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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자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 1932~1962
[1]
찌뿌드드하고 후덥지근한 여름이었다.
다들 내가 생애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짐작했다. 미국 전역의 수많은 여대생이 선망하는 대상이었으니까.
호텔에 묵는 우리 일행은 열두 명이었다. 다들 패션 잡지사 콘테스트의 에세이나 소설, 시, 패션 광고 부문 입상자들이었다. 잡지사에서는 상으로 한 달간 뉴욕에 일자리를 주었고 경비를 지급했다.
나는 베스트셀러 소설가와 인터뷰한 원고를 타자로 치는 중이었다.
제이 시는 징그럽게 못생겼어, 남편은 불을 끈 다음에야 제이 시 옆에 갈걸, 안 그러면 토하고 말 테니까. 제이 시는 내 상사였고, 도린이 무슨 험담을 하든 난 그녀를 굉장히 좋아했다. 제이 시는 가짜 속눈썹과 번지르르한 액세서리로 치장한 패션 잡지 사람들이랑은 달랐다. 머리가 좋았고, 그 덕에 예쁘지 않은 외모는 문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제이 시는 내게 일을 가르쳐주고 싶어 했다. 내가 아는 노부인들 역시 모두 뭔가 가르치려 들었지만, 불쑥 배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몸에 붙는 40달러짜리 검정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뉴욕에 가는 행운아로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 장학금에서 큰 몫을 떼어 산 드레스였다.
그날 밤은 나, 내 본명, 보스턴 출신이라는 사실과 전혀 상관 없는 말과 행동을 하고 싶었다.
뭐 하세요? 여기 뉴욕에서 뭐 하시죠? 나는 밀림의 풀처럼 빼곡이 내려앉은 침묵을 깨려고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천천히, 큰 노력이라도 하듯이 도린의 어께에서 눈을 뗐다. 그가 대답했다. 디스크자키예요. 내 이름은 들어봤을걸요. 내가 바로 레니 셰퍼드예요.
[2]
그의 집은 뉴욕 한가운데 있는 아파트였지만 실내는 목장 주택이랑 똑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더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자리를 피했다. 문밖으로 나와 양손으로 난간을 잡고 미끄러지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린은 문설주에 기대어 몸을 숙이고 있었다. 내가 나가자 그녀는 내 품에 쓰러졌다.
[3]
<레이디스 데이>의 연회 테이블에는 마요네즈에 버무린 게살을 담은 연두 빛 아보카도와 살짝 구운 쇠고기, 찬 닭고기 접시가 놓여 있었다.
뉴욕에 오기 전에는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뚱뚱한 대머리 사회자가 옷깃에 꽃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더할 수 없이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들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저희 스태프가 여러분을 만난 것은 큰 행운입니다. <레이디스 데이>의 이 연회는 저희 푸드 테스팅 키친스가 여러분의 방문에 감사드리며 베푸는 작은 성의입니다. ~~~잡지사에서 온 여대생은 열한 명이었고, 도린은 레니 셰퍼드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여가 시간 내내 그와 지냈다.
[4]
제이 시는 정오에 유명한 문인 두 사람을 만나러 가야 했다. ~~~나는 몇 분간 회전의자에 앉은 채로 제이 시에 대해 생각 했다. 저명한 편집자가 되어 고무나무 화분과 아프리칸 바이올렛이 즐비한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봤다.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주는 비서가 있다면 어떨까.
여기까지 온 기나긴 길을 생각했다. 처음 핑거볼을 본 것은 내게 장학금을 준 부인의 집에서였다.
호텔로 돌아가야겠어. 나는 어둠침침한 속에서 베시에게 속삭였다. ~~~식중독이에요. 아가씨들 모두 식중독에 걸렸어요.
[5]
다음날 아침 일곱 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윌러드 부인이 소개한 동시통역사는 땅딸보 추남이겠지.
조엔 길링은 우리랑 같은 고향 출신으로 같은 교회에 다녔고, 나보다 한 학년 높았다. 대단한 여학생이었다. 물리학 전공으로 과 대표였고, 대학 하키 챔피언이었다. 조앤을 볼 때마다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예일대에 가본 적이 없었고, 예일대는 우리 기숙사에 있는 모든 상급생이 주말에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버디가 가자 나는 편지를 뜯었다. 예일대 3학년 무도회에 초대하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너무 놀라서 두어 번 낑낑대는 소리를 내고는 기숙사 안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가야지, 가야지, 가야지!
무도회가 열리는 내내 버디는 날 그냥 친구나 사촌 누이처럼 대했다. 우리는 줄곳 뚝 떨어져서 춤추었다. ~~~숙소가 가까워지자 버디가 말했다. 우리 화학 실험실에 올라가보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화학 실험실에? 응. 버디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화학실험실 뒤쪽으로 경치가 아름답거든. ~~~와, 너랑 키스하니까 기분이 정말 좋은데. 나는 얌전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가을 그가 의과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자 나는 예일대가 아닌 의대로 그를 만나러 갔다. 오랜 세월 그가 날 속였으며, 그가 얼마나 위선자인지 알게 된 것도 거기에서였다. 아기가 함께 태어나는 것을 함께 본 날 나는 깨달았다.
