일본의 국수주의 언론인이자 역사가이기도 했는데 데라우찌 총독은 한국에 부임하면서 총복부 기관지격인 경성일보 운영을 그에게 주관하게 하였다. 이 신문은 일본어로 발간되었고 산하에 한글판 자매지가 바도 매일신보였다. 도쿠도미는 일본에 언론사를 경영하고 있어 경성일보 사장 자리는 측근인 아베를 대신 취임시키고 자신은 감독 위치에서 배후 실권자로 군림했는데 이광수는 진작 아베와 만났고(1916년) 이후 각종 원고 청탁을 받게되었다. 그해 7월 도쿠도미와도 만났으며(우신사 간 전집 연보) 무정 연재 후에도 아베의 주선으로 그를 친견한다. (1917) 도쿠도미는 그후 지속적으로 이광수에게 애정과 사명감을 주입시켰다고 알려진다. (정우성,『도쿠토미 소호』,지식산업사,63-83쪽 참조)
3) 당대 사회를 발칵 뒤짚었던 「자녀중심론」에 “우리는 우리의 재산-정신적이나 물질적-의 전부를 우리와 우리 자손을 위하여서만 사용하여야겠고 필요하거든 조선(祖先)의 분묘도 헐고 부모의 혈육도 우리의 양식을 삼아야 하겠다.(중략)우리의 자녀가 필요로 인정하거던 우리의 골격(骨格)을 솥에 끓여 기계를 운전하기에 수용(需用)되는 기름으로 만들어도 가(可)하고,거미새끼 모양으로 우리를 산대로 두고 가슴을 욱이어 먹어도 가하다.”(1918,『청춘』;『이광수전집』10,37-38쪽)는 등의 구절만으로도 사정은 약여(躍如)하다.
4) 「광염소나타」같은 소설(1930;『김동인전집』5)에서 고의로 불을 내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음악을 창작한 것을 예술 차원에서 긍정적 시각을 보임도 그의 의식의 일단을 들어내는 사례일 것이다.
5) 『폐허』창간호 권두 글(「폐허에 서서」)에서 염상섭은 “페허에서 솟아나오는 떡잎의 낫낫이 그 순간순간의 새로운 생명을 무엇에게도 유린되지 않고 저해밧지 않고 열매가 맺을 때까지”(2쪽) 운운하였고 사학자 이병도조차 “3·4천년이라 하는 비교적 오래된 역사를 (중략)과(誇)하면서 일방(一方)으로 일즉이 세계에 공헌이 무(無)하엿다 하면 반(半)은 붓그럽지 아니하냐.(중략)과거에 실패하엿스면 장래에 구하려 함이 상정(常情)일다.”(10쪽) 운운하며 동지(同誌) 동인(同人)들의 당대 분위기에 합류하였다.
6) 박계주·곽학송,『춘원이광수』,삼중당,317-318쪽.
7) 70년대 길현모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조선시대의 신화처럼 퇴색해버린 문화의 고유성과 문화의 순수성에 대한 숭상이 새로운 활기를 얻어 팽배하고 있으며,외래문화를 국적없는 문화로서 배척하는 국수주의적 경향이 급격히 대두하고 있다.”(「민족과 문화」『문학과 지성』,1973,여름;『역사란 무엇인가』,문학과 지성,270쪽)고 우려하고 있다.당대 분위기를 요약하는 글귀이다.
