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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신앙 찾기] 친구란 참 소중한 것, 내 친구 정일우
어떤 만남은 일생을 관통하기도 한다. 만나던 당시에는 대개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리고 스스로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 뒤에야, 그것도 간혹 드물게 깨닫는 일인 듯하다. 그 만남이 자신의 팔자를 바꾼 것임을, 끝내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은 거의 그럴 것 같다.
운이 좋게도 최근에 어떤 만남에 대한 의미를 되새길 기회가 있었다. 김동원 감독이 엮은 다큐멘터리 영화 ‘내 친구 정일우’를 본 뒤였다.
딱 한 번, 정 신부님을 뵙고 말씀을 들었다. 푸른 눈의 사제가 한복에 검정 고무신을 너무나 편안하게 걸치고 나타나던 순간, 그 또렷하던 발음과 이전에는 어디서도 들어 보지 못했던 놀라운 말들을 듣던 그 저녁을 기억한다.
“희망은 오직 가난뱅이에게만 있습니다. 가난뱅이가 교회와 이 나라를 구할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너무나 강렬해서 되레 당장 잊고 싶었다. 감당하기 힘든, 내 좁은 그릇이 깨져 나가거나 터지기 전에는 안고 갈 수 없는 말씀임을 듣는 즉시 깨달았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잊은 듯이 살았다. 그 말씀들을 듣던 밤을 이후에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정일우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한 시절
책 「정일우 이야기」에는 이 괴짜 사제를 이렇게 표현한다. “온 동네를 잔칫날로 만들었던 개구쟁이, 모든 것을 초월해 사랑을 나누었던 파란 눈의 신부, 김수환 추기경이 가장 신뢰했던 종교인, 아시아의 노벨상인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사회 운동가, ‘복음자리’ 딸기 잼으로 철거민들을 지원했던 민중의 벗, 평생을 빈민, 부랑아, 걸인들과 함께 생활했던 ‘판자촌의 예수’, 그리고 ‘진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우리 모두의 평범한 이웃.”
영화의 주인공 정일우 신부는 미국 출신으로 1960년 서강대학교 교수로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스물다섯 살 젊은 외국인 철학 교수는 이후 사제가 되었다. 교수이자 신부로 생활하다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회의감을 극복하려고 서울 청계천에서 시작해 상계동으로 이어진 빈민 운동에 투신했다. 그렇게 ‘동네 외국인 신부님’이 된 뒤 유신 체제를 반대하다 잡혀간 학생들을 위해 단식 투쟁도 벌였다. 1998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뒤에는 충북 괴산에 터를 잡고 농촌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미국 땅에서 태어났지만 어느 결에 한국 사람이 되었다. 진짜배기 한국 사람 말이다. 함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친구들에게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지, 순간마다 더 재미있고 더 웃으며 노는 듯이 살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삶으로 보여 주었다. 영화 ‘내 친구 정일우’의 네 명의 해설자 중 하나로도 등장하는 김동원 감독은, 이 맛에 깊이 감화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철거민들의 모습을 ‘하루만’(1986년 10월 정 신부로부터 상계동 강제 철거 ‘증거 확보’를 위한 촬영을 하루 부탁받고) 카메라에 담기로 했던 청년 영화인은, 상계동에서 3년을 살았다. 그리고 영화 ‘상계동 올림픽’을 만들었고, 정일우 신부를 만나 팔자가 바뀐 사람답게 이 영화도 만들었다.
네 명의 화자가 들려주는 정 신부의 나날
영화에는 예수회 한국관구 전주희 수사, 평생의 짝이었던 고 제정구 의원의 부인 신명자 씨( ‘복음자리’ 이사장), 괴산에서 함께 농사를 지었던 김의열 농부 등 네 명의 화자가 등장해 저마다 ‘내 친구 정일우’에 대한 일종의 편지를 낭독한다.
영화는 정일우 신부의 나날을 쉽고 재미나게 알려 준다. 네 명의 해설자가 네 가지의 다른 시간과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의 방식이 좋았다. 어쩌면 본질은 늘 똑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벗’으로 살았지만, 시기별로 투신의 양상이 조금씩 달랐던 정 신부의 삶을 들여다보기에도 친절한 방식이었다.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은, 한국 사회의 현안이 그때그때 달라졌음을 정 신부의 삶이 온몸으로 증명했다는 점이다.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선명히 보인다. 그가 들어가 몸을 눕히고 산 곳이, 그가 껴안고 함께 산 사람들이, 당시 사회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지켜야 할 ‘씨앗’ 같은 이들이었음을 말이다. 씨앗 같은 사람들이 더는 짓밟히고 빼앗기며 내몰리지 않게 하려고 온 힘을 다해 곁을 지킨 삶이었다.
