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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샬 롬
셋째 천사의 나팔 (계 8:10-11)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셋째 천사의 나팔은 중생의 복음의 나팔입니다.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하늘에서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떨어져 강과 샘들이 쑥물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쑥물에 대해, 식수에 대한 오염, 말씀의 혼잡, 공산주의 사상 등의 학설이 있지만 계시록의 흐름에서 본다면 복음나팔에 대한 어떤 묘사로 보아야 합니다. 답부터 말씀드리면 셋째 나팔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중생의 복음입니다(고전2:1-5).
중생의 복음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신실한 약속와 성취 때문입니다.
10절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여기 횃불같이 타는 큰 별에서 횃불은 창 15장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실 때 불로서 나타나신 횃불언약을 연상시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들을 주시고 그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고 장차 그의 자손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실 때 나타나신 불입니다. 언약을 체결하실 때 쪼갠 짐승들 사이로 여호와께서 불로서 통과하셨는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시겠다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생과 사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이란 히브리어로 ‘베리트’인데 이 용어는 ‘자르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로서 죽음을 각오한 약속입니다(민14:28, 렘4:2). 이 견고한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 100세에 아들을 주셨고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게 하셨고, 이 견고한 약속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예수의 복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에 따라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고, 지금도 복음의 나팔을 통하여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처녀가 임신했다면 물리적 이유가 있는데 믿는 자에게 새 생명 예수가 임하신다니 믿음과 실재 사이가 너무 간격이 크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간격을 좁혀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믿은 여자가 복 있다 했듯 성령으로 임하시는 견고한 약속입니다. 이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에 의해서 사라가 아들을 낳듯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새 생명 예수를 영접하게 될 뿐 아니라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듯 하나님을 열심히 경외하면 그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더욱 확장하고 충만하여 우리가 점점 예수의 마음과 형상으로 바꾸어지고 세상을 이기고 영광스러운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생명의 현상을 신학적 용어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교의신학에 중생을 정의한 것을 보면 '중생이란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원소를 심고 영혼의 주관적 성향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했고, 구원의 시점에서 구원의 완성까지를 중생으로 보았습니다.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게 하듯 새 생명 예수가 우리 안에서 커지심으로 우리를 온전히 변화시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입니다. 이 중생의 복음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는 신실한 약속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언약입니다. 중생의 복음이 위대한 것은
2.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이기 때문입니다.
“횃불같이 타는 큰 별” 이제는 “큰 별”의 의미입니다. 별은 성경에서 자손을 의미하거나 하나님의 종들, 계명성 사탄(사14: ), 혹은 왕이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큰 별이니까 구속사와 관련된 별입니다. 동방박사들을 인도하던 아기 예수의 별입니다. 이런 큰 별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기를 낮추시고 낮추셔서 이 땅에 태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 비하를 가리킵니다.
빌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처럼 인간으로 나신 것만도 낮추심인데 냄새 나는 말구유에 나시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시고 사역하실 때도 죄인과 함께 하시고 병인을 고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마지막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 자체도 귀한 복음이지만 복음의 나팔로 울려 퍼지는 이 복음이 중생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바로 그 영광스런 예수의 생명이 말구유보다 더 추하고 차가운 우리 심령에 임하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움직이시고 성령으로 적용하셔서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늘의 사람으로 만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계 11장에서 보여주신 두 증인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낮고 천한 우리의 심령에게까지 찾아오신다는 사실 얼마나 귀한 복음입니까? 중생의 복음이 위대한 것은
3. 중생은 생명의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10절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강들과 여러 물샘에 떨어졌는데 물샘은 물의 근원이므로 성경이라면, 강물은 물이 흐른다는 점에서 우리 영혼 속에 흐르는 성령입니다. 우리 영혼 속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데 이 강은 중생한 영혼의 심령에서만 흐르는 강입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7:37-39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하셨고, 롬8:1에도 “예수 안의 생명의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요4:14에도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횃불의 그 신실한 언약이 물샘에도 떨어졌기 때문에 성경 속에서 예수님과 그 신실한 언약을 더 발견하고 더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죄과만 갚으신 것이 아닙니다. 죄악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이걸 모르니 수행을 한다. 뭘 한다. 그 뿐 아니라 예수 안에서 승리하게 하셨고 하늘의 사람으로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전이 되고 신부가 되고 왕이 되고 지체가 되고... 이처럼 성경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믿을 것이 많아지고 풍성한 누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후3:15-18에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예수로 말미암는 복음을 알면 알수록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보배로 잘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아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중생의 복음이 위대한 것은