8) 최홍규,『단재신채호』(태극출판사),연보/423쪽
9) 신채호는 ‘선배’를 한문으로 仙人 등으로 표기하며 한국 고대종교였던 수두교의 교도 일단(一團)으로(전집 상<上>,79) “신수두의 대제(大祭)에 모든 군중을 모아 혹 칼로 춤추며 혹 활도 쏘며 혹 깨금질도 하며 혹 택권이도 하며(중략)혹 가무(歌舞)를 연(演)하여 그 선악을 보며” 운운 했다고 설명한다.이들이 사서(史書)에 보이는 고구려의 조의선인(皁衣仙人),신라의 화랑들로 이어진 동시에(161쪽) 선비와도 같은 용어로 사용했다.(385쪽)그리고 이는 “단군 때부터 내려오던 종교의 혼이요 국수(國粹)의 중심”(383쪽)이라 하여 자신의 역사관 주맥(主脈)으로 중시한다.스스로 맥락의 일원을 자임했던 신채호는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 활동에 깊숙이 개입하고 체포 순국(殉國)함은 주지하는 바다.
10) 『흥사단운동70년사』,흥사단,59,76쪽 등.
11) 사회주의 계열 작가였던 팔봉 김기진의 시 ‘백수(白手)의 탄식’은 자신과 주변인들의 일면을 자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입으로 말하기는 ‘우나로드!’/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의 헛되인 탄식이 우리에게 있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고나!;『개벽』,1924 )
12) 김동리는 그의 큰형이었던 김범부의 영향을 지대히 받았거니와 작가의 길에 들어선 것도 ‘철학보다 문학 쪽이대이’라는 형의 평가가(『김동리전집』8,자전에세이,96쪽) 상당 계기가 된 것같다. 범부는 동서철학에 해박했으나 화랑에 대한 관심이 특히 지대하여 거의 유일한 구술 저서가 『화랑외사(花郞外史)』였던 바(김동리,「백씨를 말함」『풍류정신』,정음사,권두글) 김동리의 등단작의 하나가 「화랑의 후예」(중앙일보,1936)인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13) 1960.4.5.새벽5;『조지훈전집』5,104-107쪽.
14) 1960.2.15.새벽3;위 전집5,93-94쪽.
15) 전집에 정인보가 작사했다는 국경일과 각 학교의 교가를 보면 ‘개천절‘,‘광복절’,‘삼일절’,‘제헌절’ 노래와 ‘연희대’,‘국민대’,‘고려대’,‘동국대’,‘덕성여중’,‘성신여중’ 교가 및 기타 여러 기관 단체의 노래가 실려있다.(『담원정인보전집』1,연세대출판부,80-87)이 방면 독보적이었음을 나타낸다.
16) “장시간 성찰하는데에 종사하면 할수록,(중략) 감탄과 외경을 내 마음에 가득 채우는 것(중략)내 머리 위에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칸트,『실천이성비판』결론부,최재희 역,박영사,177쪽);주지하듯 이 두 요소는 칸트의 묘비명으로도 새겨졌다.(최재희,『칸트의 생애와 철학』,태양문화사,21쪽).
17) 위 정인보전집2,124-125쪽.
18) 정인보는 역저 『오천년간 조선의 얼』(동아일보,
19) 김춘수는 『창조』 이래 제 문예지와 발표작들에 서구풍이 대세를 이룰 때 지방에서 완고히 전통 정서 편에 섰던 김소월에 대해 “소월은 왜(서구풍의-필자 주)잡음 속에서 무슨 소리<새로운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가?그 잡음은 실은 한국의 신시가 세계의 시로 나가려는 한 당황상과 혼란상이라고 왜 그는 보려고 하지 않았는가?한국의 신시사에 소월의 시가 높이 솟아있는 것을 느낄 적에 괴롭다.”(『김춘수 시론전집』1,64쪽)운운 하였는데 정부(正否) 양면성을 함께 내포한 설명이다.맹렬한 서양 바람과 잡음은 역사의 대세 과정으로서 이해되어 마땅하나 그렇다고 당시 한국문단에 소월같은 전통정서 고수파가 전멸되었어야 할 일은 아니다.그것도 필요하지만 이것도 필요했던 것이며 양자 공히 역사에 요긴한 인자(因子)였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최동호가 “소월시에서 전통적 특질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적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현대시의 정신사』,열음사,238쪽)고 판단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