訥隱先生文集卷之十三 墓碣銘 李桃村墓碣陰記
【자손 중에서 공이 관란 원호, 어계 조려와 함께 치악산 속에서 노닐면서 이름을 적은 작은 첩자(帖子)를 구한 이가 있었다. 그 해가 사육신이 죽음을 당한 해에 있었을 것이나, 적힌 일(日)과 월(月)이 그보다 조금 앞선다. 상왕께서 영월로 유배되어 순흥의 화가 일어날 때로 본다면, 또 요원하여 징험할 길이 없다.
子孫有得公與元觀瀾昊,趙漁溪旅。同遊於雉嶽山中。題名小帖子。其年在六臣就死之歲。而日月稍先之。及上王遜越。順興禍作之日。則又窅然莫之徵矣。】
《 눌은집 눌은선생문집 13권 묘갈명 이도촌묘갈음기( 訥隱集 訥隱先生文集卷之十三 墓碣銘 李桃村墓碣陰記)》
【이것은 도촌 이공과 관란 원공, 어은 조공이 이름을 적은 기록이다. 이씨의 자손들이 그 첩을 전하고 있는데, 첫머리에 원공을 적고, 다음으로 조공을 적고, 그 다음으로 이공을 적었으며, 성명의 위에 각각 별호를 표시하였다. 하방에는 경태0년 3월16일에 치악산의 선돌에 쓰다. 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태泰’자의 아래, ‘년年’자의 위에는 1글자가 빠져있다. 눌옹 이공은 사육신이 죽음을 당한 해라고 단정하였는데, 그러나 이를 근거로 해 본다면, 마땅히 7년 병자년이 되어야 한다.
此桃村李公曁觀瀾元公,漁隱趙公題名錄也。李氏子孫傳其帖。元公首之。次者趙公。次者李公。而姓名之上。各以別號標之。下方題以景泰年三月旣望。書于雉岳立石云。而泰下年上缺一字。訥翁李公之定以爲六臣就死之歲。未知何所攷也。然以此爲據則當爲七年丙子矣。】
《여와집 여와선생문집 11권 서[일] 이도촌치악제명록서(餘窩集 餘窩先生文集卷之十一 序[一] 李桃村雉岳題名錄序)》
【이름을 새긴 것은 돌인데 옮겨 적은 것은 종이이니, 어느 시대,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연기에 그을리고 벌레가 먹어 겨우 자획을 분별할 정도인 것을 보면, 요컨대 수백 년 이상 된 물건이다. 題名者石也而移錄在紙。不知出於何時何人。然烟煤蠧蝕。僅辨字畫。要之數百年以上物也。】
《여와집 여와선생문집 11권 서[일] 이도촌치악제명록서(餘窩集 餘窩先生文集卷之十一 序[一] 李桃村雉岳題名錄序)》
[인용문헌] 문헌 속 역사적 고증을 통해 알아보는 단종의 유배시기 - 권경렬(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발표일 : 2015년 11월6일 13:00~18:00
장소 : 영월군청 2층 대강당.
2015 영월 문화재지역 주민공감정책 포럼
관풍헌 및 자규루와 단종 유적에 대한 문화재적 가치와 활용방안
주최 : 영월군
주관 : 한국문화유산연구센터
후원 : 문화재청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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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桃村墓碣陰記
桃村李先生葬在順興治之東十里黑石負艮之原。墓有石。前面書禦侮將軍忠佐衛副司正李某之墓。不書氏與行。蓋聞公享九十四春秋。有四子一女。子孫最爲繁衍。間有學士文人。豈不能顯揚公哉。何故沒其行與跡。歷數百載而無所徵與。有志者可以悲其意也。世傳公二十一。棄平市署令。歸老于榮川之桃村。其歸實在端廟遜位之年。公歸未二歲。而六臣者死矣。其志微。其行隱。後之人雖欲尋逐而不可得。或言公實棄典牲署令。而石面只書軍職。歷官次第。又不可知。蓋公嘗並令典牲,平市兩署。而後又付軍職與。當禪受之際。士之有才力者。無不攀附騰踔。以之弋奇勳取高位。公之子孫。猶傳公受知光廟。公歸之後。