[6]
나는 정말 흥미진진한 병원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바디를 졸라댔다. 그래서 어느 금요일 수업을 다 빼먹고 긴 주말을 보내러 그에게 갔다.
내가 시 한 편을 읽고 나자 불쑥 버디가 말했다. 에스더, 남자를 본 적 있어? ~~~아니, 조각상만 봤지. 내가 대답했다. 그럼 내 몸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어?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최근 엄마와 할머니는 버디 윌러드가 얼마나 단정하고 반듯한 청년인지 은근히 암시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뭐. 좋아. 내가 대답했다.
버디에게 결핵에 걸려서 안됐다고 위로하고 편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을 때는 안쓰러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후 하는 안도감만 밀려올 뿐이었다. 결핵은 버디가 이중생활을 하면서 남보다 잘났다고 으스댄데 대한 벌인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버디가 결핵에 걸렸고, 사실상 우리는 약혼한 사이라고만 말했다.
[7]
아니나 다를까 콘스탄틴은 키가 심하다 싶게 작았지만, 나름대로 미남이었다. ~~~콘스탄틴은 낡은 초록색 승용차에 나를 태우고 유엔으로 데려갔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나란히 앉아 거리를 달릴 때 그가 내 손을 잡더니 꼭 쥐었다. 그러자 아버지와 뜨거운 해변을 달렸던 아홉 살 이후 가장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그 여름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는 진정으로 행복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날 위해 모은 돈으로 걸스카우트 활동을 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고 수채화를 배우고 무용 강습을 받고 조정 캠프에 갔고, 대학에 진학한 후로는 아침 식사 전에 안개 속에서 배를 타고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불꽃놀이 하듯 떠올렸지만 말이다.
대학 신입생 때 유일한 단짝 친구였던 조디가 어느 아침 숙소에서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들어준 일이 기억난다.
춤에 관한한 몸치였다. 리듬을 타지 못했다. 균형 감각이 없어서 체육 시간에 양손을 뻗고 머리에 책을 올리고 좁은 판자 위를 걸을 때면 늘 떨어졌다.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은 승마와 스키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서 못 배웠다.
평생 처음으로 유엔 건물의 방음이 되는 심장부에서, 테니스를 치는 동시통역사 콘스탄틴과 관용어구를 많이 아는 러시아 여자 사이에 앉으니 내가 끔찍하게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콘스탄틴이 데려간 레스토랑에서는 허브와 향신료, 사우어크림 냄새가 풍겼다. 뉴욕에 머물면서 이런 레스토랑에 와 본 적이 없었다. ‘헤븐리 햄버거’ 같은 곳만 찾아다녔다.
버디 일러드가 웨이트리스 이야기를 한 후 나도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하고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버디와 자는 것은 소용없었다. 그래 봤자 버디가 나보다 경험이 한 번 많게 되니까. 상대는 딴 남자여야 했다.
실제로 동침을 고려한 남자는 한 명 뿐이었다. 남부 출신으로 매부리코에 냉정한 성품인 예일대생이었다. 어느 주말 그는 우리 학교에 왔다가 여자 친구가 전날 택시 운전사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날 밤 숙소를 지키던 사람은 나뿐이어서, 그를 위로하는 일이 내게 떨어졌다.
그의 이름은 에릭이었다. ~~~그는 남부의 사립 고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신사 양성 교육에 주력했다. 졸업 전에 여자를 알아야 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어느 토요일, 에릭은 같은 반 친구 몇 명과 버스를 타고 가까운 도시로 나가서 악명 높은 매춘 업소를 찾아갔다.
그 순간 에릭이 알맞은 동침 상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미 경험이 있는데다가 그런 말을 할 때도 보통 남자들처럼 음흉하거나 멍청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에릭은 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편지를 보냈다. ~~~아쉽지만 어릴 적 연인과 결혼할 거라는 편지를 보냈다.
생각할수록 뉴욕에서 동시통역사의 유혹을 받는다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다. 콘스탄틴은 매사에 성숙하고 사려 깊은 사람 같았다. ~~~~콘스탄틴이 자기 아파트에 올라가서 발랄라이카 음악을 듣겠느냐고 묻자 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난 발랄라이카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요. 내가 말했다.
열아홉 시절 내게는 순결이 가장 큰 화두였다. ~~~그 경계선을 넘는 날, 특별한 변화가 밀려들 것 같았다. ~~~큰스탄틴은 내 손을 잡는 것을 빼면 유혹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서 누워야겠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자연스럽게 침실로 들어가서 구두를 벗어던졌다.
콘스탄틴의 손목시계는 세 시를 가리켰다. 그는 셔츠와 바지를 입고 양말을 신은 채 자고 있었다.
[8]
윌러드 씨는 나를 차에 태우고 애디론댁으로 갔다. ~~~버디가 묵고 있는 요양원을 내가 어떻게 상상했는지 모르겠다. ~~~결핵을 앓아 뺨이 발그레한 젊은이들은 매력적이지만 열 기운에 눈이 번들거릴 것 같았다.
