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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7. 언약을 세움(1)
2021. 9. 25. 이현래 목사
출애굽기 23장에는 여러가지 법률이 나오는데 읽어보면 상호관계의 법이니까 상식적이다. 하늘의 법이라고 하지만 인간 세상에 주어졌기 때문에 일반적인 법과 별로 다를 바 없다. 하나님 백성이라 해서 비상식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사는 것은 상식적으로 사는 것이니까 내가 누구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계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는 것이 원칙이다. 손해를 입힌 대로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니까 이런 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별로 없다. 그러므로 정상적으로 살면 문제가 없다. 율법이라해서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니다.
24장에는 언약을 세웠다는 말이 나온다.
열 말씀을 선포하신 후 제단에 관한 법을 정하여 주셨는데(출20장), 이것은 특별한 경우다. 일상의 법은 이런 것과 관계없는데 왜 제단의 법을 말씀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그를 대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그 앞에 있는 것이고 그를 대면하는 것이다. 그래서 흙으로 단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인위적인 것으로 하면 안된다. 돌로 할 경우에는 으로 다듬지 않은 것으로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흙으로, 다듬지 않은 돌로 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자신에 관해서는 사람의 손으로 한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는 손을 가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주신대로 받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주신 것을 받는 것이니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쉽다.
복음과 율법이라고 할 때 크게 내용의 차이는 율법은 내가 행하는 것이고, 복음은 은혜와 같은 말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 주셨다는 것이다. 내가 했느냐 하나님이 하셨느냐의 차이다. 율법과 복음, 율법과 은혜라고 말할 때 은혜는 받은 것이다.
나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받은 것은 은혜라고 할 수 없다. 돈이 있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고 은혜라고 하겠는가. 없는 사람에게 줄 때 은혜가 되는 것이다.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은혜가 아니다. 벌 수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은혜다. 돈을 벌 수 없는 사람은 감사하는데 있는 사람이 받으면 특별히 감사할 일이 없다. 삼성 회장에게 코로나 위로금이라고 25만원을 주면 그것을 돈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오히려 왜 세금을 낭비하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에 비해 진짜 어려운 사람은 그것도 굉장히 중요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이 위로금을 받지만 그 중에 감사하는 사람은 그 돈이 없어서 쩔쩔매는 사람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 준 것이 은혜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고 복음주의라고 하는데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해 주셨다는 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아무것도 아닌 말 같지만 이것이 복음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못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른 일 같으면 모르지만 내 자신의 생명에 관계된 문제인데 아메바에서 나왔다고 하면 복음이 되겠는가. 그 말이 옳을지는 몰라도 나에게 복음이 안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람으로 만드셨다고 하니까 복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이 귀중해야 복음이 되지 ‘나를 왜 인생으로 만들어 놓았느냐.’ 이러면 되겠는가. 죽지 못해 살면서 ‘하나님이 왜 나를 만들어 놓았는가?’ 이러면 복음이 안된다. 행복할 때는 부모가 나를 낳아주셨다는 것이 감사한데 불행해서 죽고 싶을 때는 ‘부모가 왜 나를 낳았는가.’ 하며 원망하게 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도 내 인생이 복될 때 감사가 된다. 복음이라는 말은 내가 못한 것을 해 주셨는데 그것이 나에게 복이 될 때 복된 소식이라고 한다.
보통 기독교에서는 복음은 죄를 사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죄사함이 복음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복음이 안된다. 내가 젊었을 때 고민했던 것이 그것이다. 부흥회를 가도 그렇고 성경을 공부해도 그렇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하고 그 죄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났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내가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예수님이 대신 죽어야 했는지 도저히 수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데 교회를 다니다 보니 이런 고민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다녀서 생긴 문제다. 어렸을 때는 문제가 안되었는데 신학 공부를 하다 보니 문제가 되었다. 목회자가 되어서 나가려고 하니 문제가 된 것이다. 이것이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뭔지 모르고 교리를 잘못 들어서 그렇다고 알게 되었다. 그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긴 것인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르는데 내가 무슨 죄를 알겠는가. 알려면 바로 알아야 되는데 잘 모르니까 그런 고민을 했던 것이다.
기독교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두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죄사함의 복음이다. 구원파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큰 문제가 되었다. 교회에서 죄 문제를 해결 못하고 밤낮 “죄 죄” 하던 사람들은 그때 그 말씀을 듣고 너무 좋아서 6개월간 발이 땅에 닿는지 안닿는지 모르고 다녔다고 한다. 교회에 가서 얻은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무슨 병인지 몰라서 치료를 못하다가 “성경에 우리 죄를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같이 희게 하셨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값을 지불하셨다. 이제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폭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특별히 장로교에서 많이 이탈해 나왔다.
극동방송에서 대구 칠성교회 권신찬 목사가 ‘은혜의 아침’이라는 설교를 했는데 거기서 그 방송을 듣고 대폭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요즘은 이천 명이 보통이지만 그때 여름 수양회를 했는데 ‘극동방송 청취자 수련회’에 이삼천 명이 모였다.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빌려서 집회를 했던 것이다. 우리가 마이산에서 집회를 할 때 그들도 그 부근 솔밭에서 개인 텐트를 쳐놓고 수천 명이 집회를 했다. 죄 문제가 그렇게 심각했던 것은 교회에서 죄를 말하면서 해결책은 주지 못했는데 구원파에서는 해결책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 침례교회에서 해외 선교를 하는 평신도가 한국에 와서 8명을 교육시켰는데 권신찬, 박옥수, 유병언이 그 중에 있었다. 한국 교계에 큰 교파가 생긴 셈이다. 미국 침례교에서는 당연히 이 교리를 배우는데 한국에는 없었던 것이라서 그런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에 관하여는 사람의 손으로 한 것을 싫어하신다. 어디서나, 언제나 관여하지 않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빗나가면 하나님도 고민이지만 인간도 괴롭다. 관계를 맞추는 것이 중요한데 관계는 회복 안되고 엉뚱한 짓만 벌어져 버리면 하나님 일이 되겠는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들끼리의 관계가 다르다는 말이다.
