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오 9,1-8)
"Courage,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에 온전히 복종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시험은 당신 백성을 정화시키고 신앙을 단련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아브라함은 혹독한 수련을 거치며 신앙의 선조로 거듭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들것에 실어 데리고 온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다. 그분께서는 단순히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죄의식으로 짓눌려 있는 마음까지도 낫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온전히 낫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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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유다인들은 죄와 질병을 같은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요한 9,2 참조). 그들에게 질병은 죄의 결과이면서 또 죄의 처벌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질병에 걸리면 신체적 고통은 물론 죄인 취급을 당하는 정신적 고통까지도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 중풍 병자는 그래서 몸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마비된 상태인 것입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처럼 이스라엘 전통과 율법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주지 못했습니다. 병자들은 당연히 죄의 벌을 받는 것이기에 고통을 달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율법을 지켜야 하므로 사람이 아무리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해도 어떤 치료도 해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보다는 법과 전통이 늘 먼저였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없는 법의 찬 기운만이 감돌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중풍 병자의 마음을 헤아리며 연민을 가진 사람들이 그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어쩌면 그들은 가난을 함께 나누는 약한 처지의 이웃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법도 전통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이 더 중요합니다. 법과 제도를 앞세우며 사는 사람들은 그저 조직의 구성원일 뿐입니다. 이들은 신앙생활도 교회 규정만 잘 지키며 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냉정합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누군가 고통을 받으면 아픔을 함께 나누는 하나의 지체가 되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법과 제도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믿음과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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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은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지는 질환입니다. 그 결과 한쪽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발음이 힘들어집니다. 본인에게는 청천벽력입니다. 충격으로 한동안은 삶의 많은 부분이 흔들리게 됩니다. 새롭게 인생을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지만 저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복음의 중풍 병자는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기적을 체험하고 돌아갑니다. 자신을 태우고 왔던 평상을 본인이 들고 나간 것입니다. 그의 표정이 어떠했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놀람과 환희와 감사로 빛나는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까지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원인 모를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지은 ‘죄의 벌’이 그 사람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죄를 용서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었기에 죄의 결과인 중풍도 사라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따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사건’을 자신들의 지식만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눈길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몸이 건강하다고 마음도 ‘자동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마음은 절대로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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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악은 아브라함의 적자로, 정실부인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혈육이었습니다. 그것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부인도 포기한 상태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아이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바치라고 하시다니……. 이에 대한 사라의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나 아브라함은 어떤 식으로든지 부인에게 귀띔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펄쩍 뛰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데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사라가 잠든 사이에 이사악을 데리고 나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밤새 잠 못 이루며 고뇌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야속함이 참으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바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그분께서 주셨다가 그분께서 거두어 가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순간 제사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 아들을 바치려 했습니다. 내 자식이기에 앞서 주님께서 주신 아들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만으로 모든 아픔과 유혹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우리 신앙인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늘 창문 앞에서 앞집 여자가 게으르다고 흉을 보는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저 여자가 널어놓은 빨래에는 항상 얼룩이 남아 있어. 어떻게 빨래 하나도 제대로 못할까?”
그러던 어느 날, 깔끔하기로 소문난 친구가 부인의 집에 방문했습니다. 친구는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창문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었어요. 그러고는 못마땅한 듯 걸레를 들고 창을 닦기 시작하며 말했습니다.
“봐, 이렇게 닦으니 얼마나 깨끗하고 좋아? 창이 더러우면 창밖이 전부 지저분해 보인다고.”
이 여자는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탓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즉, 자기의 기준을 세우고 남을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처럼 흔한 것이 아닐까요?
얼마 전에도 글에 썼던 것 같은데, 저는 몇 년 전에 강아지 두 마리를 키웠었습니다. 아주 귀엽고 똑똑한 강아지였지요. 그런데 하루는 제 동창신부와 길을 가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동창신부가 “야, 네 강아지 아냐? 왜 여기 있지?”라고 말합니다. 그 소리에 자세히 쳐다보았지요. 분명히 제 강아지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말했지요.
“내 강아지 자주 봤었잖아. 그런데 내 강아지도 못 알아봐?”
그 말에 동창신부는 아무리 봐도 똑같아서 도저히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데 말이지요. 왜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요? 바로 관심과 사랑이지요.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으니, 남들이 보지 못하는 차이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이러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즉, 나의 관점에 상대방이 무조건 맞추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관점에 나를 맞추는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서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에 ‘이 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면서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감히 예수님을 향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생각에 예수님께서 맞추길 원하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생각과 판단만이 옳다는 착각 속에 계속 빠져있다면, 주님을 보고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이군.’이라고 말하면서 불충을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나의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웃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를 더욱 더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관심과 사랑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주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실수는 잘 못한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라(시드니 스미스).
닫힌 마음
-홍금표 신부-
오늘 복음은 사죄권을 놓고 벌어지는 율법 학자들과의 대립입니다. 예수님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에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며 반감을 표시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쉽겠는가? 하고 질문합니다. 두 가지 모두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는 말씀으로 중풍병자를 치유함으로써 당신의 능력과 함께 사죄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율법 학자들과의 대립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닫힌 마음입니다. 당시의 논리로는 메시아도 사죄를 선언할 수 없었기에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율법 학자들의 항변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과 논리는 실제적인 사실에 의해 재해석 될 때 의미를 가지는데, 율법 학자들은 과거의 논리를 가지고 현재의 실재를 해석하는 우를 범합니다. 예수님의 언행을 자신들의 논리로 판단합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욕심입니다. 예수님께 쏠린 백성들의 관심과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릴지도 모를 자신들의 권위와 명예, 그리고 예수님의 등장으로 드러날 자신들의 허례허식이 예수님과 대립의 각을 세우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 강석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시며 ,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시자 율법학자들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합니다 . 이러한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 ,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 ‘ 너희 ’ 는 누구일까요? 그건 바로 예수님이 사시던 ‘고을의 율법학자들’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라! 아시다시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통해 삶의 구심점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은 고장에서 소규모로 집회를 하던 ‘회당’의 기능을 강화했기에, 그곳에서 율법을 해석하던 율법학자들의 역할 역시 무척 중요했습니다. 그런 권한을 가진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이 되면 늘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자, 회당에서 충실히 토라를 읽으면서 생활하셨던 예수님을 몰랐을 리 없을 테지요.