윌러드 씨와 나는 오후 휴식 치료가 끝날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버디가 들어섰다. 아버지 안녕하셨어요? 버디는 아버지를 포용하더니 끔찍할 정도로 환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만 가봐야겠다. 젊은이들끼리 있게 해줘야지. 그러세요, 아버지 그만 가보세요. 나는 깜짝 놀랐다. 윌러드 씨도 하룻밤 지내고 같이 갈 걸로 알았는데 혼자 가다니.
나는 버디의 침대에 앉았다. 달리 앉을 데가 없었다. ~~~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버디 윌러드 부인이 되는 게 어때? ~~~난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야.
[9]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를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르코가 여성혐오자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마르코가 나를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이끌었다.
[10]
거울에 비친 얼굴은 병든 인디언 같았다. 콤팩트를 핸드백에 넣고 기차의 창밖을 응시했다. 서로 상관없는 부서진 조각들을 쌓은 거대한 쓰레기 처리장처럼 코네티컷의 늪지와 가정집 뒷마당들이 휙휙 지나갔다.
예야, 얼굴은 어쩌다 그랬니? 베었어요. 간단히 대답하고, 가방을 들고 뒷자리에 올라탔다. 집까지 가는 길 내내 엄마의 눈길을 받고 싶지 않았다.
식탁에 여름 학기 강좌에서 온 사무적인 장문의 편지와 예일대의 하늘색 편지가 있었다. 겉봉에 버디 윌러드의 단정한 필체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난 연필을 집어 들고 버디의 편지에 X자를 그었다. 그리고 편지 뒷면에 동시통역사와 약혼했고, 내 아이들에게 위선자를 아버지로 삼게 하기 싫어서 버디와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썼다.
소설을 쓰면서 여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내가 여주인공이 되어야지, 변장을 해서 일레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일레인의 알파벳 숫자를 꼽아보았다. 내 이름 에스더의 알파벳도 여섯 자였다. 행운이 따르는 것 같았다.
“일레인은 어머니의 낡은 노란 잠옷을 걸치고 집과 차고 사이의 통로에 앉아서 뭔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7월의 무더운 아침이라 땀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한 방울씩 기어 내려갔다. 느려터진 벌레처럼.”
등을 뒤로 기대고, 쓴 부분을 다시 읽었다.
문득 공부를 일 년 미루고 도자기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났다. 아니면 독일에 가서 웨이트리스를 하면서 독일어를 완벽하게 익힐까.
내가 살아온 해들이 전봇대처럼 길에 늘어선 광경이 떠올랐다. 전봇대 사이에 전선이 이어져 있었다. 전봇대가 하나, 둘, 셋..... 열아홉. 한데 전선이 거기서 땅으로 축 쳐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열아홉 번째 전봇대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1]
닥터 고든의 병원 대기실은 조용했고 베이지색 일색이었다. ~~~냉방장치가 가동되어 몸이 떨렸다. 나는 아직도 베시의 흰 블라우스와 펑퍼짐한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삼 주 동안 세탁을 안 해서 옷이 추레했다. 면은 땀에 절어 시큼하면서도 친근한 냄새를 풍겼다. 머리도 삼 주나 감지 않았다. 잠을 못 잔지 칠일이나 됐다.
닥터 고든은 은색 연필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님께서는 따님이 혼란에 빠져 있다고 하시더군요.
내가 말을 마치자 닥터 고든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 대학에 다녔다고 했지요? 나는 왜 대학 이야기를 하는지 어리둥절했다. 아!
닥터 고든은 오른쪽 옆으로 늘어뜨린 내 손을 잡더니 흔들었다. 그럼, 다음 주에 봅시다.
해군은 내 허리를 안았고, 우린 오랫동안 그런 자세로 광장을 걸었다. 해군은 헐렁한 초록색 스커트를 걸친 내 엉덩이를 쓰다듬었고, 나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보스턴 출신이며, 비콘힐에서 차를 마시거나 파일린 베이스먼트 잡화점 쇼핑을 마친 윌러드 부인이나 어머니 친구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으려 했다. 시카고에 간다면 이름을 아주 엘리 히긴바텀으로 바꾸리라. 그러면 내가 동부의 여자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았고, 뉴욕에서 한 달간 빈둥댔고, 언젠가 미국 의학 협회 회원이 되어 돈을 많이 벌 전도유망한 의대생을 차버렸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겠지.
불쑥 해병에게 물었다. 해군에서 제대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 ~~~그는 놀란 눈치였다. 그는 흰 모자를 기우뚱하게 밀더니 머리통을 글었다. 해병이 말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제안하듯 물었다. 정비소를 열 생각이 있나요? 아뇨, 생각해본 적 없어요. 해병이 말했다.
에스더, 이번 주에는 기분이 어때요? 닥터 고든은 날씬한 은빛 총알 같은 연필을 만졌다.
투신의 경우 층수를 제대로 가는 못하면 떨어진 후에도 살아 있다는 게 문제였다. 7층 정도면 안전한 거리일 것 같았다.
