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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밤 동안만 더 생각해보고 알려드릴께요. 아셨찌요오오옷?’
우리 작은손녀 세리의 독특한 화법이다. 뿐만 아니라 이 녀석은 유독 다섯이라는 숫자를 즐겨 자주 사용하기도 하고, 또래 어린이들이 거의 쓰지 않는 표현으로 할머니를 자주 기절초풍시키곤 하는데, 당돌하다고 해야 하나 능청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살펴보면 볼수록 요물은 분명한 요물이다. 그걸 보면 할아버지가 녀석의 별명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어서 붙여주었는데, '윤세리는 잠들면 천사, 깨어있으면 예쁜 악마구리’라고 붙여주었다. 아들 이름도 기가막히게 지어주었지, 손녀 별명도 기가막히게 붙여주었지, 어디 길거리에 돗자리 하나 펴고 나설까?
지난번 2박3일의 (다리안 야영장) 캠핑을 마치고 충주로 철수를 했고, 엄마 아빠가 녀석들을 데리러 와서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다음 여행계획은 구체적인 것이 아직 없었지만, 바로 다음 주에 할머니의 간절함이 듬뿍 담긴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가 있는 주간이다. 기독교 신앙을 강권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 조금이라도 경험을 해보기를 할머니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할아버지는 그것이 꼭 기독교가 아니라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종교가 되었든,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쯤은 마음속에 소중하게 간직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어떤 종교든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지난해에는 괴산군에 속해있는 (추산교회 여름 성경학교)를 태리와 세리가 함께 참석했었다.
성경학교 개원일이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고 맞물려 있기도 하고, 한해 한해 무럭무럭 자라나는 녀석들이라 나름 다른 스케줄이나 약속이 있는지도 모르고 하여서, 이젠 할머니도 반걸음쯤 뒤로 물러나서 순전히 녀석들의 생각과 선택에 따르기로 애초부터 마음먹은 다음이었다. 늘 그래왔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 헤어지기 전에, 녀석들의 의사를 물어보고, 여름 성경학교를 집행하시는 분들께 참석 여부를 알려드려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의사 타진을 해 본다.
'할머니. 금요일이 여름방학 시작하는 날이라서 일단 학교에 가야하구요. 그날 오후하고 다음날이 토요일에 친구집에 가기로 약속이 있어요. 저는 금년에는 참석하기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지요?'
큰손녀 태리에게 이미 선약이 있었던 모양이다.
실망하면 어쩌나 했던 할머니의 표정이 여전히 환하고 밝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사전에 마음의 대비를 단단히 했던 때문일까?
‘당연하지. 알았어. 교회에서 성경학교 일정이 너무 늦게 잡혀서 미리 이야기 해주지 못한 것도 있고, 내년을 또 기대해 보기로 하지 뭐.’라면서 이로써 금년 여름성경학교 일정에 관한 대단원의 마무리를 지으려 하던 순간이었다.
‘왜 나한테는 안물어봐요?’
작은 손녀 세리가 할머니의 옆구리를 쿡 쿡 찌르면서 빤히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 보면서 묻는다.
‘세리한텐 왜 안물어보느냐고? 우선 언니에게 참석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았는데 언니가 금년엔 참석할 수가 없겠다고 했고, 언니가 참석하지 못하게 되면 세리는 언니보다 더 어리니까 당연히 참석하기가 어려울거라고 생각했었지. 할머니 기억에는 엄마 아빠랑 떨어져서도 우리가 자주 여행을 다녔지만, 세리가 언니랑 떨어져서도 다닐 수 있다고는 아직까지 생각해보지 못해봐서 그랬던 거지? 그럼, 언니가 없어도 세리 혼자 참석할 수 있겠어?’
‘그래도 저한테도 똑같이 물어봤어야 하잖아요. 작년에 저도 참석 했으니까요.’
‘세리가 그렇게까지 생각을 했어? 아이구 우리 세리 다 컸네. 할머니가 잘못 생각했나봐. 당연히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할머니가 미안해. 그럼....... 세리는 이번 여름성경학교를 어떻게 생각해? 참석하고 싶어?’
‘네. 저는 가고 싶어요. 그런데 태리 언니가 못간다고 하니까 좀 그런데..........’
‘괜찮아. 세리 마음은 할머니가 다 아니까 내년에 다시 참석하면 되지 않겠니?’
‘있잖아요. 할머니. 다섯밤 동안만 더 생각해보고 알려드릴께요. 아셨찌요오오옷?’
그렇게 할머니랑 새끼손가락을 걸고 다섯밤을 약속했는데.......
설마........ 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어린 세리가 참석하고는 싶었는데 언니가 참석 못한다고 하니까 약간의 아쉬움에 그저 잠시 해본 이야기였거니 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을 했다.
저녁에 할머니는 (추산교회) 여름 성경학고 집행부에 금년엔 우리 손녀들 참석이 어렵겠다고 알려 드렸다.
그리고........ 다섯밤이 훌쩍 지났다.
금요일 아침, 아들과 며느리가 출근 준비에 한참 바쁠 시간에 느닷없이 (모야? 모야?)가 울려 퍼졌다.
'아들. 이 시간에 웬일이니? 무슨 일 있어?'
'세리가 막 일어나자 마자 오늘 충주 간대.'
'충주 온다고? 왜 갑자기?'
'오늘이 다섯밤이 지난 아침이래요. 밤새 생각해 봤다는데 혼자서 여름성경학교 참석한다고 지금 짐 챙기고 있어요.'
헐!!!!!
또 헐!!!!!!!
그저 잠시의 기분으로, 또 지나는 투정이겠거니 했었는데........ 세리는 다섯밤을 꼬박 세어가면서 고심에 고심을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니와 떨어지는 단독 여행을 제 스스로 결심'했던 것이다.
우리 예쁘고 귀여운 세리 요정의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이 순간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이녀석, 정말 다 컸네!!!)
'엄마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당연히 데리러 갈거구, 여름성경학교 가야지. 세리가 약속을 지키겠다는데 할머니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지, 안그러니?'
'지금 막 일어나자 마자 통보해 온건데. 또 중간에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고. 괜찮을까? 태어나 처음인데 언니랑 떨어져도?'
'아들. 침착. 일단 침착하게. 너희들은 평상시처럼 얼른 출근하고, 태리는 학교로 가고 세리는 유아원으로 가는 거야. 아주아주 간단하게 세리 옷가지만 작은 가방에 싸 놔. 치카치카하고. 그럼 준비 다된거야. 겡구가 출근하고나서 오늘은 할아버지가 점심 시간에 세리 데리러 갈거라고 연락해 놓으면 돼. 그게 전부야. 엄마는 빠질 수 없는 작업이 있어서 서둘러 오전에 마치면 될 것이고, 할아버지는 스케줄을 조정하던 망치던 무조건 시간에 맞춰서 세리 데리러 갈꺼야. 세리가 끝가지 충주 가겠다고 하면, 할아버지가 데려올거고, 오후에 여름성경학교 참석할거고, 만약 집에서 세리 마음이 변하면 언니 태리가 집에 오거나 너희 퇴근시간까지 할아버지가 놀아주다가 혼자 돌아오면 돼.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평상시처럼 하면 돼. 모든것은 세리가 직접 결정할거고, 할아버지가 옆에서 지켜볼꺼야. 됐지? 너희들은 평상시처럼 얼른 출근해. 기쁜 마음으로 지켜 보렴. 세리가 얼마나 대견해? 다섯밤을 기억하고 고민했다잖아? 그리고 결심이 섰다잖아. 다컷네 우리세리. 정말 장하게 잘컸어. 너희들이 자랑스러워 해도 충분할만큼 예쁘고 씩씩하게 잘 커주었네. 크게 기뻐하고 감사해야할 일이야.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다 잘될거야.'
