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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영한대역 만화 삼국지 제5권 P34 – P41
- 국내 및 세계 최초 -
관도대전(官渡大戰) The Battle of Gwando
- 국내 및 세계 최초
- 출처 : 영한대역 칼라 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제5권 P34 – P41 / 아래 스캔 자료 참조
- 저자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 출판사 : (주)파우스트 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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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한대역 만화 삼국지 제5권 P34 – P41
관도대전(官渡大戰) The Battle of Gwando
- 국내 및 세계 최초
- 출처 : 영한대역 칼라 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제5권 P34 – P41 / 아래 스캔 자료 참조
- 저자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 출판사 : (주)파우스트 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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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대전(官渡大戰) The Battle of Gwando
(1) 관도대전(官渡大戰)은 중국 후한 말 시기에 관도(官渡 : 현재의 허난성 정저우시 중무현 근처)에서 조조(曹操)와 원소(袁紹)가 벌인 큰 전투이다. 적벽 대전 · 이릉 대전과 함께 삼국시대의 흐름을 결정지었던 중요한 전투이다.
좁은 의미로는 관도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볼 수 있으나, 넓은 의미로는 원소와 조조의 일련의 항쟁을 합친 큰 전투였다. 백마 전투를 전초전으로 시작하여 원소의 곁에 있던 유비는 여남(汝南)에서 교란작전을 일으키는 등 중원 일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The Battle of Guandu was fought between the warlords Cao Cao and Yuan Shao in 200 AD in the late Eastern Han dynasty. Cao Cao's decisive victory against Yuan Shao's numerically superior forces marked the turning point in their war. The victory was also the point at which Cao Cao became the dominant power in northern China, leading to the establishment of the state of Cao Wei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2) 배경
당시 후한 황제는 명목상의 존재였고, 중원 각지는 군웅이 할거하는 전란의 시대였다. 서서히 군웅 중에서도 승자만이 살아남게 되었으니, 그중 가장 강력한 자들이 조조와 원소였다. 이 두사람은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이기도 했다.
조조는 환관 가문 출신이지만, 부친 조숭(曹嵩)이 삼공(三公)중 하나인 태위(太尉)까지 올랐었고, 조조 자신도 군웅할거 중기에 두각을 나타내 헌제(献帝)를 손안에 넣어 도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여포(呂布), 원술(袁術), 장수 등을 차례로 쓰러뜨리며 하남(河南)에서 강소성(江蘇省) 장강(長江) 이북에 걸친 지역을 지배했다.
Background
The inevitability of military conflict between Cao Cao and Yuan Shao had become apparent by 196. Yuan Shao held control of the lands north of the Yellow River, namely the Hebei region, while Cao Cao controlled most of the lands south of the Yellow River after he defeated Lü Bu at the Battle of Xiapi in 199 and kept Emperor Xian with him in the new capital city of Xu. The warlords saw each other as the obvious impediment to their individual ambitions to conquer and rule China.
Some years before the battle, Yuan Shao's advisors Ju Shou and Tian Feng warned that Cao Cao would become a threat to their lord in his ambition to dominate China. They advised Yuan Shao to attack Cao Cao when the latter was still building up his forces, but Yuan Shao ignored their advice as Cao Cao was still nominally an ally. Tension between Cao Cao and Yuan Shao increased after Cao Cao moved Emperor Xian from the old capital Luoyang.
한편 원소는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 불리는 명문 출생으로 비록 노비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였지만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 청류파의 사상 정치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이를 바탕으로 빠르게 군벌화하여 한복(韓馥), 공손찬(公孫瓚), 장연(張燕), 공융(孔融) 등의 군벌들을 격파, 병합해 청(靑), 기(冀), 유(幽), 병(幷)의 4주(州 : 현재의 하북, 산서, 산동)를 지배했으며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서 최고의 위세를 떨쳤다.