[12]
닥터 고든의 개인 병원은 풀이 우거진 오르막길에 있었다. ~~~간호사가 문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핸드백을 뒤져 편지 조각과 콤팩트, 땅콩 껍질, 동전, 면도날 열아홉 개가 든 파란 통 사이에서 스냅사진을 꺼냈다. 그날 오후 오랜지색과 흰색 줄무늬 부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죽은 여배우의 꺼먼 사진 옆에 스냅사진을 댔다.
저기 건물에 붙은 벽시계로 오 분만 여기 공원 벤치의 햇살 속에 앉아 있다가 딴 데로 가서 일을 해치워야지. 내 안의 여러 목소리를 불러냈다. 하는 일이 흥미롭지 않아. 에스더? 에스더, 넌 진짜 정신병자의 요건을 완벽히 갖췄어. 그래서는 아무것도 안 돼. 그래서는 아무것도 안 돼. 그래서는 아무 것도 안 돼.
어느 더운 여름밤, 예일 법대생과 한 시간 동안 키스한 적이 있었다. 털이 많고 원숭이 같이 생긴 남학생이었는데, 못생긴 게 불쌍해서 키스해주었다.
글쓰기 담당 교수는 내가 쓴 “대단한 주말”이라는 소설에 “인위적”이라고 휘갈겨 썼다.
스무 하루째 잠을 못 잤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움직이는 수백만 가지 형체와 그늘진 막다른 길들, 서랍장과 옷장, 옷가방 속에는 그늘이 있었다. 지구의 밤 쪽으로 끝없는 그늘이 뻗어 있었다. 그날 아침 일에 착수했다. 욕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욕조에 온수를 채우고, 면도날을 꺼냈다.
사람들이 어느 늙은 로마 철학자에게 어떻게 죽고 싶은지 묻자 그는 따뜻한 물속에서 동맥을 끊을 거라고 말했다. 팔목에서 흘러 투명한 물속으로 퍼지는 붉은 피를 욕조에 누워 보는 것은 쉬울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양귀비처럼 화려한 수면 밑, 잠 속으로 빠져들겠지.
연습 삼아 피를 조금 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조에 걸터앉아서 오른쪽 발목을 왼쪽 무릎위에 올렸다. 면도날을 든 오른손을 치켜들고 면도날을 오른쪽 정강이에 단두대처럼 뚝 떨어뜨렸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러다 미세한 전율이 밀려오면서 베인 자리에 선홍색이 차올랐다. ~~~욕조에 들어갈까 하다가 우물쭈물 아침 시간을 허비한 바람에 곧 엄마가 집에 올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면 성공하기 전에 엄마한테 들킬 테지. 베인 자리에 반창고를 붙이고, 면도날을 챙겨서 1130번 버스를 타고 보스턴으로 향했다.
미안하지만 디어 섬 교도소까지 가는 지하철은 없는데요, 아가씨 그 교도소는 섬에 있거든요. 아니에요, 섬에 있지 않아요. 예전에는 섬이었지만, 바다를 흙으로 메워서 육지랑 연결됐다고요.
어두컴컴한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은 열차를 타러 가느라 날 밀치고 지나갔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나왔다. 아버지요. 뚱뚱한 매표원은 매표소 벽에 붙은 도표를 살피더니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저기 1번 트랙의 열차를 타고 가다 오리엔트 하이츠에서 내려서 포인트행 버스를 갈아타요. 그 버스가 교도소 정문 앞까지 갈 거예요.
이봐요. 더 들어가면 안 돼요. 거기 교도소 구역이어서, 출입이 통제되거든요. ~~~유쾌한 얼굴을 한 청년이었다. 내가 말했다. 멋진 곳에 계시네요. 작은 집 같아요. 그는 초소를 흘끗 쳐다보았다. 방에는 깔개가 있고, 명주 커튼도 있었다. 청년이 빙그레 웃었다.
저 교도소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통행증이 있어야죠.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갇히느냐고요. 아. 경비병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대답했다. 차를 훔치거나 가계에서 강도짓을 해야죠. 안에 살인범이 있나요? 아뇨, 살인범들은 큰 주립 교도소에 가죠. 그 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십 년 만에 다시 와보니 평평한 모래밭에 울긋불긋한 오두막들이 맛이 안 나는 버섯처럼 퍼져 있었다.
[13]
칼과 나는 주황색과 초록 색 줄무늬가 있는 수건 위에 나란히 누웠다. ~~~우린 연극에 대해 토론했다. 더러운 여자와 관계한 아버지 때문에 청년이 뇌 질환을 앓게 되고, 뇌가 점점 물러져 완전히 덜렁덜렁해지자 어머니가 아들을 죽여야 할지 고민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그 연극을 기억하는 것은 미치광이가 나온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건 모두 흩어져버렸지만 미친 사람이 나오는 대목은 모두 머리에 남았다.
다시 반듯이 누워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살할 생각이라면 어떻게 죽고 싶어요? 칼은 즐거운 듯했다. 자주 그런 생각을 해요. 총으로 머리통을 날려버리죠, 뭐. ~~~그날 아침 나는 목을 매려고 시도했다.
