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 당산동 지역에서 양화대교를 건너다보면 우측에 절두산 성지가 나옵니다.
양화진 절두산은 야트막한 작은 동산의 이름입니다.
“ 한강가 양화진의 불쑥 내민 산모양이 흡사 ‘누에머리’ 같다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또 머리가 하나 더 얹혀있는 것 같다하여
덜머리(加乙頭) 또는 용의 머리라는 뜻으로 용두봉(龍頭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
(주간한국 2002년 1월호에서 발췌)
근대사의 아픈 역사의 현장인 절두산에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소개하는 개요글입니다.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복음의 씨앗으로 이 땅에서 헌신한 선교사님들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선교 200주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이자 밑거름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줍니다.
또한 이곳 양화진묘원은 한민족의 지난했던 근대사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기도 합니다.“(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홈페이지 소개 글 인용)
이곳에 잠들어 있는 15개국 417명(홈페이지 인용)의 선교사님들 가운데
한국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분으로는 H.B 헐버트 박사일 것입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외국인으로" 평가받는 헐버트에 대한
인터넷 백과 사전의 소개 글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헐버트 박사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온 이래 《독립신문》 창간에 이바지했고 1907년 고종 황제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1910년 이 땅에서 추방되었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3·1운동을 지지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지요”
개인적으로 인터넷 백과사전의 소개글을 읽으며 무척 아쉬운 부분은
헐버트 박사께서 머나먼 조선땅에 발을 딛을 때는 육영공원 교사의 신분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이 조선 땅에 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라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던
그분의 소원대로 양화진 묘원에 먼저 잠들어 있던 아들 곁에 안장되어 있는 분입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잠들어 있는 분들 모두가 귀하고 소중한 분들이지만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이땅에 온지 9개월 만에 과로로 숨진 한 여성 선교사분의 사연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루비 켄드릭선교사입니다.
그녀의 비문에는““만일 내게, 줄 수 있는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라고 적혀 있습니다.
“켄드릭은 1883년 1월,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했다.
1905년 캔자스 여자성경학교를 졸업한 직후 선교사를 자원하고 이후
2년간의 준비 끝에 1907년 9월, 텍사스 엡윗청년회의 후원을 받아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내한 직후부터 켄드릭 선교사는 송도(개성)에서 교사로 헌신했다.
그곳에서 켄드릭은 아침기도회를 인도하고, 영어를 가르쳤으며,
아픈 아이들을 간호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녀는 젊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웠고, 헌신을 통해 많은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1908년 6월 과로로 인해 한국에 온 지 9개월 만에 사망했다.
(켄드릭의 묘비에는 1908년 8월 15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1908년 8월에 간행된 <The Korea Mission Field>(p.118)에
1908년 6월 19일 사망하여 6월 21일 장례식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홈페이지 선교사 소개글 부분 인용)
다음은 그녀가 부모님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이 곳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 종일 집 생각만 했습니다....이 곳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 곳은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킬로미터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주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된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 본부에서는 철수하라고 지시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순교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늘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 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으로 인해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 하겠죠?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내겠죠?
저는 이 곳에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조선에 대한 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한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방인이면서도 조선 땅에 자신의 심장을 묻겠다는 젊은 여인 켄드릭 선교사님의 헌신은
이후 미국의 감리교회 청년들을 깨웠고, 그후 20여명의 젊은이들이
조선의 선교사로 건너오게 하였고 조국 근대화에 일조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과 고등교육 기관은 선교사분들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해방의 이면에는 무수한 벽안(碧眼)의 선교사분들의
유 무형의 노력 끝에 선물로 주어졌음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