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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묵상글 들 ( 연대와 선택 그리고 긴장(이기우 신부님). 등 )
* 거의 매일 대문 묵상글로 올렸던 김찬선 신부님이 묵상글을 오늘 조금 늦게
올리셨고, 아래와 같이 댓글에 알려 오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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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3일, 어쩌면 5일 강론을 올릴 수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문제 없으면 토요일, 문제 있으면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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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에 나타나는 행복 선언은 마태오의 것과 달리 네 개로 요약되고, 네 개의 불행 선언이 곁들여집니다.
행복과 불행을 대립시켜 서로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묘사하는 문학적 형식은 루카 복음의 전형적인 서술 방법이기도 하지요.
행복에 대한 수많은 담론 가운데 프랑스 리옹 국립 대학의 교수인 미셸 포쉐의 담론이 제게는 가장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는 행복을 ‘회개’(또는 개종)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회개’라는 말마디의 본디 뜻은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을 가리키는데, 반목하고 갈라진 것을 서로 이어 주는 것이 회개이고 개종이겠지요. 루카 복음에서 줄곧 강조하는 것도 바로 회개입니다.
사회적 통념으로 내쳐진 이들에게 굳이 더 가까이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자주 묘사하고 그런 예수님을
못마땅해하는 이들, 곧 제 잇속을 챙기며 사회적 책임에 무감각한 이들을 고발하는 것이 루카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을 다시 찬찬히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행복은 배고픈 이들에게 주어지고 불행은 이미 배부른 이들을 향하여 있습니다.
행복하려면 부족함을 되새기고 간직해야 합니다.
행복은 충족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쉬워서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데서 가능합니다.
다만 그 아쉬움을 자신의 노력 부족이나 능력의 한계라는 순전히 개인적 책임으로 묻지 않고
서로에 대한 책임과 친교로 메꾸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은, 행복을 어떻게 추구하느냐는 것입니다.
행복은 서로를 향한 회개여야 합니다.
행복은 개인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화해와 사랑의 열매입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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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이기우 신부님. 연대와 선택 그리고 긴장
1코린 7,25-31; 루카 6,20-26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천명하신 대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는 소식과 그와 동시에
가난한 이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있던 부유한 이들로부터 받으셔야 했던 긴장에 대해 루카가 전해줍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삼아서, 우리가 지녀야 할 정체성의 자연스런 귀결로서 이웃과 개방적인
대인관계를 가지려고 할 때 과연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
또 그 연대의 선택이 주는 긴장스런 결과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으로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성령의 이끄심이 있기도 했으므로
이는 당신의 선택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 순명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가난하지 않은 이들을 만나지 않을 도리는 없는 것이고, 피해 다닐 필요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부유한 청년의 방문도 받으시기도 했고,
역시 유복한 바리사이 지도자의 식사 초대에 응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와 수산나 등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의 시중을 들어주곤 했던
예루살렘 부인들 역시 먹고 살기가 빠듯한 그런 가난한 형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은
만사와 만인을 제쳐놓고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리고 기회가 닿는 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순위를 부여하셨다는 정도의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자들, 무식한 이들과 유식한 자들,
힘 없는 이들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들을 나름대로 고르게 기회를 주어 복음을 선포하셨어도,
그 결과는 마치 의도한 것처럼 판이했습니다. 스스로 슬기롭다거나 지혜롭다고 자처한 자들은
하나같이 그 슬기와 지혜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하느님의 복음을 거절했고,
그 반대로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을 만큼 소외되고 배운 지식이 적고 가진 재산까지 별로 없는
이들로부터는 언제나 대환영을 받았으며 그런 이들이 죄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회심하는 확률도 높고 또 그 회심의 순도와 열성도 역시 성공적이었다는 경험적 결과가 있습니다.
열두 제자 중 학식이 높았던 이스카리옷 유다를 제외하고는 전부 가난하거나 배움이 짧았던 이들 출신인데,
성공의 확률이 100%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가난하고 무식한,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열성적인 이들에게 투신하시고 헌신한, 그리고 희생한 보람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그 팽팽한 긴장이 대조적으로 나와 있듯이, 복음을 선포한 가난한 이들은
그 당연한 결과로 하느님 나라를 자기네 현실로 차지하게 되는 소망스런 결과를 가져오지만 복음을
거절한 부유한 자들은 그 당연한 결과로 재산과 사회적 지위는 차지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재산과 지위가 그네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영적 굶주림과 영적 슬픔과 영적 불행을 자초하게
되리라는 것이 복음선포의 현실적 긴장이요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선교사들이 늘 겪게 되는 선교의 현실입니다.
연대와 선택은 가난한 이들과, 그러나 연대와 선택에서 배제된 자들로부터 오는
저항은 당연히 각오해야 하고 따라서 긴장도 초래될 것임을 예상해야 합니다.
