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3월25일(월)흐림, 煙雨
밤 늦게까지 성성하여 잠 못 들다가 새벽에야 잠들다. 조식 먹고 8:30 택시 타고 銀閣慈照寺(긴가꾸 지소지, 흔히 은각사, 실버템플이라 한다)로 가다. 동백과 대나무가 도열한 참도叅道를 걸어 월사탄月沙灘(물결 무늬로 갈퀴질해 놓은 모래사장) 위에 향월대向月臺(원기둥 모양으로 만든 모래기둥)가 살그머니 서 있다.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고산수枯山水가 펼쳐진 모래바다를 앞에 두고 좌선하다. 고요한 가운데 연우煙雨에 솔솔 젖어 드는 백해白海(모래가 하얗게 깔린 마당)와 석도石島(모래 위에 놓인 수석)는 꿈꾸듯이 날아올라 구름이 되어 공간으로 스며드니 무한 여백으로 비워진다.
청태靑苔가 입혀진 정원 옆으로 春水가 잔잔하며 미수아송美樹雅松(아름다운 숲속의 소나무)이 멋들어지게 자리한다. 정원 뒤쪽으로 난 석경石逕을 따라 오르니 銀閣慈照寺은각자조사 전경이 조망된다.
은각의 산문을 나와 시냇물을 따라 걸으니 <철학의 길 Philosopher`s Path>이라 한다. 무릇 산다는 게 철학 하는 짓이라 모든 길이 철학이다. 哲學(밝을 철哲)은 徹學(꽤 뚫을 철徹)이니 學을 徹할 것이다. 學을 徹하면 行을 徹해야 한다. 行을 徹하는 게 바로 修行이다. 그리고 그건 일상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修行은 隨行(따를 隨)이며 遂行(이루다, 마치다 수遂)이다. 사실 벚꽃이 찬란하게 핀 오후에 철학의 길을 걷는다는 계획이 이번 여행의 제일 목적이었건만 이상기후로 말미암아 개화가 늦어져 꽃도 없고 낭만도 없는 메마른 길이 되고 말았다.
골목길 어귀에 앉아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카페 <再願>에서 말차 한 잔을 하며 아픈 다리를 쉬다.
택시 타고 남선사로 가다. 가레산스이(枯山水를 일본말로 발음한 것, 물이 없이 마른 모래와 돌로 된 정원) 전경을 마주하며 선정에 든다. 화대, 수대, 풍대를 차례로 소멸하고 地大만 남으니 바로 사선정의 경지다. 사선정, 사념청정지(仙道선도에서는 연신환허練神還虛에 해당한다)에 들었던 선사가 고산수를 창안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다.
남선사 방장으로 들어가는 벽에 써져 있다.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입에 있고, 지혜로운 사람의 입은 마음에 있다.” 이곳은 지혜를 기르는 성소이니 말을 삼가며 침묵하라는 뜻이다.
선종사찰의 전통적인 정원인 枯山水고산수(가레산스이)를 보여준다. 남선사의 정원. 夢窓疎石(무소오 소세키)선사가 초대 방장을 역임했다.
남선사 뒤쪽으로 가면 수로각水路閣이 있는데, 진짜로 물이 흐르고 있는 지 올라가봤다. 수로각엔 물이 촬촬 흐른다. 산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유명한 두부집 <슌세이順正>를 찾다. 약간 멀미가 난 듯 배가 불편하니 빛깔 좋은 요리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조금 남기며 먹기를 마치다. 가게와 연결된 정원이 있어 둘러본다. 과거 남선사 부속 주방이었던 역사가 깃든 것인지 전통적 선종사찰의 정원 양식인 지천회유池川回遊식으로 멋지게 만들어졌다.