‘정확하게 12시 50분쯤 도착하도록 신경 쓰셔. 세리는 할아버지 오는 줄 아니까 기다리겠지만, 점심시간과 오침 시간이 겹치면 다른 어린이들이나 선생님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 가능하면 시간 맞춰가서 슬며시 세리만 데리고 나오면 돼. 알았지? 안전벨트 꼭 하고.’
아니 이 할망구가 정말? 내가 이래뵈도 세리 전담 할아버지 경력만도 7년 차여? 왜 오늘따라 초짜 취급하면서 잔소리가 이리도 심하시지?
내가 그동안 (라온 어린이집)을 드나든게 몇 번인데? 눈 감고도 찾아간다니까? 그리고 세리 사는 집이 내 아들 사는 집인데 내가 거길 못 들어갈 이유가 없잖아? 비번? 다 기억한다니까? 할망구 생일을 잊으면 잊었지 그 딴거는 다 기억한다니까? 할아버지가 무슨 고스톱 쳐서 따는 것인 줄 아니? 세리의 하나뿐인 할아버지가 바로 나여.
‘오늘은 할아버지께서 세리 데리러 오셨네요?’
세리 선생님을 보니 오늘따라 허리가 더 깊게 숙여진다.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시고 고마운 분들이 내 자식의 선생님이다. 아무리 소중해도 내가 다 가르쳐 줄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상식과 올바른 가치관을 가르쳐 주시는 고마운 분이 그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 손에 이끌려 나온 할아버지 껌딱지가 달려와 품에 안긴다.
오늘따라 더 으젓하고 사랑스럽고 소중한 껌딱지를 안아 하늘 높이 쳐드는 순간 ‘오늘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니겠는가?’ 싶다. 닷새 만에 만나는 처지이면서도 ‘언제 이렇게 부쩍 컸지?’ 하는 마음은 어디까지나 이 녀석이 순전히 내 손녀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듭 거듭 또 그래 본다. 왜냐고? 내 손녀고, 내 맘대로니까.
‘할망구야. 아들 집 찾아가다 길 막히면 전화하라고? 참 할아버지 무시하시네. 아파트 잘 찾아와서 지하 2층에 차 대고, 엘리베이터 구역 비번? 걱정을 하덜덜덜덜 말어. 우리 손녀가 누구여? 여기사는 아들놈 딸이여. 세리가 알아서 할아버지를 에스코트하면서 척척 잘 찾아간다니까? 시방 정말로 다 컸어. 걱정을 붙잡아 매셔.’
2301호 비밀번호를 세리의 고사리 손이 쓱싹하니 철커덕하고 바로 아들네 집안이네.
앞장을 서신 세리 공주님이 자기방 침대 위에 유아원 가방을 휙하고 던지고는 거실로 향하더니, 거실 가운데 놓인 작은 여행 가방을 확인한다. 쟈크를 쭈욱 당겨서 잠그더니 돌아서며 하는 말.
‘할아버지 준비 다 됐어요. 얼른 가요. 할머니가 기다리실 거예요.’
쿨!!!!
이거야 쿨을 넘어서 씨크해도 너무나 씨크한 것이 아닌가?
혹시나 마음이 변해서 가기 싫다고 하거나 언니 타령을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집에 들어온 지 채 2분도 되지 않아서 벌써 쿨하게 출발하잖다.
‘뭐 빠진 것 없나 살펴보고, 물이라도 마셔야 하지 않겠니? 화장실 안가?’
‘괜찮아요. 할머니 기다리실테니 얼른 충주로 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이렇게 술술 잘 풀린다고? 이거 뭐 망설이거나 고민하는 표정도 전혀 안보이니, 다섯밤동안 아예 단단히 작정을 했음일까? 너무너무 냉정한 것 아니니?
헐!!!!
이거 순전히 일곱 살이 아니라 열 일곱 살 보다도 더 냉정하네?
‘할아버지 차의 앞자리 조수석에 타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 할머니 아니면 언니 차지였는데? 오늘은 세리 자리가 앞자리야. 안전벨트부터 매고 추울바알. 우리 가다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을까?’
‘좋아요. 저는 폴라뽀요.’
‘할아버지는 붕어빵.’
그리고 나서 스피커폰으로 아빠랑 통화도 한다.
‘아빠. 할아버지 차 타고 출발했어. 치카치카? 잘 챙겼어. 할머니랑 여름 성경학교 잘 다녀올게 걱정하지 마. 엄마한테도 걱정하지 말라고 아빠가 꼭 전화해 줘. 알았지? 응? 할아버지가 안전벨트도 잘 매주셨어. 나중에라도 언니가 충주 오고 싶다고 하면 아빠가 와 줄꺼지? 알았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밥 잘 먹고 성경학교 잘 다녀올게. 아빠 안녕. 엄마한테 꼭 전화해 줘.’
‘할머니. 저 할아버지랑 차타고 지금 충주 할머니 집으로 가고 있어요. 수영복이랑 치카치카랑 수달인형도 잘 챙겨가고 있어요. 금방 갈께요. 유아원에서 점심 많이 먹고 와서 배 안고파요. 할아버지가 귤이랑 망고랑 토마토랑 참외 사주신대서 먹고 싶은 것도 더 없어요. 아이스크림은 가면서 하나씩만 먹기로 할아버지랑 약속했어요. 네. 저도 많이 보고싶어요.’
우리의 작은 야가 요렇다. 요리보아도 조리 보아도 틀림없는 요물이다.
할머니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자기 밥그릇을 스스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이다. 특히 요녀석을 빗대어 자주하는 말이다.
세리는 귀여움 받는 법, 호감을 얻는 표정과 표현을 하는 법, 누구에게나 서스럼 없이 다가서는 법, 거기다가 제 스스로가 이미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깨우침에 이르기까지 제 밥그릇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자주 말한다. 거기에다 세상 모든것에 대한 넘치는 호기심에다가 남들에겐 없는 겁대가리 상실(?)의 용기까지 밥그릇에 담겨 있으니........ 장차 무엇이 될꼬?
2박3일 여정의 2026년 (추산교회 여름 성경학교) 행사가 금년에도 성황리에 잘 마쳤다고 한다.
우리 작은 손녀 세리의 참여도와 관심도와 만족도는 그야말로 최고다. 내년에도 어김없이 꼭 다시 참석하겠단다.
나는 처음 여름성경학교 시작하는 시간만 잠시 참관을 했고, 할머니는 시작과 마감하는 시간 참석을 했다. 나머지 시간은 아침에 데려다주고 저녁에 데려오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금년도 여름 성경학교의 주제는 (노아의 방주)였다.