부유한 자들이 제공하는 경제적 편익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차지한 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현세적 편익을 포기하면 그뿐, 필요한 물질과 기회는 하느님께서 몸소 마련해 주시도록 기다리는
태도가 편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야훼이레’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이백여 년 전, 천진암 강학회 출신 선비들로부터 천주교 교리 서적을
비롯한 서학 서적들을 전해 받고 자진해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들은 1784년부터 1789년까지
불과 6년 사이에 천여 명이 훨씬 넘을 정도로 천주학 내지 천주교의 인기는 선비들 사이에 선풍적이었습니다.
주로 한양 선비들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북경 구베아 주교가 전해 준 바, 교황청의 제사금지령이 전해지고
또 실제로 권상연 야고보와 윤지충 바오로가 모친상을 당하여 유교식이 아니라 천주교식으로
제사를 치룬 진산사건이 벌어지자 그 많던 선비들은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양반의 특권이었던 조상제사를 포기하면서까지 천주교를
신봉할 정도의 믿음은 아니었던 자들이 태반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양반층 신자들이 흩어지고 배교하는 사태와 더불어 중인과 상민
그리고 천민 출신 중에서 천주교 신자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더욱 늘어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어차피 이들은 제사를 드릴 자격도 없었던 이들인데, 천주교가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는
만민평등의 종교임이 사회적으로 드러나자 믿었다가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입교하는 기적 같은 선교적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교훈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이를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그만큼 관심과 도움을 제공하는 우선적 선택을 할 것이며, 그로 인해 주어지는 사회적 반향과
불이익과 정치적 긴장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흔들림없는 요지부동의 자세를 견지할 것,
이것이 가톨릭적이며 동시에 복음적인 연대와 선택의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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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연중 23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람의 아들 때문에 행복하길
남보다 머리가 좀 뒤떨어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머리가 좋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무시를 당해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였더니 어느 날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한 가지를 청하면 꼭 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는 얼른 똑똑한 머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머리보다는 돈이 좋을 듯 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머리 좋은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청을 바꾸었습니다. 또 청을 바꾸고 생각하니 돈보다는 아리따운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니 다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청했습니다. 세 가지를 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참다못해 말씀하셨습니다.‘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하여라.’그래서 젊은이는 큰소리로 외쳤답니다.‘머리 돈 여자!’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셨고 그는 지금 많은 어려움 속에 산답니다.‘머리 돈 여자!’정신없는 여자와 살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행복은 똑똑한 머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골로3,2).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은’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골로3,9-10). 참된 행복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을 차지하면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모욕을 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시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을 받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부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확고한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얻으려 하기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뿐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사람의 아들 때문에”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말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열성을 기르고 믿는 바에 관심을 일깨우며 천상사물을 갈망하십시오. 어떠한 불행 중이라도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이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성 대그레고리오 교황). 시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모두가 하느님 때문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행복하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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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20-26: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신다. 루카는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20절) 이것은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죄에서 가난한 사람, 악덕에서 가난한 사람, 세상 우두머리에게 빼앗길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요한 14,30 참조). 부유한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그분처럼(2코린 8,9 참조)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내용을 요약한다면, “우리가 몸과 마음, 모든 힘을 다하여 또 가진 것을 다해서 하느님께 충실하고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살이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에 불행하고 바보스럽게 보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보상받지 못한 것은 영원으로 그리스도께서 책임지고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물론 현세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한 것은 좋은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과 세상의 행복을 놓고 그 마음에 어떠한 순서로 정리되어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다면 모든 것은 잘 되어있는 것이다. 반대로 재물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하느님께나 인간에게나 제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자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진정으로 울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아들 때문에 박해도 당할 수 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살 수 있다. 그리고 우는 것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나의 잘못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진정으로 울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울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부유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세상의 일로 차 있으므로 하느님이 그 안에 들어가실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일에 즉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삶 때문에 결정적으로 슬픔을 맛보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복음에 나오는 불행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벌을 뜻하며, 애통하여 소리친다는 뜻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바람직한 태도는 나쁜 일을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보듯이,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던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선행을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행복한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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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한상우 신부님.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웃게 될 것이다.
울음과
웃음사이에
참된
행복이 있다.
깊은 울음이
있기에 환한
웃음이 있다.
지금 울고 있는
우리의 울음을
모른 척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의 울음을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한다.
울음도 삶의
일부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서야
울음도 웃음도
선물임을
알게된다.
너의 울음이
나의 울음이다.
울음에
함께하는 것과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
행복이다.
아픈만큼
행복도
깊다.
우리 삶에
이미 행복이
있다.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행복은 울음을
아우르는
살아있는
행복이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기도로
봉헌한다.