자신에게 어떤 권한이 주어지면 사람들이 그 권한 안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독재나 힘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부류 사람들은 권한을 얻기 전에는 겸손한 척, 열심한 척, 소신 있는 척하며 살다가 권한을 취득하면 바로 그 권한으로 사람을 잔인하게 희생시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권한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학자들처럼 겉으로는 하느님 이름으로 권한을 행세하는 듯하지만, 그 권한이 자기 것인 양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과 권력을 휘두르는 권한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악한 것’이 됩니다.
문득 성직자든 수도자든 또 본당에서 어떤 역할을 맡은 사람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사람을 살리는 역할인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역할인지 제대로 묵상하고 싶어집니다. 무더운 7월의 여름, 왠지 내 삶을 돌아보며 나는 나에게 주어진 그 어떤 권한이든 ‘악한 것’으로 사용하지 않았는지 묵상해 보니,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겸손의 덕을 청해 봅니다.
인간은 ‘성사’적 존재
-전삼용신부-
오늘 미사를 드리면서 봉헌 때 손을 씻으며,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라고 경문을 외우다가, ‘개신교 신자들에게 이런 예식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라고 잠깐 고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손을 씻는 것이지 맘속에 있는 죄를 씻는 행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손을 씻는다고 마음의 죄가 씻기지는 않듯이,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성체성사도 하나의 밀떡과 포도주에 불과하고 고해성사도 인간이 죄를 사해주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은 육체를 지니면서부터 필연적으로 ‘성사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워낙 강하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대야에 물을 받아 손을 씻습니다. 물에 손을 씻는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은 그 행위로써 자신의 말에 대한 보다 강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듯이, 육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은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성사에는 항상 외적인 물질이나 말을 포함한 행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세례성사를 생각해봅시다. 세례성사에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에게 세례를 베풉니다.”라고 말만 하고 물을 붓지 않으면 그 성사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물을 붓거나 안 붓거나 그 영혼의 상태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그 물이라는 물질과 그것을 붓는 행위가 예식 말씀과 함께 어우러지지 않으면 성사가 이루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성사를 제정하실 때 항상 이런 외적인 요소를 포함시키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듯이, 그리고 그 분이 부활하셔서 여전히 육체를 지니고 계시듯이, 또 인간도 육체가 부활해야 온전한 구원이 되듯이, 육체를 지니고 사는 인간에게 내려오는 은총도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결합 되어야만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로 넘어와 봅시다. 개신교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하며 고해성사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과 직접적인 통교에 의해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들에게 들은 것은 그들이 아무리 울며불며 참회기도를 하여도 그리고 목사님이 다 용서되었다고 아무리 말을 하여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는지의 의구심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육체를 지니고 있는 인간은 영적으로만 만족할 수 없고 직접 자신의 귀로 죄의 사함을 들어야 완전히 만족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은 지금의 교회에 대한 개신교들의 반발만이 아니라 유다인들이 예수님에게도 똑 같이 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중풍 병자를 데려옵니다. 중풍 병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는 유다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느님만이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속죄의 예식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으심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며 그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 병자가 치유된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마다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당시 ‘병’은 곧 ‘죄’였습니다. 따라서 병이 치유되는 것은 곧 죄가 용서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누구도 그 사람의 죄가 용서되는 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죄의 용서’와 ‘눈에 보이는 병의 치유’를 결합하여 사람들에게 온전한 성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든 성사들이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과 눈에 보이는 행위나 물질과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오는 단순한 ‘사람’의 아들,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하며 예수님 한 분만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음을 암시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포함하여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주셨듯이, 아들은 교회를 사랑하여 당신의 모든 권한을 교회에 주십니다. 사랑의 본질은 모든 것을 주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체적인 행위가 바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는 것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리는 이 권한이 바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늘나라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다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권한이란 그 죄를 용서하는 신적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 하늘나라의 열쇠를 열두 사도가 나누어 사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열쇠는 오직 하나 베드로에게만 주셨기 때문에, 교황님께 일치하지 않는 사도단, 즉 교회를 떠난 주교들은 그 열쇠를 사용할 권한이 없어서 자동적으로 교황에게서 떨어져 나간 교회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각 주교님들께 이 권한을 받아 죄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저도 고해성사를 너무 자주 보는 것도 좀 이상해서, ‘상등통회’라는 것을 통해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을 믿고 열심히 통회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래봐야 그런 죄를 또 짓게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하느님만이 아니라 내 자신까지 용서받았다고 속이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상등통회를 할 정성이 있으면 겸손되이 사제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경을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고해성사가 싫어서 계속 냉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 은총에 충실히 참여하는 것이 그런 선물을 주신 분께 대한 보답일 것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김충수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죄 사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좋은 계기를 마련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예수님께 어떤 중풍병자 한 사람이 들것에 들려 왔는데 치유를 받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中風病 환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정성과 믿음을 보시고 가상히 여기시며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라고 수근 거렸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반박을 하신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하셨다. 자! 여기서 우리도 각자의 생각을 말해보자! 과연 어느 편이 더 쉬울까요? (거수로 대답하기!) 여기서 어느 한 편도 인간으로서는 할 수가 없는 말이며 똑같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게 어느 한 편이 가능해지면 다른 한 편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하고 죄의 사함을 선언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고, 中風病 환자를 말 한마디로 고칠 수 있다는 것도 역시 하느님 밖에는 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치유 능력이 증명이 되고 따라서 율법학자들이 시비하던 죄를 사하는 신적 권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 中風病 환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고 명령하시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화제를 바꿔서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과 죄를 사하는 신적인 권능을 인정하고 나서도 또다시 주목해야할 부분이 있음을 봐야겠다. 그것은 中風病 환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의리와 믿음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을 믿고 어렵사리 들것을 만들어서 中風病 환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이다. 이것은 남을 위한 대리 신앙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이것은 또한 진정한 우정 즉 사랑의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친구들의 신앙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훌륭한 기사이다. 우리는 여기서 남을 위한 신앙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선교이며 사랑의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대세를 받고 죽은 사람의 집에 가서 모든 장례 절차와 상가 일을 돌보아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선교가 되는지 활동을 해 보신 분을 알 것이다. 그들은 절대로 그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반드시 입교를 하게 되고, 또 훌륭한 신자가 될 것이다.