구약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이미 영화화되었을만큼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아직 어리거나 심지어 글을 깨우치지도 못한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무슨 크신 뜻이 있으셔서 그런 고난을 내리셨는지, 그 결과가 어떤 긍정적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가 오히려 몹시 궁금할 지경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잠들기 전까지 (노아) (노아)를 연발하면서 어떻게든 열심히 설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자니,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고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지 못해 속으로 웃음이 터져 올라왔지만, 녀석의 열정과 애쓰는 것을 볼 때 절대 함부로 웃을 수가 없었다. 하여간 넘치는 에너자이저인 우리 세리 요정의 넘치는 열정 하나만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싶다.
지금 당장 노아는 아무래도 좋다. 훗날 청소년이 되고 나면 할아버지랑 영화 (노아)를 함께 보자꾸나.
물론 성경학교의 모든 프로그램을 참관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 각자는 직업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따로 있었고, 평소 우리는‘교회 안에서, 모든 진행과 운영은 프로그램을 실질적 준비를 하고 진행을 맡아서 하는 여름 성경학교 담당자의 고유한 영역이자 몫’이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참관이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보람일 수도 있겠지만, 때론 부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멀리서 성원을 보내고 격려를 보내고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사실 아주 오래전에(짱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저런 여름성경학교의 실무 담당자였던 적이 있다.
지금은 교단 차원에서 커리큘럼이 만들어지고 사전 지도자 강습이 있고 하지만, 당시에도 그런 과정이 있기는 있었지만 지극히 현실적이지 못했다. 해서 자체적으로 커리큘럼을 짜고 인쇄 책자를 만들고 자체 담당자 강습을 하고, 교회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분들의 적극적 협조를 얻어 여름 성경학교를 진행했다. 중고등부 학생회나 청년부와 대학부에 대해서는 별도의 커리큘럼은 물론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했고, 장소를 물색해야 하는 여러 어려움 등이 따로 수없이 많이 산재해 있었다. 챠밍여사와 내가 바로 그런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담당자였다. 중고등부를 위해서 수주팔봉 분교와 미륵리 분교를 섭외하려 쫓아다니다가, 최종으론 박달재 기도원에서 진행했었고, 청장년부와 대학부를 묶어서 지금 써핑의 성지라 부르는 양양의 죽도 해변까지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아주 먼, 까마득한 과거의 아주 착실했던 기독교 청년이었을 시절의 오래된 이야기지만 말이다. 당시 충주의 가장 활기찬 유명 교회에서 주일학교, 학생회, 성가대 등 나름 맡은 바 역할을 열심히 다했던 큰 일꾼이었지 싶다. 더 열심히 해서 그동안 받았던 사랑과 은총에 보답을 했어야만 했는데.
그러나 아쉽게도 현대 한국 기독교 교회의 가장 큰 폐단이자 병폐로 등장하는 시련들이 우리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에 거듭해서 반복되었고, 나는 그 후로 무교회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아울러 그런 내 덕분(?)에 챠밍여사도 맡겨졌던 막중한 교회의 일(?)을 모두 내려놓게 되었고, 나와서 작고 소박한 교회를 찾아다니다가, 지금은 (추산교회)에서 정말로 차분하고 소박하고 단란하며 그동안 이상적으로 기대하던 바로 그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무척이나 감사하고 적극 지지를 하고 무엇이든 다 돕고 싶지만, 단 한 가지만, 지금의 내 방식대로의 ‘무교회주의’ 만은 건드리지 말아 주기를 여전히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다.
여러 종교가 존재하고 또 여러 교파가 존재하듯이,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다른 방식의 신앙 생활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받고 싶다는 뜻이다.
세리의 (여름 성경학교 참석)만큼이나 당장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조건 지금 당장 녀석이 우리 옆에 손 닿는곳에 있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를 떼어놓고 녀석들을 데리고 처음 캠핑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엄마 아빠가 뒤에서 쩔쩔매는 표정을 보이던 때가 엊그제만 같다. ‘새벽에라도 자꾸 보채면 연락하세요. 데리러 갈게요.’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캠핑을 마치고 한층 으젓하게 자란 당당한 모습으로 엄마 아빠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린 녀석들을 데리고 열흘을 훌쩍 넘기는 기간동안 비행기를 타겠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비행기 안에서 잠투정을 해서 저희들도 애를 먹은 적이 있단다. 출입국 시간이 늦거나 새벽이면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있게 걱정말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항상 자신이 있다. 우리 병아리들과 함께라면 언제 어디든지 말이다. ‘핏줄은 서로 당긴다’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 아무리 어떤 어려운 상황이 생긴다 해도, 또 우리 병아리들이 아무리 어려도, 상황이 주어지면 우리 모두가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서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쯤은 말하고 이해 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느낀다는 말을 나는 굳게 믿는다. 가족이니까, 핏줄이니까 말이다.
그런 내 생각이 기가막히게 들어맞았다.
새벽 2시에 출국 수속을 하고, 새벽 5시에 입국 수속을 반복해도, 우리 병아리들 잠투정 한 번도 없이 제 스스로 여권 들고 작은 배낭 메고 제발로 당당하게 걸어 다니면서 어설프게 ‘신짜오’와 ‘땡큐’를 연발하면서 직접 다 해결해냈다. 할아버지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주면서, 그렇게 또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번 여름 성경학교엔 언니 없이 단독으로 첫 출격을 감행하는 세리를 보자니........ 정말 다 컸다. 기가차서 헛 웃음이 자꾸만 나온다.
언젠가........ 시간이 훌쩍 지나서..........
이들 두 자매가 로마나 파리나 바르셀로나로 자유여행을 떠난다고 생각을 해보니.......... 그 여행을 앞에서 끌어가면서 주도할 사람은 아무래도 세리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세리야. 언니 잘 챙기면서 다녀야 해?’아무래도 그럴것만 같다. 세리가 매사에 훨씬 적극적이고 도전적이니까 말이다. 거기다가 겁대가리 상실(?)이라는 태권도 소녀가 아닌가 말이다.
'윤세리. 너 일곱살이 정말로 맞니? 무슨 일곱살이 그렇게 징글징글(?)해?''
'내년엔 핸디폰이 생기겠네? 학교 들어가면 사주기로 아빠가 약속했으니까. 할아버진 벌써 기다려져. 세리가 할아버지에게 (모야 모야)로 전화할 날을 무척이나 손꼽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윤세리는 할아버지의 검딱지, 할아버지는 윤세리의 눈딱지.’
할아버지보고 잠자는 세리 숨결 확인해 본다고 장난치다가 건드려서 애를 깨운다고 크게 나무라면서, 정작 할머니는 잠든 세리 팔뚝을 잡아당겨 물어 뜯고 난리다. 손녀가 장난감이여? 뒤에 있는 수달 인형이나 가지고 노실일이지 할머니가지 되어가지고 자는 애를 괴롭히면 어떻게 하니?
헐!!! 할머니 지금 정말 어이없다는 걸 알아? 그러다 깨면 어쩔거야?
정말로 정말로 이 녀석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면서 ‘안될까요?’라며 어떤 간절함을 눈동자에 가득 담아 보이면 일단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만단. 이래서는 안되지. 아무렴 안되고말고, 하면서 결국엔 녀석과 무엇이든 타협을 할 생각을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서로에게 늘 다짐에 다짐을 하듯이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아무리 귀하고 소중하고 한없이 예쁜 손녀들이라고 해도 절대로 버릇없는 어린이로 자라게 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단호할 때는 엄청 단호하게 엄한 학교 선생님처럼 대할 때도 가끔은 있다. 지금 우리 병아리들의 시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옳은 것’과 ‘그른 것’등의 가치관이 모두 형성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른이 되어서 입으로는 ‘양심’과 ‘상식’을 외치면서도, ‘내로남불’과 ‘몰염치’의 근본을 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최소한의 ‘사람다움’을 어떻게 정의 내리면 좋을까?