우리의 실패도
행복이 됨을
우리는 믿는다.
행복이 곧
우리의 울음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안에
참된
행복이 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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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참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 ♣
‘참행복 선언’은 단순한 행복론이 아니라, 즉 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구원을 받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행복하여라.” 라는 말은 “복되다.”로 바꿀 수 있는데,
이 말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 평화, 안식, 복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복된 상태’입니다.)
‘불행 선언’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경고 말씀이고,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권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구원받지 못하는 것 자체가 ‘불행’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루카 6,21ㄱㄴ).”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육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들과 영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인데, 세속의 양식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찾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루카 4,4).”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육적인 양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양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집착하면 안 됩니다.)
“배부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모든 굶주림에서 영원히 해방되는 나라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ㄷㄹ).”
“지금 우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슬픔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지만
하느님에게서만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웃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2-23).”
박해와 미움과 모욕과 중상을 당하는 것이 행복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일이라면,
그 고통이 고통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 일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지고 가는 십자가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승리와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신앙인은 십자가에서 부활과 생명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루카 6,24-25).”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
또 재물을 섬기면서 이웃 사랑 실천은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이미 위로를 받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위로가 없다는 뜻입니다.
“굶주리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뜻인데, 그 나라의 음식은 생명나무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입니다.
따라서 “굶주리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후회와 절망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이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하고, 기도를 하고, 단식을 하는 자들이(마태 6,1.5.16)
그 위선으로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위선도 죄이고, 명예욕도 죄입니다.
“불행하다!”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겉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속을 보시는 분입니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라는 말씀은,
“구약시대 때의 거짓 예언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죽어서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다.” 라는 뜻입니다.
(세속의 존경과 명예만 추구하는 것은 심판받을 짓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세속의 존경과 명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루카복음 18장에 있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이고(루카 18,9),
또 사람들이 그를 ‘거룩한 사람’인 줄로 아는, 그런 자인데,
그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누가 보아도 그냥 죄인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과 세리의 진실한 회개를 말씀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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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새벽을 열며.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빠다킹신부님.
고등학교 때 기타를 배웠습니다. 여학생들이 기타 치는 교회 오빠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저 역시 기타 치는 인기 있는 교회 오빠가 되어 보려고 기타를 배웠습니다. 책 한 권을 사서 독학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그때 성당 선배님께서 해주신 이 말씀이 기억납니다.
“하이코드를 배울 단계가 되면 기타를 계속 칠 아이와 포기할 아이로 구분된다. 하이코드 잡기가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봐.”
실제로 하이코드를 배우면서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는 그런 코드를 잡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제대로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었고, 또 아무리 해도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점차 재미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포기할까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기 있는 교회 오빠’라는 꿈을 꾸면서 꾹 참으면서 이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그 뒤로 기타 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당시에 저와 같이 시작했던 친구들이 몇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 하이코드 단계에서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타와 나는 안 맞아.”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그 순간을 못 넘어서는 우리가 아닐까요? 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극복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을 함께 전해주십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시고, 세상의 눈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이해가 안 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주님이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 세상의 눈으로는 불행 속에 있지만, 여기에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희망의 삶을 살아간다면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눈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그냥 그 자리에 안주해서 주님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고 또 어떤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 자신은 행복선언의 주인공일까요? 아니면 불행선언의 주인공일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그 자리에 초대하면서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 뜻에 맞는 변화의 길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행복선언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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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서로 모여들어 체온을 나누는 습성이 있다는데, 같이 붙어 있게 되면 가시에 찔리고 떨어져 있자니 추운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답은 가시에 찔리지 않을 정도의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모이는 가까움과 멈의 균형이다(강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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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이야 엘리베이터가 고속으로 운행되지만, 예전에는 속도가 아주 느렸다고 합니다. 어느 백화점에서도 이 문제로 큰 고민에 빠졌지요.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리다는 고객의 불평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을 논의했지만, 최신형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 외에는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주 빨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 비용이 엄청나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고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엘리베이터 담당 청소부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것은 엘리베이터 안에 커다란 거울을 설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불평이 사라질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불평이 사라졌습니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들은 할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엘리베이터 안에 거울 설치하고 있습니다.