인간들끼리 관계에서 문제는 늘 있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문제니까 상호간에 갚아야 한다. 상대방에게 잘못을 해놓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끝나는 사람이 있다. 본인끼리는 해결이 안되었는데 자기는 하나님께 회개했다고 하는 것이다. 밀양이라는 영화의 내용이 그런 것이다. 이창동 감독이 기독교의 문제점을 꼬집어서 만들어놓은 것이 밀양이다. 사람끼리 지은 죄는 사람끼리 해결해야 되지 하나님과 해결한다고 되겠는가. 사람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는 그를 대면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이 말씀에 대해 어긋나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면할 때 인위적인 방법으로 대면하면 안된다고 한 것이다. 흙으로 지어진 인간은 흙으로 나서야 되지 벽돌을 만들어서 나서면 안된다는 것이다. 돌이면 있는 그대로 단을 쌓아야 되지 정으로 잘 다듬어서 쌓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흙보다 벽돌이 좋고, 자연석보다 잘 다듬은 돌이 좋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중심적으로 하나님께 나가려고 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전혀 원치 않으신다.
살아계실 때는 부모에게 불효해 놓고 돌아가신 다음에 정성을 다해서 제사를 드리면 되겠는가. 조상신이 와서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귀신이니까 다 알지 않겠는가. 조상신을 달래서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가증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흙으로, 다듬지 않은 돌로 단을 쌓아야 한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추호도 우리 손으로, 내 생각대로 하면 안된다. 내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면 안된다.
천주교회가 되면서 온갖 방법을 생각해 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니까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다.’ 하고 여러가지 의식을 개발해 놓았다. 미사를 드릴 때 보면 우리가 모르는 방법들이 많다. 향불을 풍기거나 춧불을 켜놓거나 특이한 옷을 입거나 하는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자연히 행동도 어떤 행위를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게 된다. 이런 것이 손으로 다듬은 것이다.
둘이 만날 때는 화장도 하고 잘보이려고 모르는 것도 아는척하고……, 그래서 그것을 보고 멋있다고 결혼했는데 막상 결혼을 해 놓고 보면 그렇지 않으니까 실망하게 된다. 그와 같은 것이다. 사람은 모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상대하는데 그렇게 해서 되겠는가. 그래서 종교적인 의식이나 제도나 교리 같은 것들은 하나님께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대면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관해서는 절대로 사람이 손대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의 창조에 사람이 손을 대면 되겠는가. 어떤 유명한 화가가 필생의 작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별것 아닌 사람이 와서 ‘이렇게 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점을 찍으면 되겠는가. 작품을 완전히 버리고 만다.
우리 집 옆에 성운 형제 집은 모 대학 교수가 설계한 집이다. 그런데 주택도 아니고 창고도 아니고 이상하니까 사람들마다 와서 보고는 저것이 뭐냐고 물었다. 그래서 리모델링을 하면서 모양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집같이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교수가 자기 작품집에 내려고 그 집을 사진 찍으러 왔다가 자기가 해 놓은 것이 아니니까 대단히 화를 내고 가 버렸다고 한다. 그 사람의 예술가적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고쳐놓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이 볼 때는 지금 집이 좋다. 그러니 세계적인 작가가 그려놓은 그림에 점을 찍어놓으면 되겠는가. 아무리 보기 좋아도 그 작가가 보면 좋아하겠는가.
모나리자의 미소가 유명하다고 해서 박물관에 갔을 때 유심히 보았다. 너무 유명하니까 거기 사람이 제일 많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예쁘기는 커녕 눈썹이 없어서 이상해 보였다. 요즘 같으면 도저히 미인이 아닌데 미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거기 눈썹을 그려넣으면 작품을 완전히 버린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해 놓으신 것은 우리 눈에 안좋게 보여도 거기 손대면 안된다. 어느 날인가 보면 안좋게 보이던 것이 ‘이것이 진짜구나.’라고 보일 때가 온다. 그러니 손대면 안되는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보고 “하나님, 이것은 잘못하지 않았습니까?” 이러면 안된다는 것이다.
안식일이라는 법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 그래서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고 그 날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 사람에게도 복을 주고 쉬라고 하셨다. 그 말은 “내가 창조한 것에 이의를 달지 말고 100% 감사하라.내가 사람으로 지어준 것이 최상의 복이니까 이 복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이래서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해서 죽일 필요까지 있겠는가. 그런데 뜻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사람은 부모를 원망한다. 더 나아가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이보다 큰 죄가 없다. 잘났든 못났든 부모는 그 자녀가 제일 예쁘고 소중할 것 아닌가. 자녀는 자기 현실이 잘 안되니까 맨날 원망하고 부모가 무엇 때문에 낳았느냐고 한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와서 “나를 무엇 때문에 낳으셨습니까.”라고 하는 것처럼 치욕은 없다.
그런데 복을 얻고 나면 부모에게 “나를 사람으로 낳아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감사한다. 유산을 많이 주셨거나 학교를 보내주셔서 고맙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람으로 낳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이 나올 때 부모도 행복하고 자식도 행복하다. 명절을 쇠러 선물을 잔뜩 사갔는데 속으로는 부모를 원망하고 있다면 그것이 선물이 되겠는가. 비록 돈이 없어서 맨손으로 가더라도 부모에게 “감사합니다. 내 인생이 너무 행복합니다.” 이것이 부모에게 최고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도 똑같다.