처음에 조조는 원소의 지원으로 인해 세력을 성장시킬 수 있었고, 이후로도 줄곧 조조는 원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조조의 독단적인 헌제 옹립을 계기로 완전히 원소와 결별했고 대립이 깊어져갔으며, 원소는 공손찬을 격파한 뒤 정병 10만을 선발하여 조조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이때 참모 전풍(田豊)과 원소군의 2인자 격에 위치에 있던 저수(沮授) 등은 아군이 공손찬과 싸우느라 국력이 피폐해져 있고, 천자를 끼고 있는 군대를 치는 것은 의로움에 위배된다고 하여 원소의 출정을 만류했으나 당시 원소에게 크게 중용되고 있던 곽도(郭圖) 등은 객관적으로 조조의 국력을 하북의 강역을 차지하고 있는 아군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며, 황실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칼날이 역신 조조만을 향하는 것이므로 지지를 받을지언정 의로움에 위배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반박했고 오히려 저수의 위세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탄핵했다. 원소는 이를 받아들여서 강대했던 저수의 권한을 삼분하고 저수와 곽도, 순우경(淳于瓊)이 각각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199년 유비가 서주(徐州)에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원소와 손을 잡았다. 이에 조조는 직접 출진해 유비를 격파했고 패배한 유비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으며, 관우는 조조의 포로가 되어 조조의 객장으로 지내게 되었다. 삼국지 원소전에 의하면 이때 원소의 참모 전풍은 조조가 유비에게 신경이 쏠린 틈을 타 배후를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은 원소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며 현실적으로 아들의 병환 때문에 큰 일을 무시한다는 것은 이전 원소의 행보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이므로 원소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지 무제기와 곽가전에 의하면 원소가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의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다만 우금전에 의하면 원소는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는 틈을 타 연주를 공격했다. 당시 우금은 조조를 대신해 주요 거점이던 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 사이에 원소군이 남하해 연진을 공격하자 굳게 수비해 이를 막아냈으며 악진 등과 함께 황하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며 오히려 반격을 가해 급(汲) · 획가(獲嘉) 2개 현에 주둔하던 원소군의 수비초소 30여 개를 불태우며 하무(何茂) · 왕마(王摩) 등을 항복시켰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에서는 한결같이 원소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우금전에서도 이에 대한 원소의 적극적인 응전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봤을때 당시 원소의 움직임은 견제 수준에서 그쳤던 것 같다.
(3) 백마 전투
원소는 격문을 돌려 조조의 부정을 성토했으며 10만의 대군을 편성해 조조와의 결전을 감행한다. 이때 전풍은 “조조는 유비를 격파해 허(許, 조조의 본거지로서 헌제의 거주지)는 비워있지 않습니다. 지구전으로 끌고가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본거지를 지키면서 조조의 후방을 교란한다면 3년 안에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원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풍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피력하며 억지로 원소를 막으려고 하다가 대노한 원소에게 투옥되었다.
다음해 2월. 원소는 곽도와 순우경, 안량(顔良)을 파견해 백마(白馬 : 현재 황하 남쪽 강변)에 포진한 조조군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 원소군의 참모 저수(沮授)는 안량을 기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간언했으나, 원소는 이를 듣지 않았다.
조조 측은 순유(荀攸)의 진언에 따라 연진(延津)에 주둔하며 미끼 및 견제로서 원소군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후,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안량을 공격해 격파했으며, 관우는 적 진영에 파고들어가 단칼에 안량을 베고 수급을 얻었다. 이에 곽도와 순우경 등은 백마의 포위를 풀었고 이 사이에 조조는 백마의 군대와 백성들을 모아 철수한다.
하지만 원소는 결과적으로 백마, 연진에 이르는 주요 도하 거점을 확보했고, 조조는 더욱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원소는 문추(文醜)를 보내 이를 추격하게 했으나, 조조는 다시 순유의 진언에 따라 수송대를 미끼로 사용해 문추군의 대열을 어지럽히게 한 뒤에 서황 등이 습격해 문추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죽인 것으로 나온다.
