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 13,1-2.44-46; 1코린 10,31─11,1; 마르 1,40-45
+ 찬미 예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옆에 계신 분들, 앞뒤에 계신 분들과 새해 인사 나누실까요?
설 명절 잘 쇠셨어요? 새해 주님 은총 안에서 건강하시고 복된 날들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성모님께서 1858년 2월부터 프랑스 루르드에서 여러 차례 발현하셨는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1992년부터 발현 첫날인 오늘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정하셨습니다. 또한 오늘은 대전교구의 주보이신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세계 병자의 날’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병자’란 누구일까요? 병을 앓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면 ‘병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일까요? 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요?
우리 모두는 병자입니다. 다만, 내가 어떤 병에 걸려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병자와 병자가 아닌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병자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쓰셨는데요, 그 책에서 탈무드의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여호수아 벤 레비라는 랍비가 엘리야 예언자를 찾아가 묻습니다. “메시아는 어디 계십니까?” 예언자가 대답합니다. “성문에 앉아 계십니다.” 랍비는 다시 묻습니다. “제가 그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상처투성이인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처에 감은 붕대를 전부 풀었다가 또다시 감고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아마 내가 필요하게 되겠지, 그때에는 지체하지 않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지.’ 하시면서 자신의 상처에 감은 붕대를 하나씩만 풀었다가 다시 감고 계십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메시아는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역시 상처를 갖고 계시지만, 자기 상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처 역시 돌보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오늘날의 사목자가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자신의 상처를 돌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편사제직으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가 어쩌면 ‘상처받은 치유자’가 아닐까요? 우리 모두 자신의 상처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 우리 주위 사람들의 상처를 아울러 돌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지만, 복음은 예수님의 치유에 초점을 두지, 그 병에 대해서는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병은 예외입니다. 나병은 육체적으로도 고통 받았지만,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었기에, 공동체에서 소외되어야만 했습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오늘날 한센병을 포함하여 다양한 피부 질환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병에 걸린 사람은 제1독서의 말씀처럼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치며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낫지 않으면 이 상태에서 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당신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청하는 나병환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그는 병이 낫고 깨끗하게 됩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립니다. 다른 사람과 접촉이 금지되었던 그가, 이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렇게, 단절되었던 그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교황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라는 제목으로 제32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문을 발표하셨는데요, 부제목은 ‘관계의 치유를 통한 아픈 이들의 치유’입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모든 질병에 필요한 첫 번째 돌봄은, 연민과 사랑으로 곁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즉 하느님과의 관계와 다른 이들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 그 자신과의 관계를 돌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황님께서 우리 본당 사목지표를 잘 알고 계신 느낌이 드네요? 교황님께서는 코로나 19 감염증의 세계적 확산 시기에 몹시 외로웠던 모든 이를 생각한다고 하시며, 이 ‘외로움’ 자체가 큰 고통이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첫 번째 돌봄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으로 곁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을 봅시다.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 고통받는 형제의 상처를 돌보는 그의 온유함을 바라봅시다. 삶의 중심이 되는 이 진리를 기억합시다. 우리는 누군가 환영해 주기에 이 세상에 왔고, 우리는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친교와 형제애로 부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신다’는 말은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요, 이 말은, ‘연민으로 가득 차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유대인들은 감정이 내장 기관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 마음은 창자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애끊는 마음이 들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항상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만 쓰였는데, 단 한 차례의 예외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는 강도 당한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다가갑니다. 뒤이어 나오는 동사는 모두 7개입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고, 자기 노새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말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또 들르겠다고.
이 모든 행동의 원천이 된 것은 ‘가엾은 마음이 든 것’이고, 그의 최초 행동은 ‘아픈 이에게 다가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가질 때, 하느님의 마음을 닮는다고 성경을 말합니다. 그 마음을 가질 때, 최초의 행동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교황님을 말합니다.
코로나 19 감염증으로 인해 우리는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을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어느 틈엔가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연민과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거리를 두는 습관이 우리에게 생긴 것은 아닌지 성찰하여 봅니다. 그것이 전염병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아플 때, 주위 사람들이 아플 때, 우리는 낫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성경을 보면 아픈 사람들이 즉시 낫는데, 우리의 아픔과 병은 왜 이리 오래 지속되는 것인지, 원망의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이어서 해 달라고 부탁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값싼 동정이 아니라, 깊은 연민과 공감의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기를, 나에게도 상처가 있지만, 그의 상처도 돌보아 주기를, 내가 누군가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줄 때에, 이미 내 주위에도 나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준 누군가가 있었음을 발견하기를 바라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당한 이에게 그토록 헌신적이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도 그런 처지에 있어 보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비슷한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하여 봅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주라고,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주라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오늘 미사 후에 어떤 교우분께서, 1년간 카페에 제가 올린 강론을 편집하고 제본해서 주셨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네요.
정성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카페에 올리는 게 부담스러워질 즈음, 그러지 말라고 격려해 주시네요.
* 세계 병자의 날 담화문입니다.
[담화] 2024년 제32차 세계 병자의 날 교황 담화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cbck.or.kr)
첫댓글 강론집 넘 잘하셨습니다.👍 카페에 올리시는 강론은 저는 유익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사시간에 놓친 말씀을 다시 점검하기도 하고 좋은 말씀은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신부님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계속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