上常令方伯致食物而不屈致之云。方是時。左袒上王者。盡虀粉矣。生者爲毁形廢疾。遐遯以絶蹤。公勳臣胄。世居京師。弱冠。已筮仕受五品服。人情豈不念舊土懷寵祿哉。乃一朝離鄕去墳墓。捨知己主棄軒冕如糞土。而投荒遐寂寞之中。忍竆餓七十有餘年。足跡不一到京師。其心亦太苦矣。公婦翁金文節公淡。實與公同心。公之不之他而歸金公之鄕。有以也。子孫有得公與元觀瀾昊,趙漁溪旅。同遊於雉嶽山中。題名小帖子。其年在六臣就死之歲。而日月稍先之。及上王遜越。順興禍作之日。則又窅然莫之徵矣。其炳智先幾。高蹈以全身者可知已。當是時。不義從仕。而高擧遐引。如觀瀾,漁溪者。世稱六人焉。其跡俱隱。不可詳於今。而若公與文節則其隱又甚矣。文節猶有數句詩可徵。而公則竟泯焉。其平生文與武賢與不肖。俱不可知。然身愈隱而志益烈。名愈泯而節益不可及。只觀其弱冠棄官者何。七十餘年不向京宅者何。上數使人存問而不强致之者又何也。以其時。想其心與事。可以得其人矣。公諱秀亨。字英甫。江陵之羽溪人。其七世祖球十八。中元朝制科。官至禮賓卿。高祖薿佐我太祖。策開國勳。官中樞院副使,都評議司事。曾祖蔓虎賁衛經歷。大父仁淑德川郡守。父景昌軍資監主簿。娶藝文館提學安玖女。以宣德乙卯生公。至嘉靖戊子。爲九十四年。配宣城金氏。卽文節公之女。四子。大根縣監。養根別坐。盛根監役。峻根參奉。一女孫伯暾。自孫曾以下。多不可勝載。先王朝。端廟復位。當時死者。咸追復立祠。議者謂公之墓。不可以終無識如前。公六世孫吾表兄直講徵道謀諸同宗。思所以追刻石後而未果。今直講之弟弘道年八十一。徒步詣光庭泣語曰。莊園旣復。吾祖獨不可以無識。吾兄嘗有志不及。吾亦朝暮人。若爲我銘吾祖。光庭固辭以非其人而不可得。謹略識其始終如是云。上之十四年端陽日。莊寢郞平原李光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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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여와집 여와선생문집 11권 서[일] 이도촌치악제명록서(餘窩集 餘窩先生文集卷之十一 序[一] 李桃村雉岳題名錄序)
此桃村李公曁觀瀾元公,漁隱趙公題名錄也。李氏子孫傳其帖。元公首之。次者趙公。次者李公。而姓名之上。各以別號標之。下方題以景泰年三月旣望。書于雉岳立石云。而泰下年上缺一字。訥翁李公之定以爲六臣就死之歲。未知何所攷也。然以此爲據則當爲七年丙子矣。夫石之爲物。終古不泐。而其立者尤挺然不伏。三君子題名必於是。不以他人間之。其亦有取於斯石歟。雉卽原州鎭山。而原固元公所居之鄕也。方其携手登臨。藉草鼎坐。西山之佚詩可和也。中流之楚辭可詠也。拊其跡而想其心。有不傷心而隕涕者乎。題名者石也而移錄在紙。不知出於何時何人。然烟煤蠧蝕。僅辨字畫。要之數百年以上物也。噫自當時觀之。鐵其券而金其櫃者。輝煌震耀。何趐山阿片石。而霜降水落。百年論定。人之摩挲而咨嗟者。在此而不在彼矣。余按端宗元年癸酉。元公以集賢殿直提學謝病歸。又四年而六臣死。公之歸盖後於元公而六臣未死之前也。夫結心膂於知己之主。以圖一身之富貴。常情之所同欲也。追恩遇於執手之託。不顧九族之湛夷。天理之不容泯也。桃村其世則勳舊而年纔踰弱冠。塵埃之契素厚。監市之跡尙微。非集賢諸學士比也。又况宗社如故。粟非周粟。則何苦謝方來之榮而自投於寂寞之鄕。歿身而無怨悔哉。不可與徼福於前覬名於後者。同日而語。雖不與六臣同其死。而其志則未甞異也。光廟令守土臣常致食物以寵之。而終不屈以爵祿。其所築室。至今猶存。而壁其三面。唯一牖北出。與越中山相直。訥翁公名之曰千仞室云。公諱秀亨字英甫羽溪人。旣棄官。從其婦翁金冢宰文節公居於榮川之桃村。二十一而歸。九十四而終。後人爲之立祠祀之。號曰道溪書院。在順興府。公之九世孫慶携題名錄至都下。要余一言。遂並與公平生而畧叙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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