달랑 아들 하나를 낳아놓고 이름을 지을 때 무척 고심했던 기억이 있다. 누가 말하길 ‘사람은 이름대로 따라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뿐일 소중한 우리 아들이 어떤 생을 살아가기를 아빠로서 바라야 할까? 자식이 태어나면 한 달이라는 출생 신고 기간이 주어진다.(1985년 당시) 기간이 지나면 하루에 만 원씩 벌금이 부과된다. 벌금을 피하려면 생년월일을 가까운 날짜로 바꾸면 된다.
난 벌금을 냈다. 기간 내에 이름을 짓지 못했고, 그렇다고 생일을 바꾸어 주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돌림자를 꼭 고집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아들이면 무조건 하나뿐’이라는 사전 각오 속에 태어난 하나뿐일 아들의 이름을 아빠로서 기대하는 녀석의 인생에 걸맞게 짓는다는 게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정한 것이 ‘어질 현(賢)’과 ‘이룰 성(成)’이 들어가는 이름이었다. ‘착하게 살아다오’, 그것이 아빠가 아들에게 바라는 전부란다.
그런 아빠의 노고(?) 덕분이었을까? 난 지금 이 순간까지 하나뿐인 아들 때문에 속이 상했거나 화가 났거나 후회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야말로 ‘우리 집은 아빠는 개구쟁이, 아들은 애늙은이다.’
그랬으니 자식 교육의 기준은 당연하게 ‘우리 아들처럼’ 혹은 ‘우리 아들만큼 만’이 되었다.
물론 이 대목에 대해서 할머니는 불만이 상당하다.‘아들을 당신이 길렀니? 내가 길렀지? 당신이 뭘 얼마나 알아? 내가 남모르게 피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당신은 몰라. 그런데 아들은 모두 알아. 그래서 우리 아들 심성이 이 절대로 엄마를 슬프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서 지금 저렇게 버젓하게 된 거야. 알아? 제발 아빠만은 닮지 말라고 내가 밤을 새워가며 기도했다고? 그 기도를 아들이 다 들었다고 알아?’
‘어험!!!! 아들은 나를 그대로 옮긴 것처럼 똑같게 생겼는데 닮지 말라니? 길쭉한 허우대에 절대 호감형 인물하며, 그런 원본인 내가 어디가 어때서?’
‘허이구. 아들한테 직접 물어봐?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냐구?’
‘뭐가 어때? 살 좀 빼서 옛날 아빠 모습으로 좀 돌아가 달라는 것 말고는 없더구만. 이래뵈도 우리는 지금도 만나면 항상 꼬옥 안아주면서 포옹으로 인사하는 아주 보기 좋은 부자지간이라구.’
‘그게 인사가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아들이 아빠를 껴안아보면서 살이 빠졌는지, 근육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건강 걱정이 돼서 그때그때 눈치껏 체크하는 거라는 생각 안 해봤어?’
‘포옹이 인사가 아니라 아빠 건강체크라고?’
‘그려. 언젠가 아빠 살이 좀 빠지고 체중이 줄었는데 아빠 어디 아픈것은 아니지 하고 내게 묻더라.’
헐!!!
이넘이 정말........ 착하게 살으래니까 이젠 컸다고 은근히 아빠 뒷바꾸를 쳐?
아무튼, 그래서 그런 아들을 보더라도 교육은 무조건 챠밍여사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아니겠어? (기독교 교육) 분야를 괜히 전공했겠어? 그게 다 나중에 아들하고 손녀들에게 쓰려고 미리미리 공부해 두었던 것을 내가 아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고 무슨 거부감이 있겠어. ‘자녀 교육은 무조건 태리 세리 할망구여’라고 칭송을 했는데, 느닷없이 돌아온 답변은 그게 절대로 전부가 아니란다.
‘태리와 세리의 자녀 교육은 오로지 겡구(며느리)의 몫이여. 그것이 산통을 겪고 제 자식을 낳은 엄마의 고유 영역이기 때문이여. 그 엄마의 성품과 자질이 어떤지는 그것 또한 태어난 그 아이의 복이 되겠지.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겡구의 성품과 성격과 가치관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될 만큼 올곧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어. 그게 태리와 세리의 복이기도 하고 아들의 복이기도 하고, 결국은 우리의 복인 것이지. 겡구가 태리와 세리를 우리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잘 길러 줄거야. 우리는 한발 물러서서 그냥 묵묵히 지켜보기나 하면서 혹시나 겡구가 부탁해오는 것이 있다거나, 우리가 저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으면 모를까, 늘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후견인이면 되는 거야. 가능하면 온전하게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오래 곁에 있어주면 더 좋은거고, 그냥 존재 자체로 녀석들에게 뿌듯하고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면 되는 거야. 때론 한없이 너그럽고, 때론 저승사자 보다도 더 엄한 할머니 할아버지여야 하고.’
그래서 우리에겐 ‘무조건 무조건이야’는 통하지 않는다. 대신 대화와 소통의 장이 언제나 열려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설득시키면 언제든 무엇이든 기꺼이 병아리들 편에 서서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고 운명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누구? 태리와 세리 할아버지 할머니다.
바라기는 녀석들이 언제든 찾아와서 쉬었다 갈 수 있는 그런 푸른 숲이었으면 좋겠다. 싱그러운 바람결이 스쳐 지나는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추억속의 그런 아름다운 숲으로 남아 오래오래 기억되고 싶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집이 그런 푸른 숲속의 집이다.
우리 아파트는 오로지 세리를 위한 놀이터요 캠핑장이다.
거실에 커다란 러그를 하나 펼쳐서 깔아놓고 그 위에서 뛰어놀고, 그 위에서 함께 밥과 과일을 먹고, 그 위에서 함께 나뒹굴다가 그대로 널부러져 함께 잠이 든다. 캠핑장 텐트에서 늘 그랬듯이 말이다.
오늘 세리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지현 현대 캠핑장)에서 캠핑여행중이다.
2박 3일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2026년 (여름 성경학교) 시즌 행사가 모두 끝났다.
일요일 오후에 언니랑 엄마랑 아빠가 막내딸 세리를 데리러 왔다.
혹시나 2박 3일간 언니랑 엄마 아빠를 못 보아서 눈물이라도 흘릴까 궁금했는데 결과는 전혀이지 않은가? 짧은 이별이었고, 꼭 그만큼 그리움이 쌓인 반가운 만남이었다.
일전에 황매산 캠핑에서 돌아와 보았던 꼭 그런 장면의 이어짐이었다.
그만큼 또 우리세리가 한단계 성장했다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오늘 이 순간으로서 우리 세리의 유아 어린이 시기는 끝이나는가보다. 내일부터는 어엿한 소녀겠지?
그럼 우리 세리가 아가씨가 될 날도 그리 썩 멀리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이구야. 그럼 요물이 나이를 더 먹으면 모가 되는거지?
늦은 점심을 함께하고 헤어지면서 언제나처럼 또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교대로 달려와 매달리면서 작별의 포옹을 해주는데.......