만약 백화점 측에서 청소부 의견을 무시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어떤 말도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됩니다. 문제의 해결에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열린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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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인공지능은 쉽게 이야기하면 ’함수(function)’라고 합니다. 기능이 있는 도구에 데이터를 넣으면 변화된 답을 출력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 배우는 ‘사칙연산’은 간단한 인공지능입니다. 사칙연산은 숫자를 넣고 더하거나 빼고, 곱하거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은행에서 볼 수 있는 자동화기기도 함수입니다. 원하는 금액과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이체할 수도 있고, 찾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몸의 신진대사도 함수입니다. 우리가 에너지를 섭취하면 다른 에너지로 변환되고 생리작용에 의해서 배출됩니다. 인공지능의 핵심은 ‘변화’입니다. 질문에 답을 하기도 하고, 정해진 경로로 움직이기도 하고, 결과를 예측하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에게는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데이터(자료)라고 합니다. 크게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림입니다. 그림에는 정지된 그림이 있고, 움직이는 그림이 있습니다. 수많은 그림이 입력되면 그것을 토대로 사람을 구분하기도 하고, 지명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영상자료는 의학, 생물학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며, 범죄의 현장을 파악하는데도 사용됩니다.
두 번째는 문서입니다. 문서는 인류가 그동안 축적한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검색을 통해서 우리는 문서화된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저도 지난 30년 동안 강론을 저장하였고, 공유하였습니다. 인공지능은 입력된 문서정보를 분석하고, 분류하고, 평가합니다.
세 번째는 소리입니다. 사람의 음성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음성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악보에 있는 음표를 악기의 소리로 구현할 수 있습니다. 영상이 소리를 만나면 멋진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소리가 없는 인공지능은 삭막할 것 같습니다.
네 번째는 숫자입니다. 인공지능의 기능을 제어하는 것은 숫자입니다. 아날로그로 된 모든 것들은 숫자로 디지털화 시킬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로는 소통이 어렵지만 숫자는 언어가 달라도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수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소통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형태의 함수를 이야기하십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과 불행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조건입니다. 인공지능처럼 복잡한 데이터를 입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행복해 보이지 않을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차원의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그런가하면 불행한 사람의 조건도 말씀하십니다. 지금 부유한 사람, 지금 배부른 사람, 지금 웃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행복할 것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사람을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또 다른 함수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주어진 환경은 다를지라도 이것을 입력하면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있고,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고, 어둠에서도 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도, 독신인 사람도, 노인도, 젊은이도, 남자도, 여자도 이것을 입력하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에로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불편심, 항상성, 중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때로 소중한 것들, 아름다운 것들을 말을 통해서 잃어버리곤 합니다. 우리의 주변은 많은 소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음들에 묻혀서 진실의 소리, 침묵의 소리,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감각과 감정에 따라가다 보면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현실이라는 벽을 넘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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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 - 하느님 중심의 초연한 깨어 있는 삶 -
사람의 진면목은 살아서보다 죽어서 잘 드러납니다. 본인보다 주변에서 인정하고 알아 줍니다.
구상 시인이 그렇고 안병초 수사가 그런 분입니다. 동시대를 살면서도 죽어서야 더 잘 알게 된 분들입니다.
“마리아니스트 안병초 수사 평전-참 아름다운 사람, 안병초-“
라는 책을 휴게실에서 발견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 얼마나 좋은 호칭인지요!
참 아름답게 살다간 영원한 마리아니스트 안병초, 비록 체구는 작았으나 거목巨木이었고,
한국 마리아니스트들의 훌륭한 아버지였습니다.
누구나 바라는 바,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아름다운 삶은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행복한 삶은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할 때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이 행복한 삶, 아름다운 삶의 비밀을 알려 줍니다. 마태복음과 아주 대조되는 행복선언입니다.
행복선언 넷에 뒤이어 곧장 불행선언 넷이 나옵니다. 오늘 행복선언은 직접 제자들을 보며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도 그렇게
대하였다.”-
행복선언 전반부를 전부 인용했습니다. 그대로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비춰주는, 참으로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행복선언을 통해 가난한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참으로 온통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사랑하기에 역경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행복입니다, 세상에 희망을 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이런 행복입니다.
주목할 말마디 ‘지금’입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고, 지금 우는 사람들이 웃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앞당겨 체험하니 이런 행복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순수히 열렬히 사랑할 때 세상에 대한 일체의 원망이나 증오가 없는 이런 참 행복의 가난입니다.
이어지는 불행선언은 그대로 자족의 있는 자들에 대한 회개의 촉구입니다.
전반부의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여 함께 살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예화가 생각납니다.
전반부의 행복선언은 가난한 나자로를 연상케 하고, 후반부는 이름이 없던 부자를 연상케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대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같아 참 불편하게 들립니다만 우리의 참 모습을 비춰주면서 회개에로 이끄는 충격 요법적 표현입니다. 오늘부터 참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을 좌우명으로 삼아 살고 싶습니다.
불행한 사람들, 세상 눈으로 보면 행복한 사람들이지만 내면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리가 없어, 깨어 있지 못하고 곧 부패하게 되니 참 행복은 불가능합니다.