(4) 관도 대전(官渡大戰) Battle of Guandu
이 시점에서 양군은 일시적으로 태세를 정비한다. 조조군은 관도로 물러났고, 원소 진영에서는 저수가 “북쪽(원소 진영)은 숫자가 많으나, 용맹함에는 남쪽(조조 진영)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군량에 대해선 남쪽은 적고, 북쪽은 풍족합니다. 남쪽은 속전속결을 바라니 북쪽은 지구전이 유리합니다.”라고 말하며 또다시 지구전을 간언했으나 원소는 이를 듣지 않았다. 원소는 직접 군을 움직여 양무(陽武)까지 진군했다.(여기서 곽도,순우경 등과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저수는 본대를 움직여 조조를 치지 말고 연진에 본영을 두면서 별군을 보내 관도를 칠 것을 진언했다고 하나 원소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원소는 조조군을 공격해 동서 수십리에 걸쳐 진을 구축하고 서서히 전진하는 전술로 조조의 진영을 압박했다. 조조도 똑같이 수십리에 걸쳐 진영을 구축하며 전진해 이에 대응했다. 마침내 양군이 회전을 벌였는데, 조조군이 패주하여 요새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원소는 더욱 진군하여 관도까지 조조군을 몰아붙였고, 토산을 쌓거나 지하도를 파서 성벽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조조도 내부에 똑같은 것을 만들어 대응했다. 원소는 망루를 만들어 토산에서 조조 진영 안으로 화살을 쏘았다. 조조군은 이 공격에 크게 고전하였으나, 우금이 토산의 지휘를 맡아 분전하여 조조군의 전의를 불태웠다. 또한 조조는 발석차를 만들어 망루에 대응했다.
전황은 지구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조조군은 크게 고전하고 있었고, 조조 진영의 식량 역시 나날이 줄어들어갔다. 걱정이 된 조조는 본거지를 지키던 순욱(荀彧)에게 편지를 보내 철수에 대한 상담을 했으나, 순욱은 철수에 대한 상담 대신 예상 밖의 일을 예측하고 기회를 노리면 기필코 승리할 수 있다고 조조를 격려했다.
한편 남쪽 여남에서 조조의 형세가 나빠진 것을 본 유벽(劉辟)이 원소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고, 원소는 그를 지원하기 위해 유비를 파견했다. 조조는 조인(曹仁)을 파견해 이들을 격파했다. 패배한 유비는 유표곁으로 도망쳤다. 또한 조조는 순유의 진언에 따라 서황(徐晃)과 사환(史渙)에게 명령해 원소군의 수송대를 공격해 수천대의 곡물수송차를 불태웠다.