헐!!!
그새 더 자랐음일까? 왜 갑자기 세리가 무겁게 느껴지지?
떠나가는 아들의 차를 보면서 할머니가 내 어깨를 툭 친다.
'할아버지 노릇하느라고 수고 하셨어. 이것으로 우리 몫의 이번 여름은 다 지나간셈 치면 되겠다. 가을이 오면 그때 상황을 봐서 다시 계획을 세우면 되겠지 뭐. 다음주에 우리끼리 여행이나 잘 다녀오면서 푹 쉬어 보자.'
'이제 여름이 시작인데 그게 되겠어? 병아리들도 어제부터 겨우 방학이 시작된 것인데, 여름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고. 그걸 벌써 다 지나갔다고 할 수 있나? 우리 병아리들이 그냥 넘어가겠어?'
'지난주 캠핑을 앞당겨 다녀왔지. 이번 주 여름 성경학교 무사히 마쳤지. 다음주에 지들끼리 마카오 가족여행 간다고 했지. 덕분에 원래 예약해 놓았던 우리끼리 단양 여행을 한 번 더 가게 생겼지. 그리고 한 주 있다가 아들과 겡구 직장 여름휴가로 애들 데리고 제주도로 여행 다녀온다 했지. 그러고 나면 한 주나 두주 있다가 여름방학 끝나고 개학인데 뭘 더 어쩌겠어? 금년 여름은 이것으로 지나가는 거지. 병아리들 스케줄이 우리보다 훨씬 빼곡하게 바빠. 방학 후반부의 기간에 이모랑 외할머니하고의 스케줄도 있을 거니까, 뭔가 우리가 더 하고 싶어도 도무지 시간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뭔가 해주고 싶어도 시간적 틈새가 없다니까? 병아리들과의 금년 여름은 오늘로 모두 지나가는 거야. 혹시나 아쉬움이 있으면 우리끼리 다녀오는 계획밖에 더는 없어. 잘 생각해가며 연구를 해 보시던가?'
'담주 단양 우리끼리 캠핑도 안 내킨다고 했으면서 더 계획은 무슨 계획?'
'일이 몰려드니까 그러는 거지. 그러니까 당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줘 봐. 그리고 유독 심한 무더위에 우리 모두 잔뜩 지쳐가잖아. 쓰러지기 전에 잠깐씩은 쉬어가도 되는 거야.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러니까 힘써 도와줘봐. 내 기꺼이 단양캠핑 따라간다고 지지로 돌아섰잖아. 싫어?'
'누가 싫대? 그럼 이번에 캠핑을 모처럼 우리끼리 다녀오고, 여름 무더위 상황 지켜보면서 여름이 혹독하면 나중에 한 번 더 우리끼리 어디든 가볼 궁리를 해볼까?'
'그리시던가? 나도 우리끼리 쉰다고 하면 무조건 찬성이고 따라나설거야. 약속해.'
'알았어. 8월 하순이나 9월 초쯤에 한 번 더 계획해 보기로 하자.'
'우리 병아리들은 지금 잘 가고 있겠지?'
'왜? 가니까 그새 아쉬워?'
'오면 반갑고 좋으면서도, 가고 나면 더 좋고 고마운게 손녀라니까? 애물단지라고 내가 늘 그러잖아?'
'겡구한테 일러준다?'
'그러시든가? 그래봤자 겡구도 내 말에 적극 동의할껄? 그러면서도 또 언제든 병아리들을 우리에게 보내줄꺼고.'
우리 세리가 떠나갔다. 제 집으로 돌아갔다.
사방에 세리 특유의 흔적을 잔뜩 남겨놓고 말이다. 할아버지 차에, 할머니 차에, 그리고 아파트에 사방에 걸쳐 세리의 흔적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차엔 귤 껍질이랑 과자 봉지랑 부스러기 들이 널려있고, 부엌 식탁과 냉장고엔 평상시 잘 보이지 않는 세리 전용 과일들이 쌓여있다. 인형이며 액자들이며 장식품들이 어질러져 있다. 열심히 가지고 놀던 흔적이다. 그러고보니 제대로 제자리에 있던 그대로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런만큼 흔적은 여기저기 남았지만, 잠시 다녀간 녀석의 빈자리는 다욱 커 보인다.
썰렁!!!! 마치 우리집 같지가 않게 느껴질 정도이다.
'진짜로 우리 세리가 가버렸네. 아이고야. 하루 더 있었으면 할머닌 쓰러지는 줄 알았아. 이제 좀 누워서 쉬어 보자. 잠시 쉬어서 컨디션을 되찾아야 내일 다시 일할 것 아니야? 그러니까 저녁도 당신이 어떻게 좀 해봐.'
'있던 병아리가 당장 옆에 없으니까 이상하네? 집이 너무 썰렁해?'
'부탁인데...... 오늘은 더이상 병아리 타령 하지 말아줘. 나 정말 힘들었다니까? 세리 이야기 하려면 내일부터 해. 알았지? 세리 보내고 나니 이게 얼마만에 쉬어보는거냐고? 오늘만은 세리없이 할머니 좀 제대로 쉬게 해 줘. 세리가 출발하고 나니까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한 느낌이야.'
'하나 다녀갔는데 그러면서 둘 다 데려와야 한다고 할때는 언제고? 태리까지 왔으면 엠블런스 불렀어야 했겠네?'
'자꾸 시비 걸래? 할머니부터 살려놓고 나서 병아리 타령 하라니까? 어쨌거나 오늘은 세리도 태리도 없다!!!!!!!!!! 할머니 반나절 정기휴일!!!'
'개뿔! 갖다가 붙이기는......... 차라리 조금만 더 붙잡고 있다가 저녁에 할아버지가 데려다 줄껄.'
'지금이라도 쫓아갔다가 오시던가? 좋은말 할때 이마트나 다녀오셔. 저녁 좀 책임지라니까?'
'이 많은 과일을 다 어떻게 하냐? 싸서 보내줄껄. 기집애. 과일이나 다 먹고 가던지 말던지........'
'정말 이럴꺼야? 내가 오늘은 더 이상 세리 찾지 말랬지?'
할머니는 호언장담을 늘어 놓았다.
‘금년도 여름방학에 대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야. 여름 시작하면서 캠핑했지, 여름 성경학교 했으면 충분한 거지. 겡구가 병아리들 데리고 마카오 여행 다녀온다고 했지, 8월 중순에는 휴가로 제주도 여행한다고 했지, 그리고 나면 바로 개학이야. 그러니까 올여름 우리의 역활은 모두 여기서 끝! 대신 이제부터 우리 노인네들끼리나 어떻게 잘 지내볼까 궁리를 좀 해보셔. 지난번 검마산 여행처럼 처럼 병아리들 없으니까 우리끼리도 참 좋았잖아?’
‘그래도 여름 방학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그게 잘 될까?’