어떤 부모는 출세하는 것만 좋아하겠지만 진짜 부모라면 출세보다 자식이 행복한가 아닌가를 보지 않겠는가. “부모님, 나는 진짜 행복합니다.” 이러면 부모는 그 이상 행복한 것이 없다. 그러나 “왜 내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를 왜 낳았습니까.” 이러면 부모는 할 말이 없다. 부모에게 그 이상의 불행이 없는 것이다. 나 한 사람이 불행하면 온 우주가 불행해진다. 부모는 조상이니까 나의 우주다. 우리말 속담에 잘되면 내 탓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한다. 조상 탓이라는 말은 하나님 탓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니까 이렇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의 법은 상호 간에 언약이다. 언약이라는 말은 쌍무적으로 둘이 서로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약속은 일방적이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겠다.” 이것은 약속이고 “네가 이렇게 하면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 이것은 언약이다.
여러가지 일상의 법을 말씀하신 후에 백성의 지도자들을 불러놓고 피로써 언약을 세우셨다. 피로써 세웠으니까 이것은 서로 책임을 져야 한다. “네가 내 말대로 하면 나는 너에게 책임을 지겠다. 복을 주겠다고 약속했느니까 복을 주겠다. 그러나 네가 내 말대로 안하면 너에게 벌을 주겠다.”는 뜻이다. 쌍무적이니까 서로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계약할 때 “나는 이렇게 할 테니까 너는 이렇게 하라.” 하고 도장을 찍는다. 우리 교회를 건축할 때도 `창용이가 나서서 건설회사와 철저하게 계약을 했다. “만일 당신이 계약대로 이행을 안할 때는 이러저러하게 벌금을 내야 한다. 우리도 계약대로 안하면 이러저러한 벌을 받는다.”고 계약을 했다. 그들이 한번 공기를 어겨서 벌금을 물었다. 우리는 한 번도 위법을 안했다. 그래서 끝날 때 사장이 “너무 감사합니다. 이런 교회 공사는 처음입니다. 우리가 평생 a/s하겠습니다.”라며 고맙다고 했다.
계약은 쌍무적이다. 그래서 손대지 말고 다듬지 말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피로써 언약을 세웠다. 약속이니까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상호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당연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손해를 끼쳤으면 배상을 해야 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했으면 위로를 해야 한다. 그에 상당한 보상을 해야 되지 그냥 넘어가면 안된다. 성전에 예배한다고 갈 때 형제와 먼저 화해하라고 하셨다. 사람과 먼저 화해하지 않고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형제에게 원망 들을 것이 있으면 미리 풀고 가야된다는 것이다.
말씀이 선포되고 언약이 세워진 후의 분위기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발아래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다고 하였다.
청옥(靑玉)이라는 말의 청은 푸를 청(靑)이 아니라 맑을 청(淸)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은 원래 색이 없다. 그런데 많이 있으면 푸른 빛이 생긴다. 원래 물은 맑은데 많은 물을 보면 푸르게 보인다.
하늘도 마찬가지다. 파일럿이 제일 어려운 것이 높은 데 올라가면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내려다 보면 바다고 올려다 보면 하늘인데 하늘인줄 알고 올라가다 보면 바다로 빠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성경에는 위엣 물과 아랫물로 나누셨다고 표현했는데 하늘은 위엣 물이고 바다는 아랫물이다.
공사를 나오면 대전훈련소에서 파이럿이 될 사람을 가려내는데 그 시험에 합격해야 파일럿이 된다. 여러가지 실험을 통해서 방향감각이 정확한 사람이라야 되지 그렇지 못하면 파이럿이 되지 못한다. 파일럿이 못되면 별을 못단다. 그래서 그렇게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전부 파일럿이 되려고 한다. 거기서 불합격되면 출세에 제한이 생기는 아주 중요한 훈련이다. 흉터만 있어도 높이 올라가면 흉터가 벌어져서 고공비행을 못한다고 한다. 공사를 나와서 파이럿이 된 사람은 신체가 아주 정확하고 건강한 사람이다.
말씀이 선포되고 언약이 세워진 후에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발아래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였다. 언약을 선포하고 나니까 백성들이 “우리가 그대로 지키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 마음이 넉넉해 지셨다. 마음이 풀린 것이다. 그래서 발 아래 청옥을 편 것 같고 하늘같이 청명하다 하였다. 아무 불만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다. 완전히 모든 것이 평정되고 안식이 왔다는 것이다. 백성의 존귀한 자들은 지도자들로 뭔가 잘못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책임이 중요하니까 잘못하면 엄벌을 받아야 한다.
모세같은 사람은 엄청나게 귀중한 사람이고 엄청난 위임을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 백성 전체를 위임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이유가 반석을 치라 하실 때 두 번 쳤다는 것이다. 백성들이 하도 불만이 많으니까 한번 치고 또 한번 쳤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를 보고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고 생각했을 것 아닌가.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에 손상이 된다. 보통 사람은 해도 상관이 없는데 책임이 중대하기 때문에 그 벌로 가나안 땅에 못들어갔다는 것이다. 상상이 안되는 일이다. 그래서 모세는 멀리 비스가 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었다. 존귀함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규격에 맞아야 존귀함이 인정된다.
그런데 이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은 죽는다는 원칙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다. 하나님 마음이 너무 좋으셨다는 것이다.
