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상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생존자는 5명으로 톰, 케빈, 잭, 존, 한나이고 사망자인 마가렛은 사과, 제임스는 올리브, 크리스티나는 레몬과 연결되고 다음 희생자는 의문의 남색 과일과 연결된 듯합니다. 그런데 이번 과일은 실제 과일이 아닌 그림이고 범인에게 주어진 힌트는 1. ABC 살인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 (과일의 무엇과 사람이름이 연결?) 2. 살인 순서는 정해지지 않았고 과일과 사람의 연결은 고정되어있다. 3. 침이 빠진 회중시계입니다.”
제임스가 정리를 끝내고 플레이어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이 느려진 것처럼 보인다. 사람의 물건을 처음 보는 원숭이의 눈빛이다. 물끄러미 과일그림을 바라보고 있던 톰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임스 앞에 가서 가지고 갔다. 그림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무슨 과일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종이에서 나는 코를 때리는 딸기향은 천연의 향기와는 바다저편만큼이나 달랐다. 향기 나는 싸인펜으로 썼나보다. 하지만 이 그림이 딸기를 지칭한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이 그림이 미싱링크 찾기에 큰 이득이 될지.”
“굳이 그림을 써야할 이유를 찾아내면 큰 이득이 되죠.”
옆에 앉은 잭이 거들었다.
“이 그림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실제가 아닌 그림이다, 남색이다, 과일이다 뿐입니다. 그런데 과일그림이 어떤 특정한 과일종류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원래 이 게임에서 과일종류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럴 리가요. 이전까지는 다양한 종류의 과일을 사용했기 때문에 과일종류가 연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원래 사용하려던 과일을 구하지 못해서 그림으로 대체했다라고요.”
“실수가 아니라면 범인이 완벽하게 준비를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추리소설 애독자이시니까요. 그리고 그런 경우라면 그림보다 사진을 사용했겠지요. 단서를 플레이어들이 알지 못하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과일종류가 아니면 과일모양?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과일 모두 동그란 모양이라서 의미가 없고 색인가? 그럼 잭 씨, 과일종류가 관련이 없다고 치고 색이 연관이 있다면 범인은 왜 실제 남색 과일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대답은 잭 대신에 노트북을 두들기던 케빈이 답했다.
“인터넷에 쳐보니까 남색 과일은 블루베리 밖에 없습니다. 블루베리는 이 저택 바로 앞에 마트에서도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블루베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블루베리는 다른 살인에서 사용하려는 게 아닐까요?”
“앞전에 과일의 특정한 어떤 것은 우리의 이름과 연결되어있고 고정되었다고 한다면 또 남색 과일을 사용한다는 뜻입니까? 그럼 규칙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과일의 색깔이 정확하게 남색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예를 들어 블루베리의 경우, 익으면서 색깔이 달라집니다. 익기 전에는 연두색에서 파란색을 거쳐 남색이 됩니다. 범인이 파란색 과일로 블루베리를 사용하고 남색은 없으니까 하는 수 없이 그림으로 대체했다. 이러면 설명이 됩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진을 못 쓴 거구요.”
“과일의 색깔을 따져보면 우리에게 제시된 과일색이 사과는 빨간색, 올리브는 녹색, 레몬은 노란색, 그리고 남색입니다. 우리는 Red > Margaret Isle, Green > James Newton, Yellow > Christina Ester, Bluish Violet > ?의 연결을 찾아야 하네요.”
“첫문자가 시저암호처럼 환자(Substitution)된 건가? 이니그마(Enigma)나 콜로서스(Colossus)를 빌려와야겠는데?”
“안타깝게도 콜로서스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사라졌습니다. 우리에게 회중시계라는 단서가 있으니까 이 지점에서 사용해보시죠.”
모두의 시선이 그동안 사용된 과일을 담은 접시 곁으로 이동했다. 침이 없는 은색의 둥그런 회중시계는 단서로는 난해했다. 풀이에 도움을 줄 망정이지 오히려 실타래처럼 꼬는 것 같다. 시계란 시간을 나타내는 기계인데 침이 없으니 시간을 알 수 없다. 기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이상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고치거나 재활용하거나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게 단연하다. 이 단서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둥그렇다는 것이 단서인가. 시계의 재질이 단서인가. 시계에 쓰인 로마숫자가 단서인가. 여러 추측이 난무하지만 8명 중에 아무도 그럴 듯한 단서를 짚어내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40분 후, 남색 과일에 해당하는 피해자는 침대 위에서 뚜껑 열린 약통에서 나온 똑같은 모양의 캡슐형 알약에 둘러싸인 채로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케빈이었다. 그가 오른손에 쥔 과일은 블루베리. 피해자의 추측이 들어맞았던 것이었지만 자신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블루베리는 영롱한 파란색을 띄며 남은 4명의 생존자를 우롱하는 느낌을 주었다. 범인을 제외한 7명의 플레이어들은 고전추리소설에서부터 현대추리소설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간 많은 추리소설을 읽었고 다양한 미싱링크를 접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아니, 실제로는 이런 미싱링크를 접할 기회가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지만 말이다. 추리의 실패가 명쾌하게 악당을 지목하는 형사나 미스터리를 깨트리는 탐정의 환상을 깨트리는 충격은 어떠한 것보다 묵직했다. 후반부에는 실패의 불안감이 두뇌에 달라붙어 회전을 저지한다. 8명은 또다시 30분을 허비하고 10분 후에 피해자를 발견했다. 블루베리에 해당한 톰은 유리재떨이와 침대에 곤히 누워있다. 이전에 4명과 똑같은 포즈. 과일은 주황색으로 잘 익은 통통한 감이다. 육안으로는 떫은맛인지 단맛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그리고 톰의 머리에 눌린 A4용지가 범인의 마지막 지령을 전달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지만 아무도 막지 못했군. 다음 피해자를 마지막으로 게임을 끝낼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사람은 3명. 3명 중에는 분명이 범인인 내가 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2명 중에서 다음 표적을 정확하게 짚어낸다면 여러분의 승리로 끝내고 그렇지 못하면 패배. 그리고 3명은 지금부터 추리에서 빠지고 묵비권을 행사한다. 이 시점에서 범인은 자유롭게 추리를 말하지 못하니까 핸디캡을 줘야지. 그리고 정답을 맞추더라도 미싱링크를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면 승리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운영자가 3명의 유력자로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으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군요. 이상.”
생존자 3/8
사과 > 마가렛 > 올리브 > 제임스 > 레몬 > 크리스티나 > 남색 과일? > 케빈 > 블루베리 > 톰 > 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