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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2-18
장애물에 도전하라 / 임현수 목사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탕 남작은 올림픽의 5가지 기본경기를 지정했는데,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이 다섯 종목이 기본경기로 채택된 달리기, 펜싱,사격, 수영,그리고 장애물 뛰어넘기입니다.
19세기 젊은 프랑스 기마장교가 전쟁터에서 중요한 전령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타고 전쟁터를 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적군이 나타나더니 칼을 뽑아 들고 결투를 신청했다고 합니다. 칼을 빼어 들고 결투에서 승리한 장교는 다시 말을 달리다가 그의 말이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지자 말에서 나뒹굴면서 자기를 겨냥하는 적군의 심장을 향해 총을 뽑아 사격을 한 후 적의 사살을 확인한 후 그는 다시 맨발로 달려 강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이번에는 수영을 해서 강을 건너 마침내 아군의 진영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성공합니다. 그는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이 다섯 가지의 경주를 치러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달려야 했고, 칼을 뽑아야 했고, 총을 쏘아야 했고, 수영을 해야 했고, 강을 위시하여 여러 장애물을 건너야만 했던 것입니다.
쿠베르탕이 5가지 경기를 제안했을 때 제일 반대가 많은 것이 장애물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쿠베르탕은 장애물 경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기본경기에 포함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그 이유가 장애물 경기야말로 인생의 그림을 너무나 유사하게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장애물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삶도 예외일수가 없습니다. 한 민족의 운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산 넘어 산, 강 건너 강이라는 말이 있듯이 환난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해 본문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도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장애물을 스스로 만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일부러 문제를 만들어 스스로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즐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순교 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화평케 하는 자에게 행복을 약속하지, 트러블 메이커에게 행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제발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문제를 피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또한 기도의 응답을 받은 일에도 여전히 어려운 장애가 존재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홍해 사건과 요단강의 기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고 축복 중의 축복 이었습니다. 기적 중의 기적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쉽지 많은 않았습니다. 바로의 끈질긴 공격과 방해작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출애급의 과정에서 만났던 아말렉의 집요한 공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를 당연히 가장 잘 도왔어야 할 가까운 사람들의 비난과 배신과 가시 도친 비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야말로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지금 여호수아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 가운데 가나안에 들어 왔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 12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는 과정 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도 얼마나 어려운 일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장애물들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험한 산지도 있었고, 어마어마한 거인들도 많았고, 무시무시한 철병거도 많았습니다.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수17:16 하)
가나안 정복은 분명히 하나님이 확실히 허락하신 역사였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역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장애물이 많았습니다.
우리 교회 성전 건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는 사역 입니다. 우리들의 집을 짓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교파나 교세 확장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이것은 기도 하면서 하고 있고, 기도의 응답도 많이 체험했습니다.
반대하는 교인도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시 관계자들도 대부분 협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고 무조건 만사형통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도 장애물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고 착수한 일에 장애가 존재한다고 해서 너무 서둘러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속단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어서 사단이 질투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시고 강하고 담대해 지십시오.
이런 사람만이 장애물 뛰어넘기에 성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요즈음 개의 용기를 예찬하는 유머가 유행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제목이 개가 해석한 개에 대한 속담입니다.
그 중에 이런 해석이 있습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 /
개는 타고난 용맹성을 지닌다.
복날 개 패듯 한다 /
개는 어떤 시련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닭 좇던 개가 지붕 쳐다본다 /
개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본다."
어떤 분이 개를 키우면서 정말 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침을 튀겨가며 강조하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개의 용기, 의리, 주인에 대한 절대 충성…친절, 절대복종…이런 것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여러분 동물들에게서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개미에게서도 배우라고 교훈 하십니다. 성경은 인간의
속성을 양에게 비유하기도 했고, 소나 말이나 나귀에게도 비유했고(이사야), 야고보는 사람의 혀를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 합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이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7,8)
다른 피조물에게서도 배우라는 것 입니다. 특별히 용기와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장애물을 극복하는 용기를 배우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도 장애물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은 결국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장애물에 도전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는 원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한 이유는 이기심 때문 이었습니다.