어떤 구두쇠가 다방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애인을 만나고 있는데 껌을 파는 아이가 와서 껌을 팔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보통 때는 그런 것을 살 사람도 아니고 껌을 씹을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든 애인을 어떻게 꼬여볼까 하고 앉아서 대면하고 있는 중인데 껌을 내미니까 좋은 마음처럼 하면서 돈을 꺼내서 샀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이 ‘이 남자가 선심을 쓰네.’라고 생각할 것 아닌가. 거기서 만일 안산다고 했다면 ‘이 남자 째째하네.’ 할 것이니까 빳빳한 돈을 주고 거기 두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 그와 같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무 넉넉해지니까 마음놓고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아무 무서운 사람이 기분이 좋아서 한턱낸다면 기분좋게 먹을 것 아닌가. 평소에는 한턱 낸다 해도 ‘이것 먹었다가 잘못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할 일인데 오야붕 기분이 너무 좋으니까 마음놓고 먹지 않겠는가. 발 아래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였다는 것은 그와 같은 표현이다.
그는 백성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않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얼마나 신나는 장면인가! 하나님이 마음이 풀어져 버리면 온 만유가 평안해진다.
하나님이 찌푸리고 있으면 만유가 고난스럽다. 하늘이 찌뿌둥하면 기분이 썰렁할 것 아닌가. 오늘같이 햇빛이 잘 안나면 바깥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기분 좀 내려던 사람들은 잡치는것이다. 가을 날씨처럼 청명해야 기분이 나지 우중충하면 기분이 나겠는가.
그런 기후에 사는 사람들은 우중충하다. 영국은 맑은 날이 별로 없이 항상 우중충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응큼하다. 겉으로는 신사적인 것 같은데 어둠에 가면 비신사적이다. 기후 때문이다. 소련 사람들은 너무 추우니까 잔뜩 입고 눈만 내놓고 다닌다. 그러니까 꿍꿍이속이다. 그에 비하면 남쪽 기후 좋은 지방 사람들은 마음이 좋다.
관계가 확실해지면 하나님은 만족하고 복을 주신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창조를 마친 후에 복을 주셨다. 이것이 원칙이다. 사람이나 하나님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만족은 곧 축복이다. 하나님을 만족케 하면 사람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자기가 행복하려고 발버둥칠수록 더욱 불행하다. 어쩌다 나같이 아무것도 생각이 없었는데 복을 받은 것이지 진짜 행복하려는 사람치고 행복한 사람이 없다. 내가 기준이 있어서 ‘이렇게 살아야지, 저렇게 살아야지…….’ 이랬으면 끝이 있겠는가.
관계가 확실해지면 하나님은 만족하시고 복을 주신다. 창조를 마치신 후에 복을 주신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만족은 곧 축복이다.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실 수 있다니……. 이 어떠한 은혜이며 영광인가! 하나님을 보고 하신 일을 보고 마음이 놓인다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내가 무엇을 잘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잘못하면 불안해지고……, 이러면 되겠는가. 사람의 일이 잘될 때도 있고 못될 때도 있지 항상 잘되라는 법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있으면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이 늘 완전하다. 이 사람은 태양이 항상 비치는 것처럼 살 수밖에 없다. 자기를 보면 늘 불안하고 만족이 없고 조석이 다르지만 하나님을 보고 있으면 항상 햇빛이 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빛이 있는 데 가면 어둠이 없다. 그러나 어둠에 가면 눈을 떠도 어둡다. 밝은 데 가면 눈을 안떠도 밝은데 캄캄한 데 가면 아무리 눈을 떠도 어둡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행복할 수 있는가. 우리의 위치가 정당하면 된다. 불행한 곳에 갈 필요가 없다.
일부러 불행한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같이 흥얼거리는 사람이 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다. 성경에도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다. 시체를 만졌을 경우에는 칠일 동안 부정하다 하였다. 그러니까 아무 데나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이 나왔겠는가. 죽음을 가까이 하면 나도 그와 같이 되기 때문이다.
화장터에서 일하는 사람은 얼굴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웃지도 못한다. 슬퍼서 온 사람들 속에서 웃고 돌아다니면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설사 웃을 일이 있어도 웃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표정 자체가 굳어져 있다. 그런데 밝고 기쁘고 그런 곳에 가면 좀 화가 났다가도 나도 모르게 기뻐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가면 내 문제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내 문제는 어디로 가고 없고 하나님 하신 일에 박수를 치게 된다. 아침에 경기장에 나갈 때는 꼬라져서 나갔는데 손흥민이 공만 차면 들어가니까 나도 모르게 박수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대면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부정적인 사람을 만나서 부정적인 것을 보고 사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매일 눈만 뜨면 부정한 것만 보이고 부정한 사람만 주변에 있다면 사람은 자기도 그렇게 되고 만다. 피해야 한다. 일부러 찾아간다고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정말 밝은 사람이 가면 되겠지만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빛이 필요한데 내가 어둠을 또 가지고 가면 얼마나 더 어둡겠는가. 흑암이 깊음 위에 있지 않겠는가. 나를 위해서도, 상대를 위해서도 피해야 한다.
내가 빛이 있을 가면 상대방이 살아나지만 살릴 힘이 없으면 가면 안된다. 등불이 없으면 어두운 데 갈 필요가 없다. 등불도 없이 캄캄한 데서 둘이 서로 위로가 되겠는가. 어둠만 더해진다. 불평불만인 사람들이 만나면 불평이 배로 증가한다.