또 놀라운 것은 그때그때 가장 ‘가난한’ 곳을 찾아내 정처를 옮겼다는 점이다. 아무리 정이 들고 좋아도, 때가 되면 떠났다. 그 발걸음을 따라가는 것이 격동의 한국 사회가 당시 가장 깊이 파묻으려 했던, 가장 그늘진 곳의 미약한 나무들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도끼질 한 번이면 찍혀 넘어가 버릴 것 같은 곳에서, 그 마지막 도끼질을 막으려고 몸을 던지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때 지켜 낸 싹들이 어느덧 무성한 숲을 이루기도 했고,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해 시들어 버린 것도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도끼질만은 막아야 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도처에 가득하다. 세상은 점점 이런 존재들을 묻으려 한다. 아무도 외롭지 않고 가난하지 않으며 슬프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더 ‘나아진’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가난뱅이만이 희망이라고요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야 생각했다. 나는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는’ 삶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맴돈 것은 아닐까? 거기서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가난은, 과연 예전 그대로의 모습인가? 한국 사회의 가난이라는 것은, 자꾸만 형태를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난한 마을은 사라졌다. 아니 건물과 건물들 틈으로 위태롭게 발을 걸치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숨어 버렸다. 가난은 상존하지만, 가난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다들 말하기를 꺼린다.
상계동 사람들도 어느 때인가부터 모임 자체를 갖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날은 아예 싹 다 잊고 싶다고 한다. 그저 숨기고 있는 게 그나마 덜 상처받는 방법임을 알아 버렸기 때문일까?
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힘이 나고 위안이 된다. 정일우 신부는 우리에게 소중한 희망을 전했다. 친구가 되어주는 법에 대하여, 타인의 이야기를 ‘발가락으로 듣는’ 깊은 몰입에서 오는 깊은 사랑, 그리고 할 만큼 하고 나면 떠난다는 신념, 영구히 거기에 뿌리박겠다는 자세가 아니었기 때문에, 날마다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랑법 말이다.그게 인간은 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님을 우리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신 셈이다. 놀고 먹고 마시고 웃으면서! 그렇게 같이 사는 게 최선이며 더 좋은 다른 길은 없음을 말이다. 영화 말미에서 정 신부는 꿈꾸는 소년 같은 얼굴로 이야기한다. “살아오면서 아름다운 사람 많이 만났어요.” 그리고 덧붙인다. “아름다운 사람만 만났어요.”
정일우 신부님이 2014년 6월 2일 선종하셨을 때, 그 전에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오래 투병 중이실 때도 많이 안타까웠다. 간간이 매체를 통해 근황을 접하면 여러 생각이 오가곤 했다. 그래도 그분이 나와 무언가로 연결된 분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참 많이 당황스러웠다.
어딘가에 정을 붙이기도 어렵지만, 그 인연과 정을 이어 가기도 힘든 세상에서 신부님은 일생토록 누군가의 ‘친구’이고자 하셨다. ‘나한테 와서 기대라.’고 말하는 듯 변함없는 그 눈빛과 태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로받았을까?
강물처럼 돌고 돌아 어디에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철모르던 시절에는 잘 몰랐다. 그래도 어찌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고비마다 그 ‘마주침’들이 나를 잡아 준 끈이었음을 이제는 믿는다. 그래서 굉장히 잘 쓰고 싶어 욕심 부리다 결국 탈이 났던 이번 원고를, 마음을 비우고 모자란 대로 채우기로 하고서야 겨우 이어 나간 이 글을, 다만 이 감사함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내 곁에 와서 친구가 되어 준 모든 인연들, 그간 읽어 주신 모든 독자 분들 참 고맙습니다.”
[영화 속 신앙 찾기] ‘기억’이 없어진다고, ‘살인자의 기억법’
영화를 보면서 자꾸 ‘소설’과 비교한다. 원작이 있는 영화, 그 원작을 먼저 읽은 영화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현상이다. 원작에 대한 인상이나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렇다. 김영하의 소설이 원작인 ‘살인자의 기억법’(감독 원신연)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설과 영화를 비교한다. ‘이건 이렇게 바꾸었네!’ ‘왜 금강경 얘기는 안 나오지?’ 하며 영화로부터 슬금슬금 물러난다. 차라리 원작을 읽지 않았거나 잊어버렸다면 영화에 훨씬 깊이 몰입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자꾸 원작을 떠올리려 애쓴다. 마치 그 ‘기억’이 영화를 보는 목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 기억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않고, 소설과 영화를 끝없이 비교하며 ‘살인자의 기억법’을 보면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다. 소설을 다시 한번 읽는 것이다. 영화는 소설을 온전히 기억하는지 끝없이 묻고 강요하는 것만 같다. 기억이란 이처럼 때론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무엇’을 빼먹든 말든, 인물 설정과 다르든 말든, 결말을 뒤집든 말든 소설의 ‘기억’을 버리고,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봐야 한다. 그럴수록 악착같이 달라붙은 원작의 기억. 기억이란 이런 것이다, 잊으려 한다고 잊히는 것도 아니고, 떠올리려 한다고 언제든 아무런 막힘 없이 떠오르지도 않는.
삶은 기억이다
인간에게 기억은 무엇인가? 삶 그 자체이다. 기억이 없으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은 기억하고, 기억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기억이 없으면 시간도 없으며 과거도, 추억도, 역사도 없다. 순간순간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현재 또한 그 순간이 지나면 끝없이 소멸해 버리고
만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은 그것을 불가에서 말하는 ‘공’(空)이라고 했다. 기억이 없다면 말 그대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영생도 어쩌면 ‘기억’일지 모른다. 죽은 이도 ‘기억’ 속에서 살아 있게 하니까.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고, 누군가는 또 나를 기억하며 살아 있게 한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살아 있는 이들에게 끝없이 기억됨으로써 영원히 살아 계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시며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감동과 스릴 넘치는 인간적인 드라마이다. 감동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던 연쇄 살인마 김병수(설경구)가, 말이 딸이지 불륜을 저질러 죽여 버린 아내가 낳은 자신과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은희(설현)의 목숨을 지키려고 온몸을 던지는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이 원천이다. 긴장감은 바로 딸의 목숨을 노리는 민태주(김만길)란 인간 또한 연쇄살인마란 사실과 노인이 된 김병수가 석달 전 치매 판정을 받아 기억이 끊긴다는 사실에서 온다.
