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스톤헨지 돌기둥과 그 위에 가로로 놓인 상인방 구조를 볼 수 있다. 대략 기원전 3100년경부터 기원전 1100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세워졌다고 추정된다. 큰 돌은 높이가 7미터에 무게가 30톤쯤 된다고 한다.
17세기 초 제임스 1세는 스톤헨지를 보고 흥미를 느껴 건축가 조운즈에게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조운즈는 스톤헨지에서 로마식 설계양식과,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식 기둥 배치방식을 확인했기 때문에
고대 로마인이 스톤헨지를 건설했다고 생각했다. 옷을 걸치는 것조차 잘 몰랐던 야만인인
고대 브리튼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보기에는 스톤헨지의 건축양식이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스톤헨지를 상공에서 본 모습
스톤헨지는 돌기둥과 상인방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스톤헨지를 상공에서 보면 손거울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손잡이에 해당하는 부분은 스톤헨지의 중심으로
향하는 길로서 큰길(大路)이란 뜻의 아베뉴라고 부른다. 그 입구 근처에 있는 것이 힐스톤(뒤꿈치), 중심에서
바깥쪽을 향해 트리리톤 · 사르센원 · Z구멍 · Y구멍 · 오브리 구멍 · 주구의 순서로 되어 있다.
스톤헨지에는 가까운 곳에서 구할 수 있는 사르센석 외에도 무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구한
청석이 사용되기도 했다. 학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그 청석을 신성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학자들은 이 놀라운 구조물이 왜 건조되었는지 규명하기 시작했다. 스톤헨지가 방어를 위한 성채도 아니고
거주 공간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곳에서 생활한 흔적이 없다는 것은 토기의 파편 등 거주에 필요한
생활필수품의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으로도 증명된다.
실베리힐 근처에 생긴 미스터리 서클
실베리힐 부근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 서클이 자주 등장한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 5월에는 폭풍이 지난 뒤 실베리힐 정상에 지름 2미터의 깊은 구멍이 생기기도 했다.
옛 고대인들이 지옥의 문으로 통하는 구멍을 막기 위해 이 언덕을 세운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돌 자체에 초자연적인 힘이 내재한다는 믿음, 혹은 돌에 조상의 영혼이나 신령 등 영적인 존재가
강림한다는 생각에서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프레셀리 지방에 병을 고치게 하는 샘들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고대의 성지 참배자들이 방문하는 순례지였을 것이란 얘기도 있다. 또 장례식을 치르는 장소였다는
주장과,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는 주장도 있다.
스톤헨지에 대해 그 어떤 과학 단체에서도 정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는 가운데
솔즈베리의 이 거석군은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초자연적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스톤헨지가 만들어졌을 무렵 그리스의 동쪽 지방은 이미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접어들 때였다.
청동으로 도구를 제작할 때는 주석(朱錫)을 꼭 섞어야 한다. 주석의 주요 산지 중 하나가 영국 남부에 있는
콘월반도였다. 당시 이집트나 그리스의 상선들은 스페인 · 프랑스 북부 · 영국 · 아일랜드 방면으로 항해를 했고
특히 그들이 무역을 활발히 했던 곳에는 거의 모두 거석들이 세워져 있다. 당시의 상인들이 원주민들에게
거석을 건설하는 기술을 알려주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주석을 구하려는 상인들이 원주민들에게 거석을 쌓는
방법을 알려주어 스톤헨지가 건설되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스톤헨지 근처에서 300개 이상의 선사시대 분묘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수는
영국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다. 농경사회에서 인구가 증가해 사회를 조직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지배계급에서 이 같은 거대 구조물을 통해 사회를 결속시켰다는 설도 있다.
스톤헨지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에이브베리의 서클스톤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거석 유적지로 지름 400미터의 거대한 원 모양의 고랑에 둘러싸여 있는데
약 100개의 선돌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그 고랑은 밑바닥에 흙담 윗부분까지 최고 17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기원전 3000년 전쯤에 세워졌다고 추정되며 마치 스톤헨지의 구조를 확대해놓은 듯하다.
중세시대에는 이곳이 악마의 두목과 마녀가 잔치를 벌이는 곳이라고 하여 근처 주민들이
피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유럽의 거석 기념물 건설이 기원전 1400년경부터 갑자기 중지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학자들도 있다.
이 무렵 유럽에서는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번영한 미노아문명이 붕괴되었고 기원전 1200년경부터는
‘바다의 민족’이 유럽에 침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대사건으로 인해 이집트를 포함한 지중해
지역 사람들이 기념물 건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스톤헨지의 구조를 볼 때 천문학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스톤헨지가 제사 등 의식을 치르던 곳이라고 추정한다.
초기 목조 건축물 단계에서는 유물의 중심부에 목재를 원형으로 세워 중심부로 일반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통제했다. 이 유적의 심장부에서 바깥을 바라볼 수 있었던 소수의 특권층은
태양이 하짓날 아침 진입로 위로 뜨는 순간이 1년 중 가장 중요한 때임을 인식하고
감격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1750년 스톤헨지에서 주민들이 의식을 벌이고 있는 모습
중세에는 스톤헨지를 키가 5미터나 되는 거인의 묘라고 생각하거나 노아의 홍수 이전에
살았던 악마나 마법사가 만든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2003년에 발표된 스톤헨지의 수수께끼에 대한 새로운 가설도 주목거리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앤서니 퍼크스는 〈스톤헨지: 의학적 견해〉라는 논문에서 스톤헨지를 건설한 사람들에게 있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탄생과 죽음이었다며 스톤헨지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여성의 성기와 뚜렷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청석으로 쌓은 내부의 원은 소음순, 그 둘레에 사르센석으로 쌓은 큰 원은
대음순, 가운데 제단석은 음핵이며 중심부의 터진 통로는 산도(産道)를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퍼크스는 스톤헨지와 이웃한 우드헨지에서 발견된 희생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어린이의 유해는
이 같은 이론을 뒷받침해준다고 주장했다. 고대사회에는 대지의 어머니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스톤헨지를 만든 사람들에게 어머니 대지는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동식물을 낳는 산도를 뜻했다는 것이다.
스톤헨지는 한동안 지역 족장들의 매장의식을 거행한 곳으로도 알려졌고 다산을 기원하는 상징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스톤헨지를 복원한 그림 일부 학자들은 스톤헨지를 여성의 성기 구조와 비슷하다고 본다.
대지의 어머니를 숭배하는 신앙, 다산 신앙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수많은 비밀과 전설을 간직한 채 오늘도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스톤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