남을 위한 신앙, 즉 남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하느님께 가지고 가서 낫게 해 달라고 청원을 드린다는 것은 사랑 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마귀나라에서 회의가 열렸답니다. 그 날 회의 주제는 “인간들을 가장 무능하게 만드는 법은 무엇인가?”였습니다. 마귀들은 하나씩 일어나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지요.
“몸을 아프게 하는 병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고통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일에나 실패를 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계속 실패하다보면 완전히 좌절감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대장 마귀는 마귀들의 의견이 그럴 듯했지만, 100%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서 어떤 의견을 채택할지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마귀가 일어나서 자신만만하게 말합니다.
“제가 쓰는 방법인데, 정말로 100% 확신을 합니다. 모든 인간들의 가슴에 미루는 마음을 심어두는 것입니다. ‘차차 하자, 내일 하자!’ 등등, 이런 미루는 마음이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공한 사람의 달력에는 ‘Today'라는 단어가 적혀있으나, 실패한 사람의 달력에는 ‘Tomorrow'라는 단어가 적혀 있답니다. 또 성공한 사람의 시계에는 ‘Now'라는 로고가 찍혀있지만, 실패한 사람의 시계에는 ‘Next'라는 로고가 찍혀 있다고 하네요.
이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해당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차차 하자, 내일 하자.’ 등의 말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지금 당장 주님을 따라야 하고, 지금 당장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님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알아차린 마귀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발언입니다. 그리고 그 마귀들은 마을 사람들이 치는 돼지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돼지들이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만 것입니다.
문제는 이 모습을 본 고을 주민들의 태도입니다. 마귀들이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뻐하지 않지요. 혹시 또 다른 물질적인 피해를 입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자기네 고장을 떠나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을 모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다음에 모시지 뭐…….’라는 안일한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했던 것은 아닐까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유혹에 주님은 항상 뒷자리에 모셔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남성이 할 수 있는 훌륭한 일은 열심히 일함으로써 성취하는데 있고 여성이 이룩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성격에 달려 있다.(필립 체스터필드)
믿음의 길
-정명숙 수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풍랑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잠잠케 하시자 두려움과 경탄에 찬 외침을 품어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마저 그분과 함께 동고동락하지만 여전히 주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계속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워갑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께 대한 체험이 매번 새롭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 ‘신앙의 길’은 살면서 배웁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한꺼번에 안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일상의 삶에서 찾고 찾아 만난 주님 앞에선 언제나 놀라움과 기쁨에 찬 경탄이 터집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 이 경탄이야말로 우리를 참된 기쁨의 근원에로 이끕니다.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기쁨의 근원이시고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게 합니다. 이 믿음의 길은 “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가 데리고 가는 데로 가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 내어맡기는”(K. 라너) 것입니다.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시편 23,4).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귀들과 돼지 떼
- 강석진신부-
가끔 ‘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면서도 , 주변 사람들과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 하는 분 ’ 들이 면담을 요청할 때가 있습니다 .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 웬만한 사람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열심 , 정말 열심한 분들입니다 . 하지만 그들의 하소연은 왜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힘들어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상당히 열심히 사시는 분이시군요. 그렇다면 당신이 보기에 주변의 다른 분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것 같으세요?” 그러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합니다. “이런 신심, 저런 신심 없는 사람은 가톨릭 신자라 할 수 없어요. 본당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어요. 누구는 시간이 남아돌아 봉사하나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마음으로 살면, 하느님은 백 배 천 배의 상급을 주실 텐데요. ”
마태오복음을 읽어보면, 첫 번째로 예수님의 신원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입으로 고백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귀 들린 사람입니다. 곧 마귀 들린 사람 ‘둘’ 말입니다. 왜 두 사람일까 생각해 보니, 문득 지나치게 열심한 사람들은 늘 자기들끼리의 파벌을 형성하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또한 마귀 들린 이가 사는 곳은 무덤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열성인 사람들의 삶은 외형적으론 열성 가득한 듯하지만, 실상 그들의 내면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신앙의 틀에 갇혀 주변 사람과 관계 맺지 못하는 것, 어쩌면 그것 자체가 죽은 이들이 있는 ‘무덤’에 비유될 수 있겠지요.
마귀 들린 이들이 맨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 뭔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외형적으로 열심히 해서 자신도 모르게 삶이 병든 이들을 보면, 일상적인 관계 형성을 못하니까 신앙 안에서 맹목적인지, 아니면 신앙 안에서 맹목적으로 살다 보니 일상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인지…. 왠지 충실한 신앙인의 삶이 그리운 하루입니다.
얼마 전, 실내화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실내화는 보통 우리가 쉽게 보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글쎄 실내화 바닥에 극세사 천(몹시 가는 실로 만든 천)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걸어 다니기만 해도 실내화 바닥의 천으로 인해 저절로 청소가 됩니다. 그리고 그 천이 더러워지면 신발에서 떼어 물빨래를 하면 그만입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방 청소를 위해 신을 질질 끌면서 방을 왔다갔다만 하면 되니까요. 또한 더러운 것이 떨어지면 실내화 신은 발로 쓱쓱 닦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어제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로 빵을 먹다가 보니, 빵 부스러기와 약간의 이물질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발로 닦았습니다. 그 실내화가 생긴 뒤에는 습관적으로 이렇게 발로 닦게 되었지요.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 제 발에는 실내화가 신겨 있지 않았거든요. 즉, 양말만 신은 발로 바닥을 닦았던 것입니다.