그들이 힘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 16장은 에브라임 지파, 17장은 므낫세 지파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요셉자손들 입니다. 실패의 이유를 16장 10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수 16:10 그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 땅을 분배 받은 그들은 그 땅에 있던 가나안 족속을 좇아 내지 아니하였습니다.
17장 12~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처음에는 좇아 낼 힘이 없어 못 좇아 내었지만 나중에 힘이 있어도 안 좇아 내었습니다.
수 17:12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13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많은 사람이 힘과 능력과 은사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합니다. 힘을 가지고도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 입니까?
작은 이익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이기심이 문제입니다.
요셉 지파는 눈 앞에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가나안 백성들을 쫒아내지 않았습니다. 쫒아내기 보다는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거나 조공을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상 요셉은 훌륭했는데 그 자손들은 이기적이고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다에 비해 북쪽은 우상이 가득한 국가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열왕기상을 볼 때 북쪽 열아홉 왕 전체가 우상을 섬겼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을 남겨뒀기 때문에 우상을 두게 되었고 그 결과가 북 이스라엘 시대까지 계속 영향을 미쳤다는 것 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유익이 될 줄 알았는데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 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사무엘상 15장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나옵니다.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죽이지 않았던 사건 인데 그 이유는 살지고 귀한 양이 탐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사울은 그 아말렉의 손에 죽게 됩니다.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이스 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숨어 그를 기다린 일을 내가 기억하나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진멸하고 남기지 말며 남자 와 여자와 어린아이와 젖먹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삼상15:2,3).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빠져 나올 때 아말렉의 죄를 보셨으며, 이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을 사울 왕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정말 어처구니없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그의 겸손과 신중함은 다 사라지고, 전리품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대리인이 아니라 약탈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삼상15:9). 사울 왕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 것은 남겨두고 나쁘고 가치 없는 것은 진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였던 사울은 약탈물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불의의 하나님 으로 만들어 버린 것 입니다. 사울이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았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 그의 목소리는 가증스러운 것이며, 어리석기 그지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와 같이 말합니다. (개역판)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태우는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숭배와 같음이니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하더라."(삼상15;22,23)
우리도 결혼, 직장 기타 많은 결정할 일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 눈 앞의 이익을 따라가면 망하게 됩니다. 의사결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따라 움직이고 모든 결정에 앞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눈 앞의 작은 이익을 생각하다가 망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개척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개척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개척자였습니다. 그는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팔레스틴 전역을 유랑하면서도 간데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제단을 쌓았고, 생활의 거점이 되는 성읍을 개척하였으며, 후손들에게까지 공급되는 샘물을 개발하였습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삭이나 야곱, 요셉, 모세등 모든 선진들도 광활한 중동천지를 주름잡으며 개척자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언제나 개척자는 더 나은 세계를 바라보며 미래를 향하여 도전하는 사람입니다(히11:16).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시며(마11:12)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과 투쟁을 강조하셨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생각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과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긍정적으로 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러면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의 구체적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긍정적인 사람은 없는 것에 고민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를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람은 있는 것에 감사하지 아니하고 없는 것으로 인하여 고민하며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합니까? 있는 것에 감사하는 긍정적인 사람입니까? 아니면 없는 것으로 인하여 불평하는 부정적인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있는 것에 감사하지 아니하고, 없는 것으로 인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요셉 자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들입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그들의 요구는 정당한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불만은 지나친 욕심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느 지파들과 비교해도 절대 손색이 없는 가장 좋은 분깃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도 제비뽑기를 통해 그들에게 가장 알맞는, 가장 적당한 땅을 주었습니다. 이 정도가 되었으면 그들의 입에서 감사와 찬송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뜻밖에도 그들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있습니다. “큰 민족이 되었는데, 왜 한 분깃만 줍니까?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는 이렇게 투덜거리며 원망과 불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투덜거리지 말고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18절에도 나옵니다.[수 17:18]“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찌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스스로 개척하라!(다같이) 개척정신 이것이 청교도 정신이었고, 이것이 사도들의 정신이었으며, 이것이 가나안 농군학교 정신이었고, 이런 개척자가 바로 선구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요셉 자손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큰 땅을 차지하겠다는 비전은 있었지만, 그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대가를 치르려고 하지 않고 투덜거리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꿈과 비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모두 다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전을 실현하는 사람은 대가를 치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비저너리(Visionary)란 비전을 소유하고 있고, 또 그 비전을 위해서 기꺼이 대가를 치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모세는 자기 민족을 애굽에서 구해 내고자 하는 비전이 그 가슴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버리는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히11:24,25). 애급의 보화를 버리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비전을 위해서 대가를 치른 사람만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비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운동 선수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특별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얼마나 무섭게 자기 극복훈련을 하는지 모릅니다. 비젼을 성취하기 위해 그들은 합당한 대가를 지불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루어야 할 꿈이 있습니까? 세워놓은 비전이 있습니까? 비전에 대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시기 바랍니다. 비전의 땅은 아무리 머릿속으로, 멋지게 그린다 할지라도 차지할 수 없습니다.