몇 번이고 다이빙을 했지만, 매번 코르크 마개처럼 수면으로 떠올랐다. 잿빛 바위는 부표처럼 느긋하게 수면에서 오르내리며 나를 조롱했다. 실패했음을 알았다. 몸을 돌렸다.
초록색 자원봉사자 제복을 입으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또 흰 제복을 입은 의료진과는 달리 쓸모없는 사람이란 기분이 들었다. 갈색 제복을 걸치고 걸레와 시꺼먼 물이 담긴 양동이를 들고 말없이 내 앞을 지나는 청소부들보다도 못한 기분이었다.
엄마는 말했다. 자기에 대해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긴 병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게 치료법이라고. 그래서 테레사는 나를 동네 병원의 자원봉사자로 등록해주었다.
묘지는 어느 쪽이죠?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이탈리아인이 걸음을 멈추고 하양 감리교회 뒤편의 골목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이 감리교회를 기억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아홉 살까지 나도 감리교도였다. 그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우리는 유일신교로 개종했다.
최근 나는 가톨릭 신자가 될까 고민했다. 가톨릭에서는 자살을 엄청난 죄로 본다는 걸 알았다.
나는 보스턴의 신부에게 가는 상상을 했다. 우리 동네의 신부에게 자살할 생각을 털어놓기 싫으니 보스턴에 가야 했다. 신부들은 입이 싸니까.
아버지는 대학 시절 곤충학을 전공했다. 또 독일어와 그리스어, 라틴어를 알았으니 가르쳐주었겠지. 난 루터교도가 됐을 거고 아버지는 위스콘신에서 루터교도였지만 뉴잉글랜드의 스타일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타락한 루터교도가 되었다가, 엄마 말로는 냉소적인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했다.
잿빛 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자 마음이 몹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무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은행 계좌에 잔고가 없어지면 일을 감행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차에 그날 아침 마지막 남은 돈으로 검은 우비를 샀다. 그때 아버지의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매끄러운 대리석에 얼굴을 대고 짭짤한 친비 속에서 상실감에 울부짖었다.
금고를 열어 수면제 병을 꺼냈다. 수면제가 기대보다 많이 있었다. 적어도 쉰 알은 될 것 같았다. ~~~수면제를 한 알씩 입에 넣었고 중간중간 물을 삼켰다. ~~~약병이 손에서 미끄러졌고, 난 누웠다.
[14]
칠흑같이 어두웠다. 어둠만 느껴질 뿐이었다. 벌레의 머리처럼 내 머리가 위로 올라가면서 어둠을 느꼈다. 누군가 신음하고 있었다. 돌담처럼 묵직한 무게감이 내 뺨을 짓눌렀고, 신음은 멎었다. ~~~찬바람이 불었다. 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터널을 지나 땅속으로 내려갔다. 그때 바람이 멈추었다. 멀리서 여러 사람이 거부하고 불평하느라 소란이 일었다. 그러더니 목소리들이 잦아들었다.
끌이 내 눈을 쪼개자 입이나 상처처럼 빛줄기가 벌어졌다. 그러다가 어둠이 밀려와 다시 눈을 덮었다. 빛이 있는 쪽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댔지만, 주검을 싼 천처럼 사람들 손이 내 팔다리를 감싸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때 다시 끌이 내리쳤고, 빛이 머릿속으로 새어 들어왔다. 두껍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털 같은 어둠 속에서 비명이 들렸다. 엄마.
면회 오셨어요. 간호사는 환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사라졌다. 엄마가 웃으면서 들어와 침대 발치에 섰다.
[15]
나는 주저 없이 문을 열고 차량의 홍수 속을 지나 다리 난간으로 향할 작정이었다. 뛰어내리면 강물 속으로 들어가겠지. ~~나는 캐딜락 승용차의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니 여사는 보스턴으로 날아와서 나를 북적대는 시립 병원에서 데리고 나왔다. 지금 그녀는 날 컨트리클럽처럼 너른 단지에 골프 코스와 정원이 있는 개인 병원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그곳 아는 의사들이 날 회복시킬 때까지 장학금처럼 치료비를 대주기로 했다.
다시 독방을 차지하게 됐다. ~~~닥터 놀런입니다. 에스더를 담당할 겁니다.
그녀가 불쑥 말했다. 닥터 고든에 대해 이야기해 봐요. 그를 좋아했나요? 나는 닥터 놀런을 조심스럽게 응시했다. 의사들은 다 같은 줄 알았다. 이 병원 구석 어딘가에도 닥터 고든의 병원에 있던 그 기계가 있으리라. 내 살을 벗겨낼 준비를 하고 있겠지. 아뇨, 전혀 안 좋아했어요. 내가 대답했다. 흥미롭네요, 왜요? 그가 내게 한 짓이 싫었으니까요. 짓이라뇨? 닥터 놀린에게 그 기계 이야기를 했다. ~~~ 닥터 놀린이 말했다. 그건 잘못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제대로 작동하면 잠에 빠지는 기분이 드는데. 닥터 놀린이 말했다.