여기까지는 소설과 같다. 그러나 소설이 연쇄 살인범이란 극단적 인물의 ‘기억’을 잃어 가는 것에 대한 쓸쓸한 회한의 서술이라면, 영화는 딸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그의 애절하고 집념 어린 ‘기억하기’이다. 그 집념 속에 딸이 있다.
사람을 무수히 죽인, 심지어 첫 살인의 대상이 아버지였던 인간의 아름다운 생명 지키기와 휴머니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소설은 ‘잘못된 기억’으로 말미암은 착각이라고 말한다. 은희는 딸이 아니며, 살아 있는 존재도 아니다. 비록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그때부터 살의가 사라졌고, 치매에 걸려 살인의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그의 말처럼 “손이 기억하고 습관은 오래가서” 25년 만에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고도 모른다고 말이다. 기억 상실이야말로 또 다른 살인의 시작이다.
기억이 없다고 죄도 없는 건가
영화에서 기억 상실은 오히려 살인이 아닌 살인을 막고 딸의 목숨을 구하며 지난날의 살인을 기억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김병수는 ‘기억하기’(녹음과 기록)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 잔인하고 거침없었던 범죄를 들추어낸다. 그렇다고 그 기억하기가 참회를 위한 것은 아니다.
김병수는 자신의 살인에 대해 당당하다. 세상에는 꼭 필요한 살인이 있다고 했다. 술만 취하면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자신에게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는 짐승의 눈빛을 가진 아버지, 자신의 아버지처럼 아내와 아이를 마구 패는 가정 폭력범, 자신의 반지를 삼켰다고 살아 있는 개를 때려죽이고는 배를 가르는 여자, 인신매매까지 마다하지 않는 악랄한 사채업자, 가정을 파괴하는 알코올 중독자. 이들을 그는 ‘존재 이유 없는 쓰레기들’이라면서 서슴없이 죽여 버렸다.
정말 그의 말처럼 그가 죽인 사람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인간쓰레기들인가? 그는 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법을 대신해 응징한 것인가? 기억에도 거짓과 과장과 왜곡이 있다. 인간은 때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기억에 자신의 욕망을 덧칠한다. 기억하기 싫은 부분은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기억’이 모두 ‘사실’은 아니다.
설령 김병수의 기억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런 그의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아무리 소설의 쾌락을 위한 다분히 정신병적 행위로서의 살인과 달리 영화에서는 그것이 응징적 행위라 하더라도 말이다. 김병수도 물론 죄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오래전에 목매 자살한 누이를 수녀의 모습으로 만나 “나 벌받는 건가?” 하고 물어본다. 그 벌이란 다름 아닌 기억의 상실, 기억의 혼돈이다.
그러나 기억이 없다고, 기억을 잃게 되었다고 연쇄 살인에 대한 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 인간 존재 그 자체이고, 그것을 잃는 것이 자신 소멸이라 해서 죄까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악의 존재를 막았다고, 한 소중한 생명을 구했다고 상쇄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기억 속에서 사라질 죄라고 해도 진정한 참회가 없다면 용서도 없다. 우리가 주님께 기억하는 죄와 함께, ‘이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죄’까지 모두 고해성사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애초에 이런 것에 관심이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라면 소설과 달리 영화는 인간의 기억과 시간에 대한 성찰보다는 가슴 졸이는 사건의 전개에 매달린다. 김병수의 기억 상실이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이야기의 흡인력과 상업적 흥행을 위한 선택일 것이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김병수와 민태주의 대비와 대결 구도, 비록 자신의 핏줄은 아니지만, 딸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을 알고 “언제나 나는 아빠 편”이라 하는 딸이 갈 곳은 뻔하다.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정신적 상처를 받아 여자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는 정신 이상자 살인범 민태주에게 납치된 딸을 구하려고 ‘기억’을 붙잡으려 발버둥 치는 아버지를 누가 가로막겠는가? 사투 끝에 딸을 구하고 “너는 나의 딸이 아니니까.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고 하는 아버지를 누가 살인자였다고 해서 비웃겠는가!
영화로만 보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평범하고 뻔한 스릴러이다. 운명적인 대결과 아슬아슬한 위기,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 단서가 나오고, 기억이 살아나며, 그래서 해피 엔딩(행복한 결말)이다. 다만 ‘기억을 잃어 가는 아버지, 지난날 연쇄살인범’이란 주인공의 개성 설정과 배우의 매력적인 연기가 색다를 뿐이다. 이것조차 특별한 것은 아니다. 비슷한 영화들도 많이 나왔으니까.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나는 살인자다. 진짜 죽어야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딸을 구한 김병수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어 한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 한다. 물론 세상은 그에게 죄를 묻고 벌할 수도 없다. 공소 시효가 끝났고, 더구나 치매에 걸려 있기에 말이다.
