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은 조선시대에는 영천군 봉양면의 땅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휴천동이라 하고, 영주군 영주면에 편입시켰다. 1940년의 영주읍 승격을 거쳐 1980년 영주시 승격에 따라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휴천 1·2·3동으로 구분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 마을 앞을 흐르는 서천이 자주 말라붙어 물이 흐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내[川]가 쉬어 흐른다는 뜻으로 휴천(休川)이라 하였고, 이에 따라 마을 이름을 휴천리라 하였다.
또 개척 당시에는 초곡(草谷)으로 부르다가 조선 태조 때에 하륜(河崙)이 영주 군수로 재임할 때 남쪽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다 하여 지천이라 한데서 지천(支天)이라 하였고, 지금은 지천(芝天)이라고 쓰고 있다.
지천에는 증참판 김우벽이 천상면 달천에 세웠던 관수당을 후손들이 이곳에 옮겨 세웠다. 또한 관수대는 동강 송계가 장령으로 단종의 폐위를 보고 벼슬에 있던 두 아들 송인창과 송원창을 데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삭망마다 영월을 바라보고 통곡하던 곳이다. 관수대와 그 좌측에는 휴천동 미륵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지천동네 가운데로 조그마한 물길이 있는데, 이 물길을 중심으로 건너편 마을을 건너 또는 양지마을, 그 반대편을 음지마로 불렀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의성김씨가 살던 양지마을을 윗마로, 타성들이 살던 음지마을을 아랫마라고 불렀다 한다. 또한 광승사가 있었던 마을을 광승이마을, 화림사가 있었던 곳을 화림이라 불렀으며, 광승이에 거주하던 야성송씨와 여러 문중이 남간서당을 세우고 그곳에서 글을 가르쳤는데 이 서당의 이름을 딴 남간마을 등이 옛 명성을 지니고 있다.
옛날에는 휴천과 원당천 유역의 비옥한 충적평야 지대였으나 지금은 시가지로 형성되어 있다.
휴천 1동은 휴천농공단지와 4개의 학교, 광승이마을의 지석묘와 입석, 술바위, 뚜껑바위 등이 있다.
휴천 2동은 영주시청·영주역·철도청 영주지사·경북전문대·남부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영주역을 중심으로 발달된 시가지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도시 지역이다.
휴천 3동은 적서농공단지에 노벨리스코리아 영주공장, 동양 최대의 KT n G 영주제조창이 있어 북부지역 최대의 공업단지로 조성되어 있다.
현재 휴천동에는 남악 오여벌이 거처하던 남악정, 사일의 삼우정, 아천마을의 아호정 등의유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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