습관이란 이렇게 무섭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들, 그런데 우리가 습관적으로 짓는 죄들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단순히 나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만 말해야 할까요? 그래서 습관이 되었으니 그러려니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지요. 나에게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과감하게 없애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습관 되어 실내화도 없이 이물질을 닦아서 양말이 더러워진 것처럼, 내 영혼은 더욱 더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중풍병자에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에 율법학자들은 ‘이 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부정하지요. 어쩌면 이들은 습관적으로 주님을 거부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더 큰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신이 생명처럼 생각하는 율법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행동이라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된다면 무조건 거부하고 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시지요. 이처럼 불가능이 없으신 분께 자신의 무조건 거부하는 습관 때문에 주님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율법학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습관처럼 짓는 죄가 바로 주님을 습관적으로 거부하는 또 하나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래서 불쌍한 우리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을 거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나쁜 습관이 내 몸에 배어 있다면 과감하게 없앨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나쁜 습관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 습관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세요.
일어나 걸어가라
-김순중 수녀-
마주 보는 눈빛을 녹여 지치고 헐벗은 영혼에 온기를 적셔주는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버무려서 비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도 꽃망울을 터트리는 사랑입니다.
꿈은 노을 속에 묻혀지고 삶은 어두운 뒷골목을 말하지만 존재로 등불이 되고 있는 사랑입니다.
기쁨보다 슬픔에 하나가 되고 희망보다 절망에 하나가 되는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이승의 끝자락에 서서도 생명을 잉태하는 고귀한 사랑 그 순백의 길을 흡수하는 참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김민소님의 ‘참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시다. 내 친구들은 걸을 수 없는 나를 들어다가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다. 예수님의 시선이 내 위에 내려왔다. 말라버린 내 마음이 펴지고, 무엇인가 그 속으로 들어와 붙었던 것이 떨어지고, 찌꺼기가 밑으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아주 순간적으로 일들이 벌어진다. 그 순간 나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들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믿음은 마음을 여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 작은 믿음의 문으로 들어오시어 마비된 곳을 뚫으신다.
오늘 하느님 아들이 오셨다. 내 속 깊숙이 아주 깊숙이. 하느님 아들의 현실이 나의 육체와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이 나를 다스리시니 내가 온전하게 되는구나! 사람이 되신 예수께서 나를 살리시는구나!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양승국신부-
<호기심의 대상>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저기에서 저와 인연을 맺은 아이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옵니다. 나라 전반적인 경제사정이 악화되어서인지, 대체로 그 내용이 듣기 안타깝습니다.
“저 이제 자리 좀 잡았어요!” “저 다음 달에 결혼하는데, 와주세요” “월급 타면 동생들한테 아이스크림 한번 쏘러 갈께요” 이런 전화는 거의 드믑니다.
대신 ‘어떻게 좀 안될까요?’식의 전화가 대부분입니다. “오늘까지 지불하지 않으면 신용불량자로 넘어간다는데, 좀 도와주세요” “다음에 꼭 갚을 테니 입금 좀 시켜주세요” “여기 **경찰서인데, 좀 와주시면 안 될까요?”
때로 너무도 냉정하고, 때로 너무도 살벌한 세상, 의지가지없고 가진 것 없는 한 젊은이가 홀로 서기가 만만치 않은 세상이란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죽을 고생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니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아는 많은 아이들이 겪는 인생의 한 단면입니다. 처음에는 굳은 각오로 힘든 일에 한번 뛰어들어봅니다. 그러나 와 닿는 현실이 만만치 않습니다. 기름때를 묻히고 톱밥을 마시는 일들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야단도 좀 맞고 그러면서 일을 배워나가는 것인데, 그것이 용납 안 됩니다.
‘욱’하는 마음과 함께 너무도 쉽게 포기합니다. 우선 쉬운 일, 때깔 나는 일, 그럴듯해 보이는 일로 옮겨갑니다만, 오래가지 않아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자기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휩쓸려 따라다니다가 결국 눈앞에 펼쳐진 비참한 현실을 자각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마음으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몸은 전혀 따라주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 앞에 도달한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그냥 제 발로 온 것이 아니라 ‘침상에 누인 채’ 남들의 손에 이끌려온 것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어디론가 실려 간다는 것,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도 침상에 누인 채 옮겨졌다니 더 그랬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슨 구경거리라도 났는가 싶어 다들 호기심어린 눈동자로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병자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쯧쯧’ 혀를 차며 한심해했을 것입니다. 산다는 것이 참으로 구차스럽고 힘겹다는 것을 병자는 절절히 체험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저 역시 ‘침상에 누인 채’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못하고 예수님 앞으로 이끌려갑니다. 제 꼴 을 가만히 보니 침상에 누인 중풍병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살다보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지독한 악습을 고리를 죽어도 끊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괴롭습니다. 철저하게도 저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저 역시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 자비의 손길만을 기다립니다.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이런 말씀을 던져주십니다.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그냥 “네 병을 치유시켜주마” “네 병세를 완화시켜주겠다”가 아니라 죄를 용서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단지 외적으로 드러난 병에 대한 치유뿐만 아니라 내적인 치유까지 동시에 선물로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병이야 한번 낫는다고 영원히 낫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언제 또 재발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번 낫는다고 해서 영원히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몇 번이고 치유 받았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외적인 치유를 포함한 한 차원 높은 치유, 영혼의 치유인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시는 주님, 육체적 질병의 치유뿐만이 아니라 정말 시급한 영혼의 치유를 위해 오신 주님께, 그래서 결국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공동체의 믿음
-박선환신부-
미사 경문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 (공동체)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
게 하소서]. 비록 개개인의 잘못이 그를 단죄해야 할만큼 크다 할지라도 잘못한
개개인의 허물보다는 교회 공동체가 주님 앞에서 잘못을 용서하며 청하는 믿음을
보시고 개인의 허물까지도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걱정은
나누면 작아지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된다는 말처럼 우리들이 공동체의 일에 참여
함으로써 얻어지는 개인의 성숙과 공동체와의 일치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
는 소중한 보물이라고 생각됩니다.