물이 고이면 썪듯이 부유는 곧 부패로 직결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가짜 행복의 불행에서 벗어나는 일은
회개하여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여 함께 나눔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일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 좋게 말하면 불행하다 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으려 하거나 맞추려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진리에 맞춰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참 예언자들이, 성인들이 그러했습니다. 본당 신부의 말을 들어도 아무리 잘해도 신자들의 반응은 ‘1/3은 찬성, 1/3반대, 1/3중도’ 라 합니다. 마치 1/3보수, 1/3진보, 1/3중도의 비율과 흡사합니다.
과연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인지 혹은 불행한 사람인지 묻게 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사랑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가난을,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깨어 있게 되고 초연하게 되고 자유로워집니다. 가난한 부자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부패하지 않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그 빈자리를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코린토 1서 후반부가 참 행복의 비결을 알려 줍니다. 때가 얼마 안 남았으니 깨어 초연히 자유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참으로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가능합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오로 당시 신자들은 예수님 재림이 곧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하여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했습니다. 이런 재림이 아니더라도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종말론적 삶의 자세로 살아가라 합니다. 언제 갑자기 들이 닥칠 죽음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무시나 거부가 아니라 세상에 빠지지 않고 소유되지 않고 깨어, 집착함이 없이, ‘세상의 종’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이 되어 초연한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몸은 지상의 현실에 두지만 마음은 하늘의 하느님께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상적 현실주의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참 행복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전반부의 참 행복의 원리와 똑같습니다.
참으로 경계할 바 사람을 폐인이나 괴물로 만드는 중독과 부패입니다. 돈중독, 일중독, 사람중독, 인터넷 중독등 중독 아닌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에 깨어 있을 때 초연하게 되고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중독도 부패도 예방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매일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평생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성무일도 은총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참 행복의 초연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세상 것들에의 중독과 부패 방지는 물론 치유와 더불어 초연하고 자유로운 삶에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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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0.09.09 05:16
연중 23주 수요일-실패한 행복의 이유
오늘 주님의 말씀은 행불행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마태오 복음에도 행복에 대한 가르침이 있는데
이것이 진복팔단 또는 산상수훈이라고 일컬어지며 우리에게 더 친숙합니다.
그런데 같은 행복에 대한 가르침이지만 마태오 복음의 가르침과
오늘 루카 복음의 가르침 사이에 차이점이 많이 있는데 저는
오늘 그중에서도 두 가지 차이점에 더 주목을 하고 싶습니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두 가지 차이점이란
루카 복음은 행복과 불행을 함께 말씀하신다는 점이 하나이고
마태오 복음이 '그들' 곧 일반 대중에게 말씀하신 것에 비해
루카 복음은 '너희' 곧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주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의 '그들'이 아닌 바로 우리에게
'너희 지금 행복하니? 혹시 불행하지는 않니?'하고 질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행복하고, 행복하다고 답할 자신이 있습니까?
아니면 불행하다고 솔직히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난처한 질문을 받을 때 흔히 취하는 태도가 '전략적 모호함', 곧
행복하긴 하지만 참으로 행복하다 할 수는 없고, 불행하지 않은 정도의
행복이라고 답하는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이것은 행복이고, 저것은 불행이라고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행불행과 관련하여 왜 이런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까?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더 솔직히 말하면 불행하다.'고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닙니까?
'나는 정말로 행복하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면 아마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왜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말을 못하는지 이제 물어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묻고 있습니까? 묻지 못한다면 왜 묻지 못합니까?
불행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자신과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까?
그럴 겁니다. 그런데 행복하다고 말할 자신도 없고,
불행하거나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용기가 없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이유를 계속 파고 들어가다 보면 나의 행불행에 대해 묻지 않고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근본적 이유는 실패의 체험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한 행복의 이유가 행복 욕심 때문임도 알게 됩니다.
제 생각에 우리 욕심 중에 제일 큰 것이 사랑 욕심과 행복 욕심입니다.
아니, 행복 욕심은 모든 욕심의 종합이고, 사랑 욕심도
행복 욕심의 일부이기에 행복 욕심이 제일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행복 욕심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욕심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이 욕심의 대상이 되면 '더'에 집착하게 되겠지요?
지금 행복한데도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더 행복해야만 된다고 합니다.
추구와 욕심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추구하면 지금의 행복을 인정하고 누리면서 더 완전한 행복에로 나아가지만
욕심을 부리면 지금보다 더 행복한 것에 집착을 하기에
지금 나의 행복을 보지도 누리지도 못하여 오히려 불행해지지요.
그래서 이런 실패의 체험 때문에 '꼭 더 있어야 해?
이 정도로 만족하자'는 타협적 지혜가 나오는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 행복으로도 만족해야 하지만
더 완전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현재적 행복과 초월적 행복을 모두 살 수 있어야겠습니다.
지금 행복하면서도 미래에 더 행복하고, 더 완전한 행복을 말입니다.