새 여자 환자가 옆방에 들어왔다. ~~~옆방에 가서 사귀어야겠다 싶었다.
[16]
옷장과 서랍장, 테이블, 의자, 파란 C자가 박힌 흰 담요가 잇는 조엔의 방은 나의 방과 똑같았다. 조앤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장난삼아 핑계를 대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사실상 안면만 있는 사이일 뿐 그리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어떻게 여기 들어왔어? 나는 그녀의 침대에서 몸을 웅크렸다. 네 이야기를 읽었어. 조앤이 대답했다. 뭐야? 네 이야기를 읽고 달아났어. 무슨 뜻이야?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
조엔은 꽃무늬 안락의자에 등을 기댔다. 여름에 어느 친목 단체의 지부장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 프리네이슨은 아니지만 비슷한 단체였어. 그런데 끔찍했어. 건막류가 생겨서 걸을 수가 없었지.
아, 그럼 난 목숨을 끊으려고 했어. 이 의사가 손을 쓰지 않으면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 ~~~양손을 포개고 날 보더니 말하더군. 미스 길링, 집단치료를 받으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17]
오늘 에스더는 행운아예요. ~~~오늘 벨사이즈로 옮길거든요. 간호사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날 보았다.
간호사가 몸을 굽히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몸을 빼면서 더 안쪽으로 몸을 웅크렸다. 간호사가 사라졌다. 곧 그녀가 남자 직원 두 명을 데리고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는 나를 끌고 휴게실에 모인 구경꾼들 앞을 지나겠지.
닥터 놀린은 흰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오랜 친구처럼 팔짱을 끼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마침내 검은 글씨로 전기 치료실이라고 적힌 초록색 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뒤로 물러섰고 닥터 놀린은 기다렸다. 내가 말했다. 우리, 이겨내요.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흰 작업복 차림의 키 큰 여자가 안쪽 문에서 나왔다. 나는 그녀가 갈색 가운을 입은 남자에게 다가갈 거라고 짐작했다. 그가 먼저 왔으니까. 그런데 내게 다가와서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닥터 놀런. 에스더인가요? 여자는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래요, 미스 휴이, 에스더, 이분은 미스 휴이예요. 에스더를 맡아줄 거예요. 내가 미리 잘 얘기해뒀어요.
미스 휴이는 내가 침대에 올라가 반듯하게 눕도록 거들어주었다. 얘기 좀 해주세요. 내가 말했다. ~~~내 관자놀이에 약을 바르고 작은 전기 단자를 머리 양쪽에 붙였다. 아무렇지도 않을거예요. 아무 느낌도 없으니까 그냥 물고만 있어요.
[18]
에스더. 푹 빠졌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처음 본 것은 앞에서 어른거리는 닥터 놀린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불렀다. 에스더, 에스더. 어색한 손짓으로 눈을 문질렀다. 닥터 놀린 뒤에 여자의 몸이 보였다. 검정과 흰색 체크무늬 가운을 입은 여자는 높은 데서 천을 드리운 것처럼 옷단을 펼치고 침대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더 파악하기도 전에 닥터 놀런은 나를 문밖으로 데려갔다. 신선한 공기와 파란 하늘 속으로. 열기와 두려움이 저절로 사라졌다. 놀랍게도 평온했다. 벨자가 내 머리 위 2미터쯤 되는 곳에 매달려 있었다. 내 몸은 순환하는 공기를 향해 열려 있었다. 내 말대로였지요, 안 그래요? 닥터 놀린이 말했다. 우리는 낙엽을 밟으며 벨사이즈로 돌아갔다. 네. 언제나 그럴 거예요. 일주일에 세 차례씩 충격요법을 받을 거예요.
다섯 번째 충격요법을 받은 후 나는 시내 외출을 허락받았다.
의사를 기다리다가 그냥 갈까 고민했다. 내가 하려는 일이 불법인 줄은 알았다. 어쨌거나 매사추세츠에서는 그랬다. 가톨릭 신자가 넘쳐나는 주였으니까.
뭐로 예약하셨죠? 흰 제복을 입은 안내 직원이 명단에서 내 이름에 체크를 하며 물었다. 뭐로라니 무슨 뜻이죠? ~~~직원은 나를 올려다봤고, 난 얼굴을 붉혔다. 피임 시술 하러 오신 거 아닌가요?
[19]
난 심리 상담사가 될 거야. 조앤은 평소처럼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아, 좋은 일이네. 내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닥터 퀸이랑 오랫동안 이야기했는데, 가능한 일이라고 했어. 막터 퀸은 조앤을 담당하는 정신과 전문의로 똑똑하고 빈틈없는 독신녀였다.
닥터 놀런은 추천서를 써줄 테니 기니 여사가 장학금을 주면 봄 학기에 복학할 수 잇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내가 엄마랑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나는 학기 개강때 까지 요양원에 머물고 있었다.