‘어허! 부정타게스리........ 세리 온다니까 무척 좋았잖아. 거기다 놀랍게도 이번엔 언니한테 떨어져서 혼자 온다니까 신기하기까지 했던 게 사실이야. 그럼 앞으로는 언제든 세리 보고 싶다고 하면 혼자라도 올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야. 그런데 이 무더운 날씨에 오고 나니까 정말로 너무너무 힘들었어. 작년하고도 다르더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 한 발짝도 움직이기 힘든데 애는 더 컸다고 쌩쌩 날아다니지, 발걸음은 못 따라가지, 거기다 이쁜 짓은 다 하면서 죽어도 같이 놀아달라고 하지,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아들이 데리러 온다는데 얼마나 신나고 좋았는지 알아? 그제야 살 것 같더라고. 아이고. 이젠 정말로 벅차. 온다니까 한없이 좋았는데, 간다니까 왜 더 좋아하게 된다는지 그 말뜻을 저절로 알겠더라니까?’
‘나도 사실은 그렇더라. 지쳐서 막 샤워하고 났는데 또 놀이터 가잘 때 기절할 뻔했어. 그냥 놀이터에 미니 텐트 하나 쳐줄까 했어. 앞으로 우리 어쩌면 좋냐?’
‘점점 텀을 더 두어가며 버티는 수밖에..... 그러니까 제발 당신이 먼저 사고 좀 치지 말아. 캠핑 여행도 세 번을 두 번으로 줄이고, 가능하면 기간도 좀 짧게 하고, 이젠 병아리들이 어느 정도 컸으니까, 아들보고 지덜끼리 놀으라고 하자니까. 병아리가 굳이 찾아오면 놀아주는 거고, 대대적인 행사는 각자 알아서 지덜끼리 알아서 하라고 하자니까? 우리가 녀석들에게서 슬슬 독립하는 준비를 해야 한다니까?’
‘이 할망구가 시방? 그럼 무슨 낙으로 사니? 난 병아리 없으면 안돼. 쫓아다니다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우리 병아리들이 곁에 있어야 해. 아직 함께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데? 계절마다 들로 산으로 캠핑 다녀야만 해. 병아리들이 먼저 싫다고 할 때 까진 죽어도 갈 거야.’
‘누가 안 간대? 점점 나이들면서 힘에 부치니까 조절 좀 하자는거지? 누군 병아리들과 있는게 싫대?’
‘온다면 기쁘고, 가고나니까 정말 행복하다면서? 난 그렇지 않다니까?’
‘너무 자주 보게되면 소중함이 떨어지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적당한 거리와 시간을 두고 서로 간에 애틋함을 잘 조절해 나가는 것이 더 현명할 때도 있다는 말이야. 지금 우리에겐 어느 정도 그런 시간이 필요해. 알았지? 한동안 좀 참아보는 거야. 병아리들이 간절하게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을 때까지 말이야.’
‘그게 잘 되려나? 아직 한참 어린것들이 무얼 어떻게 하라고?’
‘다 컸다면서? 이미 그런 지각 정도는 다 갖추었다니까? 어디 한 번 모르는 척 지켜보자고.’
‘아무리 그래도 추석까지는 너무 멀어. 캠핑을 가도 한 번은 더 가겠다.’
‘누가 추석까지래? 다음달에 세리 생일도 있잖아? 그러니까 그때까지만이래도 모르는 척 해봐. 지난번에 세리가 벌써 할머니한테 생일선물로 받고 싶은 것이 있어요 라고 하더라니까? 얼마나 영악한 녀석인데. 이제 곧 선물 확인 연락을 해올 거라니까? 다섯 밤을 약속하고 하루하루 세었던 녀석이야. 한 치의 틈도 없는 무지하게 영특한 녀석이 우리 세리야. 기다려봐. 내 말이 틀림없을 테니까.’
‘설마....... 세리는 이제 겨우 일곱 살인걸?’
‘요물덩이 악마구리라며?’
‘누가 그래? 잠들면 천사라니까? 세리는 그냥 아직은 어린 요정이라니까?’
‘아니야. 엉덩이에 벌써 꼬리 하나가 튀어나온 여우 새끼야. 끔찍한 여우.’
여행을 하면서 내가 늘 투정을 부리듯 자주 투덜대는 말이 있다.
‘내 슬픈 예감은 왜 항상 틀리지 않는 것 일까?’하는, 내 자신에게 슬쩍 털어놓는 약간의 빈정거림이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 뿐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도 이런 빈정거림은 늘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이번에 할머니가 세리의 영특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살짝 비판적인 은근스런 디스 같은 결론을 확신했었다. 수일 내로 세리에게서 자신의 생일에 할머니에게서 받고 싶은 선물에 대해 확인하려는 연락이 올 것이라고 말이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겨우 일곱 살이 된 꼬맹이가 그렇게 철저한 집요함을 벌써 가질 수가 있겠어? 그냥 해 본 소리고 저 자신도 벌써 까맣게 잊었을거야. 할머니가 다시 물어봐 주어야 그제 다시 기억을 떠올릴테지.’
‘아니라니까? 세리는 당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경우와 현실적인 계산을 이미 마쳤을껄? 모르긴 몰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녀석이란 말이야. 자기 생일이니까 할머니가 반듯이 선물을 해주실 텐데, 어떤 것을 주세요 라고 할까 하는 생각 정도는 이미 마쳤을 것이고, 다음으로 어떤 정도의 요구를 해야 할머니가 받아들여 주실까를 지금쯤 고심하고 있을거야. 두고 봐. 정말이라니까? 그뿐인 줄 알아? 할머니가 선물을 해주었어도, 그 선물이 엄마 아빠에게도 순순히 허락받을 수 있는 정도의 선물이어야만 한다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고심 중일 녀석이라니까? 제가 아무리 갖고 싶어도, 할머니가 선뜻 허락할 수 있는 정도에서 골라야만 하고, 그래서 할머니가 사주었다고 해도 엄마 아빠 보기에 지나친 선물이라고 지적을 받게되면, 녀석이 생각하는 선물의 기쁨과 가치가 부서져 버리거나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녀석은 이미 깨닫고 있어. 할머니의 수락과 엄마 아빠의 동의를 전제로 하고 나서 제가 갖고 싶은 것을 골라야 하는 거야. 만약 그게 안 된다면 어떻게든 수락과 동의를 얻어낼 방도를 궁리할지도 모르지. 세리는 아직 어려. 분명한 일곱 살 꼬마는 맞아. 하지만 녀석의 정신연령과 셈 능력은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성인식을 해도 될 만큼 노련한 욕심쟁이라니까? 두고 봐.’
설마.......
할머니가 틀릴 것이라고 믿었고, 슬픈 예감처럼 당연히 틀려주기를 바랬다. 할아버지에겐 그저 깜찍한 재롱둥이 요정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에 아들을 통해 세리에게 전화가 왔다.
주말에 또 충주 할머니한테 가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캠핑이나 다른 행사나 계획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냥 할머니한테 가고 싶어졌단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 이제 세리가 바라는 확실한 생일선물이 정해졌다는 이야긴거야. 그걸 아주 신중하게 할머니에게 직접 타진해 보고 싶어진 거야. 아무래도 우리 세리는 이담에 커서 외교관이나 무역하는 사업가가 되어야 할까봐.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런 게 우리에게 왔니? 정말 미치겠어.’
할머니는 전화를 바꿔 직접 세리와 통화를 시작했다.
