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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1 - 우리 가족 3대 7명은 후쿠오카 공항으로 입국해서 렌터카를 빌려 타다!
일본은 그간 여러차례 여행을 했고 그 중에 규슈는 여섯번이나 다녀왔지만 대개는 우리 부부 둘 이서
여행한게 대부분이고 간혹 직장 동료들과 서너명씩 다녀온적도 있지만.... 이번 2023년 봄철
여행은 특이하게도 대가족 여행 이니 우리 부부에 딸과 사위와 손주(손녀) 3명등 일곱명 여행입니다.
그리고 그간의 여행은 개인 배낭여행이라 항상 내가 계획 을 세우고 준비한데 비해 이번만은 딸 이 모든
계획을 세웠으니 모처럼 머리 아픈 일이 없이 편안하게 여행했는데, 딸이 휴대폰 으로 “비지트 재팬”
앱에 접속해서 서류를 작성하니 우리 부부는 코로나 3차 접종 증명서만 카톡 으로 보내주었을 뿐입니다.
일본은 식당이나 작은 가게에서는 신용카드가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100만원을 엔화로 환전한후
드디어 2023년 2월 22일 김해 공항으로 가서는 딸네 가족들과 합류해서 코로나 3차 접종증명서
를 제출하고 수속을 한 후에 11시 30분 비행기를 타니 항공기는 현해탄 바다를 건너 후쿠오카 로 향합니다.
이번 우리 여행은 후쿠오카 공항으로 입국해 렌터카 를 빌려서는 후쿠오카 시내를 잠시 본 후에
서쪽으로 달려서 사가현의 가라쓰 성 을 구경하고, 임진왜란때 김해 사람들을 잡아와서
아리타에서 도자기를 구워 이마리항을 통해 1천만개나 유럽에 수출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사가성 을 보고 차를 타고 동쪽 나가사키의 하우스텐보스 를 구경하고 1박 합니다.
다음날 렌터카 차를 타고 우레시노 에 들러서 일본차를 시음 하고는 다케오 도서관 을 구경한후
다시 구마모토로 가서 체크인후 가토 기요마사가 포로로 잡아온 울산 사람들을 시켜 건축한
구마모토성 까지 구경한 후에 1박하고, 셋째날은 동쪽 산속에 구로카와 온천 을 보고 오이타를
거쳐 벳푸 로 가서 1박한후 넷째날은 바다를 건너 시모노세키 를 구경하고 배 로 귀국하는 것입니다.
첫 방문지 후쿠오카 는..... 에도 막부 시대에는 후쿠오카 와 하카타(博多) 가 헝가리의 수도 부다와
페스트 처럼 별개의 도시였으니, 후쿠오카성이 위치한 후쿠오카는 사무라이 들이 많이 사는
도시고 현재 하카타역 주변인 하카타는 중국과 거래하는 상인 들이 많이 사는 도시였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8년에 아주 가까이 붙어 있던 후쿠오카와 하카타시 두 도시가 합쳐
지니 이름은 처음에는 후쿠하쿠(福博) 라고 했다가 나중에 후쿠오카 로 변경되고
공항 이름도 후쿠오카공항 이지만..... 그래도 하카타는 기차역과 항구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니니.... 1889년에 일본에서 시(市) 제도가 시행되어 후쿠오카도
시로 지정되는데, 이때 시 이름을 두고 후쿠오카 지지파와 하카타 지지파 가 거의 50 : 50 으로 갈려
극심한 대립을 보였으니 결국 이름을 두고 시의원들 끼리 투표하여, 단 1표 차이로 후쿠오카 로 정해집니다.
하카타 지지파들은 반발했지만, 하카타에 만들어질 예정인 중앙역 의 이름을 후쿠오카역이 아닌 "하카타역"
으로 명명하는 것으로 타협한 탓으로 오늘날 후쿠오카시의 JR 중앙역이 후쿠오카역이 아닌 하카타역이
된 것인데, 후쿠오카를 처음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역 이름이 후쿠오카가 아니고 하카타 라 당황하기도 합니다.