그것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미래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행복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종말을 생각하며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초월적인 행복을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깊이 성찰하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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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김레오나르도 김찬선 4 분 전 ( 2020. 09.09. 05:27 현재)
오늘 너무 어처구니 없게도 강론 쓴 것을 실수로 날려버리고 다시 썼습니다. 그러데 놓친 고기가 더 큰 것과 같은 심리 때문인지 '먼저 쓴 것이 훨씬 좋은데'라는아쉬움이 있습니다. 저의 실수인지, 성령의 역사인지!
이것은 그냥 제가 너무 한심해서 넋두리 한 것이고, 정작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앞으로 3일, 어쩌면 5일 강론을 올릴 수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문제 없으면 토요일, 문제 있으면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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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이영근 신부님.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오늘 여러분은 행복하세요?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라는 두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세속정신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행복선언은 현실을 넘어있고 현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고, 삶에 대한 태도의 방향전환을 요청합니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삶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 중에서 마지막 것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비위맞추며 눈치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이 하늘을 보고 있지 않는 까닭입니다.
곧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단순히 공동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단지 인간적인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손 도손 재미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도, 그저 열심히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되 당신이 하신 것처럼,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다 내려놓고, 당신만을 차지할 것입니다.
굶주릴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도 마음을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배척받고 모욕 받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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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행복을 일러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네 가지 행복과 네 가지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 받는 이들에게 행복하다고 하시고,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고, 늘 호평 받는 사람들에게 불행하다고 하시지요. 솔직히 받아들이기에 그리 만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 질서와 상반되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가난하되 부를 시기하지 않고, 굶주리되 남을 해치지 않으며, 제 아픔에 울면서도 타인을 연민하고, 박해 받으면서도 주님만을 향할 수 있는 이는 행복하다고요. 과연 그런 이는 행복합니다.
또 부유한데 만족을 모르고, 배부르면서도 남을 착취하며, 남의 눈물은 아랑곳없이 저만 웃고 즐기면 되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으려 하느님 시선은 무시하는 이들은 제아무리 세상이 인정하고 부와 권력과 명예를 보장한들 진정한 행복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네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혼인 문제를 들어 때를 준비하는 자세에 대해 가르칩니다.
"... 있는 사람은 ... 없는 사람처럼 ... 사십시오."(1코린 7,29)
사도는 혼인과 독신, 웃음과 울음, 기쁨과 슬픔, 소유와 이용 등에 대해 무엇이 좋다고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보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말라고 권고하지요.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기에, 영과 육의 질서와 균형은 영성 생활의 화두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일방적 선호와 집착, 취향과 갈망은 한 존재의 중심추가 물질에 쏠려 있음을 반증하지요. 사도 바오로는 믿는 모든 이가 마지막 날에 자유롭고 홀가분한 상태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7,31 참조)
"네 백성, 네 아버지 집을 잊어버려라. ... 임금님은 너의 주인이시니, 그분 앞에 엎드려라."(화답송)
시편 저자는 지상 임금의 혼인식 장면을 들어, 결정적인 하느님 왕국의 도래와, 신부로 단장한 아름다운 영혼과 신랑이신 주님과의 해후를 묘사합니다. 세상 애착과 연줄과 욕망을 끊고(잊어버리고), 영원한 주인이신 분께 승복함으로써(엎드림으로써) 온전히 그분의 소유가 됨으로써 혼인 잔치는 절정을 향해 갑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곳은 하느님 곁에 마련된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지상에서 주어진 제 십자가를 지고 순례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그렇다고 내세만 바라보고 기대하면서 현세를 아무렇게나 지나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은 작은 일에 충실한 종을 "착하고 성실한 종"이라 칭찬하시며 당신의 큰 일을 맡기실 것이니까요.(마태 25,21 참조)
오늘의 말씀에서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 독서와 화답송 안에 담긴 속뜻은, 일차적으로 현세에서 주어진 삶에 성실히 임하되, 그 결과와 열매를 현세에서 기대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주님의 바람이 들어 있는 듯합니다. 결국 우리가 돌고 돌아 마침내 정착할 곳은 본향의 복된 자리이니,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움과 충만함, 기쁨을 관상하며 현세의 장벽과 광야와 어둠 속을 의연히 걸어가라는 격려일 것입니다.
현세와 내세를 흑백논리로 갈라, 극과 극에 놓아버리고 어느 하나에만 집착하면 종교가 자칫 사회 불안과 위험을 초래하는 이단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현세는 내세의 행복을 위해 주님께서 각자에게 알맞게 마련해 주신 환경이니,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웃과 더불어 힘껏 살아내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부유함에 감사하며 나누는 이!
행복하여라, 자기 배부름을 덜어 타인을 배불리는 이!