‘그새 또 할머니가 보고싶어 졌어? 하이고 감사해라. 할머니도 우리 세리가 또 너무너무 보고 싶어. 그런데 세리가 좀 이해해 주어야 할게 생겼어.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요즘 너무나 바쁘게 일이 많이 밀려 버렸어. 내일도 일 약속이 있고 모레도, 그리고 어쩌면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우리 세리가 너무너무 보고 싶지만, 이렇게 전화 올지를 모르고 사전에 이미 약속한 일들이라 이번엔 어쩔 수가 없겠구나. 약속은 어떻게든 꼭 지켜야 한다는 걸 세리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아무리 바빠도 곧 세리 생일이 돌아오고, 그게 아주 큰 기쁜 날이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단다. 기쁜 선물을 주고 싶은데 아직 어떤 것을 할 것인지 결정을 하지 못했어. 할아버지랑 열심히 상의하고 있으니까 조금 기다려 주겠니? 늦어도 다음 주 안으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각한 선물을 너에게 알려줄게.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의 생각과는 다르게 세리가 다른 원하는 것이 있다면 또 세리하고 상의해서 가장 좋은 선물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너도 무엇이 좋을지 생각해 보아 주겠니?’
‘할머니. 저는 벌써 생각해 둔게 있어요.’
‘그래? 그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나서, 가능하면 우리 세리의 생각을 알아맞힐 수 있도록 시간을 좀 주지 않겠니? 다섯 밤 안에 세리 생각을 알아맞히도록 노력해 볼게. 요번 주는 너무 바빠서 못 만나지만 열심히 일해서 급한 것만 마치게 되면 다음 주에는 충주 올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요번엔 세리가 이해해 주면 고맙겠어.’
‘알았어요. 할머니 그럼 다섯밤 자고 할머니가 전화 해주실거지요?’
‘당연하지. 약속! 우리 세리를 할머니 할아버지는 너무너무 사랑해요.’
‘저두요.’
전화를 끊고나니....... 만감이 교차한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겡구(며느리)에게 문자 보내 놓아야 하겠어. 세리가 할머니에게 어떤 선물을 기대하고 있는지 정보를 좀 캐내 봐달라고 말이야. 이 영특한 녀석에게 그 정도의 서프라이즈 한 능력은 할머니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할머니는 늘 너와 똑같은 마음이야. 너를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 보니까 네 생각이 들여다보이는 것이란다고 말해주고 싶어. 세리를 생각하면 할머니는 늘 긴장 상황이고 비상사태이지 싶어. 도대체 저 요물단지 재를 어쩌면 좋아?’
‘호호상박(狐狐相搏) 이지 뭐. 할머니는 꼬리 아홉인 구미호, 겡구는 꼬리 여덟인 팔미호, 태리는 꼬리 셋인 삼미호, 이제 고리가 막 나온 세리는 그냥 새끼여우. 하여 우리 가문은 말 그대로 여우 천지요, 여우 공화국이란 말이지.’
‘그럼 아들은 뭐야?’
‘할아버지는 이빨 빠지고 발톱 다 빠진 무늬뿐인 푸른 늑대, 아빠는 제 스스로 발톱을 다 갈아내고 스스로 마우스 피스까지 입에 물고 여우 공화국에 귀순한 무늬뿐인 푸른 늑대, 한마디로 집안 꼴이 폭싹 망했다는 말이지.’
‘이참에 겡구랑 나랑 위치 바꿔줘. 아무리 따져봐도 우리 겡구가 더 한참 고단수여. 곳간 열쇠 넘긴 지가 언제인데?’
그래서 이렇게 끝나고 다 지나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이상하게 ‘할머니가 세리만 생각하면 늘 긴장의 연속이고 비상사태 대기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도대체 왜?
‘왜 슬픈 예감은 늘 틀리지를 않느냐는 말이다? 왜?’
바로 다음날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공동작업을 하는 날이라서 오후까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모야? 모야?)가 또 울려 퍼진다. 요새들어 (모야모야)가 참 바쁘게 자주도 울린다.
‘할머니. 조금 전에 아빠가 와서 세리 데리고 병원에 갔어요.’
‘왜? 세리가 어디 다쳤어? 어디가 아픈거야?’
‘다친 것은 아니고요. 놀이터에서 놀다가 쓰러졌대서 제가 내려가서 집으로 데려왔는데요, 아빠에게 연락했더니 아빠가 쫓아와서 곧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갔어요. 엄마도 병원으로 가고 있대요. 무슨 일 생기면 할머니한테도 알려야 한다고 했던 약속이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그래 고마워. 태리는 지금 집이니? 그래. 아빠랑 엄마가 갔으면 별일 없을 거야. 할머니가 아빠한테 연락해 볼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엄마 올 때까지 가능하면 집에 그대로 있으렴. 알았지?’
아들과 겡구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세리가 아프다? 병원에 갔다?
이건 당장 우리 윤(尹)씨 가문의 재난 위기 경보가 최고 수위의 단계로 발령되었다는 뜻이다. 곧 가문의 위기다.
다른건 다 몰라도 우리 병아리들 안위만은 무탈하게 지켜야만 한다. 그게 이 할아버지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다. 나는 지금 오로지 병아리들에 대한 사명감으로 살아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아니 멀쩡한 우리 세리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왜 쓰러져?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여보. 당장 가봐야 하는 것 아니야?’
‘아들하고 겡구가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곧 연락 오겠지. 조금만 기다려 보자고. 내가 사람들과 마무리 할 테니까 당신은 차에 가서 아들 전화 기다려봐. 마무리부터 해 놓고 나서 애들 전화 받아보고 쫓아가던지 말던지 해야 하지 않겠어? 놀이터였다니 별일 아닐 거야. 세리 성질머리가 남달라서 이 무더위에도 아침부터 온종일 뙤약볕에 뛰어다니며 놀았을 게 뻔하지, 잠시 일사병이 온 것일거야. 교통사고만 아니면 우리 애들은 아무런 걱정이 나는 없어. 우리 가문 자체가 건강에 대해서만은 타고난 강골들이라 아무런 문제 될 게 없어. 너무 나대는 통에 잠시 기력이 떨어졌을 뿐이야. 내 말이 맞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봐.’
그렇게 다독이면서 할머니를 내보내고 나서 마무리 작업을 챙기는데.......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무엇이든 다 견디고 참아내고 할 수 있는데......... 우리 병아리들 아프다는 소리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당장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더 그렇다. 아! 정말 미치겠다. 할머니 안심시키려고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내 속은 타들어 간다. 혼자 있었으면 벌써 이천으로 출발을 했을텐데.......
잠시 지나서 할머니가 문을 열고 다가오는데 표정에서 옅은 미소까지 흘리는 게........ 그제야‘휴우’하고 안도의 한숨부터 내 쉰다.
‘이 녀석아 뛰어노는 것도 날씨 봐가면서 어느 정도껏 해야지, 그렇게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다니면 어떻게 하니 라고 하면서 의사 선생님이 세리 이마에 군밤까지 주셨대. 온종일 뙤약볕 아래서 물도 제대로 안 마시고 뛰어노느라 기력도 탕진할 만큼 했고, 결국 잠시 일사병이 온 거래. 포도당 주사 맞고 하루 이틀 너무 뙤약볕에 나가지 않게 좀 쉬고 나면 말짱해질 거라고 하시더래. 지금 병실에서 링겔 주사 맞기 시작하셨다네? 공주마마께서.’
‘세리 표정이나 상태는? 의식은 정상이고 이야기도 제대로 하고?’