그의 기억을 그가 첫 살인(아버지)을 저지르기 전인 열다섯 살로 돌려놓은 것도, 그가 은희를 누나로 착각하게 만든 것도, 은희가 그에게 그때의 하얀 운동화를 신겨 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주연 배우(설경구)가 같은 ‘박하사탕’의 주인공 영호처럼 그도 처음 ‘순수’의 자리로 돌아간 셈이다.
영호가 그랬듯, 누구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기억이나 흔적을 지워도, 지나온 시간은 김병수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마지막에 지금까지 김병수에게 벌어진 일들이 진짜인지 기억의 조작인지 알 수 없다는 듯한 어감으로 “너의 기억을 믿지 마라. 태주는 살아 있다.”고 말한다. 속편을 만들 욕심인지 모르겠다. 영화라고, 가짜라고 제멋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김병수는 영화를 안 본다고 했다, 가짜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영화 속 신앙 찾기]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투신, 택시 운전사
때로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말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말은 그저 몇 마디 단어의 조합이 아니다. 온 힘을 다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순간이다. 그 지극함이 ‘말 없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할 말은 입이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공기로 전해진다.
극 중 배우의 연기도 다만 ‘연기’가 아닐 때가 있다. 오래 보아 온 배우라고 해도 어떤 작품에서 어떤 임무를 맡았을 때, 아주 낯설게 보이면서 우리가 처음 만나는 그 배역 자체로 물들어 있는 경우다. 혼이 담겨 있다고 해야 할까. 그저 배역을 잘 소화하거나 형상화했다는 정도를 뛰어넘는 지점이다. 흔히 ‘빙의’라고 줄여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딱딱한 낱말로는 이런 경이로운 순간을 담아내기 미안하다. 그런 순간을 만날 때, 관객으로서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인다.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고 배역에 내맡긴 채 움직이는 어떤 ‘실존’을 보는 놀라움, 때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주연은 물론 단역까지도 모든 배우가 온 힘을 다해 작품에 임했을 때, 영화는 어떤 한 세계를 완벽하게 그려 내면서 관객을 감탄하게 만든다. ‘택시 운전사는 그런 영화였다.
그날, 그 인연
사실 ‘택시 운전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경이로운 영화였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현재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를 담아낼 수 있는 최적의 방식으로, 마치 모든 것이 순조로이 펼쳐질 수 있는 이야기의 한 지점을 절묘하게 떠냈다고밖에는 여길 수 없는 작품이었다.
흥행은 천우신조였고, 제작의 험난함이야 미루어 짐작하는 수준을 능가하고도 남았으리라. 영화 시나리오보다 어쩌면 제작 후일담 또는 고생기가 더 길고도 긴 이야기일 법한 영화지만, 절대로 ‘재미’에 소홀하지 않았다.
초반부 한동안은 아주 유쾌한 장면들이다. 주인공 김만섭을 맡은 송강호의 친숙하지만 물리지 않은 연기가 빛을 발한다. 객석에서는 연신 웃음이 터지곤 했다. 웃음의 포인트는 뻔뻔함과 막무가내인데 그게 알고 보면 소시민 가장의 절절한 생존 전략이라 밉상이 아니다. 상처 뒤에도 실의에 빠지지 않고 어린 딸과 단둘이 어떻게든 살아 보려 애쓰는 가장의 모습에 정감이 가기도 한다. 고물이 다 된 택시가 유일한 재산인 만섭의 눈에는, 세상은 그저 나 먹고사는 데 유리한 게 좋은 것일 뿐이다. 시국이나 정세는 ‘밀린 월세 10만 원’이 발등의 불인 그에게 남의 나라 얘기처럼 멀었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몰랐기에 갔고, 몰랐던 것을 보고 말았기에 달라지고 변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충격이었다. 조금 알거나 많이 알았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런데도 이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세상에 대한 일말의 짐작조차 하지 못하던 백지상태의 소시민은 사실 먹고살 궁리뿐이었다. 푸른 눈의 기자를 만나 동행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김만섭이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 분)를 택시에 태운 것도 돈 10만 원 때문이었다.
광주까지 갔다 오는 데 10만 원이나 주겠다는 이유도 모른 채, 신나게 광주로 달렸다. 길목마다 바리케이드가 있고 무장 군인들이 삼엄하게 막았지만, 이 분위기가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샛길과 산길을 물어물어 광주에 닿고야 만다.
역사의 격랑이 포화로 세상을 뒤흔들고 한 지점을 피로 물들여 갈 때, 그 순간 그 자리에서 하필 목격자의 구실을 해야만 했던 이의 고뇌를 생각한다. 사실 만섭은 페터를 내려 주고 ‘돌아가’ 버려도 그뿐이었다. 애초에 광주에 데려다주는 일이 중요한 거였고, 그는 택시 운전사의 임무를 절반은 한 셈이었다. 운전사 자신도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임무였는지 모르고 온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도망쳤다가, 자기도 모르게 ‘유턴’을 했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말미암아 ‘두고 온 손님’을 데리러 다시 광주로 간다. 이번에는 거기가 살아 나오기 어려운 사지(死地)임을 뻔히 알고도 말이다.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사람
게다가 인상적인 것은 페터의 태도였다. 그는 만섭 앞에서 친절한 서양 신사도, 부드러운 외국인도 아니었다. 아주 까칠했다. 개인주의가 몸에 밴 이 독일 남자는 불필요한 말이나 친절에도 질색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실은 한국이나 ‘광주’에 대해 (시국) 뉴스 외에는 거의 아는 게 없는 무심함 또는 냉랭함마저 풍긴다. 초반에는 만섭에게마저 자신의 직업을 숨겨야 했기에 더욱 무뚝뚝하다.