공동체의 모습이 성숙한 곳은 아무래도 각 집안의 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는
작은 공동체에서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도회지의 성당보다는 시골 성당
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심지어는 어느 집에 수저가 몇 개씩 있는지조차 다 안다
는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가끔 마을에 있는 성당으로 대축일
미사를 드리러 다니곤 했습니다. 보통 부활 대축일이나 성탄 대축일 즈음해서 신
자들이 공동으로 축제 준비를 하게 됩니다. 떡도 만들고 돼지를 잡아서 얼큰한
국물도 내고, 따뜻한 잔치 국수도 말아서 한바탕 잔치가 벌어집니다. 음식을 나
눈 다음에는 조를 짜서 배구며 족구를 하고, 마지막에는 흥겨운 풍물로 마무리를
하곤 했었는데, 군인이라고 해서 소외되거나 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들이 늘 감
사하는 마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말 그대로 집안의 대소사
가 마치 성당 공동체의 일인 것처럼 서로를 아끼고 마음을 나누는 정이 깊숙이
배어나게 마련이었습니다.
복음을 보면 중풍병자 한 사람을 담요에 싣고 장정 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
니다. 중풍병자는 아마도 걸음을 옮길 수조차 없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모양입
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운반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은 채 다만 침묵
속에서 주님께 대한 믿음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병자를 옮긴 사람들은 병자와
친한 친구이거나 친척이거나 그도 저도 아니라면 한 동네 사는 친지일 것입니다.
적어도 주님을 믿는 마음에서만큼은 하나가 될 수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을 헤치
고 자신들의 믿음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는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십니
다. 유다인들은 깊은 병이 생기는 이유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
해 왔기에 예수님의 이 한 말씀은 결국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해주겠다]는 분명
한 선포로 들려졌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부터 멀어져서 자기 멋대로
의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 다시금 그 모든 잘못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인생을 온전히 바꿀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은총
의 체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병자를 들고 왔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
던 모든 사람들도 그들 공동체의 믿음이 가져온 놀라운 결과에 탄복하면서 하느
님 아버지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시련에도 무너지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
나 때때로 우리들의 믿음은 마치고 모래로 쌓아올린 성처럼 한 순간 붕괴의 위험
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개의 믿음은 약할지라도 그들을 보호하기 지켜주고
키워주는 든든한 공동체가 함께하는 한 여하한 약골도 성장할 수밖에 없을 것입
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공동체의 믿음 안에서 우리를 길러 주시는 하느님 아
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우리와 함께 머물러주실 주님을 우리들 인생의 동
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예수님과 병자의 벗들
-상지종신부-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예수님께서는 분명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쉽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중풍 병자에게 더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일어나서 걸어가라.'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빨리 나으십시오.'라는 말보다 더 필요한 말이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질병을 단지 육체적인 문제에 국한해서 바라보지 않고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고통을 겪고 있는 중풍 병자를 치유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으로 낙인찍혀 격리되고 소외된 한 불쌍한 영혼을 온전히 품에 안고자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완전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셨습니다.
불온한 마음을 가지고 당신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통쾌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역시 예수님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보다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람의 마음과 믿음의 꿰뚫어보는 예수님의 따뜻한 시선입니다. 중풍 병자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입니다. 온전한 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풍 병자를 따돌렸습니다. 그들의 따돌림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중풍 병자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발짝도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예수님과 중풍 병자의 만남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보았습니다. 불쌍한 한 인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본 사람은 중풍 병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중풍 병자를 당신께로 데리고 온 사람들을 함께 보셨지요. 이들의 마음을 보셨지요.
모두가 한 사람을 소외시키는 상황에서 그 사람을 감싸안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자신들도 도매급으로 넘어가기 쉽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험을 감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과 당신을 향한 굳센 믿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만약 오늘 복음을 한 편의 영화라고 한다면, 이렇게 영화평을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느님 감독에 권위있는 주연(예수님), 가녀린 주연(중풍 병자)과 정이 넘치는 조연(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사람들)이 빚어낸 감동의 휴먼 드라마"라고 말입니다.