말만하지 말고 스스로 개척하시기 바랍니다.
투덜거릴 시간이 있으면 스스로 개척하시기 바랍니다.
내 입에 넣어 줄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말고, 내가 수저를 들고 내 입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요셉 자손들은 비전을 위해서 힘차게 전진하는 비저너리가 아니라, 침대에 누워 생각만 하는 몽상가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스스로 개척하라”는 이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개척정신이 없는 사람들은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했던 갈렙과 같은 믿음과 개척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경우를 기회로 생각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능력과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만을 할 수 있습니다. 내 주위에는 모두 내가 도와줄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등등..그러나 도와야 할 사람이 많은 것,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그 자체가 바로 축복이라고 생각해야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잭칼스 목사는 “사명을 잃어버린 교회는 축복을 잃어버린 교회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약점은 더 많은 싸움과 전쟁 벌이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많은데 땅은 좁다고 원망한 것 입니다. 능력 있는데 무너진 이유는 이같은 개척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장애물에 도전 하시려면 스스로 개척 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3.있는 힘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은 사용하면 할수록 강해집니다.
근육은 쓰면 쓸수록 강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힘의 원리인 것 같습니다. 새벽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집니다. 어쩌다 하면 힘이 더 듭니다. 힘은 사용하라고 주신 것 입니다. 17장 17절 말씀과 같이 여호수아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이렇게 말 합니다.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했으니 증인이 되어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정의 역사는 능력의 역사인데 누구의 능력입니까?
성령의 능력입니다.
다이나마이트의 폭발력 보다 더한 능력 원자탄 보다 더한 성령의 능력을 무제한으로 사용 할 수 있는 특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면 우리는 너무 주님이 주신 자원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 입니다. 사용하면 할수록 강해지는 것이 성령의 능력 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 기도의 능력 주어졌을 때 사용하여야 합니다.
김장환 목사님이 지난번 조용기 목사님 나눈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였던 것을 기억 하십니까? 김장환 목사님은 조용기 목사님에게 “학력이나 설교내용의 수준, 그리고 외모에서 까지도 내가 당신보다 나은 것 같은데 교인수에 있어서는 내가 시무하는 수원침례교회 3000명과 비교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가 30만명인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조 목사님의 대답을 소개 하셨습니다.
이때 조용기 목사님이 “나는 기도를 하루 세시간 하는데 당신은 몇 시간 하느냐”고 물었을 때 김장환 목사님은 30분 한다고 대답하면서 차이는 여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많이 활용해야 할 영적인 능력은 기도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활용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도 불사용죄, 믿음 불사용죄가 가장 큰죄가 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활용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 10%만 나누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말을 남을 칭찬하고 세우는데 사용하여 보십시오.
녹쓸어 없어지게 하지말고 닳아서 없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강력한 영향력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최선을 다해 가야 합니다. 사업을 하던 목회를 하던 직장을 다니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가 주신 것 다 사용하는 교회만 되어도 세계를 변화 시키는 강력한 교회가 될 수 있음을 저는 의심 없이 믿습니다.
4.철병거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요셉 자손이 가로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요셉 자손들은 여호수아로부터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을 듣고 막상 개척하려고 보니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개척할 산지에는 오늘날의 탱크라고 할 수 있는 철병거를 보유한 가나안 족속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철병거는 커녕, 철기문화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철로 만든 무기조차 없었습니다.
