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댕이 젓갈
고양일(2021.8. 신인상. 부산)
가을 날씨가 맑고 바람도 한결 부드러운 오후다. 모처럼 보수동 헌책방에 들러 책 몇 권을 골라 살까 하고 채비를 하는데 느닷없이 아내가 부평동 시장에 들러 밴댕이 젓갈을 사오라는 것이다. 곁들여 전번에 사 온 것은 밴댕이는 적고 땡초만 많았으니 이번엔 특별히 밴댕이를 많이 받아오라는 당부였다. 오늘은 서실의 습작도 땡땡이를 치고 모처럼 가을바람에 맑은 햇빛 받으며 살방살방 가벼운 걸음으로 책방 나들이를 할까 했는데, 아내의 지엄한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거운 부담만 안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줄곧 밴댕이에 대한 생각과 아내의 당부 말 때문에 차창 밖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즐거움조차 잊고 있었다.
밴댕이 젓갈은 내가 좋아하는 반찬 중 하나다. 밴댕이와 매운 땡초를 곁들여 곰삭힌 젓갈은 그 맛이 웅숭깊은 시 한 구절처럼 감칠 나고 맛깔스럽다. 고소하고 짭조롬한 밴댕이 젓갈의 풍미와, 입안이 화끈하게 매운 땡초가 어우러져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낸다. 떨어진 식욕을 돋우어줄 뿐만 아니라 한 숟가락 뜨거운 밥술에 얹어 먹으면 밥 한 그릇쯤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다. 나는 그동안 객지 직장생활로 회사의 식당 밥에 익숙해 있어 밴댕이 젓갈 맛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느닷없이 젓갈을 사 들고 와서 오랫동안 닫아 놓았던 나의 입맛을 ‘빵’ 터뜨린 것이다.
밴댕이는 청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이다. 몸길이가 겨우 어른 가운뎃손가락 크기에 불과하고 모양이 전어와 닮았다. 늦은 봄에 인천 등 서해 해변에서 많이 잡히고 고기가 연하고 맛이 좋아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 조선 시대 문인 옥담이응희는 밴댕이를 두고 ‘밴댕이가 어시장에 잔뜩 나오니 / 은빛 모습은 마을을 뒤덮고 / 상추쌈에 싸 먹으면 맛이 으뜸이고 / 보리밥에 먹어도 맛이 달다.’라고 읊었고,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밴댕이 젓갈을 구해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보냈다는 구절이 있을 만큼 맛이 뛰어난 밴댕이 젓갈로 효도를 했다고 한다.
책방에서 안면이 있는 주인을 만나 종이상자에 쌓아둔 책을 뒤적이다가 전혜린의 수필집 『목마른 계절』과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을 발견하고 두 권을 샀다.
전혜린 수필집은 초판이 1976년, 1991년에 2판 5쇄 발행하였고 한용운 시집은 1991년에 초판 인쇄가 된 책이다. 세월 깊숙이 잠겨 있던 이 책의 주인이 된 나는 마치 진흙탕에서 보석을 캔 것처럼 기쁘고 행복했다. 큰 책방에서 칼칼한 종이에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새 책보다는 비록 손때가 묻고 오랜 세월이 배어 누렇게 바래었으나 묵은 정감이 훈훈하게 가슴에 담기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옥담의 시 구절처럼 상추쌈에 싼 밴댕이 맛이다. 다행히 책에 낙서 하나 없고 밑줄 그어진 곳이나 종이 한 장 접어진 흔적이 없어 얼굴이나 이름도 모르는 책 주인의 정갈한 마음씨가 고마울 따름이고, 두 사람의 걸출한 작가의 주옥같은 문장을 담은 책을 나에게 넘겨준 행운에 감사한다.
IMF가 발생한 그 이듬해 1월 경기도 여주의 한 변두리에서 내 평생의 마지막 직장으로 똬리를 튼지 어언 18년, 그로부터 다시 4년이 지난 오늘 부평동 시장은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모두가 변해 있었다. 통로 바닥에 다닥다닥 붙었던 좌판대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낮에도 환한 불빛이 홍등가처럼 밝았다. 아내의 말대로 오랜 기억을 더듬어 어렴풋이 비슷한 가게를 찾았다. 처음, 아내와 같이 시장에 왔다가 맛보기로 밴댕이 살점을 찢어 나의 입에 넣어 주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때의 밴댕이젓갈과 깻잎을 담은 양은대야 대신에 몇 배나 많은 스텐대야가 밝은 불빛에 번쩍이고 있었다. 할머니의 땅바닥 좌판대는 며느리나 딸쯤 돼 보이는 한 여자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할머니와 젊은 여자 두 사람이 할머니를 돕고 있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할머니가 여태 장사를 하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렵고 지금의 할머니는 그때의 딸이거나 며느리일 것이고 지금의 젊은 여자들은 지금 할머니의 딸이거나 며느리라고 짐작되어 세대를 옮겨가는 세월이 흐르는 강물 같아서 감회가 깊다. 아내의 당부대로 땡초 대신 밴댕이를 많이 달라 간청했더니 할머니는 옛날처럼 기분 좋게 땡초 속에서 밴댕이를 골라 주섬주섬 비닐봉지에 담아 주었다. 할머니는 20년 전에 아내와 내가 할머니 양은대야 단골이었음을 알 리가 없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차가 흔들릴 때마다 불현듯 책과 함께 젓갈을 싼 비닐봉지가 걱정이 되어 가만히 봉지에 손을 넣고 책의 안부를 물었다. 다행이다. 책은 무사했다. 행여나 젓갈 봉지에서 끈적한 국물이 흘러들었을라.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책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젓갈은 먹지 못해도 이 책은 버리면 다시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밴댕이는 몸체도 작지만 크기에 비해 내장이 들어 있는 속이 매우 작은데다가 성질이 급해서 그물에 잡히자마자 죽어 버리고 말아 밴댕이를 잡는 어부들조차 ‘살아있는 밴댕이를 본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속이 좁고 옹졸한 사람, 쉽게 토라지는 사람을 가리켜 ‘밴댕이 소갈머리’라 한다.
요즘처럼 세상이 척박할수록 밴댕이 소갈머리 비유는 점점 많아진다. 우리가 사는 이 좁은 땅에서 밴댕이들이 밴댕이들을 탓하며 아등바등 싸우는 소갈머리들을 보면 나 자신이 밴댕이 속이 되어 가슴이 답답해진다. 남의 소갈머리를 탓할 것도 없다. 나의 소갈머리는 어떠한가. 나의 소갈머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 받고 상심했을까. 밴댕이라는 한 마리 물고기가 이렇게 마음을 갈라놓는다.
버스에 내려 어느덧 집 앞 건널목에 다다랐다. 심부름의 결과가 궁금하다. 아내의 판결에 따라 나의 저녁 밥숟가락에 얹어 주는 밴댕이 살점이 정해질 것이다.
첫댓글
고양일 선생님.
2021년 8월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과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으로 환영합니다.
앞으로 부산지부에서 자주 뵐 수 있겠지요.
등단작품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양일 선생님
밴댕이 젖갈 잘 읽었습니다. 읽어가는 동안 입안에서 침이 고입니다.
앞으로도 맛갈나는 수필 많이 발표하시기를 빕니다.등단을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고양일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매번 좋은 글을 쓰시는데 앞으로 더욱 기대가 됩니다.
수필의 길에 들어서서 더욱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고양일 선생님, <밴댕이 젓갈>로 신인상 수상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입맛 없는 염천에 밴댕이 젓갈을 읽으며 입맛을 찾습니다. 왕성한 활동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