행복하여라, 우는 이에게 웃을 일을 선사하는 이!
행복하여라, 가장 낮은 곳에 귀기울여 하느님 칭찬을 듣는 이!"
사랑하는 벗님! 오늘 주님은 이렇듯 행복을 더 큰 행복으로, 불행을 반전의 행복으로 끌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충실히 살며 하느님 나라를 자유로이 관상하는 복된 이들입니다. 그런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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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창조시기 9일째-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배부른 사람들!"(루카6,20.25)
'행복선언과 불행선언!'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이 전하는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행복의 기준이 크게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지금 부유하고,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고, 지금 칭찬 받는 일인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불행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행복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지금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행복선언입니다.
하지만 이 행복선언 앞에다 '예수님'이라는 거룩한 이름과 '영원한 생명'을 붙여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난하고,
예수님 때문에 굶주리고,
예수님 때문에 울고,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영원한 생명 때문에 가난하고,
영원한 생명 때문에 굶주리고,
영원한 생명 때문에 울고,
영원한 생명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가 아니라, 죽음 저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1코린7,29)
사도 바오로는 이 세상 형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때와 종말의 때!'
인간적으로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은 때이지만, 이는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모두에게 주어진 '결정적인 때'입니다.
이 결정적인 때 앞에서,
지금 부유하고,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고,
지금 칭찬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지막 때에 기뻐할 수 있도록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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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1코린토 7,25-31
루카 6,20-26
오늘 가난 때문에 힙겹습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가슴 절절한 권고 말씀, 그리고 예수님의 4대 행복·불행 선언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제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코린 7장 29~31절)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루카 복음 6장 20~21절)
곰곰히 생각해보니 두분 말씀의 요지는 변화무쌍하고 덧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나가는 소소한 것들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늘 낙천적으로, 마음 너그럽게 먹고, 크게 크게 살라는 부탁 말씀입니다.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니 왜 그리 쫌생이 좁쌀영감처럼 살아왔는지 후회막심입니다.
왜 별것도 아닌 것들에 그리 목숨을 걸었는지 부끄럽습니다.
한 때 인생의 전부라고 여겼던 대상들,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 움켜쥐려고 발버둥쳤던 대상들이
사실은 물거품이요, 뜬구름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보폭은 짧은 반면 하느님의 보폭은 깁니다.
인간의 호흡은 촉박하지만 하느님의 호흡은 여유롭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큰 걸음을 걸어야겠습니다.
좀 더 많은 여유와 너그러움을 나 자신과 이웃들,
그리고 하느님께 보여드려야겠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처지의 사람들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가난하고 굶주리며 우는 사람들에게 직접 위로의 메시지를 건네시면서 격려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역사를 통해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하느님께 희망을 걸때,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편이 되시는지를 온 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굶주리며 우는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더 가까이 다가가시고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십니다.
부유한 사람들, 그들이 쌓아올린 부 때문에 맨날 행복해 할 것 같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잘 활용하지 않으면, 언젠가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부자들이 자신 삶의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재물에 두고 있습니다.
그 기반이 영원할 것 같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허물어집니다.
이런 배경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루카 복음 6장 24절)
혹시라도 오늘 가난 때문에 너무 힙겹습니까?
지금 굶주리고 계십니까?
홀로 돌아서서 속울음을 울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너무 슬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조만간 당신 자비의 손을 펼치시며 가까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항상 함께 해주실 것이며 든든한 산성이요 성채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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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1코린토 7,25-31
루카 6,20-26
감사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이유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행복은 감사한 마음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감사할 수 없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행복합니다.
이것을 잘 알아서 오프라 윈프리는 매일 저녁 감사일기를 썼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는 것이 법칙이기 때문에 감사하는 자에게 더 감사할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행복해지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지만 감사하려고 한다고 해서 잘 될까요?
처음 감사일기를 써 보라고 하면 매우 힘들어합니다.
하루 다섯 가지, 세 가지도 찾기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얼마간 쓰다가 포기해버립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또 불만 쌓인 삶으로 돌아갑니다.
왜 감사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
자신을 물어뜯고 있는 늑대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 때문입니다.
모기가 무는데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감사를 찾기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방정환 선생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가 밤이 늦도록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이 열리더니 복면을 한 강도가 불쑥 들어와 시퍼런 칼을 들이밀며 말했습니다.
“꼼짝 말고 손들어!”
그러자 방 선생이 말했습니다.
“아니, 꼼짝 않고 어떻게 손을 든단 말이오?”
강도가 주춤하며 말을 바꾸었습니다.
“그럼, 손들고 꼼짝 말아. 그리고 더 이상 잔소리 말고 돈이나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
방 선생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고 390원을 내놓았습니다.