(삼상13:19,22)에 보면, 삼상 13:19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졌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삼상 13:22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으니라”
여호수아 시대가 사울 시대보다 훨씬 오래 전이니까 철기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쉽게 말하면 보병부대인 이스라엘과 가나안 전차부대의 싸움이 된 것입니다. 요셉 군대는 가나안군대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였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난관에 부닥쳤습니다. 이제 그들은 비전을 이루기는커녕, 잘못하면 가나안 족속들에게 파멸 당할 지도 모르는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에 등장하는 비전의 사람들은 난관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그의 비전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할 때, 손쉽게 쌓았습니까? 아닙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의 방해공작이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느헤미야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난관을 극복했습니다. 결국 52일만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여 비전을 성취하였습니다.
또 요셉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비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형들의 비난이라는 난관을 만났습니다. 나중에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리는 난관도 만났습니다.
또 종살이하는 가운데 보디발의 아내라는 난관을 만났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난관도 만났습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비전을 가지고 수많은 난관을 극복했습니다. 결국 그의 비전대로 그는 애굽의 총리대신에 올랐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 자손이 비전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들 앞에 놓여있는 난관
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난관을 극복해야만 개척할 수 있고, 난관을 극복해야만 비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난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가로막는 철병거가 무엇입니까?
영어라는 철병거가 가로막고 있습니까?
아니면 돈이라는 철병거가 가로막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이라는 철병거가 가로막고 있습니까?
학력..신체적 조건..어떠한 철병거가 가로막고 있습니까?
여러분 앞에 어떠한 난관이 놓여있습니까? 그 난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시면 됩니다. 요셉 자손은 자기들이 정복해야 할 땅에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음을 들어 개척의 어려움을 토로하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시는 한 능히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격려합니다.
17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일러 가로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을 격려하되 일찍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하여 요셉 지파에게 약속하고 축복한 말씀을 근거하여 확신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제가 (창48:21,22)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즉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들이 믿음이 약화된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옛 언약을 생각하면서 다시금 담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합니다.예레미야는 사람을 믿으며 혈육을 권력으로 삼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렘17:5-8).
렘 17: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여러분들은 철강왕 카네기를 잘 아십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확신있는 사람은 확신이 없는 사람보다 성공 확률이 두 배나 더 높다.” 크라이슬러를 다신 일으킨 장본인인 아이아코카 회장은 “삶의 승패는 환경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 의해 만들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외부적인 환경이나 조건이 기독교의 능력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구척 장신 골리앗 앞에 달랑 물맷돌 다섯 개 들고 나간 다윗이 미쳤습니까? 아닙니다. 소년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허구헛날 금성철벽(金城鐵壁) 여리고성 주위를 돌았습니다. 무려 6일 동안 한바퀴씩 돌았습니다. 7일째에는 일곱바퀴 돌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여리고성을 돌았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의지하여 돌고 돌고, 또 돌았던 것입니다. 천하무적 철병거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승리할 수 비결은 다름 아닌 이 믿음입니다. 사방으로 꽉 막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마라톤 게임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라톤 장애물 경기인 것입니다. 하나의 장애물을 비껴가면 또 다른 장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장애물 통과는 우리에게 실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 수치와 자존감을 함께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넘어 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계속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휘슬이 불려질 때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일관성있게 달려야 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 하나의 장애물을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제자가 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인생의 마지막 장애물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십자가를 단순한 고통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여, 할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얼굴에 땀 방울이 변하여 피 방울이 되기까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엎드려 기도하시는 그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나타나 새 힘을 돋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담담히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은 우리의 깨끗함을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다시 사심은 우리의 다시 삶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을 당신의 코치로 영접해 보십시오.
당신의 인생의 구주와 주님으로 초청해 보십시오.
새 인생이 시작되실 것입니다.
인생의 장애물을 넘어서실 새 힘을, 새 희망을 얻으시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작은 이익에 매달리기 때문 입니다. (개인적 유익 추구/ 이기심)
개척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 입니다. (의존적/ 불평 원망)
주신 능력과 은사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게으름/ 불신앙)
철병거를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