한국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페터가 또렷하게 감지한 것은, 이 사태의 심각성이었다. 독일 공영 방송 일본 특파원이었던 그는 한국발 뉴스가 ‘날조’와 ‘통제’가 심해지고 있음을 깨닫고 이 상황이 가리키는 불행한 예감에 급히 서울로 온다. 행여 끔찍한 참사가 생기는 일만은 없기를 비는 초조함에, 실은 몸이 굳어 있다. 조심이 지나쳐 퉁명스럽다.
그런 그가 허술한 ‘베스트 드라이버’ 김만섭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감정의 충돌은 이 영화의 초반 재미를 만들어 낸다. 부족한 회화 실력과 노후 차량의 불편함을 ‘너스레’와 눈치로 눙치려는 김만섭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넘어가려 드는 만섭의 능구렁이 태도는 페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기 싫은 점이기도 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엮인 동행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운명적 동행을 시작하게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 채 말이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갖가지 일들이 꼬이고 엉키면서 발생하고, 패터와 만섭도 내내 티격태격하면서 서로를 파악하는 동시에 ‘계약 조건’도 바뀐다. 본디 통금 전 ‘당일 코스’였다가 1박 2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도저히 잊거나 지울 수 없는 기억 또는 내상을 나눠 갖게 되기도 한다. 그 모든 게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그럴 때, 평범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값어치를 깨닫게 되는 위대한 일이다. 당시에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겪어 낸다. 마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느닷없이 다가와, 결코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할 중책을 평범한 이의 어깨에 지우고 간다. 극 중 만섭이 해낸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영화가 현실을 투과해 넘어올 때
그들이 만나 하필 그날 ‘광주’에 간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역사를 넘어섰다. 실제로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2017년 그 이야기는 영화로 세상에 나와 현재 1,200만 이상의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다. 우리 역사의 가장 가슴 아픈 일을 소재로 삼을 때부터 이 영화에 대한 관심과 기대치는 높았다. 의미라면 이미 차고 넘쳤다. 게다가 실화였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흥행에 대한 걱정이었다. 꽤 많은 제작비가 필요했던 소재의 특성상, 상업적 성공이 절실했다. 개봉 시기를 잡을 때만 해도, 판도는 아무도 점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안팎으로 천운이라고밖에 여길 수 없는 여러 가지 행운이 따랐다. 적어도 흥행 면에서는 말이다. 김만섭이라는 보통 사람을 내세운 장훈 감독의 전략은 통했다. 시국에 대해 모르쇠였던 만섭이 눈떠 가는 과정과 변화가 관객에게 주는 공감과 공명이 크다.
이 영화가 극장에 무사히 안착하는 데 가장 필요했던 것은 관객과의 ‘눈높이’였다. 광주 시민들이 덮어쓰고 살아온 오해와 누명의 억울함이나 역사의 원통함마저도, 일단은 현재의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게 전달되어야 했다. 그 어려운 임무를 영화 ‘택시 운전사’는 해냈다.
마지막 장면에서 ‘김사복’(페터가 기억하는, 영화 속 김만섭의 이름)을 그리워하는 고(故) 페터의 영상은, 관객을 눈물짓게 하면서 이 모든 이야기가 실제였음을 넌지시 일깨워 준다. 부채감마저 감동으로 바꾸는 순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영화는 극장 밖의 현실에서 김사복의 아들을 뉴스에 등장하게 했다.
더 극적인 것은, 뉴스를 통해 5.18 당시 공군 조종사의 증언을 육성으로 듣게 된 사건이다. 이 고백을 기점으로 당시의 여러 문서를 ‘발굴’, 조사하고 있다. 영화 한 편이 세상과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 이어짐에 가슴 뜨겁게 화답한 관객들의 힘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꾸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빚어낸 기적이다.
[영화 속 신앙 찾기] 인간이 이 땅과 생명체들의 주인인가, 옥자
세상이 혼탁하고 뻔뻔할수록 풍자와 은유는 약하고 비겁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보다는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언어와 고발과 비판이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것을 사람들은 ‘용기’라고 말하고, 그 용기가 세상과 인간을 바꾼다. 그렇다고 날카롭고 거친 ‘직설’만이 능사는 아니다. 예술은 은유와 상징, 풍자와 역설로 세상을 비틀거나 깎고 다듬어, 그 울림을 크고 오래가게 한다. 문학도, 그림도, 영화도 그렇다.
예술도 때론 직설로 나아가기도 한다. 아무리 외쳐도 들으려고도, 바로잡으려고도 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구호나 운동, 고발이 될 수밖에 없다. 문학과 영화가 진실을 파헤치고, 정의를 밝혀야 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그것에 놀라 그때야 허겁지겁 뒤돌아보는 사회는 더 불행하다.