하지만 원소는 관도에 조조를 묶어둔 채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호응하는 반란을 유도했고, 예주 전 지역이 원소군으로 돌아서는 등 조조군의 전황은 점차 절망적으로 악화되었다. 이 무렵 원소 진영의 허유(許攸)는 비리가 탄로나 가족들이 투옥당한 일이 있었다. 허유는 좁아진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원소에게 군사를 나눠 허도를 습격하자는 적극적인 헌책을 했으나 원소는 관도에서 조조를 포위해 사로잡는 것으로 완전히 결착이 날 것으로 여겼으므로 이를 거절하였다. 자신의 계책이 거절당한 데에 분노한 허유는 더이상 원소 밑에서 출세하기가 어렵다고 보아 조조 진영에 투항해 왔다. 허유는 순우경(淳于瓊)이 원소군의 병량을 운송하는 것과 순우경이 오소(烏巣)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이곳을 기습할 것을 진언했다. 조조의 측근의 대부분은 이 허유의 발언을 의심했으나, 순유와 가후(賈詡)만이 이 의견을 지지했다. 이에 조조는 즉시 행동을 개시해 직접 원소군으로 위장한 보병과 경기병으로 구성된 5천의 특공대를 이끌고 기습, 오소의 군량과 말먹이, 군수물자들을 소각한 뒤 순우경의 군량 경비군을 섬멸하고 순우경을 참수했다.[1]
한편, 오소에 있는 순우경이 습격당한 것을 알게 된 원소는 순우경이 지키는 오소가 쉽게 함락 당할 리 없다고 여겼으므로, 오히려 조조의 주력이 빠져나가 수비가 약해진 본진을 더욱 몰아붙여야 한다고 판단, 장합(張郃)과 고람(高覧)에게 주력군을 내어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게 했으며 순우경에게는 경기병을 보내 지원했다. 하지만 결국 오소의 군대는 간발의 차이로 원군의 도착 이전에 전멸당했고, 순우경군이 전멸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 진영은 책임 소재를 두고 내분이 벌어졌다. 이에 장합이 배신하여 원소를 공격했으며 진영을 불태우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장합의 공격을 받은 원소는 단지 800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갑옷도 입지 못한 채로 급히 도망쳤는데, 예상치 못한 아군의 습격에 더해 총사령관의 행방과 생사마저 알 수 없었던 나머지 군사들은 대혼란에 빠져 사실상 완전히 무너졌다.
원소의 패배를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은 부패한 관료 허유의 배신이었지만,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군의 수장 원소와 근위세력인 곽도 등의 지나친 독선과 오만함이었으며 이로 인해 간부들의 배신이 속출한 것이다.
(5) 관도대전(官渡大戰) 후
원소의 패배를 본 기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원소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패군을 수습해 귀환했으며, 반란을 일으킨 군현을 공격해 모두 평정했다(201년 4월). 또한 원소는 전풍을 처형했는데, 이는 원소가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원소와 합류하지 못한 군사들은 조조의 공격을 받아 죽거나 사로잡혔는데, 조조는 사로잡은 병사들도 모두 생매장해 죽였다. 이때 죽은 원소의 군사들은 7만 혹은 8만이라고도 하는데, 조조군의 병력이 1만이었다고 기록된 것과 더불어 조조의 승리를 미화하기 위해 과장된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한편, 조조 역시 원소의 침입으로 영내에 큰 피해를 입어 내부 정리로 시간을 써야 했으므로 관도전 이후 원소와 조조는 황하를 두고 군대를 주둔시켜 약 1년간을 대치했다.
202년 5월, 관도의 패전 이후 건강이 악화된 원소는 병이 들어 피를 토하며 죽었다. 원소의 아들 원상(袁尙) 뒤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렸으므로 원소의 조카(원담은 원소의 장남이나 원소가 그를 자신의 죽은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호적상으로는 원소의 조카이다.) 원담(袁譚)은 원상에게 공공연히 불복하며 자신이 원소의 후계를 이어받을 것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원소의 세력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조조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기주를 공격했으나 원상에게 여양에서 격파당하여 철수한다(203년 4월).
하지만 원담이 원상을 공격함으로써 내전이 발발했고, 이 틈을 타 조조는 원담과 연합하고 다시 원상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이로써 원소가 세운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조조는 뒤이어 원담과 싸워 그를 죽이고 기주를 평정했다.(205년 1월) 이로써 조조는 당대의 최대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6) 의문점
관도의 병력에 대해선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寿)가 쓴 본문부분에는 원소군 10여만, 조조군 1만에 불과하다고 적었으나, 이것에 대해 배송지(裴松之)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로는
조조가 세력을 일으켰을 때 5천의 병사를 갖고 있었고, 그 후 황건적의 잔당 30만을 항복시키고, 기타 수많은 세력을 병합하였다. 그런데도 겨우 1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적다고 생각된다.