후쿠오카성 은 센고쿠시대 히메지성의 성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석 참모인 구로다 간베에 가 오이타
의 나카쓰성의 성주 가 된후 이를 이어받은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 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참가한 덕분에 세워진 후쿠오카번의 거성으로 새로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구로다 나가마사 는 임진왜란때 1만을 이끌고 제3군의 주장 으로 참가한 장수로 이후 후쿠오카번
의 첫 번주 가 되었는데, 후쿠오카번은 석고가 50만석에 이르러 도쿠가와 에도 막부 전체
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큰 번이었으며..... 후쿠오카 라는 지명도 구로다 가문의 고향 인
비젠 (현 오카야마현) 의 히메지성 인근 인 후쿠오카(현 세토우치시) 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좀 더 얘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센고쿠시대에 오토모 소린은 독실한 크리스찬 으로 후쿠오카와 오이타
일대를 지배한 대영주였으니..... "규슈를 하나님의 나라" 로 만들겠다는 신념에 불타 남쪽
시마즈(가고시마) 의 사쓰마군 과 충돌하니 1578년 미야자키현의 미미가와 전투에서 대패한 후
모리씨가 지배하던 히로시마와 야마구치를 점령하고 서진하던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구원 을 요청합니다.
이에 하시바 히데요시군 이 대거 북규슈로 침입하니 히메지 성주 구로다 요시타카(간베에)
와 아들인 나가마사 부자도 1587년에 함께 규슈를 공격해서는 오이타를 거쳐
미야자키로 진격해 사쓰마군을 격파하고 보상으로 오이타현의 나카쓰성의 성주 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794년에 간무왕(천황) 이 수도를 나라에서 헤이안(교토) 으로 옮긴후 전국을 66개주 로 나누었으니
시코쿠(四國) 는 글자 그대로 아와(도쿠시마현), 도사(고치현). 이요(에히메현), 사누키(가가와현) 네 나라
이고 규슈(九州) 는 아홉 개 나라 이니.... 치쿠젠과 치쿠고는 후쿠오카현 이고 부젠과 붕고는 오이타현,
히유가는 미야자키현, 히고는 구마모토현, 히젠은 사가현, 아키는 나가사키현, 사쓰마는 가고시마현 입니다.
구로다 요시타카 부자는 현재 오이타현에 나카쓰성을 쌓고 부젠 (豊前國 풍전국) 을 지배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와 아들 나가마사는 다카야마 우콘의 영향으로 저 고니시 유키나가
처럼 "천주교도" 가 되었었는데..... 규슈 백성들은 물론이고 다이묘 중에도 천주교도가
많아지자 유럽 세력의 침략을 염려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에 천주교 금지령 을 내립니다.
천주교도 다이묘가 여러명 있었으니 탄압에 대해 세가지 유형의 반응을 보이는데.....
첫째는 다카야마 우콘 처럼 신앙을 지키려고 반항하다가 처형(순교) 된 경우
이고, 두번째는 구로다 요시타카(간베에) 와 나가마사 부자 처럼 배교 하는
경우이며 그리고 세번째는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처럼 숨어서 믿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1군 고니시군과 3군 구로다군은 예수교도가 대부분이었으며 2군 가토군은 불교도가 많았는데
고니시군은 십자가 군기 를 들고 조선을 침공해 진해 웅천 왜성에서 일요일이면 세스페데스 신부
집전으로 미사 를 봉헌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후 영광스러운 할복자결 을 권유받았으나...
예수교 교리 에 어긋난다며 거부하고 처형당하니 사무라이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신앙 은 지킨 것 입니다.
임진왜란 제3군은 부젠국 구로다 6천 과 오토모 요시무네 5천으로 1만 1천이니 주장은 히데요시의
심복인 구로다로 황해도를 점령했으며 양산왜성과 구포왜성을 축조해 주둔했고 부산 기장군
죽성리에 왜성 을 쌓았는데..... 어찌나 영악한지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서 철병한후 부인
이토히메와 이혼 하고 도쿠가와의 양녀로 이에야스의 씨 다른 여동생인 요시히메와 결혼 했습니다.
1600년 동서 20만 대군이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 에 도쿠가와의 동군으로 참가해 전공 을 쌓으니 나카쓰성의
부젠국은 호소카와 타다오키 細川忠興(세천충흥) 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더 큰 영지인 치쿠젠(후쿠오카)
을 얻으니 1601년 부터 후쿠오카성을 쌓고는 후손들이 수백년을 계속해 오래토록 후쿠오카를 다스렸습니다.