영화가 세상을 직접 바꿀 수는 없다. 영화는 영화일 뿐, 권력이나 제도가 될 수 없다. 세상은 세상을 사는 인간이 바꾼다. 다만 영화는 그것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그 길을 잠시 보여 줄 뿐이다. 상상으로 모두가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섬세한 시선으로 아픔과 슬픔을 드러내며 희망을 이야기할 뿐이다. 영화는 현실을 마음대로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이 ‘현실’은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감독을 꼽으라면 봉준호이다. 사회학도 출신인 그의 시선은 늘 사회 부조리에 가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을 찍으려고 경찰서와 신문사 자료실을 샅샅이 뒤지지만, 그는 경찰이나 기자가 아니다. 틈만 나면 만화를 읽고 그리지만 그렇다고 만화가도 아니다. 가끔은 두 주먹 불끈 쥐고 거리에서 구호도 외치지만, 운동가는 더더욱 아니다.
봉준호는 영화감독이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는 영화로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의 삶과 풍경을 본다. 그에게 영화는 섬세하게 디자인이 된 투명한 창이다. 그 창을 통해 봉준호 감독은 우리에게 ‘세상’을 확인시켜 준다. 그의 영화는 상상이면서 현실이고, 미래이면서 현재이고, 자아이면서 타자이다.
봉준호 감독의 은유와 풍자의 현실
봉준호 감독이 그리는 풍경은 현실 그대로가 아닌 은유와 풍자의 세상이다. 잃어버린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벌어지는 소동(‘플란다스의 개’). 미궁에 빠진 연쇄 살인 사건(‘살인의 추억’). 한강에 나타나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든 어처구니없는 가상의 괴물(‘괴물’). 엄마의 병적인 자식 애착이 불러온 살인의 비극(‘마더’). 꽁꽁 얼어붙은 지구에서 유일한 삶의 공간으로 멈추지 않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생존 투쟁(‘설국열차’). 이 모두가 은유와 풍자의 작품이다.
그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로 가든 자신의 은유와 상징, 상상과 영상 언어를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황당한 허구의 세계에서만 머무르지도 않는다. 온라인 스트리밍(인터넷 상에서 음성이나 동영상 등을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기술. - 편집자 주) 개봉으로 논란과 충격을 던진 그의 여섯 번째 작품 ‘옥자’ 또한 마찬가지다. 슈퍼 돼지(옥자)는 한강의 ‘괴물’처럼 만화적 상상일지는 모르나, 영화가 은유하고 풍자하는 것은 현실이다.
‘옥자’에서 그 대상은 인간의 ‘탐욕’이다. 그리고 그 풍자는 다층적이다. 자신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유전자 조작을 하고서도 슈퍼 돼지를 대자연의 선물이라고 속이는 다국적 기업(미란도 코퍼레이션), 그 거대 자본에 놀아나며 육식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들을 때론 우화적, 때론 섬뜩한 분위기로 비판한다.
‘옥자’는 독특하게 창조해 낸 캐릭터다. 인간이 아닌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괴물’과 비슷하고,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거나 모른 척하는 사회 부조리를 각인시켜 준다는 점에서는 ‘설국열차’와 비슷하다. 달리는 ‘설국열차’는 미래이지만 그곳의 차별과 폭력과 갈등과 분열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모습과 다를 게 없듯, 슈퍼 돼지 ‘옥자’는 우리의 추악한 현실을 집약하고 있다.
설국열차’가 그렇듯 ‘옥자’ 또한 그 현실을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혹시라도 모르고 지나친 ‘세상’이 없나 돌이켜 보게 만든다. 여기저기 숨겨 놓은 은유와 상징은 영화가 언제든 현재성을 가지고 새롭게 다가오게, 오래 살아 있게 한다.
‘옥자’는 애틋하고 따뜻하다. 옥자가 자신이 자란 자연(강원도 산골)으로 돌아와 미자(안서현)와 함께 다시 살아가는 동물과 인간의 특별한 교감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테일’이 가진 힘
‘봉테일’이란 별명까지 붙은 봉준호 감독에게 ‘디테일’은 영상 언어요 영화적 설득력이며 생명력이다. 캐릭터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도,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도, 은유와 풍자의 힘도 거기에서 나온다. 그래서 사건, 구성, 인물, 대사는 물론 단역 배우에서 어떤 것은 제작진조차 모르고 지나가는 소품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는 디테일을 자랑한다.
디테일은 무대나 소품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이야기의 복선을 다양하게 배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꾹꾹 눌러 담는다고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인물은 물론 물건 하나하나에 섬세한 표정이 있어야 하고, 표정과 이야기가 살아있어야 한다.
‘설국열차’의 꼬리 칸에서 폭동을 일으킨 주인공 커티스가 “두 팔이 있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뜬금없는 말을 영화는 치밀한 시간 계산으로 나중에 그 의미를 감동적으로 전해 준다.
또 열차 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가 성냥개비 하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남겨둔 것을 보여 주고는 마지막에 그것으로 열차 문을 폭파한다. 봉준호 감독에게는 작은 눈송이 하나, 지나가는 행인조차 ‘우연’이란 없다.
‘옥자’에서도 미자의 할아버지인 희봉(변희봉)이 가지고 있던 금으로 만든 돼지의 출처와 쓰임새, 옥자를 처음 싣고 가던 비정규직 청년의 세태를 꼬집는 한마디가 그렇다. 살아 있는 슈퍼 돼지의 속살을 확인하는 기구나 그것으로 채취한 고기를 맛보는 모습도 마치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처럼 생생하다.
‘옥자’에서 디테일의 백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옥자’이다. 돼지와 하마를 합친 모델이 있었고, 이미지가 친숙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세련됨과 그것이 가져온 미자와의 자연스러운 어울림 때문만도 아니다.
