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1일 화요일
[(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반드시 주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이루고 만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시며,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나의 말은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5,10-11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자세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계신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고,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주신다는 것이 언제나 기쁘고 감사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겟세마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달라고 하시고 나서, “그러나 …… 아버지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청하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하느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믿음을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겸손해지고 싶다고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제가 겸손해질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한계와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맞닥뜨리게 해 주셨습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제 자신을 탓하며 보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믿음을 지키기가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제는 그 시간이 저에게 필요하였으며, 제가 청하였던 겸손함의 진정한 뜻을 알아가는 과정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제가 겸손해지기를 청하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겸손임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우리가 매일 바치는 기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잡신을 섬기던 이스라엘 주변 이민족들의 기도 습관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기도는 길고 장황하고 요란스러웠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과거 우리나라 무속인들처럼 기도했습니다. 징이며 북 등 타악기를 통원해서 분위기를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잡신들을 불러냈습니다. 길길이 뛰고 작두를 타면서 몸을 워밍업시키고 마침내 탈혼, 접신 과정을 통해 잡신이나 영혼들을 불러내 대화를 시작합니다.
가급적 더 힘센 신을 불러내 원하는 바를 집요하게 청하고 또 청합니다. 여의치않으면 더 강도를 높여 압박하고 밀어붙여 잡신이 어쩔수 없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그런 식의 웃기는 기도를 바쳤던 것입니다.
이방 민족들의 그런 저급한 형태의 기도는 자연스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스며들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길고 장황하게, 이 말 저 말 붙이고 또 붙였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압박하고 강요하는 불경스런 행위였습니다.
가만히 진단해보니 오늘 우리 기도 안에도 그런 이방인들의 기도 요소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 죽었다 깨어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지나친 요구나 무리한 청원을 세상 집요하게 반복합니다. 어떤 청원 기도는 듣고 있노라면 너무나 황당해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기복적이고 미성숙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 아닌 기도를 끝도 없이 되풀이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신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비록 짧지만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기도의 모델, 구체적인 기도의 방식을 명확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특징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께 최우선권을 두는 것입니다.
기도 때,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크게 불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가 미성숙한 기도에서 보다 성숙한 기도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나 중심의 기도에서 공동체 중심의 기도, 하느님 중심의 기도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만사형통과 가화만사성도 청해야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또 다른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더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 3월에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을 할 수 있는지 제안을 받았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있을 때 기획했던 프로그램이라서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1년 정도 시간이 있었기에 ‘올바른 가톨릭 신앙’이라는 주제로 준비하겠다고 했습니다. 1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면서 ‘부담’이 되었습니다. 소화가 안 되는 음식을 먹은 것처럼, 손이 닿지 않는 곳이 가려운 것처럼 불편했습니다. 지난 2월 16일 강의에 앞서 뉴욕에서 함께 했던 부부가 달라스를 방문했습니다.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에 함께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부부는 팬데믹 때도 줌으로 하는 강의를 함께 했고,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이번에도 컴퓨터와 모니터를 연결해 주었고, 강의 자료를 영상으로 만들어서 강의 중에 화면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강의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기꺼이 함께 해준 부부에게 감사드립니다.
강의 내용 중에 ‘안다.’라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3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기억’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미사성제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상황 대부분은 기억하는 겁니다. 이름을 기억하고, 사건을 기억하고, 시간을 기억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문제해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이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죽어야 할 여인을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소경, 듣지 못하는 사람, 열병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은 본인이나, 조상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고, 절망 중인 이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파타(열려라.)’입니다.
세 번째는 ‘믿음’입니다. 신앙인들은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성과 이성은 무한하신 하느님을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에 살던 분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고, 삶을 윤택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아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인종차별을 하였고,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는 것을 믿음으로 승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기억을 넘어, 문제해결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 아버지의 뜻이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뜻’은 도덕과 정의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선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를 이야기했고, 공자는 ‘인의(仁義)’를 강조했습니다. 결국 모두가 말하는 것은 선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세상,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 직장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더 따뜻한 말 한마디, 더 너그러운 이해가 있을 때, 우리는 하늘의 뜻을 땅에서도 이루는 것이 됩니다. ‘아버지의 뜻’은 환경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기도를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작은 행동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 그리고 이 사회가 조금씩 변화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 만큼 하느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15)
하느님 계시니
나 있을 수 있으나
나 있는 만큼
하느님 계실 수밖에
하느님 믿으시니
나 믿을 수 있으나
나 믿는 만큼
하느님 믿으실 수밖에
하느님 바라시니
나 바랄 수 있으나
나 바라는 만큼
하느님 바라실 수밖에
하느님 사랑하시니
나 사랑할 수 있으나
나 사랑하는 만큼
하느님 사랑하실 수밖에
하느님 하시니
나 할 수 있으나
나 하는 만큼
하느님 하실 수밖에
하느님 이루시니
나 이룰 수 있으나
나 이루는 만큼
하느님 이루실 수밖에
하느님 살리시니
나 살릴 수 있으나
나 살리는 만큼
하느님 살리실 수밖에
오늘의 성인
성 에울로지오(Eulogius)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코르도바(Curdoba)
활동연도 : +859년
같은이름 : 에울로기오, 에울로기우스, 에울로지우스
에스파냐의 코르도바가 무어인들의 통치를 받을 때 그곳의 이름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난 성 에울로기우스(또는 에울로지오)는 스페란도 원장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학덕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성서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나바라(Navarra)와 팜플로나(Pamplona)의 많은 수도원을 위하여 규칙서를 저술하였다.
850년 무어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그도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두 그리스도인 여성인 플로라(Flora)와 마리아(Maria)를 위하여 “순교에 대한 권고”를 썼다. 그 두 여성은 처음에 노예로 팔려가도록 결정되었으나 에울로기우스의 권고에 힘입어 며칠 후에 순교하였다. 그런데 에울로기우스 자신과 다른 몇몇 죄수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석방되었다. 그 후에도 박해가 계속되었는데 그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는데 지칠 줄 몰랐다. 그는 톨레도(Toledo)의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착좌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런 와중에서도 이슬람교에서 개종한 레오크리티아(Leocritia)란 여성을 도왔는데, 그 당시의 법으로는 이런 개종자는 즉시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그녀를 피신시켜야만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녀가 발각되었고 또 그녀를 도와 준 이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이때 에울로기우스도 사형을 받았다. 그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기록한 “순교록”을 저술하였고, “호교론”을 남겨 그리스도교 신앙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크게 역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