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당신이 벌써 칠순!
신아문예대학 구연식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엊그저께 복숭아 솜털이 뽀송뽀송한 연지 볼에 한복 곱게 차려입고 시집왔는데,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서 미안해! 6명의 시누이 시동생 혼례 치러주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환갑· 칠순 잔치 그리고 상(喪)까지 치르느라 너무 고생시켜 미안해! 이제는 자식들도 모두 다 결혼하여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남았네, 삼식이 따슨 밥 챙기느라 손가락 마디마디가 생강 뿌리처럼 옹이가 튀어나왔네! 이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사랑할 일 만 남았네! 미안해,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중국의 천재 시성(詩聖) 두보는 ‘사람이 일흔 살을 사는 것은 예로부터 드물었다.’는 말에서 고희(古稀)라 했는데, 고희 고개를 넘었으니 백수(白壽)까지 삽시다. 오래전부터 자식들이 저희 엄마 칠순 때 해외여행을 계획했으나, 코로나 19로 꼼짝을 못 하고 있다. 5인 이상 집합도 여행도 금지하고 있으니, 아들이 때마침 겨울방학 중이라 멀지 않고 따뜻하고 편안히 갔다 올 수 있는 남해도(南海島)로 2박 3일 예약하여 3명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고 있다.
남해대교 입구에 도착하니 개통된 지 반세기가 되어가는 남해대교의 빨간색 H자 교각이 벌떡 일어서서 고개를 쳐들고 반가이 맞이한다. 그 옛날 신혼 시절에 왔을 때 끝이 안 보였던 관광버스 행렬과 북적거렸던 인파는 코로나 19가 쓸어가 버려 황량한 거리는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이다. 섬의 해안도로는 남국의 정취가 물씬 나는 후박나무 가로수 터널이 계속 이어진다.
첫 번째 코스인 가천 다랭이 마을에 도착했다. 세 사람은 바다 끝자락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바닷물에 손을 적시니 약간은 차가워 정신이 번쩍 들어 그래도 기분은 상쾌했다. 아들의 카메라 앞에서 포츠를 취하면서 아내의 얼굴을 보니 눈 밑에 잔주름은 앞바다의 잔물결처럼 많이도 그어져 있다. 여보 미안해! ‘박원숙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고 절벽 같은 길을 아장아장 걸어 오른다. 입춘이 지나고 남쪽 끝이라 양지쪽 매화 나뭇가지에는 벌써 꽃망울이 대롱대롱 맺혀있다. 동백나무 숲 속에는 꽃봉오리가 서울로 떠난 총각 선생님이 그리워서인지 토라진 빨간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지나가는 연인들을 숨어서 바라보고 있다.
다시 자동차는 다랭이 논두렁 같은 해변 도로를 요리조리 기어가는데 훈풍이 차창을 두드려 열어놓으니 짭조름한 김발 냄새가 코끝을 적신다. 눈을 들어 바다를 보니 그야말로 다도해의 섬섬옥수(島島玉水)이다. 입에서는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가 저절로 흘러나오니 자동차도 흥에 겨워 납작 엎드려 가고 있다. 박물관과 전시관은 코로나 19 때문에 모두 다 휴관하여 숙소인 독일마을의 ‘펜션 리베’에 도착했다. 아내의 칠순 이벤트를 위해 출발했지만 모든 시설이 휴점 상태이고 때가 때인 만큼 조용히 방안에서 간단한 음료와 케이크를 들면서 덕담으로 보냈다.
새 아침이 밝았다. 아들은 어제 운전과 가이드 역할 그리고 두 늙은이의 뒤척거리는 잠덧 때문에 선잠을 잤는지 자리에 그대로 누워있다. ‘헌서야 어제 너무 수고했는데 잠까지 설치게 해서 미안하다, 아녀요,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이것이 부자간에 위로와 격려의 전부였다. 벌써 동쪽 바다 하늘에는 독일마을 붉은 지붕을 모두 벗겨서 하늘에 모자이크로 덮어 놓았는지 벌겋게 이글거린다. 나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아내와 아들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감상하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처럼 건강하고 행복하자‘고 소망을 빌었다. 어느 사이 태양은 계란 노른자위처럼 떠올라 하얀 구름 속에서 웃어주고 있다.
2일 차 아침에는 조금 서둘렀다. 남해도의 압권인 보리암을 보기 위해서다. 서너 번이나 왔다 갔다는 아들 말에 의하면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아 늦게 가면 모든 주차장이 만차가 된단다. 보리암을 머리에 이고 있는 금산(錦山) 뒤편 길을 오르고 있다. 가파른 산을 깎아서 만든 도로라 자동차가 서서 가는 기분이다. 도로변에는 피치톤이 많이 나온다는 편백 숲이 콩나물처럼 빽빽하여 바람 한 점 지나갈 수 없고 피치톤 향기만 뿜어 나오는 것 같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철쭉과 참나무류가 옷을 벗고 추위에 떨고 산을 지키고 있어, 작은 불편에도 투정 부렸던 자신을 반성해 보았다.
드디어 보리암에 도착했다. 미세먼지도 안개도 없어 모든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내는 좋다 좋다를 연거푸 하면서 평소 고소공포증이 심한데도 기암절벽의 난간에 얹혀 있는 보리암에서 황홀 자체에 젖어있다. 그래서 선각자들은 무위자연 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터득하여 인류를 구제하고 인도했는가 보다. 속세에 찌든 나도 순간이나마 심신의 노폐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태조 이성계는 보리암 아래 선은전(璿恩殿)에서 100일 기도 후 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한다. 중국 진시황은 서불을 남해 금산으로 보내 불로초를 구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그렇듯 금산은 곳곳에서 인간의 영욕과 무상함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무한한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절경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의 답은 현실에 충실하면서 바른 삶이 답인 것 같다. 아내 사랑도 허황한 이상보다는 눈앞의 실천이 바로인 것 같아 힘겹게 돌계단 올라가는 아내 손을 잡아서 이끌어 주었다.
설렘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보리암을 내려오니, 주차장마다 자동차는 빼곡히 있어 도로 갓길에 주차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다. 내려올 때는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 같더니, 벌써 남해에서 가장 빼어난 풍경을 가진 ‘상주 은모래 비치’ 주차장에 도착했다. 걸쭉하고 시원한 물메기탕으로 점심을 때우고 해변을 걸어본다. 사람은 한 명도 없고 가끔 물새들만 물질을 하고 있다. 오늘 일정을 마치고 해넘이를 뒤로하고 독일마을로 돌아가고 있다. 아무리 봐도 파란 물결과 작은 섬들이 교차하면서 보여주는 파노라마와 하얀 벽에 붉은 지붕이 옹기종기한 독일마을 풍경은 독일로 해외여행 온 느낌이다. 수평선 넘어가는 황혼이 아름다운 것은 태양은 종일 온 누리에 생명의 빛과 따스함을 주어 모든 생명체가 고마워하는 손짓이며, 때가 되면 시작하고 사라짐의 약속이 한결같아서 일 것이다. 인간의 황혼도 누구한테나 조건 없는 배려가 한결같아야 함을 황혼이 일깨워 준다.
갑자기 라인 강가 바위 언덕에서 연인에 배신당한 애절한 처녀 로렐라이 전설이 떠오른다. 어두워질 무렵이면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요정으로 변해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하여 조난시켰단다. 나는 아내 손을 살며시 잡으며 ‘나는 당신을 로렐라이로 만들지 않겠소, 그리고 저녁노을처럼 곱게 살겠소!’ 하며 꼭 쥐어본다.
(2021.2.8.)