구로다 나가마사 가 후쿠오카의 번주가 된데는 아버지인 구로다 요시타카(간베에) 의 도움도
컸으니.... 히데요시가 죽은지 2년 후인 1600년 일본의 왕 자리를 두고 동서 20만 대군이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 가 벌어졌을 때, 일본 전국 도처에서 30만 병사들이 전투를
벌였으니, 이때 요시타카는 아들 나가마사에게 성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 한 상태 였습니다!
그런데 규슈는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에게 충성하는 서군의 본거지이니 서군 세력이 강한지라
가문의 부흥을 꿈꾼 옛 북규슈의 패자 오토모 요시무네 가 일어서니..... 은퇴했던
구로다 요시타카 는 급히 떠돌이 무사 낭인과 백성들을 돈을 주고 모병해 1만군 을
편성해서는 분고국 (豊後國 풍후국) 이라 불리던 오이타 남부 6만석 기쓰키성으로 남진 합니다.
오토모 요시무네 가 그 전에 서군인 히로시마의 모리 데루모토의 지원을 받아 기쓰키성으로 진군 한
때문인데, 당시 기쓰키성은 멀리 떨어진 교토 인근에 12만석 단고국 영주인 호소카와 타다오키
의 영지였으니.... 기쓰키성은 중신인 마쓰이 야스유키와 아리요시 타치유키 가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오토모 요시무네군이 성에 육박하자 이에 마쓰이 야스유키는 같은 동군에 속한 구로다 요시타카 에게
구원을 청하니... 그는 1600년 9월 13일 이시가키바루에 육박해 오토모군을 격파 하고 여세를
몰아 서군에 속한 아키성, 도미구성, 우스키성, 쓰노무리성과 히구마성, 사에키성, 고쿠라성
을 공략해서 규슈를 거진 평정했으니.... 이런 공적으로 아들 나가마사가 후쿠오카를 차지한 것입니다.
구로다 나가마사 는 영악한 자 이지만 전란의 시대에 자칫 줄을 잘못 섰다가는 자신과 가족에 가문은 물론이고
오래토록 대를 이어 모셔온 가신과 사무라이들까지 목숨을 잃거나 낭인 이 되어 패가망신하는 것이라....
그렇다고 냉혈한은 아니니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에 동점심 을 버리지 못한 탓에 1614년 오사카 전투
를 앞두고는 의심받아 가토 요시아키,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에도에 억류되는 큰 고초 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옛날 센고쿠 시대 전란과 구로다 나가마사가 후쿠오카를 영지 로 받은 과정을 생각을 하는 새에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 입국수속을 받는데.... 딸이 대표로 비지트 재팬 수속을 했으니 절차가 간단한
푸른 줄 에 설줄 알았더니 난데없이 사전 수속없이 입국한 사람들이 서는 붉은 줄 에 서는지라 당황합니다.
나중에 들으니 우린 미리 비지트 재팬 앱에 등록 수속을 했지만 코로나 백신 접종을 받지 않은
아이들 3명 이 포함된 대가족이라 다른 줄에 서게 된 것이라는데.... 딸이 카톡으로 백신
큐알코드를 내 휴대폰에 보내준 탓에 이 화면을 보이고 수속을 해서 입국심사대를 통과합니다.
그 전인 2022년 10월에 우리 부부만 도쿄로 입국 했었는데, 저 비지트 저팬 앱에 사전등록을 하지 않아
붉은 줄에 섰지만 도우미들이 자상하게 도와 주는지라 30분 정도 걸리기는 했지만 별 탈 없이 입국
할수 있었으니 궂이 안해도 됩니다. 셔틀버스 를 타고 국제선 공항에서 국내선 공항으로 이동을 합니다.
후쿠오카공항에서 지하철을 타거나 렌트카 를 빌리려면 국내선 공항 으로 가야하는 것인데
마침 점심 때가 넘었기로 윗층으로 올라가서는 여러 식당을 구경하면서 둘러보고는
그 중에 한 식당으로 들어가서는 덴뿌라 정식등 여러가지를 시카는데, 우린 7명 대식구 라.....
