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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양정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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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정은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 강변 언덕 위에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는 곳에 세워져 있다. 이곳을 가려면 입점리고분군을 지나 북쪽으로 직진하여 웅포 뒷산을 가야한다. 이곳은 원래 금강이 공주와 부여를 거쳐 화산에서 서쪽인 입포쪽으로 흐르다, 이곳에서 방향을 바꾸어 남쪽인 웅포쪽으로 흐른다.
웅포는 원래 순수한 우리말 곰개(熊浦)를 한문으로 표현한 말이다. 곰개한 큰 포구란 뜻으로 곰은 종(宗)과 대(大)의 뜻을 가지고 있다. 금강을 끼고 형성된 백제문화권에서 충남 공주의 곰나루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웅진이고 사실 웅진이나 웅포나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덕양정이 있었던 곳은 과거에 용왕사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규모는 전면 1칸 측면 2칸의 기와지붕이었다 한다. 규모가 작아 마치 작은 사제당 형태를 띄고 있었으며 바닥은 나무로 된 마루를 깔았다고 전한다.
구전에 의하면 용왕사 건물은 약 400여년 동안 전승되어 왔는데, 1945년 심한 태풍으로 무너져 버리자 그 후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다시 지었는데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1982년 용왕사 자리에 육각형의 정자를 세우고 덕양정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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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양정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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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덕양정은 현 웅포초등학교 뒤편의 구릉지에 자리한 사정으로, 조선 숙종 때 건립되어 250-260년간 지속되어 오면서 활 쏘는 장소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무예의 도장으로도 사용되던 곳이었다.
이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이 지방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은 덕양정을 의병 집결장소로 생각하여 구실을 만들어 폐쇄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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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양정 편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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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정에 도달하면 가장 먼저 굉장히 큰 덕양정이라 쓴 현판이 한 눈에 다가온다. 이 글씨는 순조 때 이 지역 명필 호산 서홍순이 쓴 글씨다. 호산 서홍순 어려서부터 학문과 글씨에 전념하며, 진사에 합격하여 서진사로 널리 불려졌다.
호산은 전주의 창암 이삼만으로부터 글씨를 배우면서 창암이 발행한 화동서첩과 다양한 서체를 공부하였다. 역시 창암의 영향을 받아 서홍순도 함라산중에서 목판본으로 ‘호산심획’ 6권과 호산서첩을 발행하여 많은 서예인들이 교재로 삼았다. 또 호산은 주변에 많은 편액과 글씨를 남겼으며 아들, 손자, 증손자로 4대에 걸쳐 서화의 맥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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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왕사터에 자리한 덕양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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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덕양정 현판은 덕양정 폐쇄 후 후손이 가져갔다가 일본인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함라의 조부자인 용규씨가 큰 값을 치르고 현판을 사서 간직하고 있다가, 해방 후 웅포양로원에 희사하여 들어가는 입구에 걸었다. 이것을 후에 덕양정이 복원되자 이곳의 현판을 원본대로 복제하여 걸은 것이 현재 덕양정에 걸려 있다.
덕양정 들어가는 웅포 양로원 양오당에는 서홍순이 쓴 편액과 비석 글씨가 있다. 즉 양로당과 시가재 편액은 활달한 필획과 서품을 느낄 수 있다.
1982년 이건재익산군수가 지은 덕양정기문을 일부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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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양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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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길 호남의 물결이 서해에 잇닿는 금강하구를 굽어보는 곰개라는 포구 이곳은 고려 우왕6년 최무선장군께서 왜적오백 여쌍의 전함을 격파시킨 진포대첩지로서 더욱 유명 한 곳이다. 일찍이 나라사랑하는 우리 군민은 여기 산 마루에 龍王祠를 짓고 순절하신 선열들의 넋을 추모하고 풍어를 기원하며 위령제와 풍어제를 지냈다고하나 삼백오십여년이 지난 오늘에는 그 자취마저 찾을 길이 없다. (중략) 이 산마루에 아담한 정자를 세우고 우리 고장이 낳은 명필 호산 서홍순 선생의 덕양정 현판을 이곳에 거니 그 뜻 더욱 빛나는 듯 하다’
덕양정에 올라 서해로 떨어지는 낙조를 바라보며 덕양정 주변을 산책한다면 더 할 나위 좋을 것이다. 또 요즘에는 오토캠핑장이 생겼고 새로운 곰개나루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즐겨찾고 있다. 주변의 볼거리인 함라의 삼부자집, 숭림사, 유계신도비, 나바위성당 등을 둘러본다면 즐거운 문화답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 전북문화재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