4. 영혼의 지각을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11절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됨으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여기 쑥은 성경 배경으로 보면 독초입니다. 그런데 강물과 물샘이 모두 쑥물로 변하니 그 물을 마시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환경오염입니다. 그러나 문자대로라면 별이 쑥이 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큰 별이라면 지구보다 억만 배 클 텐데 어떻게 강물과 작은 물샘에만 떨어지겠습니까? 유성만 떨어져도 분화구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 역시 복음의 나팔의 관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물의 3분의 1이 쑥물이 되었는데 여기서 물은 말씀이나 지식 사상, 3분의 1이란 완전수 3에서 1이 부족함으로 완전함이 깨지는 현상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졌으니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 등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중생의 복음은 살리는 복음만이 아니라 깨뜨리고 죽이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새 생명으로 옛 사람을 죽이고 거짓도 죽이고 새 지식과 새 지각으로 새롭게 합니다. 이방인의 마음은 영적으로 무감각함이 특징입니다. 엡4:17-18에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러나 중생이란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새 지각으로 살려내는 은혜가 있습니다.
요일2:20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했는데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우리 영혼의 새로운 감각이나 영적인 가르침을 말합니다. 이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거듭난 영혼의 본능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보이는 것처럼 알아지고, 천국 가보지 못했지만 가본 것처럼 믿어지고, 주님의 뜻이 느껴지고,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이 내 영혼 속에서 느껴져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하면 마음이 기쁘고 원치 않는 것은 나도 웬지 원치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요일2:27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다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자가 중생합니다. 이 중생의 새 생명은 신앙 안에서 더욱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새 생명 예수로 충만하여 나는 사라지고 예수만 나타나는 가장 위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 천사의 나팔 (계 8:12-13)
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넷째 천사의 나팔은 변화의 복음의 나팔입니다.
이제는 넷째 천사의 나팔입니다. 나팔이 복음이라고 했는데 넷째 천사의 나팔은 무엇일까요? 나팔재앙의 특징은 첫째 나팔부터 계속하여 3분의 1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넷째 천사의 나팔도 해와 달과 별들의 3분의 1이 어두워지고 낮도 밤도 어두워졌습니다. 이처럼 완전수 3의 파괴는 본질적 파괴로 밤낮이 어두워졌으니 시각의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사탄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고 열린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는 그런 눈은 감겨지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넷째 천사의 나팔은 변화의 나팔입니다.
복음의 나팔 앞에 어떤 시각의 변화가 있을까요?
1. 가치관의 변화가 옵니다.
12절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해와 달과 별들은 창 37장에서 가정을 비유할 때 쓰였습니다. 가정처럼 소중한 것이 없고 변함없이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잠17:6, 딤전5:8). 그러나 나팔소리에 해와 달과 별들이 빛을 잃었듯 복음을 만난 사람은 가정에 대한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하나님보다 그 어떤 것도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첫 번째 장애물이 가정입니다. 그것은 핍박도 핍박이려니와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것이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마10:34-37에 예수님께서 이 2가지를 동시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하시면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셨습니다.
가정이 중요하고 가정에 대한 책임도 다해야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악하지만, 주 안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엡6:1-4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했습니다. 이 가정의 원리는 사회 직장 나라 등 다른 모든 조직의 근본원리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엡6:10-12에 "주 안에서"라는 말씀이 나오고 씨름해야 할 대상 중에 악령 외에도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세상 권력자들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통치를 따르되 주 안에서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버리라는 그들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죽어갔습니다. 누구보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모범적인 국민이 되어야 하나 주 안에서 해야 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빌3:7-9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랬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나팔소리는 우리의 가치관을 변화시킵니다.