인생이란 하느님께서 일구어가시는 감동이 넘치는 휴먼 드라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휴먼 드라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이 드라마에 먹칠을 하려는 여러가지 유혹과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제 자신이 주님께서 일구는 이 휴먼 드라마에서 비록 눈에 잘 띄이지는 않지만 주연과 주연을 맺어주는 사랑과 정이 가득한 조연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그리고 사람의 따뜻한 마음과 믿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시선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정희 수녀-
◆본당에서 사도직을 할 때였다. 교우 한 분이 당신네 반에 환자 할아버지가 대세받기를 원하니 그 댁을 방문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방문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방에 누워 계시고 옆에 할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앉아 계셨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방안에 들어서는 우리를 보고 돌아누우시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는 세례받으실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말을 붙이자 할아버지는 느닷없이 “나는 염치가 없는 사람이오. 내가 젊어서 많은 잘못을 하였는데 이제 다 죽게 되어 구원받자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염치가 없지요”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인즉 할아버지는 유학자셨는데 할머니를 버리고 다른 부인을 얻어 재산을 다 탕진하고 병이 들어 본처인 할머니를 찾아온 지 이제 겨우 6개월이 되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동안 온갖 고생을 하면서 자식들을 키우셨으며 신자가 된 지 1년이 채 안 되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76세, 할머니는 74세셨다. 할머니 말씀이 “내가 하느님을 안 이상 어떻게 찾아온 사람을 버릴 수 있겠어요. 자비의 하느님, 용서의 하느님을 믿는데…”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그동안의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우리는 할머니의 아름다운 마음에 할말을 잊었다. 할머니를 통해 만난 예수님은 늘 내 마음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나의 편견과 판단 모두를 “걷어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으로 들렸다. 집으로 오면서 주님의 놀라운 일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일상 안에서 사람이나 사건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떠올려 주신다. 주님은 자비의 하느님, 용서의 하느님이심을.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정호 신부 -
오늘 우리는 복음 속에서 기적을 목격합니다. 중풍병자가 병에서 낳음을 받는 장면이 우리 앞에 영화처럼 그려집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는 다른 병자들처럼 그리 쉽게 낳음을 받지 못합니다. 결과는 그가 일어나 그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저에게는 그 결과가 왠지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기적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올 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 의해 뉘인채로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배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십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눈에 중풍병자의 모습만 드러난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아픈 이와 그를 구하기 위해 함께 온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고 내내 가슴에 와 닿는 말씀으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복음의 내용에는 이 말씀에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과 그래서 그들과 입씨름을 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사람들은 어찌 사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하고 시비를 걸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용서하는 것과 한 사람을 낳게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사람을 용서하는 권한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중풍병자는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의 침상을 들고 홀로 걸어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적이라 부릅니다. 중풍병자는 멋지게 자신에게 내려진 천형을 이겨내고 회복합니다. 거기에 사람들은 또 열광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 기적도 사람들의 찬양도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깊이 남겨집니다.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숨겨져 있는 참 기적을 느낍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중풍병자가 오는 순간 그를 데려온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사랑의 기운입니다. 병에 걸린 이를 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그를 돕고자 하는 이들을 보시며 예수님이 이 말씀을 던지신 것은 이미 그의 장애는 그 사람들에 의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에게 세상은 장애보다 죄인으로 내몰리고 버려지는 소외감이 더 큰 장벽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마저 버림을 받은 자로 내 몰리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그를 들어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고맙고 행복한 장면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아픈 이들에게 다가가시며 나누신 손길과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그런 이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중풍병자에게 용기를 내라시며 이미 그가 죄인이 아님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중풍병자에겐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랑받는다는 것.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함께 왔던 그가 사람들 사이에 홀로가는 모습이 그래서 저에겐 안쓰럽게만 보입니다. 기적이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엔 필요치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 기적의 내용은 모든 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 곧 정상이 되는 광경이 전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풍병자의 치유의 신기함이 그를 예수님 앞에 데려온 사람들의 사랑보다 더 크게 보이십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 시비를 걸던 그 순간, 하느님을 감동시킨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정성은 사람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그런 이들이 용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 순간 용기와 용서와 사랑을 주신 하느님의 마음도 무너져 내림을 느낍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을 울리는 사랑을 합시다. 우리 서로 말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강영구신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마.”하시고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하고 명령하시자 그는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대에게
인생살이는 함께 가는 길입니다. 좋은 도반(道伴)이 있어 함께 인생길을 간다면 그 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많이 배워 지식(知識)을 쌓고, 많이 벌어서 부(富)를 쌓고, 출세하여 권력(權力)을 누린다 해도 혼자라면 불행합니다. 지난해 12월 타계한 경북 봉화의 전우익(全遇翊)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현암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혼자만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향락을 누리고 즐긴다면 그것은 짐승이나 할 짓이지 사람이 할 짓은 아닙니다. 사람을 한자(漢字)로 人間이라 합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사람 사이’라는 뜻이지요. 사람은 혼자서 주제파악을 하기는 어렵지만, 타인(他人)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나를 파악합니다. 서로 위해 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인생길을 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중풍병자는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자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이웃들이 있어서 그는 외롭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온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웁니다. 그를 일으켜 세우는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이 하느님의 모독하는구나!’하며 욕하는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은 고통 받는 이웃의 불행을 외면하는 율법학자들입니다.
지금 당신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제 잘난 맛에 사는 독불장군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있다면 당신은 불행합니다. 당신이 먼저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들도 당신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게 됩니다. 이웃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一明)
† 나도 남의 죄를 사할 수 있다 † -박상대 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을 불신하고 떠나 달라고 청한 가다라 지방과 그 마을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다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자기 동네로 오셨다. 곧바로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 데려온다. 여섯 번째 기적이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중풍병자 치유기적사화(마르 2,1-12)를 옮겨 쓰면서 일체 부수적인 일화를 삭제하고 요점만 간추려 전하고 있다.