옛날 돈 390원이면 큰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이것이 전부이니 가지고 가시오.”
주인이 태연하게 돈을 주자 도둑이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얼른 도망가려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방 선생이 소리를 쳤습니다.
“여보시오. 돈을 주었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깜짝 놀란 이 강도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 ○○야!”
얼마 후 날이 밝았습니다.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까 강도와 순경이 찾아왔습니다. 순경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간밤에 많이 놀라셨지요? 이 사람이 선생님 댁에서 강도질했다고 하기에 확인하러 왔습니다. 맞지요?”
이때 방 선생이 차분히 말했습니다.
“아, 이 사람 말이오?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었죠.
그런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사정이 딱해 보여서 내가 390원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는데요.”
순경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선생님 댁에서 돈을 훔쳤다고 자백을 했는데요?” 하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래도 방 선생은 태연히 말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내가 돈을 주니까 인사까지 하지 않았소?
돈을 훔쳐 가는 도둑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법이 어디 있소?”
순경은 할 수 없이 강도를 풀어 주었습니다.
순경이 돌아가자 강도는 방 선생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방 선생은 강도의 등을 두드리면서
“일어나시오. 사람이 어렵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마시오” 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방 선생에게 간청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선생님 곁에서 평생 선생님을 섬기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 후 강도는 죽을 때까지 방정환 선생 곁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강도가 강도질할 때 감사하라고 한다면 감사가 나올까요?
강도는 본성 자체가 감사가 나오지 않는 존재입니다.
부족함이 감사함보다 항상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도에서 벗어나게 되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강도로 만드는 세 욕구가 있습니다.
세속-육신-마귀입니다.
세속은 돈의 욕심이고 그래서 십일조도 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주님 것까지 챙기는 강도가 됩니다.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욕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교만은 자신이 하느님이 되기까지는 멈출 줄 모릅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제시하는 방법은 자선(십일조)-단식-기도입니다.
자선하면 가난해집니다.
돈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돈이 주님 것이라 고백하게 되니 받은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육체를 지나치게 만족시키려 하는 사람도 도둑입니다.
절제하며 남는 것을 가난한 사람과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자기주장에서 벗어납니다.
자아가 뱀이고 늑대이고 모기입니다. 나를 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영원한 도둑놈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바보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슬픔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요즘은 아침마다 러닝머신에서 일정 시간 정해놓고 뜁니다.
뛰면서 감사한 일을 찾아 기도하려고 합니다.
처음엔 감사한 일이 많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몸이 힘들어지면 감사한 것보다 빨리 시간이 끝났으면 하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나를 물고 있는 늑대가 있습니다.
나의 피를 빨고 있는 모기가 있습니다.
나의 주인으로 사는 뱀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아입니다.
이것이 나의 주인인 이상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도둑일 수밖에 없고, 감사하려고 해도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러닝머신은 처음에 고문하려고 만든 도구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고문하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에서 먼저 내려와야 합니다.
봉헌과 단식과 기도가 없이는 그것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 세 개를 통해 청빈-정결-순명의 덕이 생겨나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세상이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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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연중 제 23 주간 수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말씀의 주제는 '종말의 때가 얼마남지 않았다. 와 행복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종말의 때를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곧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이 있지 않은, 세상을 이용하는 이는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라. 살아지는 형제에 매달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에서 행복 선언에서 행복은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고 좋게만 말하는 사람들의 것만이 아니다. 선언합니다. 그 반대의 가난과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도 행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나 사람들. 만남 대화, 한 일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그릇됨을 봅니다.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함가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형제 여러분, ...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코린 7,25-31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흐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20-26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하늘 나라의 행복과 영광은 참 신앙인들의 몫입니다. 참 신앙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수고하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가난하게 되어도, 굶주리게 되어도, 울게 되어도, 누가 미워하여도 그것을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곧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살아가는 이들은 하늘 나라의 영광과 영원한 행복을 알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과 간난이 와도 그것에 실망하지 않고 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 나라의 영광과 행복이 목전에 있다는 것에 감사와 기쁨을 하느님께 드립니다.
참 신앙인들은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는 것을 알고 있으며, 종국에 그 형체가 완전히 없어지고 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 신앙인은 지금 살아있고 건강하기 때문에 이 여건을 기쁘게 활용합니다. 곧 시간과 자리, 여건과 조건, 만남과 관계를 통해서 하늘 나라의 거룩한 일과 사랑과 선과 의로움을 행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늘 나라의 영광과 행복을 얻습니다. 그 기쁨을 찬미합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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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9일 수요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_이도행 토마스 신부 집전
https://youtu.be/WP4GXmDj9nc (31:24)
•2020. 9. 9.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이도행 토마스 신부 (가톨릭 평화방송 · 평화신문 보도주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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