2. 복음나팔이 삶의 목적을 변화시킵니다.
12절 하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성경에 낮은 형통의 때요 밤은 고통의 때입니다(시30:5, 사45:7). 밤낮은 인생의 날로 형통한 낮이 오면 좋아하고 고통의 밤이 오면 슬퍼하지만, 복음 안에서 낮이든 밤이든 의미가 없습니다. 계21:23에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다고 기뻐하고 저렇다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린다.'는 찬송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생활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죽든지 살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잃지 않으면 감사할 뿐입니다(시73:24-25, 빌1:20). 내가 고통을 받고 내가 손해가 되어도 나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모두가 산다면 그것보다 기쁜 일은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요3:29-30에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한 것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지만 예수의 복음이 증거되고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한 것도 삶의 목적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빌1:15-21).
그런데 알고 보면 주를 위해 살아서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마10:39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셨고, 막10:29-30에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3. 복음나팔이 하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13절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땅에 사는 자들에게 3화를 선포하는데 3화란 앞으로 불어야 할 남은 3개의 나팔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전한 복음이라 해서 공중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공중복음의 첫째 의미는 땅에 속하지 말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예수의 복음나팔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살전4:17-17에 주의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때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이 일은 재림의 날에 있겠지만, 한 편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하신 것처럼 지금도 예수의 복음을 들으면 영적으로 살아나고 하늘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대상이 “땅에 사는 자들”입니다. 땅에 사는 자란 육신적이고 세속적으로 사는 인간의 완악한 마음을 가리킵니다(골3:5). 이들에 대한 3화의 선언은 하나님보다 땅의 것을 더 사랑했던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선언하신 화를 연상시킵니다(마 23장). 그러므로 공중에 독수리가 날아가면서 큰 소리로 3화를 선포한 것은 더 이상 땅에 속한 자가 되지 말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라는 경고입니다.
공중복음의 둘째는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가장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듯 어느 일정한 이상의 수준의 신앙생활을 해야 하늘에 속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독수리의 날개짓이 약해지면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교리적으로 정통보수에다 신앙의 연조가 많고 계시록을 안다 해도 열심이 없으면 안 됩니다.
공중복음의 셋째 의미는 온전히 죽으라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아가는 이유는 시체파티에 참석하려고 날아갑니다. 마 24장과 눅 17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하시자 제자들이 어디로 데려가는지 여쭐 때 주님께서는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눅17:37) 하셨습니다.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알려 주시지 않고 주님이 데려가시는 현장에 독수리들이 날아와서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동서문답 같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들이 세상에 대하여 더 죽고 죽어 독수리를 위한 시체의 파티가 열려야 재림의 주를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다소 풍유적인 말씀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온전히 죽어야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삿 15장에 삼손이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쓰러뜨리고 시체를 두 더미나 이루었는데(삿15:16) 이 삼손 사건은 성령강림을 예언한 시110편에서 인용되었습니다(시110:6-7). 시체더미가 되어야 성령이 임합니다. 주 안에서의 죽음이란 죄와 분리 외에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에 목숨 바쳐 힘쓰는 적극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이처럼 땅에 속한 마음이 온전히 죽고 죽어 시체더미가 되어 독수리의 잔치가 열리지 않고는 각인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재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땅에 속한 마음을 버린다면 데려감을 당하지만 그걸 못 버린다면 버려둠을 당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고전15:52에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한 것처럼 복음의 나팔은 변화의 나팔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요, 성령충만의 비밀이요, 하늘에 속한 자로 사는 천국의 복음입니다. 그 증거로 3화가 다음 9장에 나타나지만 변화를 위한 강력한 성화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시간도 울려 퍼지는 복음의 나팔소리를 삼가 듣고,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도록 우리의 가치관이 변화되고, 주를 위해 사는 것보다 다른 목적이 없도록 목적이 변화되고, 그리고 땅에 속한 마음은 죽고 죽어 시체더미를 이루고,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열심 있는 신앙생활로 하늘에 속한 자로 변화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