요점은 곧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다.(6절)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연과 마귀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인간의 죄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으로 부각된다.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학자들이 자기들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이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현존(現存)으로 말미암아 성취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를 함께 베푸시는 예수를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로 여길 뿐이다.(3절)
구약성서에서는 아무도 이 땅에서의 죄 사함을 모른다. 죄 사함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에 속한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줄 것이다.”(예레 31,34) “네 죄악을 씻어 내 위신을 세워야겠다. 이 일을 나밖에 누가 하겠느냐?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버리리라.”(이사 43,25) 이렇게 개인이든 단체든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새 계약의 종말론적 시기에 이루어질 또 다른 모양의 죄 사함을 가르치고 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하느님만이 가지시는 죄 사함의 전권이 “야훼의 종”에로 이전(移轉)되는 것이다. 그것은 제2이사야에 잘 나타나 있다.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안다.”(53,11) 여기서 “나의 종”이란 “야훼의 종”을 말한다. 야훼의 종은 우선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지는 속죄의 어린양으로서 신약의 예수를 지칭한다.(루가 1,77; 요한 1,30; 마태 1,21; 루가 2,29-32) 예수는 실제로 자신이 받은 온갖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죄악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 한사람이 남의 죄를 대신 받으면 그 사람의 죄는 용서받게 되는 법이다. 예수는 이러한 방법으로 종국에 맞이할 속죄의 죽음으로 이루어질 죄의 용서를 선취하여 이미 지상 공생활 중에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이 땅에서 죄 사함의 전권을 가진다. 이 전권은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가 사랑이신 하느님 아들에게 베푸시는 것이면서, 동시에 아들 스스로가 가지는 권한으로서 새 계약의 근본요소이자, 도래하는 하느님나라의 질서를 위한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제 이 땅위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제자들을 포함한 교회에 베풀어진다는 것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았다면 아마 기절했을 것이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18-19)
그 뿐만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한낱 인간인 우리 모두에게도 이웃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물론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내용에 따라 기도할 줄 알고, 이를 실천하는 자에게 한해서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가 11,2-4; 마태 6,7-15).........◆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중풍병자에게서 보는 죄 중의 삶과 죄 사함의 삶 †
어느 칼럼에서 읽은 글입니다. 오늘복음의 '죄의 용서'와 관련하여 묵상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올려봅니다. 서울에 사는 어느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춤바람이 나서 가출을 했습니다. 나가서 몇날 몇밤을 정신없이 놀다가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어느날 깨닫고서야 후회를 합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정말로 더 험한 꼴을 볼 것 같아, 남편은 모든 것을 이해와 용서로서 포용하고 아내를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 남편은 죄지은 아내를 가까운 교회로 데리고 갔습니다. 교회에 가면 사람이 변한다는데 당신도 하느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보라는 의도에서였습니다. 물론 남편도 같이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은 수요일 날이었습니다. 신부님이 강론을 하시는데 마침 강론 내용이 어떤 내용인가 하면...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으니 죄짓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강론을 통해서 더 심한 충격과 함께 죄 지음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은 이제 무슨 벌을 받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다음 주일날도 교회에 나갔는데... 강론 내용은 달랐지만 요지는 같았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달, 세 달을 교회에 나갔는데.... 이 신부님은 매 강론때마다 꼭 한 두 번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그런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이 여인은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그렇게 비참할 수 없더랍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큰 죄인이 되어버렸을까?”그러면서 가만히 생각을 돌이켜 보니... 그때 카바레에서 자기를 꼬시던 제비족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사모님, 사모님의 다리가 너무 예쁘게 잘 빠졌네요!” 이 말에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기의 이 두 다리가 웬수입니다. 그 날부터 다리를 주먹으로 치면서 저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놈의 다리, 이 잘라버릴 다리, 이 못된 놈의 다리, 이 빌어먹을 다리...” 그러면서 자기 다리를 두드립니다.
이렇게 두 주일간이나 다리를 저주하면서 두드렸더니.... 어느 날 새벽에 다리가 이상해졌습니다. 하반신 마비가 온 것입니다. 전혀 걸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영문도 모르고 마비된 다리를 고쳐보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데 전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약도, 어떤 병원도 그녀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언니가 이 소식을 듣고 이것은 영적인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다니던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이 신부님의 강론은 율법주의적인 강론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대해서 중점으로 하여 강론을 하셨습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어떤 죄라도 다 용서하십니다!” 그런 강론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자꾸 들으면서 이 여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은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구나, 나 같은 사람도 다 용서하시는구나, 나도 용서받을 수 있구나!” 이런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3주정도 다니는데... 이 여인의 하반신 마비가 풀렸습니다. 다리가 멀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죄 사함과 함께 육체의 질병도 다 치유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치유가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와 비슷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한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중풍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지 않고 “네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이 중풍 병에 걸린 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이 중풍병자의 죄가 무슨 죄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짐작은 해볼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업급하지 않고 있으나, 개역성경에서는 예수께서 그를 부르실 때 “소자야!” 라고 부른 것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오늘의 중풍병자는 젊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좀 이상합니다. 그지요, 우리같이 나이가 많이 들어 세상살이에서 찌든 때가 많이 묻어 죄를 지었다면 몰라도, 젊은이가 얼마를 살았다고 그린 험한 병을 앓는 죄를 지었는지...여하튼 그 젊은이가 어떤 죄를 졌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지은 죄 때문에 무척이나 괴로운 시간을 많이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2절 중간에 보시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이마 예수님 앞에서 이 중풍병자는 무척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죄의식 때문에 무척 괴로워했던 같습니다. “이 죄로 인하여 벌을 받으면 어쩌나....”“누가 알게 되면 어쩌나....” 그는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을 아시고, 그의 문제를 아시고, 그가 당한 괴로움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젊은 중풍환자를 보시자 마자.... 그의 상태를 알아볼 만큼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분명한 것은 이 젊은 환자는 그동안 자신의 죄를 바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 죄를 계속 가지고 있었고, 죄책감과 두려움, 양심이 자기에게 호소하는 그 괴로움과 불안으로 인하여...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는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만 고생을 하다가 결국에는 죄에 관한 심리적 문제로 중풍병이란 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경우에 중풍병은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이 많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은 젊은 나이에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병의 상태가 상당히 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사람들이 이 사람을 침상에 누운 체로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아주 심한 상태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 마비가 온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마비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병자, 이런 죄인에게도 희망의 날은 왔습니다. 예수님이 희망인 것입니다. 그런 희망의 예수님이 그 마을에 오신 것입니다. 다행히 그에게는 믿음이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친구 중에 믿음의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함께 기도해주고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 때 신앙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모름지기 그리스도 신자는 친구를 사귀어도 믿음의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 합니다. 화투하는 친구, 놀음하는 친구, 이상한 춤방에 가는 친구, 잡스럽게 연애질하는 친구... 이런 세상적인 친구들보다... 신앙이 좋고 믿음이 좋은 그런 친구들이 많아야 합니다.
다행이 이 젊은 병자에겐 믿음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다시말하면 그 병자 본인과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아 좋은 친구들!!!! 죄인인 젊은 병자는 믿음의 친구들에 의해 오랫동안 괴롭히던 죄 문제를 한순간에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를 깨닫을 수 있습니다.
1. 친구들의 믿음
이 친구들은 그 당시에는 못 고치는 중풍병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데리고 오는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을 것입니다. 가족들도 말렸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친구들보다 환자의 가족들이 먼저 이 사람을 데리고 나왔을 것입니다. 환자의 가족들 마저 포기한 상태에서... 이들은 믿음을 가지고 친구를 데려온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복된 사람입니다.