원소는 수십 리에 걸쳐 둔영을 연결하며 군대를 진군시켰는데, 조조가 원소군의 1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전력으로 이에 똑같이 대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원소군이 조조군의 10배였다면 이치상 포위하고 출입을 단절해야 하나, 조조가 별군을 나눠 원소군을 공격할때도 이것이 저지된 일이 없었던 것은 원소의 군사수가 조조를 완전히 압도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원소군이 붕괴한 후 원소군의 병사 8만을 붙잡았다고 하는데, 고작 1만에 불과한 병사로 8만 명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진수가 왜 책에 그렇게 기술했냐는 것에 대해선 조조의 군략을 돋보이기 위해 과장해서 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지] 위서 국연(國淵)전에서는 도적의 무리를 격파한 상황에서 이것을 보고할 때 상주문에는 1을 10으로 과장해서 기재하는 것이 그 시대 통례라고 일지에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연의에서는 조조군 7만, 원소군 70만이라고 기술한것도 있다. 덧붙여서 이 전투 후에도 세력적으로는 여전히 원소가 우세했다. 원씨 가문의 멸망을 결정짓게 만든것은 그 후 일어난 원소의 급사와 어린 후계자 원상의 집권으로 인한 내부분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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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나관중 / 20권 / 할인가 10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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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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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자명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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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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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1) 미국의 작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장편 소설 개요
저자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장르 : 장편 소설, 역사 소설
발표 년도 : 1826년 / 미국
모히칸족의 최후(The Last of the Mohicans: A Narrative of 1757, 1826년)는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역사 소설이다. 대표작으로 《가죽스타킹 이야기》(Leatherstocking Tales)로 총칭되는 5편의 변경 로맨스 가운데 두 번째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14년 후인 1840년에 나오게 되는 《더 패스파인더》(The Pathfinder)가 후속작이다.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1757년 프랑스와 영국이 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다. 이 전쟁 동안 프랑스는 북동부 변방 지대에서 숫자가 훨씬 우월한 영국 주민과 싸우기 위해 미국 인디언 연합군에게 많은 의존을 했다.
쿠퍼는 17세기 코네티컷 지역에서 영국인과 동맹 맺었던 유명한 모헤간 족 사켐(수장)의 이름을 따서 ‘웅카스’(Uncas)로 이름지었다. 이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작가는 ‘모헤간’(Mohegan)과 역사적으로 허드슨 강을 따라 뉴욕에 기반을 둔 ‘모히칸 족’(Mohican)을 혼동한 듯하다. 모히칸족은 그가 작품의 배경으로 하는 중앙 모호크 계곡 영역에 더 가까웠다.
비평가들이 설정상의 오류를 지적하긴 했으나, 이 소설은 당시 영어 소설 가운데 가장 인기 소설 가운데 하나였다. 그 길이와 정형적인 산문체 형식은 후대 독자가 보기에 지루하겠지만, 《모히칸 족의 최후》는 미국 문학 과정에서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다.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었, TV의 영화나 만화 소재로 다루었다.
영국군 장교의 두 딸을 영국군 기지에 호송하는 한 무리가 프랑스군 지원하는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악전고투한다. 영국군 지원하는 변경 개척민 내티 범포와 그의 친구인 모히칸족의 추장과 그의 아들이 크게 활약한다. 쫓고 쫓기는 스릴이 넘치는 작품으로 서부극의 원조라 할 수 있다.
(2) 배경
배경은 1757년 프렌치-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이 발발한 시기로, 프랑스와 영국이 북미 인디언 식민지를 두고 전쟁을 치르던 때이다. 프랑스군은 인디언 부족들과 동맹을 맺어서 초반에는 우세하였으나, 영국군의 반격으로 결국 영국이 북미 신민지를 장악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을 실감나게 묘사, 비판한 역사 소설이다.