내가 처음 CCC에서 각 지역 보고회에 참석했는데 들어보니 학생이 얼마고 헌금은 얼마가 들어오며 전도 계획은 어떻다며 아주 잘나가는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잘나가는 일이 없어서 보고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순번이 돌아와서 “학생은 한 열두 명 되고…….” 이랬더니 김목사님이 듣더니 대번에 “이 목사, 뭐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라고 하셨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쥐구멍을 찾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때 알게 되었다. 얼굴을 들 수도 없고 눈을 맞출 데도 없었다. ‘어쩌야 되나? 여기 있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김목사님이 같이 일하자고 해서 왔는데 그렇게 되니까 엄청 당황했다. 그런데 나오면서 어떤 오래된 간사가 “이 목사님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요. 우리 CCC 보고가 좀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위로를 했다. 그래서 숨을 돌렸는데 또 한 사람이 와서 “이 목사님,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요.”라고 해서 겨우 힘을 얻어서 내려왔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면 나를 부르든지 무슨 조치가 있을 텐데 아무 말도 없었던 것이다. 뒤로 알고 보니까 김 목사님에게는 절대로 부정적인 말을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일부러 잘못한 것을 알려고 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다. 그것이 옳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 가니까 정반대였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부정적인 것을 말하면 다른 사람이 다 부정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의기소침해진다. 그런데 긍정적인 것을 말하면 자기 속에 부정적인 것이 있다가도 내놓기 부끄럽고 자기에게도 긍정적인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니까 자기도 긍정적인 것을 내놓는다. 그러면 긍정이 불어나고 모든 사람이 용기를 얻게 된다. 부정적인 것을 내놓으면 모두 다 안되는데 긍정적인 것을 내놓으면 ‘아, 되는구나.’ 하게 된다.
세일을 하는 데는 다 똑같다. 충주 있을 때 옆에 보험회사 사무실이 있었다. 아침에 나가서 맨손으로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 보험이다. 보험은 상품이지 현물이 아니다.
이러저러하게 설득해서 가입을 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말을 들어주면 좋지만 그대로 잘 안된다. 안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하는 사람도 생기고 다음에 하겠다는 사람도 생긴다. 그렇게 집집마다 퇴짜를 맞으면 의기소침해져서 남의 집에 못들어간다. 그러니까 아침마다 나갈 때면 박수치고 찬송부르고 굉장했다. 찬송가를 개사해서 보험회사 노래를 붙여서 “신인합시다. 신인합시다.” 하고 노래부르고 난리였다. 매일 “만세. 할렐루야.” 하고 나갔다. 그렇게 용기를 얻어서 나가는 것이다. 그래도 저녁 때 들어올 때는 어떤 사람은 한 건이라도 해서 기분좋게 들어오지만 대부분은 한 건도 못하고 의기소침해서 돌아온다. 잠을 자고 나면 안갈 수도 없으니가 ‘오늘은 어떻게 또 이 고비를 넘길까.’ 하고 나간다. 그런데 사무실에 가면 박수치고 난리다. 그렇게 해서 나간다.
보험은 백 사람을 만나서 한 사람만 가입해도 성공이라고 한다. 그러니 아흔아홉번을 퇴짜를 맞아야 하는 것이다. 보통 생각으로 하겠는가. 세일 중에 보험이 제일 어렵다. 다른 것은 물건을 가지고 가서 팔지만 이것은 물건이 없다. 신용으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것에 성공한 사람이 보험왕이다. 가만히 있는데도 전 세계의 돈이 그 사람에게 들어간다. 삼성에 보험을 들면 그 중 20-30%는 재보험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돈이 모자랄 때 그쪽에서 보증을 받는다. 그러니까 재보험에 또 재보험을 들어서 본부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가 말단에서 보험을 들면 그 돈의 일부는 항상 본부로 가게 되어 있다. 그 사람이 세계 보험왕이다. 가장 돈을 잘버는 사람이다. 처음 시작할 때 백 명을 만나서 한 사람만 되면 성공하는 거라고 시작했다. 맨손 들고 가는 것이니까 계약을 받아오면 성공이다. 계약자가 다달이 돈을 내니까 보험만큼 수지맞는 것도 없고 그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거기서 성공하면 다 성공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 삼개월간을 하고 못한다. 연고판매를 하니까 아는 사람을 찾아가면 안면 때문에 할 수 없이 들어주는데 그렇게 삼 개월하면 끝이다. 보험회사에서 계속 새 사람을 모집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취직문이 아무리 좁다 해도 보험회사는 항상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을 채용하는 것만큼 보험회사는 이익이다. 자기 돈으로 월급 주는 것이 아니니까 보험회사는 늘 사람을 모집한다. 직장 못구하면 보험회사 가면 된다. 한 사람을 들여놓으면 연고판매를 해서라도 돈을 가지고 오니까 언제든지 환영받는다.
긍정적인 사람이 복을 받는다. 사회생활을 해도 부정적인 사람은 듣기는 좋아해도 그 사람에게 일은 안시킨다. 긍정적인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법이다. 나는 CCC에서 인생 사는데 가장 중요한 비결을 배웠다. 부정적인 것은 안된다. 긍정적인 것만 살아남는다. 성공한 사람은 전부 긍정적이고 불행한 사람은 다 부정적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변한다. 흙이 생각하기를 ‘나 같은 흙이 이런 옥수수를 연다니 너무 행복하다.’ 이러면 행복이 아닌가. 그러나 ‘기껏 여름동안 수고해서 옥수수를 키워놓았더니 주인이 다 가져가고 나는 아무것도 없네.’ 이러면 불행이다. 똑같은 사건에서 한 사람은 감사하고 행복하고 영광스러운데 한 사람은 허망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바로 흙의 자리에 있다는 말과 같다. 내가 흙이면 무엇이 감사하지 않을 것이 있겠는가.
우리 교회에서 “어제보다 못한 오늘이 없고 오늘보다 못한 내일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아주 긍정적인 말이다. 그런 사람은 항상 그렇다. 어제 보다 못한 오늘이 없다. 권재훈 형제 그 말을 잘하는데 내 인생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큰 교훈을 받았다.