‘엄마를 보더니 다짜고짜 귤이 먹고 싶다고 하더라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바늘 꽂은 거 보고 나서 겡구는 귤 사러 마트에 갔다고 하네. 아들이 지키고 있대.’
‘어이구 그넘의 과일 귀신. 그 상황에 귤이 땡기신다니 별일 아닌 것은 확실한 게 그걸로 확실히 확인이 되네. 다행이여.’
(모야 모야)가 울리더니 겡구에게서 할머니에게 카톡으로 사진이 한 장 날아왔다.
‘아니. 시방 야가 누구여? 우리 세리 아니여?’
‘야가 시방 무슨 씨츄에이션을 보이고 있는 것이여? 이 상황에서 시방 귤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딸기 우유에 과자까지? 이거 순전히 아라비아 공주마마 레벨의 처우를 받고 계신 것이잖아? 헐!!!!!’
더불어 겡구의 추가 문자가 도착했다.
‘어머니. 놀라셨지요? 다행히도 별일 아니래요. 포도당 주사 맞고 집으로 갈거예요. 하루 이틀만 쉬게 하면 다 나을 거라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그러니까 허겁지겁 달려오시지 않으셔도 되어요. 내일은 오빠가 집에 있겠다고 했고, 주말엔 제가 잘 돌볼 테니 너무 걱정하시지 마세요. 이런 날씨에 혹시 놀라 달려오시면 어떻게 하나 오히려 그게 더 걱정되니까 제발 오늘은 마음 놓고 집에서 쉬세요. 자주 연락 드릴께요.’
‘그래 걱정하지 마렴. 그냥 집에 있을거란다. 세리 얼굴만 보아도 이렇게 마음이 놓이네. 그래 너희가 잘 돌보아 주렴.’
답변 문자를 막 보내고 있는데 다시 벨소리가 울리더니 그 안에서 우리 세리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할머니. 저 이제 괜찮아요. 주사 맞고 집에 갈거에요. 너무 열심히 뛰어 놀아서 그렇대요. 앞으론 좀 조심할께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일 또 전화할께요. 할머니 안녕. 빠이빠이.’
전화를 끊는 할머니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 지고 있다.
아까는 악마구리라고 디스하더니 그새........... 어이구. 핏줄이 뭔지. 이거 할머니 할아버지 노릇도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러니 어쩌겠어. 아무리 큰 고난이 산 넘어 산처럼 쌓였어도 기꺼이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아 가야만 할 것을. 왜? 할머니니까, 그리고 할아버지니까?
그날.
저녁을 먹다말고 느닷없이 빤히 쳐다보면서 지상최대의 과업을 하달하시는 세리 할머니.
‘내 스케줄이 다음주랑 그 다음주까지 빼곡하거든? 다음주 수요일 하루만 작업이 없어. 목요일은 금요일로 옮길 수 있을것 같거든? 그러니까 5일과 6일은 비울 수 있다는 말이야. 당신이 수단을 발휘해서 4일부터 6일까지 2박 3일 동안 가능하면 가까운 곳으로 캠핑장 좀 급하게 구해봐. 이럴 때 할아버지의 특별한 능력 도움을 좀 받아보자. 알았지?’
‘지금은 최고 여름 성수기고 모두 추첨제로 이미 결정이 난 마당에 노지 차박이 아니면 어디서 캠핑장을 구하니? 날짜마저 여유가 있는것도 아니고 4일에서 6일 고정이라면서, 갑자기 캠핑장은 왜?’
‘세리가 아프다잖아? 주말은 겡구가 돌본다 해도 월요일 부턴 다시 어린이집 보내야 할 것 아니야? 아픈 애를 하루 이틀이라도 우리가 데려다가 돌보아 주어야지. 그래야 아들과 겡구도 마음이 놓일 것 아니야?’
‘금년 여름에 할머니 할아버지 역할은 끝났다면서? 추석 때 까지는 그냥 가보자 해놓고는?’
‘지금은 애가 아프니까? 그럼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그냥 이대로 있어야 하겠니?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해서라도 돌보고 싶은데, 그러면 할머니가 좀 지나친 게 아닐지 아들 며느리가 부담을 가질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이럴 때 할아버지가 힘을 써서 캠핑장 하나 구해주면 자연스럽게 여름방학 물놀이 핑계 대면서 세리를 데리고 있을 수 있잖아. 이럴 때 어떻게 좀 해봐? 세리가 쓰러져 아프지만 않으면 정말로 추석 때까지 마냥 미루려고 했다니까? 안돼?’
‘오! 주여. 이럴 때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세리를 데려 올 수 있게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아멘.’
헐!!!!
좀체로 안하던 기도까지 다 하고........ 이런 돌팔이 기독교인 기도가 효험이 있으려나?
좋다. 기왕 이렇게 된거, 실력발휘를 넘어 할아버지 발악을 해서라도 어디 한 번 제대로 붙어 보자.
‘우리 세리가 가장 좋아하는 캠핑장이 월악산 용하 야영장이렸다.?’
얼씨구?
헐!!!!
오 마이 갓!!!!!!!!
국립공원 야영장 예약 시스템을 부숴볼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첫 화면에 A-9, A-10 야영지가 미계약 상태로 눈에 탁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어쩌자고....... 세상에 이런일이?’
작년에 우리가 머물렀던 자리가 바로 A-9 싸이트가 아니었던가? 하여 용하야영장 최고의 명당자리가 거기라고 했었는데 지금 비어 있다. 서둘러 이런저런 검색을 해 보니 한 가지 달라진 점이 발견된다. 나무 그늘이 사라졌다고 한다. A-9 데크 사이트 옆에 중간 정도 크기의 나무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 그렇게 되면 A-9. A-10 싸이트는 한낮에 서너 시간 동안은 뙤약볕에 완전 노출이 된다. 그렇게 변했다면 이제 최고의 명당에 대한 내 주관적 판단은 아무래도 B-40. B-41번 사이트로 이동해야 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용하 야영장 자체 환경적 요인이 너무나 좋기 때문이지, A-9. A-10의 사이트에 서너 시간 빛이 강렬하다고 해도, 다른 캠핑장에 비교하자면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다양하게 많은 장점들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하여 기꺼이 이번엔 작년의 바로 옆자리인 A-10번 싸이트를 할머니가 당부한 날짜에 맞추어 예약과 결재를 마쳤다.
다음날 아침에 서둘러 화요일에 병아리들 데리러 가겠다고 했더니 아들과 겡구는 물론 태리와 세리까지 모두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할머니. 저 벌써 다 나았어요. 이번에 가면 더 열심히 많이 많이 뛰어 놀거예요. 기다릴께요?’
세리 요정의 목소리만으로도 또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윤세리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할머니는 천당과 지옥을 수도 없이 쫓아다닌다. 보면 볼수록 할머니 노릇도 만만한 것이 결코 아니게 보인다.
‘할망구야. 힘내. 그래도 당신한텐 아직 내가 있잖아.’
나는 화요일에 세리를 데리러 이천으로 달려가야만 한다.
우리는 전혀 예정에도 없었던 여름 캠핑을 또 다시 떠난다. 이번엔 작년에 다녀 온 (용하야영장) 어게인이다.
-- 가늠하기 조차 어려운 이 무더위에 모두 건강 잘 챙기세요. 다음 이야기는 (다시 찾은 용하 야영장) 이야기로 이어지겠습니다. 피안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