(3) 모히칸족의 최후(The Last of the Mohicans) 줄거리
먼로 중령의 딸인 코라와 앨리스 먼로는 포트 에드워드의 주요 던컨 헤이워드와 함께 먼로가 지휘하는 포트 윌리엄 헨리까지 여행한다. 그들은 영국 민병대가 동반하지 않은 지름길을 통해 그들을 이끌고 있는 마구아라는 이름의 원주민에게 숲을 안내받는다.
영국군 먼로 대령(Colonel Munro)의 딸들-앨리스(Alice), 코라(Cora)-은 던칸 헤이워드 소령(Major Duncan Heyward)과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전쟁터를 가로질러 길을 떠난다. 그들은 길잡이 인디언 마쿠아(Maqua)의 안내를 받는데, 마구아는 영국군에 앙심을 품고 있는 프랑스의 첩자였다. 마쿠아가 그들을 프랑스 진영으로 유인하는 도중, 내티 범포(Natty Bumpo)와 모히칸족(the Mohican)의 추장 칭가치국(Chingachgook), 그리고 그의 아들 웅카스(Uncas)가 소령 일행을 구해낸다.
그러나 마쿠아 측 인디언들 휴런족(the Huron)은 그들을 추적하여 소령 일행을 인질로 잡는다. 내티 범포와 모히칸족의 도움으로 소령 일행은 겨우 윌리엄 헨리 요새(Fort William Henry)에 도착하지만, 곧 영국군이 프랑스군에게 항복하여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휴런족은 영국군이 돌아가는 도중 프랑스군의 묵인하에 영국군을 학살하고, 다시 일행을 납치한다. 내티일행과 마구아 일행의 격투 끝에 웅카스와 마구아가 죽고, 코라도 휴런족의 손에 죽게 된다. 내티와 칭가치국은 모히칸족의 마지막 후예 웅카스를 잃고 슬퍼한다.
작가는 미국 원주민 인디언들과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영국, 프랑스 간의 갈등을 현실적, 복합적으로 그려냈다. 또한, 백인 문명의 확장이 원주민들의 문명을 파괴하는 세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마이클 만 감독에 의해 ≪라스트 모히칸 The Last Of the Mohicans≫으로 영화화되었고, 이전에도 많은 TV시리즈와 영화로 제작되었다.
(3) The Last of the Mohicans: A Narrative of 1757 is a historical romance written by James Fenimore Cooper in 1826.
It is the second book of the Leatherstocking Tales pentalogy and the best known to contemporary audiences. The Pathfinder, published 14 years later in 1840, is its sequel. The Last of the Mohicans is set in 1757, during the French and Indian War (the North American theater of the Seven Years' War), when France and Great Britain battled for control of North America. During this war, both the French and the British used Native American allies, but the French were particularly dependent, as they were outnumbered in the Northeast frontier areas by the British. Specifically, the events of the novel are set immediately before, during, and after the Siege of Fort William Henry.
The novel is set primarily in the area of Lake George, New York, detailing the transport of the two daughters of Colonel Munro, Alice and Cora, to a safe destination at Fort William Henry. Among the caravan guarding the women are the frontiersman Natty Bumppo, Major Duncan Heyward, singing teacher David Gamut, and the Indians Chingachgook and Uncas, the latter two being the novel's title characters. These characters are sometimes seen as a microcosm of the budding American society, particularly with regard to their racial composition.
The novel has been one of the most popular English-language novels since its publication and is frequently assigned reading in American literature courses. It has been adapted numerous times and in many languages for films, TV movies, and carto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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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1) 돈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2)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5)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다니엘디포우(Daniel Defoe)
(6) 파우스트 Faust / 괴테(Goethe)
(7)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8)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모비 딕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15) 크리스마스 캐롤 A Christmas Carol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4. 영한대역 칼라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 5권(각권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5. 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나관중 / 20권 / 할인가 108,000원
6. 이솝우화 10권(오디오 CD 포함) : 할인 가격 30,000원
7. 10주 완성 영어 회화(1권 - 정가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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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위 도서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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