그런데 또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돌 판에 새겨 주시려고 모세를 구름 가운데서 산으로 부르셨는데 여호와의 영광이 맹렬한 불같이 보였다고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견고하게 서기를 원하는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견고하게 지키는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광이 맹렬한 불같이 보였다고 한다. 왜 불같이 보였는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태울 것을 태워버리는 불 같다 하였다(렘5:14).
우리는 쓰잘 데 없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길이 막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은 그것을 태워버린다. 태우면 단순해진다. 인생도 쓰잘 데 없는 생각을 태워버리면 너무 간단하고 단순해진다. 그런 것이 많이 들어와서 인생이 복잡해진 것이다. 소설책을 잘못 보면 너무 쓰잘 데 없는 것이 많이 들어와서 인생이 불행해진다.
소중하다고 붙들고 있으니까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는 것이지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있는 모든 부정한 것을 태워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너희는 좋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나는 긍정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백날 가도 안된다. 주여, 이 쓰잘 데 없는 생각을 태워주소서! 오! 하나님, 당신의 말씀이 아닌 모든 것을 태워주소서!
하나님 말씀이 들리면 그런 것이 다 사라진다. 내가 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말하는가? 그 자리에 가면 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가 아무 소용없다. 끝나버리고 만다.
모세는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었다. 왜 그랬을까? 모세는 불 속에서 정금 같이 되기 위하여 연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금은 연단해야 쓸 수 있지 연단하지 않으면 금이 아니다. 우리집에 금덩어리가 하나 있었는데 돌에 금이 박혀 있지만 쓸 수가 없다. 쓸려면 가루로 갈아서 거기서 순금만 추출해야 한다. 그러려면 수은이 필요하다. 굉장한 연단의 과정을 거쳐서 정금이 되는 것이다. 그냥 정금이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는 연단을 받고 있었다. 사십일 사십 야를 불 속에 있었다. 쓸데없는 것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에서도 증명된다. 이스라엘의 애굽에서 사백 년, 모세의 미디안에서 사십 년, 불 속에서의 사십 주야,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 년……. 그 원대한 꿈을 가졌던 모세는 미디안 장인의 집에서 양치기를 하고 있었고 예수는 복음을 전하기 전에 광야에 나와서 사십 일을 금식하고 주시셨을 때의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왜 꼭 사십일이라는 말을 썼는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사백 년, 사십 년, 사십 주야……, 이 시간들은 시험과 연단의 시간들이다. 쓸데없는 것들을 다 태우는 시간이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연단의 시간이다.
태우지 않으면 모든 것이 그냥 있어서 쓰레기인지 뭔지 모른다. 불탈 것인지 아닌지 모른다. 이사를 한번 해봐야 쓸데없는 살림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이사를 안할 때는 모른다. 이사를 하려고 보면 너무 귀찮은 것이 많으니까 “이것 좀 없애자. 저것 좀 없애자.” 하고 떨고나오는 것이다. 작은 집으로 가려면 살림살이가 문제가 되니까 꼭 필요한 것만 갖고 가고 덜 필요한 것은 버려야 한다. 하나님 앞으로 가려면 쓰레기 같은 것은 다 버려야 한다.
버리려면 아까워서 잘 못버리게 되는데 집사람은 자꾸 버리라고 한다. 이번에 거실을 수리하느라고 뒤집어놓았는데 버리기 싫어도 버려야 한다. 그러고 나면 깨끗해진다. 이사를 안하면, 수리를 안하면 나는 안버릴 사람이다. 언제 쓸지 모르고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까, 또 사려면 돈이 드니까 놔두지 뭐하러 버리느냐고 한다. 아주 합당한 이유다. 그런데 집사람은 어지간하면 버린다. 나와 정반대되는 사람과 살아서 그래도 집구석이 이 정도지 나와 똑같은 사람과 살았으면 우리 집은 쓰레기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여러분 집안도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긁어 모으고 이 사람은 버린다. 그러므로 리 삶에는 연단과 훈련이 필요하다. 불탈 것은 빨리 타고 있을 것만 있어야 전쟁을 할 수 있다.
전쟁을 위한 군대는 훈련을 받는다. 전쟁터에 나갈 사람은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있어야 되지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가는 큰일난다. 꼭 전투에 필요한 것만 있어야 되지 군장에 이것저것 다 집어넣고 다니면 되겠는가.
그래서단순하게 하려고 제식훈련을 받는 것이다. 앞으로 가, 뒤로 가, 옆으로 가, 서, 앉아……. 맨날 이런 것을 훈련한다. 총만 쏘면 되지 왜 제식훈련을 하는가. 군대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죽으나 사나 명령이 나면 달려가야 되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전쟁을 못한다. 제식훈련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주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이 훈련을 안받으면 전쟁을 못한다.
6‧25 때 그런 예가 있었다. 그때는 반공의식이 투철할 때였는데 남로당 사건이 있어서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좌우익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나니까 광주서 보았는데 고등학생들이 전부 학도병으로 나왔다. 학생 연대라는 것이 있어서 학생들이 웃통을 벗고 각반을 차고 목총을 들고 금남로 중심가를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 군번도 없이 훈련소도 안거치고 조국을 구한다고 나갔는데 애국심만으로 나갈 때는 하늘을 찌르고 나갔는데 안타깝게도 거의 다 죽고 군번없는 용사가 되고 말았다. 그 젊은 학생들이 전투도 못해보고 전쟁터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죽었다. 군대 편입도 안되고 보급도 못받고 거러지가 되어 죽었다. 비참한 일이다.
그에 비해 기드온의 삼백 명은 소수였으나 승리한 군대였던 것이다. 전쟁터에 나갈 사람들 중에서 기드온은 삼백 명을 골랐다. 달음질을 시킨 다음에 개울에 데려다 놓았더니 어떤 사람은 개처럼 물을 마셨고 어떤 사람은 그 와중에도 손에 물을 받아 먹었다. 여유가 있게 손으로 받아먹은 사람만 골라냈다. 그런 시험을 거쳐서 삼백명의 용사를 뽑아서 전투를 해서 승리했던 것이다.