가게 주방에 걸린 걸개그림인데 참선하는 수행자가 꽤 뚫어야 할 공안을 나타낸다. 鼠食猫兒飯서식묘아반-쥐가 고양이 밥을 먹어버렸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어서 택시 타고 청수사(淸水寺, 키요미즈테라)로 가다. 니넨자카二寧坂에서 걸어올라 산넨자카三年坂로 이어진다. 계단을 걸어 오르는데 관광객이 파도처럼 떠밀려 올라간다. 이슬 비 내리는 골목길에 우산을 든 채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이 담소를 피우는 모습에서 마치 중세로 돌아간 듯한 환상을 즐긴다.
뒤에 보이는 탑은 법연사(法演寺, 호넨지) 5층탑인데 이곳이 포토존이다.
청수사로 가는 오르막에서 올려다본 하늘 풍경
내려다 보이는 가게들은 4, 5대를 이어온 오래된 전통이 있다 해서 노포老鋪(시니세)라 한다. 서울의 인사동과 비슷하다.
높다란 산문 마당에 들어서니 붉은 빛의 본당과 누각이 마치 키 다리 거인이 두발로 쿵!
발자국 소리를 내는 듯이 해동에서 참배 온 小僧을 굽어본다.
절 입구의 대문은 인왕문이며 그 옆으로 삼중탑이 솟아 있다. 현수막에는
<물-생명의 근원을 찬탄하고 존중하자>라고 써졌다.
당우마다 모셔진 존상께 예배 드리고 내려오다. 청수사의 밤 벚꽃이 유명하다고 기대했는데 이상 기후로 벚꽃 개화가 늦어져 볼 수 없다. 님을 그리워하나 보지 못하고 물 따라 내려 가노라-사군불견하유주事君不見下柳州 라는 시(이태백의 유명한 시 峨眉山月半輪秋아미산월반륜추의 結句)구절을 읊조리며 하산하다. 터덜터덜 내려오니 오조五條 입구다. 택시를 불러 기다리는데 일본어가 서툴러 버벅대다가, 지나가는 일본청년에게 택시운전수와 대화를 나누게 하여 내 위치를 알려 주었다. 한참 만에 온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한 숨 자다. 저녁에 가모가와鴨川 강변으로 나가 다리를 건너 라멘 가게에서 요기를 하다. 돌아와 샤워하고 쉬다.
다리를 건너며 생각했던 시를 쓰다.
春眠不覺曉, 춘면불각효
冷雨無花鳥; 냉우무화조
雲水渡鴨川, 운수도압천
楓橋愁多少. 풍교수다소
봄 잠이 들어 새벽에 깨어나지 못했구나
찬 비 내려 꽃도 새도 보이질 않는데
운수승은 가와라마치 다리를 건너며 생각하기를
풍교야박의 客愁객수는 어땠을까?
[참고]
*맹호연(孟浩然689-740)의 春曉(춘효) 봄 새벽
春眠不覺曉, 춘면불각효 處處聞啼鳥; 처처문제조
夜來風雨聲, 야래풍우성 花落知多少. 화락지다소
봄 잠이 노곤하여 날 새는 줄 몰랐네
지저귀는 새 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네
간밤에 비바람 소리 들렸는데
꽃잎이 얼마나 떨어졌을까?
*장계( 張繼,~766) 의 풍교야박( 楓橋夜泊):
풍교 다리 밑 배위에서 하룻밤을 지내다
月落烏啼霜滿天, 월락오제상만천
江楓魚火對愁眠; 강풍어와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 야반종성도객선
달 지고 까마귀 우는데
하늘 가득 서리는 내리고,
강 언덕엔 단풍 들어 가을이 깊었네
일렁이는 고깃배 불빛에 잠 못 이루는데
고소성 밖의 한산사여,
한밤중에 들려오는 종소리
배에 눕힌 이내 몸을 흔드는구려
*정지용(1902~1950)의 시 <鴨川압천>
정지용 시인은 도지샤(同志社) 대학을 다니면서 해저무는 가모 강변을 산책하면서 시를 쓴 게 있다.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도지샤 대학 캠퍼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