도서관 앞 계단에서 어윈을 만났다. 난 긴 계단 꼭대기에 서서 눈 덮인 안뜰이 있는 빨간 벽돌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전차를 탈 준비를 하는 데 키가 큰 청년이 와서 말을 걸었다. 좀 못생기고 안경을 썼지만 지성적인 얼굴이었다. 몇 시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어디 가는 길이예요? 요양원에 돌아가는 길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했지만, 남자가 희망에 찬 표정을 지어서 마음을 바꾸었다. 집에요. 커피나 마실래요?
이 남자에게 새로 갖게 된 정상적인 성격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그는 내가 망설이자 이름이 어윈이며 돈을 잘 버는 수학 교수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나는 좋다 라고 대답했고 얼음이 살짝 언 긴 계단을 어윈과 나란히 내려갔다. ~~~어윈은 케임브리지 외곽의 썰렁한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다. 지하였지만 편안했다. ~~~우리는 서재의 갈색 가죽 의자에 앉았다.
초인종이 울렸다. 어윈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숙녀분일 것 같은데요. 어윈은 구식으로 여자를 숙녀라고 불렀다. 괜찮아요. 나는 크게 몸짓을 하며 대답했다. 그 여자분을 들어오게 해요. 어윈은 머리를 저었다. 당신을 보면 당황할 거예요. ~~~나는 얼른 욕실로 들어가 꾀죄죄한 은색 베네치안 블라인드 뒤에 숨었다. ~~~어윈이 내 손을 잡았다.
날이 저물 즈음, 어윈에 대한 의심은 사라졌다. 버디 윌러드가 동정이 아님을 안 뒤로 내 처녀성이 목에 단 맺돌 처럼 무거웠다. 아주 오랫동안 순결을 중요시하다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오 년 동안 그렇게 살다 보니 이제 지긋지긋했다.
조앤이 어디서 밤을 보내고 싶어 할지 아는 거 있어요? 돌아올 거예요. 뭐에 붙들려서 못 오고 있겠죠. 하지만 조앤이 심심한 보스턴의 밤 속에서 뭐에 붙들려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닥터 퀸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전차가 한 시간 전에 끊겼어요.
서리가 내린 뿌연 새벽녘,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이번에는 내가 문을 열었다. 앞에 닥터 퀸이 서 있었다. 그녀는 훈련받은 병사처럼 차렷 자세였지만 묘하게 후줄근해 보였다. 에스더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조앤이 발견됐어요. 닥터 퀸이 말했다. ~~어디서요? 숲에서요, 얼어붙은 연못가에서...~~~설마 조앤이... 죽었어요, 목을 맨 것 같아요. 닥터 퀸이 말했다.
[20]
새로 내린 눈이 요양원 마당을 덮었다. ~~~일주일 후 의사위원회 면접을 통과하면 필로메나 기니 여사의 검은 승용차가 나를 태우고 서쪽으로 달려 대학의 철문 앞에 내려줄 터였다. 이런 한겨울에!
닥터 놀런은 날 무척 조심스럽게 대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한센병 환자라도 되는 듯 피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내 스무 살 생일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요양원에 면회 왔을 때의 엄마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꾸짖는 창백한 달 같은 얼굴, 딸이 정신 요양원에 있다니! 엄마가 그런 꼴을 당하게 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래도 엄마는 날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엄마는 순교자같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떠나온 곳에서 시작하는 거야. 이 모든 게 나쁜 꿈이었던 것처럼 행동하자꾸나. 나쁜 꿈. 벨 자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은 아기처럼 텅 비고 멈춰버린 사람에게 세상은 그 자체가 나쁜 꿈인 것을. 나쁜 꿈. 난 모든 걸 기억했다. 해부용 시신, 도린, 무화과 이야기, 마르코의 다이아몬드, 광장에서 만난 해병, 닥터 고든 병원의 사시 간호사, 깨진 체온계, 두 종류의 콩 요리를 가져다준 흑인, 인슐린 투약으로 9킬로그램이 늘어버린 체중, 하늘과 바다 사이에 회색 두개골처럼 튀어나온 바위. 어쩌면 망각은 친절한 눈처럼 그것들을 무감각하게 하고 덮어버리리라. 하지만 그것들은 나의 일부였다. 그것들은 나의 풍경이었다. 어떤 남자분이 찾아왔는데요!
카키색 모자를 손에 든 버디 윌러드가 방으로 들어섰다.
에스더가 아는 나머지 의사들과 손님 몇 분, 원장인 닥터 바이닝이 몇 가지 질문을 할 거예요. 그 과정을 거치면 에스더는 퇴원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닥터 놀런의 위로에도 나는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예전부터 퇴원할 때는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알고 확신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하지만 결혼은 안 할 작정이었다. 두 번 태어나는 -치료됐고, 길을 나서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진-데 대한 의식은 있어야겠지. ~~~좋아요, 에스더. 일어나서 그녀를 따라 회의실로 갔다. 문지방을 넘으면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쉬었다. 입원하던 날 강과 청교도 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은발의 의사가 보였다. 얽은 시체 같은 얼굴의 미스 휴이도 보였고, 흰 마스크위로 본 눈이 낯익은 사람들도 잇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눈이 내게 쏠렸고, 그 눈길은 마법의 실처럼 나를 방으로 이끌었다. ■
[Review]
여인은 완성되었다.