전쟁에 나갈 사람은 반드시 훈련이 필요하다. 복음의 군대도 마찬가지다. 그냥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하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다. ‘아, 내가 육신으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으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이렇게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의 생명으로 온전한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나는 다 알아. 다 아는거야.’ 이래서는 안된다. 막상 현장에 나가면 무엇을 말할지 모르게 된다. 상대방이 맹렬히 공격해 오면 할말이 없게 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전도하러 갔는데 그 집안이 으리으리하니까 아무말도 못하고 와 버렸다고 한다. 구별이 안되니까 싸우지도 못하고 패전하고 온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고 갔는데 그 사람이 직장에서도 승진하고 너무 잘나가니까 그 얘기를 한참 듣고 나면 ‘내가 왜 여기 왔는가.’ 하게 된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 누구를 만날 때 그 사람이 부러우면 내 말을 못한다. 세상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사는 것이 부러우면 복음을 못전한다.
야곱은 백삼십 살에 절름발이가 되어 거기에 양식을 구하러 간 이재민이다. 어떻게 바로 앞에서 축복을 하겠는가. 야곱의 일생이 그것을 위해서 연단을 받은 것이다. 세상이 안보이게, 바로가 무섭지 않게……, 그러니 축복을 했지 이재민이 왕을 어떻게 축복하겠는가. 두 번이나 축복했다는 말이 나온다. 왕을 보았는데도 ‘내가 이 사람을 축복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으리으리한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야, 이 사람은 복이 없구나.’라고 알았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래서 다 버리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것을 보면, 그렇게 되는 날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는 이것을 아주 명백히 말해 놓았다. 천사는 죽지도 않고 능력이 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천사를 부러워한다. 천사 앞에 가면 꼼짝을 못한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맨 처음에 “내가 누구를 가리켜 내 아들이라고 한 적이 있느냐. 천사라도 내 아들이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고 아들이라고 하셨는가? 비록 지금 약하나, 그렇기에 고난을 받고 있지만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를 보고 아들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승리다. “사람은 약하다. 불완전하다. 안된다.” 이것은 사탄의 공작이다. 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겸손한체 하지만 완전히 패배주의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사용하시려고 하는데 사람이 ‘나는 안돼. 인간이 되겠는가.’ 하고 있으면 전쟁이 되겠는가.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하는 그 사람이 참 사람이고 진짜고 그것이 존귀고 영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왜 이 말을 계속하겠는가. 이것은 우리 개념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비까번쩍하고 말을 타고 총을 들고, 이런 것을 원한다. 세상이 볼 때는 십자가에 죽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에서도 그렇게 조장한다. 하나님 잘 믿으면 복을 받고 명문대학교에 합격하고 고시에 합격하고……, 이렇게 선전한다. 그래야만 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전투가 되겠는가. 그것은 천사를 따르는 것이지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따라가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다. 한번 죽는 것은은 정한 이치다. 어차피 한번 죽을 것인데 예수께서는 죽음에 매여 일생을 종노릇하는 사람을 놓아주려고 먼저 죽음을 맛보셨다. 어차피 인생은 죽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를 아들이라고 하시는가? 어차피 죽을 이 사람을 아들이라 하신다.
이것을 오해하면 안된다. 그래서 예수를 신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알면 이 선을 못넘어간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도 내려오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상속을 받을 자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천사 안에는 아무도 포함이 안된다. 똑똑해도 자기 혼자 뿐이다. 그런데 예수 안에는 만유가 포함된다. 나뿐 아니라 여러분도, 사람만 아니라 개도 소도 다 포함된다. 다 한 자리다. 생명을 받은 한 자리다. 개도 하나님께 생명을 받았고 나도 하나님께 생명을 받은 자리다. 그러니 다 포함되는 것이다.
개가 왜 사람을 알아보겠는가. 자기와 같으니까 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개가 사람을 제일 좋아한다. 우리는 ‘저 개 새끼’ 이러는데 개들은 ‘저 사람 새끼’라고 하지 않고 사람이 영광스럽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동질성, 일치감이 어디서 생기는가? 십자가 안에서만 생긴다. 이것이 공개된 비밀이다. 누구만 아는 비밀이 아니라 보면 다 아는 비밀이다. 보면 사람이나 개나 똑같다. 우리가 개와 다른 것은 학문, 빌딩이 있다는 것이나 그런 것은 개에게는 아무 필요없다. 개는 사람이 부러울 일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학자로, 지었겠는가 군대로 지었겠는가. 그냥 사람으로 지으셨는데 그것으로 살기가 부족하니까 자꾸 무엇으로 채운 것뿐이다. 잠시 동안 가지고 있는 것뿐이지 그것이 자기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공부를 했다고 공부가 자기라고 생각하거나 계급장을 달았다 해서 그것이 자기라고 생각하면 되겠는가. 그렇다고 계급장을 달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군대니까 필요해서 계급장을 단 것뿐이지 옷벗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 군대에서는 별 하나가 굉장하다. 산천초목이 흔들린다. 그런 사람이 지나가면 전부 서서 경례를 해야 한다. 그렇지만 옷벗고 나면 목욕탕에 가면 일등병이나 대장이나 똑같다. 그것을 자기로 착각하고 ‘나는 별이 네 개고 너는 작대기 하나다.’ 이렇게 생각하니 사람이 교만해지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서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다듬은 돌이고 구워놓은 벽돌이다. 보기에 좋은 것 같지만 다 생명없는 것들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라는 것, 이것만 생명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오직 사람이구나.’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왜 대답을 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실 때 하나님은 왜 아무 말도 안하셨는가. “너는 사람이다. 네가 사람이 아니냐. 사람은 당연히 죽도록 만들어졌으니까 죽는 것이지 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느냐.” 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물어보아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왜 죽습니까? 딴 사람은 병이 안걸리는데 나는 왜 병에 걸렸습니까?” 아무리 물어 봐야 소용없다. 하나님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너는 사람 아니냐. 병도 걸릴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여기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다. 아무 문제가 안되는 것을 문제로 가지고 산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수고다. 왜 수고로운가? 이것 때문에 짐이 되어서 수고로운 것이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생각하고, 주장하고, 나 아닌 것 때문에 짐을 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참 나’를 예수 안에서 보면 모든 데서 해방된다. ‘공연한 짐을 지고 있었구나. 단지 내가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에 불과한데 이 짐을 지고 살았구나.’라고 알게 되면 자유롭게 된다.