2. 죄인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온 믿음
친구들이 병자를 데려올 때 이렇게 말하면서 데려왔지 않겠어요? “너 예수님 만나야 산다” “너 예수님 만나야 죄 용서 받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어!” 이 중풍을 앓는 친구가 “나는 가고 싶어도... 이제는 몸이 말을 안 들으니 어찌할 수 없네” 그러면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침상 채 들고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친구가 예수 믿겠다는데 우리가 무엇을 못하겠느냐?” 하는 그런 마음으로 수고한 것입니다. 역시 이런 친구를 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주변의 친구들이 교회 안 갈려고 할 때.... 억지로라도 끌고 갈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우리를 끌고 술집으로, 도박장으로, 노래방으로, 경기장으로, 고스톱 치자고 끌고 갈 수 있는 친구는 많지만... 나를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친구... 그런 친구가 몇이나 있습니까? 믿는다고는 하지만 신앙의 체험도 없고, '너도 하느님을 만나야 산다'고 말 한마디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 좋은 친구들을 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 특히 젊은 교우들은 신앙의 동지... 믿음의 친구들을 많이 두시기 바랍니다.
3. 일반적인 시각을 깨뜨림
당시 사회는 중한 병들은 하느님이 주신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병은 죄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병에 걸린 사람들은 하느님께 나가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가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당시의 구약적(율법적) 고정관념이나 두려운 생각을 깨뜨려버렸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병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만나야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있든지... 하느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혼자서 꿍꿍거리면 안됩니다. 하느님은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4. 병자의 믿음
친구들이 아무리 병자에게 예수님 만나야 한다고 했어도 본인이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친구들의 말에 동의했거나 요청을 했습니다. 나를 예수님께 데려가 달라고.... 친구들의 믿음에는 이 병자의 믿음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5. 용서를 해주시는 주님
그런데 이렇게 나오자마자 예수님은 단번에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이 사람을 이렇게 용서하신 근거가 무엇입니까?....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나왔다는 단 한가지 사실만으로.... 주님은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복음에는 이 사람이 회개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예수님께 나오는 순간 이미 이 사람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은 이 병자를 보면서 물어보거나 따지지 아니하시고 단번에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할렐루야!....
6. 이유를 묻지 않으시는 주님
예수님은 이 병자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받아주셨습니다. 무조건 품어주셨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지요.... 사람들은 흔히 그럽니다. “어쩌다 그랬어?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어, 왜 그랬어?”... “그러게 빨리 회개하지 이렇게 미련하게 버티고 있어? 바보같이....”“이번에 용서해 주면 다음에는 안 하는 거야!, 약속하지?”...등 수없는 말로 다짐을 받습니다...맞지요, 그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냥 병든 몸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사실 하나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모든 것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따지고 이유를 물으신다면 누가 그 앞에 서겠습니까? 누가 감히 예수님 앞에 두려워서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용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묻지 않아도 이미 그 죄를 다 알고 계시고, 죄지은 사람의 두려움 마음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 15장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상속받을 재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타지역에 가서 그 많은 재산을 허랑방탕으로 모두 다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그 많던 친구들도 다 떨어졌습니다. 나중에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배를 채우려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완전히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후회를 하면서 “우리 아버지 집에는 얼마나 먹을 것이 많은가.... 차라리 나를 품꾼으로 써 달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왜 재산을 탕진했느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아들의 모습이 보였을 때, 날마다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던 아버지는 단숨에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열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겼습니다(루가 15,20-22).
여기서 등장하는 아버지는 바로 하느님이시고, 탕자는 바로 우리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을 때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따지지 않았습니다. 넓은 사랑의 가슴으로 아들을 품에 안으며 반겨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이유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돌아온 것 하나만으로... 주님은 그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며 받아주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조금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7절에 보면,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마." 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그는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 젊은이는 그 말씀을 믿고 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죄 용서를 받으니 그의 중풍병까지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병자가 먼저 예수님께 와서 고쳐달라고 요청하고... 그때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먼저 선언해 버렸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죄로 인한 고통, 중풍병으로 고생한 이 청년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참을 수 없는 사랑이 솟아났습니다. 한참 꿈을 펼칠 나이에... 이 젊은이가 그런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서 빨리 고쳐줘서 새 삶을 살게 하고 싶은 주님의 마음이 보여집니다.
7. 무슨 문제든지 주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죄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고민, 두려움, 질병으로 괴로워 할 때... 주님께서는 어서 빨리 우리를 치료해 주기 원하십니다. 어서 속히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 이상으로... 주님은 더 갈급한 심정으로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주님께 빨리 나아가는 것입니다.
불란서의 한 유명한 정신과 진료실에 한 남자가 우울증을 호소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 테스트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동안... 같이 대화를 나눈 후 에 하나의 처방으로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 아주 인기 있는 코메디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 일에만 몰두하거나 일에 중독되지 마시고... 그리발디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는데 그런 재미있는 연극 속에서 한 번 빠져 보시면서 삶의 리듬을 좀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환자는 매우 무표정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병원의 진료실을 빠져 내려가면서 그는 이런 유명한 독백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그리발디가 바로 저입니다. 그 그리발디가 바로 나 자신인걸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말하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에는 세상의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질병이 너무나 많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로 특별한 의사 한 분을 보내주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 11,28절에서 주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나오지만,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숨어있는 죄인으로 남아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말해 죄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복해서 빠지는 죄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서나 앞에 나서지 못하고, 사람도 피하고 싶고, 심지어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 받을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육신의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면의 세계가 말할 수 없이 황폐해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죄와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 예수님은 오늘도 바로 이런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두십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마...”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 즉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든지 용서하시고 해결해주십니다.
마태오 복음 9,12-13절에서 주님은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오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만 나아오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1,28). 따라서 어떤 문제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주님 앞으로 가지고 나오면 그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일점일확도 틀림이 없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디 아상 죄중에서 고뇌하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 고백을 해야 합니다. 우리 가톨릭은 여러분에게 고백성사라는 하느님의 죄사함의 길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런 은총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아멘)............◆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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