그녀의 죽은
육체는 성취의 미소를 띤다.
그리스적 필연성의 환상이
그녀가 걸친 토가의 소용돌이무늬 안으로 흐른다.
그녀의 맨발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지만, 이젠 다 끝났다. <중략>-1963년 2월 5일
1963년 2월 11일,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런던에 있는 자기 아파트에서 가스를 들이마시고 서른두 해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당시 그녀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이혼을 준비하며 별거 중이었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위에 시는 그녀가 죽기 일주일 전에 남긴 부분이다.
책은 특별한 동기가 있을 때, 재미가 없어도 끝까지 읽게 된다. 예를 들어서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나 또 다른 인상 깊은 책을 읽다가 소개된 책 내용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우연히 접하게 된 작가의 시 전집을 보고 강한 시어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남편과의 갈등 속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심한 우울증으로 수면제 과다복용과 차를 몰고 강으로 빠지는 자살 충동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시를 쓰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일에 집중한 시인이었다. 때로는 날카롭고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미묘한 시행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온다.
이 책 [벨 자]는 그녀가 쓴 유일한 소설로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영국에서 출판되었으며, 그녀는 이 책의 출판 후 한 달 만에 자살했다(1963.2.11). 이 책의 주인공인 ‘에스더’는 작가 본인을 나타내는 자전적 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남편 Ted Hughes와 그녀의 어머니 뜻에 따라 미국에서는 출판되지 않았고 후에 1971년이 이르러 12개 언어로 번역되어 관심을 받게 되었다.
주인공 에스더는 이제 열아홉 살, 보스턴 대학에서 A 학점인 모범생이다. 그녀는 패션 잡지사 콘테스트에 뽑힌 열 두 명의 학생 중 한 사람으로 뉴욕에서 한 달간 일자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행운을 얻었다. 풍족한 경비를 제공받고 다양한 시설에서 즐길 수 있는 무료 보너스 티켓도 받았고 유명 인사들도 만나는 기회도 주어졌다. 그야말로 미국 전역 수많은 여대생이 선망하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평생 처음으로 유엔 건물의 방음이 되는 심장부에서 테니스를 치고, 유명한 문인들을 만나면서 앞날에 펼쳐질 무한한 길을 꿈꾸었다. 고급스러운 연회에 초대받아 처음으로 보는 고급 음식을 맛보고, 여대생들의 선망이 되는 예일대 학생들과의 무도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희망에 차 있었고 또 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공부를 일 년 미루고 도자기를 배워볼지 하는 생각이 났다. 아니면 독일에 가서 웨이트리스를 하면서 독일어를 완벽하게 익힐까.” (본문)
그러나 이 모든 것 뒤에는 그녀의 마음을 혼란케 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도 함께 따라왔다. 젊은이들의 타락한 이성 교제의 소용돌이에서 한없는 비애를 느끼며 그녀는 정신적으로 황폐함을 경험하고 급기야는 심한 우울증에 빠지며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 이후 그녀가 악몽에서 벗어나는 십 년간, 그녀는 두 차례의 자살 시도와 두 차례의 정신 요양원 생활 그리고 그곳에서의 전기 치료를 받는 혼돈의 시간을 겪으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주변의 헌신적인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병원을 나오는 날 어머니는 그녀를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떠나온 곳에서 시작하는 거야. 이 모든 게 나쁜 꿈이었던 것처럼 행동하자꾸나. (본문)”
그러나 엄마가 하는 이 위로의 말에 그녀의 독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쁜 꿈. 벨 자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은 아기처럼 텅 비고 멈춰버린 사람에게 세상은 그 자체가 나쁜 꿈인 것을. 나쁜 꿈. 난 모든 걸 기억했다.(본문)”
소설의 주인공 에스더는 저자인 실비아 자신이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지낸 것이나. 실비아가 성년기에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여 십여 년 동안 전기 충격 요법 치료를 받은 것도 같다. 그러나 마지막 결말은 달랐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일상으로 되돌아왔지만, 실비아 자신은 이 소설이 출판된 지 한 달 후에 죽음으로 그 생을 마감했다. 어쩌면 실비아는 그 고통의 순간에 자신이 겪은 모든 심경의 변화를 이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 전가하고 주인공처럼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독자로 하여금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다.
소설의 제목이 벨 자(유리 종 The Bell Jar)라는 데서 깨지기 쉬운 여자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녀는 삶 속에서 무거운 짐(남편의 외도와 두 아이의 엄마로 견뎌야 하는 우울증)을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견디고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들을 그 약한 유리종 안에 가두려 했을까!
마지막 순간에 그가 남긴 시어에서 “여인은 완성되었다. 그녀의 죽은 육체는 성취의 미소를 띤다.”는 구절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시집<실비아 플러스 전집>은 그녀의 사후에 남편에 의해 출판되었고, 독자는 그 책에 퓰리처상을 안겨주었다. 사후에 이런 상을 준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로 유일무이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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