모든 생명체에는 저마다의 ‘모습’이 있다
옥자의 디테일은 움직임과 눈빛으로 나타내는 표정을 통해 드러나는 ‘감정’에 있다. 그 감정은 비록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났지만, 옥자도 하나의 소중한 생명체란 사실, 동물이지만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영혼을 가졌으며, 인간과 교감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그 섬세한 감정 표현과 미자와의 교감은 이 땅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오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질타한다.
인간은 이 세상의 특별한 존재인가? 인간이라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를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에는 저마다의 ‘모습’이 있다. 그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신의 섭리이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는 물론 다른 생명체까지 그 모습을 바꾸려 한다. 환경 오염의 산물인 ‘괴물’이 인간의 오만과 무책임에서 나온 것이라면, 옥자는 이기심과 탐욕의 산물이다.
어디 옥자뿐이랴. 옥수수가 그렇고 콩이 그렇다. 유전자 복제로 생명을 함부로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인간만의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가 함께 자신의 존재 가치를 가지면서 사는 세상을 바라고 있다. 옥자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귓속말로 미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도 이런 것이 아닐까.
‘옥자’는 영화이지만 우리에게 과장된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는다. 도살장에 끌려간 슈퍼 돼지를 전부 구해 내지 못하고, 겨우 옥자를 고향으로 다시 데려온다. 거기에 다른 슈퍼 돼지가 도살장 울타리 밖으로 밀어낸 아기 돼지 한 마리만 구해 냈을 뿐이다.
그것이 현실이고, 세상은 영화가 아니기에 그렇게 하나라도, 한 사람이라도 바꾸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의 풍자와 은유와 상상도 그 작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 신앙 찾기] ‘직면’이라는 뉘우침에 대하여
왜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흐름이 반복된다. 정확히는, 어린 딸이 교통사고로 눈앞에서 죽는 것을 뻔히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패턴’을 수없이 겪어 내야 한다. 죽은 딸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 ‘악몽’은 끝나는 듯 다시 이어져 두 시간 전의 비행기 안으로 되돌아온다.
시작은 비행기 좌석에서 ‘꿈’을 깨는 것으로, 끝은 딸의 죽는 순간을 무기력하게 목격하는 것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이 시간은 재깍재깍 정해진 ‘과녁’을 향해서만 흘러가는 듯하고, 이 비극 속에 ‘나’만 자꾸 도로 끌려들어 가고 끌려 나온다. 시간이 만든 감옥이자 지옥이다.
처음에 준영(김명민 분)은 그렇게 ‘나’의 시간만 도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같은 시간대를 돌고 있는 남자가 또 있었다. 민철(변요한 분)은 아내 미경(신혜선 분)이 택시 안에서 죽은 모습을 되풀이해서 봐야 하는 ‘도는 하루’에 갇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처럼 보이는 ‘택시’를 모는 또 다른 남자(유재명 분)가 있다. 그 남자야말로 이 비극의 진짜 열쇠다.
조선호 감독의 영화 ‘하루’는 이 세 남자의 끊어 낼 수 없는 업보를 들춰내며 반복의 숨겨진 이야기를 풀려 한다.
너를 살릴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날마다 눈앞에서 죽는다.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발버둥 치는 두 남자, 그리고 ‘예정된’ 결말을 향해서만 돌진하듯 무섭게 치닫는 두 시간. 딸과 아내를 살리고 반복되는 ‘하루’를 끝내려면, 무엇보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자초지종부터 알아내야 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국 ‘추리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같은 사건으로 엮인 세 남자지만, 실상 영화가 취한 ‘타임 루프’라는 형식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타임 루프(time loop)에 대한 사전적 풀이는 이렇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공상 과학류(SF)의 하위 장르로,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이 같은 기간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특정 시간대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시간 여행’ 형식과 달리, 반복이 이야기의 뼈대이자 축이 된다. 이 반복의 이유를 관객에게 설득시키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 요즘은 이런 형식의 영화가 많아졌지만, 대부분은 주인공 한 사람만 특정 시간을 반복하곤 한다. 영화 ‘하루’는 생각과 행동에서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는 두 남자가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는 반복 경험을 하게 되는 구조다.
뭔가를 바꿔야만 한다. 뭐라도 바꾸지 않으면, 고통의 순간으로 꼼짝없이 ‘되돌려지는’ 이 끔찍한 반복조차 이대로 느닷없이 허망하게 끝날지도 모른다. 바꿔서 적용해 보고, 다시 문제점을 찾아야 한다. 조목조목, 차근차근. 아무리 무한히 반복될지라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어쩌면 ‘뭔가’가 아닌 ‘뭐든’ 바꿔야만 그나마 반복할 기회라도 얻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비명과 자학으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어도, 그들은 어쩌면 같은 마음으로 한 가지 기도를 하고 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반복일지라도, 이대로 끝나는 일만은 없기를! 부디 끝내고 싶은 순간에 이 ‘반복’이 끝맺어지기를!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끝을 봐야 했다.
시작은 끌려 들어오다시피 되었지만, 준영과 민철은 어느새 온 힘을 다해 이 반복 구조에 끈질기게 매달려 있게 된다. 이 자리에서 죽을지언정 이 비밀을 꼭 풀어야 했다.