초등학생 2명은 1인분씩 시키기에는 양도 많고 점심값도 부담 되는데다가 울 마눌
과 딸도 양이 적은지라..... 그럼 5인분만 시키자니 문득 옛 일 이 떠오릅니다.
옛날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우리 일행은 직장 동료 2명등 3명 이라 도쿄 신주쿠의
한 술집에 들어서서 생맥주 나마 비루 3잔과 안주 2개 를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술집 종업원이 주문을 받지 않고 자꾸 무어라 설명 을 하는데..... 내 짧은
일본어 탓에 무어라 하는지 이해가 안돼 동료가 영어로 물어보니 이번에는
종업원이 영어에 서투른지라 5분이나 지나도 해결될 기미 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 참 답답하네!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그냥 주문한 대로 가져다 주면 되지? 그러자
설명이 안 통하는지라 종업원도 답답했던지 손가락 3개 를 펴서 보이길래....
아? 안주를 사람 수 대로 3개 를 시켜야 하느냐고 물으니 종업원 얼굴이 활짝 펴지더라는?
사연인즉.... 안주 한 접시는 아주 싼 편 으로 우리나라에서 처럼 큰접시 에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작은 접시에 각자 자기 자신의 안주만 을 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세 사람이 고깃집에 가서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구워 먹은후 된장찌개
하나에 공기밥 3그릇을 시키면..... 큰 뚝배기에 끓여 나온 된장을 숟가락 3개 가
함께 먹으며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에서는 작은 된장(미소시루) 3개를 각자 먹는다는?
그리고 계산도 철저하여 특별한 경우가 아닌한, 한 사람이 다 내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나누기 3 하여 각자
가 내는 분빠이((分配) 를 뜻하는 와리깡 (割り勘), 다시말해 더치페이 (dutch pay) 가 원칙 이랍니다.
와리깡은 와리마에칸조 (割前勘定) 의 준말로 더치페이를 뜻하며, 비슷한 말인 와리비끼
(わりびき) 는 할인(割引) 이라는 뜻으로 와리(わり) 는 나눈다는 의미의 일본말 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신용카드 불법할인 판매(대출) 이라고....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신용카드로
가짜 매출전표를 만들어 선이자를 떼고 빌려주는 불법 할인대출 행위를 와리비끼 라고
하지 않고 와리깡 으로 잘못 말하다가 이제는 “카드깡” 이란 말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불법 입니다.
저 술집에서 3,600엔이 나와 계산하는데 종업원이 어떤식으로 할거내고 물으니 당연히 와리깡이지만 2가지
방법이 있는데, 나누기 3 해서 1,200엔씩 낼수도 있고 아님 각자 먹은 안주는 500엔, 600엔, 700엔
이니..... 자기 술값을 자기가 계산 한다는 의미에서 1,100엔, 1200엔 그리고 1,300엔 으로 낼 수도 있답니다?
일본인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남에게서 대접 을 받으면 그것을 평생의 큰 부채 로 생각하기 때문에 되갚기
전까지는 마음이 편치않은 것이니, 따라서 아예 처음부터 남의 신세지는 것을 아주 꺼려하여 피함으로써
기무(의무義務) 의 큰 짐에서 벗어나고자 하여 자기 몫은 1원짜리 까지도 계산하여 각자가 내는 것이라 합니다.
루스 베네딕트 가 쓴 ‘국화와 칼’ 이라는 책에 보면.....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한 일본인 고유의 가치관을 하지(恥,수치심), 온(恩,은혜),
기리(義理,의리), 기무(義務,의무) 라 보았으니 이런 일본인의 특성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고는 공항 밖으로 나와서는 횡단 보도로 길을 건너서는 다시 100미터를 되돌아 걸어서 렌터카
사무실 에 도착하니 같은 곳에 아비스 AVIS 와 부젯 Budget 두개가 있으니 같은 회사인가 봅니다?
우리는 그 중에 인터넷으로 사전에 예약한 부젯 Budget 이라는 사무실에서 8인승 승합차 를
인수하는데 며칠 후에 반납을 대비해서 작은 흠짓 까지 미리 사진 촬영 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