절에 가서 아무리 수양을 많이 해도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예수의 경지에 갈 사람이 없다. 예수는 죽으니까 쉬운데 석가모니는 수양을 하려니까 어려운 것이다. 수양을 해서 그 자리에 가려니까 가 보면 비교가 되는가. 자기가 버려서 온 사람과 버려질 수밖에 없어서 버려진 사람과 누가 더 완전한가? 버려질 수밖에 없어서 버려진 사람이 가장 완전하지 않은가!
“내가 버렸다.” 이 말은 아직도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끝나고 빼앗겨 버린 사람은 내가 없다. 그래서 내가 행복한 것이다. ‘아, 나는 그때 한 줌의 흙에 불과했구나. 현실적으로 나는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이었구나.’ 이 생각만 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져 버린다. ‘흙인데 옥수수가 나왔구나.’ 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내가 왜 지금까지 살아있겠는가. 이 맛에 살아있는 것이지 이것이 없으면 인생이 절망이다.
그런데 누구나 죽은 날은 똑같다. 어차피 죽을 것 아니겠는가. 나보다 건강한 친구들은 다 죽고 없다. 어찌된 일인지 다 죽어버리고 친구가 없다. 이상한 일이 나에게 벌어졌다. 다 어디 가 버려서 전화하려고 해도 전화할 사람이 없다. 나보고 먼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제일 나중까지 이러고 있다. 이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오래 살아있으면 뭐하겠는가. 아무 뭣도 없이 살아있으면 밥버러지밖에 더 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옷입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에베소서에는 그리스도로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것은 한편으로는 사탄과의 전쟁이다. 우리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미국이 싸우는 곳에 우리도 참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전쟁에 그들도 오지 않겠는가. 6‧25 때 와서 미군이 사만 명 이상이 죽었다. 그 중에는 장성도 있었다. 미국에서 장성이 대단하다. 만일 미국이 침략을 당하면 우리가 당연히 참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니까 사탄과 전쟁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유익한지 알아야 한다. ‘이 일은 사탄의 영광을 위한 것이구나. 내가 이렇게 하면 사탄에게 유익하구나.’라고 알아야 되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고 나대면 아무 소득이 없다.
전에 어떤 형제보고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좀 하라고 했더니 딱 알아들었다.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해야 한다. 캄캄하면 적인지 아군인지 모른다. 6‧25 때 캄캄한 밤에 육박전을 하면 총도 필요없다. 대검하나 들고 머리를 만져보고 찔렀다고 한다. 인민군은 머리를 빡빡 깎았고 우리는 머리가 길었으니까 그렇게 피아를 구별했다고 한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면 피아의 구별이 분명해야 한다. 적과 아군이 구별되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아군은 아군이고 굉장한 것 같아도 적군은 적군이다. 적을 구별해야 전쟁을 적을 구별하지 못하면 전쟁을 할 수 없다.
육사 지망생 가운데 40%가 미국이 주적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심각한 일이다. 고등학교에서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 보통 일이 아니다. 주적이 없는 곳이 베트남 전쟁이었다. 어느 것이 민간인이고 어느 것이 적인지 몰랐다. 낮에는 민간인처럼 하고 있다가 밤에는 베트콩이 되니까 미국이 졌던 것이다. 아무리 화력을 쏟아붓고 별짓을 해도 안되고 숲속에 들어가서 밤에는 군대로 변하니까 미국이 당해내지 못했다. 제초제를 뿌리고 최신 무기를 퍼붓고 별짓을 다했어도 적이 구별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큰일인데 기독교인도 그 모양이다. 사탄의 군대와 하나님 군대가 구별이 안되면 아무것도 안되는 것이다.
언약을 세우셨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다.”라고 한다. 우리 하나님은 일반적인 신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허무맹랑한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약속이 있어서 그 약속을 지키면 이렇게 되고 안지키면 이렇게 되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지 사람의 생각 속에 있는 허망한 신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testament라고 하는데 증거, 언약이라는 뜻이다. 성경 자체가 증거고 언약이다. 중국에서 경서를 말할 때 사서삼경을 내세우는데 경이라는 말은 가장 높은 교훈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은 가장 높은 교훈이 아니라 증거다. 하나님은 증거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얼마나 완전한 세계에 와 있는지 모른다. 완전한 하나님을 상대하니까 우리도 완전하다. 우리의 상대가 허망하면 우리도 허망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상대이신 하나님은 허망한 분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이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하나님이다. 언약을 세우면 반드시 지키는 분이다. 그러니 확실하지 않은가! 언약을 세워놓았으니까 언약대로만 하면 된다. 우리의 하나님은 애매한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을 보는 것은 증거를 보기 위한 것이다. ‘이런 증거가 있구나.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