하나뿐인 딸을 구하려는 준영과 아내를 살리려는 민철은, 모든 노력을 다해본다. 어떤 순간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빠른 길을 찾아 차를 내달리고, 사고 현장으로 온 힘을 다해 질주하며 사고 장소를 바꿔 보는 등 온갖 시도를 해 봐도 ‘하루’는 바뀌지 않는다.
그때, 그들의 딸과 아내를 죽였다는 의문의 남자가 나타나고 둘은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세 남자의 처지는 다르지만, 같은 마음이다. 한여름의 아스팔트보다 더 뜨겁게 끓어오르는 복수심과 증오로 이글거린다. 문제는 주인공 세 남자가 끝내고자 하는 종결점이 완전한 대척점에 있다는 점이다.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입장 차다. 그들은 존재를 걸고 사투를 벌인다.
무엇이 시간을 ‘돌게’ 할까
타임 루프 소재는, 사실상 인간의 깊은 회한에서 비롯된 장르라는 느낌마저 든다. 얼마나 후회되고 아프면 이런 형식을 발명해 냈겠는가. 얼마나 돌이키고 싶으면, 동일 시간 동일 조건을 수없이 반복하다 결국은 뭔가를 바로잡는 이야기를 아예 장르로 만들어 냈을까!
겉으로는 그들이 ‘시간’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준영과 민철이 갇힌 것은 시간이 아니라 ‘죄’다. 과거에 저지른 죄의 흔적과 그림자에 갇혀 버린 것이었다. 준영과 딸 은정(조은형 분)은 본디 애틋한 사이였다. 그토록 사이좋던 딸과의 관계는 오히려 (억지스러운 방식으로) 딸의 물리적 목숨을 구해 놓은 뒤, 단절되다시피 틀어진다. 그는 심지어 엄마도 없는 어린 딸을 돌보지 않고 멀리 도망쳐버렸다.
그런데 도피로 택한 해외 의료 봉사가 역설적이게도 그를 ‘전쟁의 성자’로 칭송받게 하면서, 불특정 다수 환자의 생명을 구한 덕에 노벨 평화상 후보로까지 거론된다. 인생의 얄궂음이랄까. 이 성스러운 칭호가 준영에겐 얼마나 괴로운 족쇄가 되었을지 관객은 말미에야 짐작하게 된다.
만일 심장 수술에 실패해 더는 아빠 얼굴을 못 볼지라도 지금껏 준 사랑에 감사한다던 3년 전의 딸은, 그가 무리수까지 둬 가며 살려 낸 딸은, 되레 건강해진 뒤 남보다 못하게 멀어지고 말았다. 튼튼한 심장으로 사는 대신 튼튼한 마음은 아닌 것이다. 어긋나다 못해 곧 끊어질 것 같은 부녀 관계다.
무엇이 이렇게 황폐하게 만든 것일까? 영화가 결말을 향해 치달아 가는 동안, 관객들은 이 ‘사막화’의 원인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준영은 어쩌면 한시도 그때 그 순간, 그 결정을 감행했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잊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의사라는 직업만 아니었어도, 잠깐씩은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 의사의 사명을 강조하는 그의 범세계적이고 인도주의적 ‘오지랖’도 이처럼 자신을 몰아세우는 과정에서 생겨난 강박적 태도일지 모른다.
3년 전의 그도 과연 이런 사람이었을지 궁금해진다. 의사라는 직업 윤리에 극단적으로 몰두하려고 했던 그의 3년은, 실상 비윤리적 판단을 내렸던 3년 전의 잘못에 대한 마음의 빚이다. 구급차 대원인 민철의 죄 또한, 어쩌면 법적인 것이 아닌 양심에 대한 문제이다. 이 양심의 소리에 직면해야 했을 때, 그 둘은 비로소 자신들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안타까이 스러진 한 소년과 그 아버지와 마주하게 된다.
“절대 혼자 두지 않을게”
두 남자는 직업상 남을 구하는 일에 대한 전문가였다. 사람을 구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생명의 소중함을 순간마다 깨달으며 일하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에 그들은 ‘생명’이 아닌 다른 이유를 택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해 버리는 길을 갔다. 그리고 그 이후 마음이 닫힌 사람이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딸은 아빠의 무심함을 원망하다 차츰 지쳐 간다. 아빠 입장에서는 자신이 손에 묻힌 피를 딸이 알게 되느니,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오히려 ‘보호’라고 여긴 듯하다. 하지만 죄의식이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느닷없이 인생의 방향과 궤도를 덮치고 ‘탈주’하게 만드는 듯하다.
민철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아내에게 준 가장 큰 상처가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아내에 대해 어쩌면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벽은 그렇게 꼬일 대로 꼬인 미로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준영과 민철은 마침내 도달하게 된다. 그들이 어떻게든 애써 잊고자 했던 한 소년의 이름, 이하루. 그 이름을 기억해 내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이었다. 그 애가 그토록 살리고자 염원했던 아버지의 비통함을 끌어안고 함께 울어 주기 전에는, 이 참사는 끝내려야 끝낼 수가 없었다.
도저히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을 향한 돌진을, 영화 ‘하루’는 간결하고 속도감 있게 펼쳐 보인다.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순간은 깨달음을 향한 걸음이다. 돌아본다는 일은 결국 ‘돌봄’으로 이어지고, 관계를 이어 가는 일로 확장된다. 서로를 살려 내는 그 이어짐의 끈이 눈물겹게 아름답고 뭉클하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기꺼이 인정하고 처벌도 달게 받게 만드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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